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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주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 ④

‘사상계’와 장준하

낭떠러지에 걸린 죽음, 그 역사의 두루마리에 봉인된 뜻은

  •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사상계’와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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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월 장준하는 ‘일본말 성경과 독일어사전, 희랍어 성경과 사전 등 네 권을 들고 학생모 차림’(박봉랑, ‘신학생 장준하형’‘아! 장준하’에 수록)으로 일본군 학병에 끌려가 중국에 있던 관동군에 배치됐다. 그해 7월 일본군에서 탈출, 김준엽을 만나 함께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臨川分校)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갔다. 이때 필사본으로 ‘등불’을 발행했다.

1945년 1월 말 장준하 일행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 다다랐다. 1944년 7월 아내 김희숙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는 암호문을 보내 탈출 성공을 알린 지 6개월 만이었다. 그가 탈출한 장쑤성 쉬저우(徐州)에서 충칭까지의 험로에는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巴蜀嶺)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나 장준하가 꿈에 그리던 당시 임시정부의 속사정은 한마디로 만신창이였다. 셋집을 얻어 정부 청사로 쓰고 있는 형편에 수많은 정파로 분열되어 지리멸렬을 보여주었다. 오죽했으면 장준하가 어느 자리에서 이런 폭탄선언을 했을까.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본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장준하, ‘돌베개’, 세계사, 1992)

장준하는 1945년 4월29일 시안(西安)에 있던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3개월간 미군 전략첩보대(OSS) 대원이 되어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했다. 국내공작은 생명을 바치는 것으로, 그 대가는 조국을 위해서 ‘결재’될 것이라고 장준하는 생각했다. 당시 장준하는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 발행인은 장준하, 결재인은 조국”이라고 그의 ‘돌베개’에 기록하고 있다.



국내 잠입 최종명령을 기다리던 이 무렵, 장준하는 일본군 탈출시점이던 1944년 7월7일부터 8월3일경까지 써온 일기장 7권과 ‘등불’ 5권, 그리고 광복군 제2지대에서 OSS 대원으로 훈련을 받을 때까지 ‘등불’의 후신으로 펴낸 ‘제단’(등사판) 1,2호를 소포로 싸고, 거기에 유서 네 마디를 넣어 고국으로 보냈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전후의 황량한 풍토 이끈 멘토

장준하 등의 국내 정진(挺進)공작은 그러나 허망하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선언을 했고, 중국대륙에서의 모든 군사작전은 일시에 백지화됐다. 앞서 8월14일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은 서울로 향하는 미군기에 편승해 서해 상공을 날았으나 미군의 한국진입 중지명령을 받고 회항했다. 나흘 뒤인 8월18일 재진입 결정에 따라 여의도에 착륙했지만 이번에는 일본군의 제지로 회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준하 일행은 분루(憤淚)를 삼키면서 시안으로 되돌아갔다가, 그해 11월23일이 되어서야 김구 주석 등 임정요인들과 ‘개인 자격’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사상계’와  장준하

이범석 장군을 수행했던 광복군 당시 장준하(오른쪽).

김구 등 임정요인들이 서대문 경교장에 머물고 있을 때 장준하는 한동안 김구의 비서 노릇을 했다. 그 후 이범석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곧 이범석과 결별하고 1948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했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장준하의 인생은 새롭게 펼쳐졌다. 1952년 9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펴내는 ‘사상’의 창간에 간여하게 된 것이다. 장준하는 편집후기에서 “이 겨레의 활로를 개척함에는 선인들의 경험과 아울러 새삼스럽고 또 넓고 깊은 세계적인 사고가 요청된다”고 썼다. ‘사상’이 이념적인 부분에 치중할 것임을 내비친 문장이었다. 민족주의 이념의 확립과 함께 민주주의 사상의 고양을 목표로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러나 ‘사상’은 단명으로 끝났다. 경영상의 어려움과 이승만 정권의 견제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오기석이 쓴 ‘사상(思想)’이란 한자 제호에 ‘계(界)’자를 한 자 더 넣어 ‘사상계’를 발행했다. 1953년 6월호로 창간호가 나왔다. 이 무렵 장준하는 부인 김희숙을 보수 없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쓰면서 원고의 청탁 교정 제작을 혼자서 도맡았다. 등짐꾼처럼 배본까지 그의 몫이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아서일까. 창간호 3000부는 서점에 깔리면서 불티나게 팔렸다. 전후의 황폐하고 절망적이던 정신풍토 속에서 ‘사상계’는 세계의 사상들을 소개하면서 주체적인 자아를 찾는 멘토가 되어갔다. ‘사상계’는 이 시절 정신에 영양을 공급하던 지적 저수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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