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호

‘옷 잘 입히는 남자’ 정윤기 인트렌드 대표

“스타에게 사람들의 꿈을 입혀요. 그러면 유행이 만들어지죠”

  • 김민경 주간동아 편집위원 holden@donga.com

    입력2008-11-03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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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잘 입히는 남자’  정윤기 인트렌드 대표
    아무리 이해 불가한 것이라도 ‘이게 유행이에요’라고 말하면 말이 되는 세상이다. 신기하다. 바지 위로 나온 ‘빤스고무줄’이 몰상식하게 보이다가도 ‘트렌드’라고 하면 그 순간 과연 개성 있게 보이고 무지 유행스럽게 보이는 거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밖에. 유행이라는데.

    그래서 ‘트렌드가 트렌드’라는 말이 나온다. 트렌드에 대한 책이 쏟아지고, 트렌드 분석이 비즈니스가 된다. 유행을 창조하는 소수가 예술가를 대신한다. 끊임없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트렌드의 행렬은 조증 걸린 시대의 징후다. 불안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유행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해 이해하고 싶어한다.

    대한민국의 그 많은 유행이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어 불꽃놀이처럼 사람들의 화려한 욕망을 밝혔다가 사라지는지 궁금하다면, 주저없이 나는 스타일리스트 정윤기(39·인트렌드 대표)를 연구해보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그는 잡지나 광고,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델이나 배우에게 옷을 입히는 패션 스타일리스트일 뿐이다. 봄가을 새로운 옷을 선보이는 디자이너도, 트렌드효과를 계산하는 경제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무슨 무슨 경제연구소에서 수억원을 써가며 설문조사를 하고 분석해 발표하는 각종 트렌드 분석 결과를 신기하게도 그는 ‘그냥’ 안다.

    ‘옷 잘 입히는 남자’  정윤기 인트렌드 대표

    스포츠스타 박태환에게 정윤기가 클래식 수트를 스타일링한 ‘에스콰이어’표지.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을 아는 사람



    누구에게 무엇을 입히고 어떤 네트워킹을 활용하고, 어느 매체를 통해 ‘노출’하면 ‘대박’이 될지 안다. 그건 거의 본능처럼 보인다. 그는 메가트렌드니 나노트렌드니 하는 용어나 ‘다이아몬드꼴’ 트렌드 확산 모형 따위에 아무 관심도 없지만, 다이아몬드와 그보다 훨씬 더 비싼 스타들의 속성을 매일 먹는 열무김치와 배추김치 맛만큼이나 잘 알고 있어서 나노와 메가 규모의 유행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는 아역 탤런트 이미지를 갖고 있던 김혜수에게 관능적인 드레스를 입혀 여배우로 바꿔놓았고, 어설프던 ‘레드 카펫’을 영화제의 꽃으로 만들었다. 이후 그는 대종상을 비롯한 모든 영화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들에게 옷을 입혀왔다. 아니 그가 스타일링한 스타들은 언론과 네티즌의 주목을 받는다.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주인공을 맡은 40대의 김희애에게 란제리 룩과 아찔한 하이힐을 스타일링해 대한민국 아줌마들에게 잠재해 있던 욕망을 드러내보인 것도 그였다.

    그의 옷을 보면 유행의 속성은 물론 사람들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 다른 스타일리스트들이 전위적이고 독창적인 패션 비주얼을 만들어내려 한다면, 그는 ‘지금’ 대중이 되고 싶어하는 워너비의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달콤한 인생’의 오연수, ‘온에어’의 송윤아와 ‘올인’의 이병헌, 그리고 차승원, 정우성과 이정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스타에게 그가 입힌 옷과 헤어스타일과 애티튜드(태도)는 즉각적으로 트렌드가 되고 신드롬을 일으킨다. 그가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에게 슬쩍 걸쳐준 백과 구두는 종종 그 다음날 ‘솔드아웃’ 돼 업계의 화제가 된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에서 스타 마케팅을 보여준 최초의 스타일리스트이며 지금도 스타 마케팅에서 절대적인 파워를 갖고 있다. 1998년 그가 설립한 스타일링&홍보회사 ‘인트렌드’(내 안에 트렌드 있다!)는 랄프로렌, 도나카란, 마놀로블라닉 등을 포함하여 38개의 클라이언트를 갖고 있는데, 루이비통, 토즈 등 한국 법인 안에 자체 홍보팀을 가진 다국적기업들도 스타 마케팅이 필요할 땐 그를 찾는다. 약간 과장하면- 현장에서 그의 모습을 본다면 그다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결국 그는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 100여 개를 ‘혼자’ 홍보한다.

    덧붙이자면 그는 한국 최초의 남성 스타일리스트다. 1993년 ‘스타일’이라는 단어가 의류업계에서만 쓰이던 시절, 의상학을 전공한 그는 파리 연수에서 돌아와 광고대행사를 찾아갔다. 첫 번째 관문은 광고기획자에게 스타일링이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광고의 콘셉트에 맞는 옷을 모델에게 입힘으로써 광고효과를 최대한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이라면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어쩔 셈인데” 라고 말할 만한 것을 그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

    “머리를 파랗게 염색한, 새파랗게 어린 남자가 다짜고짜 졸라대니 황당했을 거다. 광고회사 AD는 한참을 웃더니 그럼 전자회사 광고를 해보라고 했다. 모델은 박지윤이었다. 의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넘치게 많았지만, 옷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의상 협찬에 대한 개념도 없을 때였다. 결국 어머니에게 ‘사업자금’ 500만원을 빌려 필요한 옷을 다 사버렸다.”

    광고는 단숨에 업계의 화제가 됐다. 마침 수입자유화를 통해 국내 상륙을 시작한 명품 브랜드와 라이선스 패션지들이 그의 감각을 눈여겨봤고, 그는 패션 화보의 스타일리스트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옷 잘 입히는 남자’  정윤기 인트렌드 대표

    2008 부산국제영화제의 수애. ‘드레스의 여왕’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즈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소란스러워진 세계 패션계는 스타일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스타일리스트는 단순한 의상담당자가 아니었다. 스타일링은 패션이라는 재료로 새로운 이미지와 비주얼을 창조하는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잡지 편집장은 대부분 가장 뛰어난 스타일리스트가 됐다. 옷을 만드는 건 디자이너지만, ‘그 위에 미학적이고 사회적인 텍스트를 입히는 사람’은 스타일리스트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타일리스트에게 필요한 재능은 대중의 욕망, 트렌드의 속성을 꿰뚫어 그것을 입히는 것이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 같진 않지만, 정 대표는 그것을 갖고 있다. 옷과 구두 더미로 가득 찬 혼돈의 옷장에서 필요한 옷을 귀신처럼 찾아내는 옷장 주인처럼.

    청담동의 조용한 한식집에 그는 양손에 휴대전화를 하나씩 들고 들어왔다. 약속 시간에서 20분쯤 지났을 때였다. 그는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고, 직원 한 명이 복통으로 병원응급실로 실려 갔다고 했다. 그는 두 대의 전화로 보험회사와 병원에 계속 전화를 했다. 몇 차례의 약속 연기와 지각에 이 산만함이라니. 그러나 “내가 이게 문제야. 직원이 그렇게 많아도, 내가 모든 걸 다 해야 하거든요. 미안해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도 함께 걱정이 되는 거였다.

    인트렌드의 클라이언트 중 한 사람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 인트렌드의 파워는 대개 정윤기 개인의 캐릭터에서 나오는 듯해요. 보통 한국 남성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아무리 근엄한 클라이언트 앞에서도 친구에게 수다 떨 듯이 얘기를 하거든요. 일단 그를 보면 모두 즐겁고요. 클라이언트가 불만스러운 점이 있어 담당 직원을 불렀다가도 직접 그가 울상을 지으면서 들어오면 오히려 위로를 하게 돼요. 무엇이든 저렇게 직접 부딪치고 동분서주하는데, 믿을 수밖에요.”

    ▼ 오랫동안 방송도 하고, 신문에 글도 쓰는데 여전히 인터뷰는 어색한가 보다. 녹음 시작하니까 말투가 달라진다.

    “패션이 아니라 속마음을 이야기해야 하니까 진지해진다. 아주 가끔 이런 기회가 필요한 거 같다. 정색하고 인터뷰하기. 나를 업데이트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주부’김희애를 패션 아이콘으로

    ▼ 여전히 많은 일을 하나 보다. 방송에서 자주 보게 된다.

    “케이블 TV를 고정으로 2개 진행하다 얼마 전 하나로 줄였다. 최근엔 권상우·손태영 커플 화보, 빅뱅의 화보를 진행했고 정우성, 김희애 등의 광고 촬영을 했다. 송윤아씨와 이탈리아에서 열린 패션 행사에 다녀왔다. 아, 최근 제일 즐거웠던 건 대한민국 영웅 박태환의 ‘에스콰이어’ 표지를 찍은 거. 너무 좋았다.”

    ▼ 많은 스타에게 옷을 입혔지만, 유난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을 거다.

    “김혜수씨의 청룡영화제 레드카펫과 ‘플러스유’(김혜수 진행의 토크쇼. 매번 김혜수의 옷이 화제가 되곤 했다) 스타일링, 수애를 드레스의 여왕으로 만든 것. 레드카펫에서 그녀는 아름다움의 절정이었지 않나. 그래도 ‘내 남자의 여자’에서 김희애 누나를 패션 아이콘으로 만든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 섹시한 주부의 모습이 지금은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지만, 아줌마를 여자의 모습으로 보여줘서 논란도 됐다. 드라마 속 행동이 아니라 그 모습을 직접 보니 더 충격이었던 거다.

    “주부들이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 바로 그 모습을 원했던 거 아닐까. 동경하는 대상을 100% 따라할 순 없지만 누구를 좇을진 안 거다. 어떤 여성이나 섹시한 면이 있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난 안 된다’는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 또 여성은 청순함, 지적인 모습 등 다양한 면을 갖고 있다. 스타일리스트에게 가장 좋은 배우는 강한 개성보다 천의 얼굴을 가진 희애 누나 같은 사람이다.”

    ▼ 그래서 김희애씨가 들고 나온 백들이 그렇게 잘 팔린 걸까.

    “많이 팔았다. 스타 마케팅을 해보면, 한국 여성은 특별히 백에 민감하다. 가장 먼저, 크게 반응이 온다. 가방은 한국에서 유행에 가장 민감한 아이템이다.”

    ‘옷 잘 입히는 남자’  정윤기 인트렌드 대표

    스타일리스트 정윤기가 설립한 스타일링 & 홍보회사 ‘인트렌드’ 사무실.

    ▼ 남편들은 그 가방들을 싫어한다.

    “진심으로 남편들은 아내들이 어디서든 유행에 뒤떨어져 보이길 바랄까. 맛있는 거 연구하고, 좋은 음식 찾아다니는 건 찬사받는데, 왜 패션은 그렇지 않을까. 대한민국 사람들은 남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나를 꾸민다는 건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그 행복을 다른 사람도 알았으면 좋겠다.”

    ▼ 그렇게 유행을 만들어내면 희열감도 굉장하겠다.

    “김희애가 입으면 뜬다는 말이 나오고, 협찬 의상은 ‘완판(완전 판매)’되고, 무명 브랜드가 유명해지면 기분 좋다. 한국의 ‘섹스앤더시티’를 만드는 느낌이랄까.”

    ▼ 대한민국의 패션 트렌드를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스스로 생각해본 적 있나.

    “아, 그건 자만이고, 그래도 10%쯤? 아니, 그것도 너무 많고, 1% 아니 0.5%?”

    ▼ 남성 스타일리스트가 여자 연예인에게 옷 입히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

    “예전엔 그랬다. 1995년 김희선씨와 함께 일할 기회가 왔는데 매니저가 ‘남자라서 안 된다’고 말했다.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다시는 여배우와 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정반대다. 동성이 보는 아름다움과 이성이 보는 것이 다를 수 있으니까.”

    꾸밀 줄 아는 남자가 성공한다

    ▼ 여배우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인가.

    “열심히 연기할 때. 또 레드카펫 위에 섰을 때. 요즘은 영화제 레드카펫의 사진 한 장이 영화 한 편만큼 영향력이 크다(실제로 ‘레드카펫 비즈니스’가 있다). 여배우는 무조건 예뻐야 한다. 여배우의 존재 의미는 대중에게 꿈과 환상을 주는 거다.”

    ▼ 남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멋있어야지. 남성 스타일링에선 라인이 정말 중요하다. 펑퍼짐해 보이면 안 된다. 나도 체격은 펑퍼짐하지만, 라인을 딱 맞게 입는다. 한국 남자들은 슈트를 너무 크고 길게 입는다. 기업 임원이나 VIP 강의를 해보면 잘 꾸밀 줄 아는 남자가 성공한다는 생각이 든다.”

    ▼ 사람들은 옷을 통해 무엇을 보는 걸까.

    “얼굴?(반문은 그의 깜찍한 말버릇이다) 기업체 인사담당자들도 그런다. 옷을 보면 어떤 감각을 가졌는지 안다고. 감각이 능력 아닌가.”

    ▼ 너무 많은 트렌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패션은 마치 트렌드들의 점조직 같다. 어떤 트렌드가 뜰 거라는 걸 어떻게 예상하나.

    “1년에 두 번씩 뉴욕, 밀라노, 파리, 런던의 4대 컬렉션이 열리는데, 한 번은 돌고 온다. 그리고 서울컬렉션에 간다. 컬렉션을 보면 뭐가 팔릴 거란 감이 온다. 그걸 컬렉팅해서 화보 촬영도 하고, 스타들에게도 입힌다.”

    ▼ 각 브랜드가 ‘미는’ 것들이 있지 않나.

    “새 시즌이 시작되면 브랜드에서 촬영용으로 샘플을 돌린다. 하지만 난 직접 매장을 다 돌아보고 선택한다. 동대문시장도 늘 간다. 두타, APM에 가면 신기한 디자인이 많다.”

    동대문시장은 교복자율화 세대인 그에게 패션의 즐거움을 가르쳐준 곳이다. 그는 고교 시절 인천 집에서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에 왔다고 했다. 참고서 사라고 준 돈으로 옷이나 신발을 샀고, 양말이 옷과 어울리지 않으면 그날은 학교에 못 갈 정도였으니 그때 이미 스타일리스트의 길에 들어선 셈이었다. 이런 유난스러움 때문에 고교 시절은 꽤 힘들었다고 했다.

    합이 맞아야 신드롬이 된다

    ‘옷 잘 입히는 남자’  정윤기 인트렌드 대표
    ▼ 우리나라 패션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스타들과 스타마케팅.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가 마찬가지다. 구두에서 자동차까지 스타들이 판매 규모를 결정한다. 스타들이 입은 모습이 언론을 통해 노출되면 트렌드세터들이 그걸 따라 하고, 국내 브랜드들과 시장에서 바로 카피를 생산하고, 그러다 보면 국민들이 사는 거다. 선글라스나 백은 ‘국민아이템’이 된다. 다른 요소도 있겠지만 스타들의 움직임은 매출과 바로 연결된다.”

    ▼ 패션 구매를 많이 하는 브랜드나 백화점의 VVIP들은 어떤가. 그들이 트렌드를 만들기도 하나.

    “백화점 퍼스널 쇼퍼를 2년 동안 했는데, VVIP에 따라 다르다. 일부는 무척 세련된 감각을 갖고 있지만, 또 끔찍하게 촌스러운 사람도 있다. 특히 자신의 체형과 맞지 않는 옷을 10~20년 동안 계속 입어온 사람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거다.”

    ▼ 일반적으로 특정 브랜드의 행사에 스타를 부른다거나, 특정 브랜드의 옷을 입히려면 스타는 물론이고 스케줄 잡는 매니저에게까지 ‘사례’를 한다고 들었다.

    “난 아니다. 행사에 와서 노래하거나 그런 게 없으면 사례비를 주진 않는다. 나의 클라이언트들은 브랜드 자체가 세계 최고니까, 스타들이 자기 이미지를 높이려고 온다. 날 보고 오기도 하고. 이게 내 방식의 ‘휴머니즘’이다.”

    ▼ 수많은 브랜드가 ‘신상’을 내놓고 스타도 많은데, 어떤 건 신드롬이 되고 어떤 건 무시된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합이 맞아야 한다. 연출자와 작가, 출연자와 의상, 시청자. 잡지라면 독자층과 맞아야 하고, 사회 분위기도 통해야 한다. 사람들이 저 배우에게 어떤 모습을 바라는지를 많이 고민해야 한다.”

    ▼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은 어떤 건가.

    “럭셔리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패션과 유행에 너무 민감해서 다들 럭셔리하게 보이길 원하니까, 좀 우스운 꼴이 난다. 다 똑같은 럭셔리다. 물론 트렌드를 좇아야 하지만, 개성은 남아 있어야 하는데.”

    ▼ 최근 ‘온에어’에서 작가로 등장한 송윤아씨의 스타일링을 했는데, 다른 드라마보단 ‘차분’했다.

    “제작진에서 극중 작가가 극중 배우들보다 튀지 않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하지만 요즘 회당 1000만원 이상 받는 최고 인기 작가라면 배우 못지않은 셀리브리티가 아닌가. 작가는 청바지에 셔츠만 입어야 하나. 작가는 배우보다 죽어 보여야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이 있다. 작품하다 보면 그런 게 있어서 혼자 속상해한다.”

    ▼ 송윤아씨를 특별히 좋아하는 거 같다.

    “송윤아, 희애 누나, 이병헌, 권상우, 김정은, 수애, 차승원, 정우성 다 날 믿어주고, 챙겨준다(그는 누가 혹시 빠지지 않았나 몇 번을 다시 생각했다. 혹 그가 말한 누가 빠졌다면 그건 순전히 기자의 잘못이다).”

    스타 스타일링을 독점한 비결

    ▼ 우연히 모 배우가 레드카펫 스타일링을 해달라고 정 대표에게 애타게 전화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까다로운 스타들의 스타일링을 거의 독점한 비결은 뭔가.

    “진심? 하지만 연예인 중 힘들게 하는 사람도 많다. 내 진심을 몰라줄 때 난 슬프다. 부모가 아무리 잘되라고 얘기해도 자식이 그 마음을 몰라주는 것과 똑같다.”

    ▼ 스타 스타일링에서 성공하지 못한 경우, 어떤 이유 때문일까.

    “자기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예인은 자기 스타일을 포기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스타일리스트는 연예인과 상의하고 타협하지만, 스타일리스트가 자신도 모르는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한다. 김혜수씨는 연예인에게 패션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남보다 먼저 알았기 때문에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했을 때 기꺼이 받아들였다.”

    ▼ 스타들을 인트렌드가 독점하다시피 하니, 업계에 ‘적’도 적지 않겠다.

    “그럴 거다. 속상한 건 남이 하면 쉬워 보인다는 거다. 내 노력은 보지 않는다.”

    ▼ 스타일링을 워낙 빨리 하고, ‘직감’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닐까.

    “처음부터 그랬을 리 없다. 이것이 14년의 연륜이다. 스타일링을 오래 하고 망설이고 그러는 건 자신감이 없어서다. 나는 옷은 10초 안에 고르지만, 준비는 오래전부터 한다. 지금 연말 각종 행사에서 배우들이 입을 옷을 연구 중이다.”

    ▼ 언론과 네티즌이 늘 ‘베스트 드레서’와 ‘워스트 드레서’를 결정한다. 정 대표가 스타일링한 배우가 워스트 드레서가 되는 경우도 있었나.

    “사람이 하는 일이니, 10번에 1번 정도 워스트가 된다. 속상하다. 베스트가 뭘까. ‘보통’인 거다. 거길 살짝 지나쳐 ‘오버’로 가면 워스트가 된다. 패션에서 베스트와 워스트는 하이힐의 높이 차이, 액세서리 하나 차이다. 보통을 만드는 게 참 힘든 거다. 전엔 ‘더하기’의 스타일링이었는데, 요즘은 덜어낸다.”

    ▼ 정 대표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니까 ‘댓글’도 많이 달리겠다.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인신공격을 한다. 스타일리스트가 왜 뚱뚱하냐 이런 유다. ‘(스타일링) 너무 예뻤어요’란 댓글 하나로 내 인생 전체가 성공한 듯 기쁘고, 정말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게 된다는 걸 네티즌은 알까? 최진실씨랑 개인적으로 친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엉엉 울었다. 그 마음 알 거 같았다. 그녀가 얘기하지 않아도.”

    ▼ 연예계나 패션계가 화려한 만큼 그늘도 짙은 거 같다.

    “우울증 걸린 연예인이 많다. 책임감 때문인 거 같다. 나는 스타들에 대한 책임감, 홍보를 맡긴 브랜드들에 대한 책임감, 직원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시달린다. 매일 6,7개 스케줄을 치르고 집에 갈 때면 공허하다. 새벽에 행사가 끝나면 술을 자주 마신다. 건강에 아주 나쁘다. 연예인들도 자기 이미지, 인기, 팬,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우울해지는 거다.”

    ▼ 옷가게 가면 내게 옷을 골라주고 입혀주는 직원과 금세 친해진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 금세 옷도 벗고, 내 몸의 단점을 털어놓는 거다. 그래서 스타일리스트들이 연예인의 사생활을 가장 잘 안다는 얘기도 한다.

    “맞다. 하지만 비밀 엄수는 기본이다. 내가 옷을 입히는 사람의 성격상 장단점도 가장 잘 알게 되니까 거짓 없는 관계가 된다. 하지만 체형이나 얼굴의 단점을 말하는 것도 금물이다. 연예인들이 외모에 관해 말하면 얼마나 상처를 크게 입는지 아나. 성형 수술한 것도 절대 아는 척하면 안 된다. 스타일리스트는 자기가 옷 입히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난 스타들을 사랑하고,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존경한다.”

    “보통 사람들이 예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좋다”

    인터뷰 중 이제 막 스타덤에 오른 모 유명 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에게 참석을 요청한 행사들 중 무엇을 선택할지, 그날 어떤 콘셉트로 나갈지를 상의했다. 정 대표는 하나의 행사를 고르고, 다른 행사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아마도 그는 정 대표의 조언에 따를 것이다.

    ▼ 그도 매니저가 있을 텐데, 스타일리스트가 스케줄을 결정하면 매니저가 싫어하지 않을까.

    “난 그런다. 스타가 되려는 사람은 최고의 자리에만 가라고 한다. 두 번째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스타일리스트는 라이프스타일도 조언해야 한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감각도, 패션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난 옷을 마음으로 만들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는 거라 사랑한다. 컴퓨터 두드려 나올 수가 없는 거다. 난 기계치고, 그딴 거 알고 싶지도 않다. 미래에 컴퓨터가 재단해준 똑같은 고무 옷을 입고 다닐까봐 너무 두렵다.”

    ▼ 지난해 퓨처리즘이 유행했을 때도 스타일링을 많이 하지 않았나. 그때 봤다시피 고무와 은박지 옷에도 트렌드는 있을 거다.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난 클래식이 좋고 점점 더 좋아진다. 예전에 정윤기 스타일링은 댄디즘, 화려한 컬러로 요약됐다. 아방가르드하고 괴상한 걸 좋아했다. 지금은 랄프로렌의 바이커 잠바, 입생로랑의 르스모킹재킷, 랑방드레스 같은 클래식 아이템이 좋다.”

    ▼ 나이가 들어간다는 얘기가 아닐까.

    “보통 사람들이 예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좋다는 얘기다. 그런 패션이 클래식이 된다. 대한민국이 외모지상주의 공화국이 됐다. 랑방의 디자이너 앨버 알바즈를 아는가. 나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같이 사진이 인터넷에 많이 뜬다. 그나 나처럼 못생기면, 귀여우면 된다. 잘생기진 않아도 이렇게 멋지게 입을 수 있다. 세상에 예쁘고 잘생긴 사람만 살 수 없다. 내가 그 대표주자로 사람들에게 희망도 주고 스타일링도 해주고 싶다.”

    ▼ 40명 가까운 직원과 그렇게 많은 브랜드와 스타들의 일을 하다 보면, 혼자 프리랜서 하던 예전이 그리울 수도 있겠다.

    “지금은 멈출 수도 없게 됐다. 5년 전쯤으로 돌아가고 싶다. 처음말고. 그땐 너무 힘들었다. 돈도 못 벌었다. 스타일리스트 보수가 워낙 작으니까. 난 완벽주의자라서 예쁜 거 있으면 다 내 돈으로라도 사서 스타일링해야 한다. 레드카펫에 여배우들 구두는 내가 사서 신긴다. 그녀들 발이 작아서 샘플이 맞지 않는다. 투자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어서 그 구두를 못 신긴다면 일을 못했을 거다. 내 분에 못 이겨서.”

    ▼ 그 많은 여자 구두를 어떻게 처리하나.

    “모았다가 연말 자선행사에서 경매한다. 그렇게 옷과 구두 등을 판 돈은 현대 아산병원 심장병 수술환자에게 기부한다.”

    그가 스타일리스트 초년생일 땐 옷을 빌리려면 매장이나 백화점이 아니라 옷 공장까지 가야 했다고 한다. 자동차도 없이 변두리 옷 공장에 옷을 빌리러 다니다가 비라도 오면, 혹시 협찬 받은옷이 젖을까 옷 가방을 입에 물고 들고 우산을 썼다고 한다.

    멋쟁이들은 몸이 아파야 정상

    ▼ 지금 가장 어려운 일은 뭔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라, 여전히 그게 어렵다. 한 달에 열 번은 운다. 눈물 좀 흘리는 게 아니라 엉엉 운다.”

    ▼ 말하자면 배신 같은 건가.

    “맞다. 소설 ‘백치 아다다’ 아나. 끔찍하게 잘해주던 남편이 살 만해지니까 아다다를 배반하고 또 다른 남자에게서도 버림받는다.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스타가 돼서 뻥 차는 사람들. 이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냥 음식 만드는 식당을 하고 싶다. 음식, 여행, 음악, 영화 다 좋아한다. 음, 역시 1등은 옷이다.”

    그는 매일 열리다시피 하는 패션쇼장에 있고, 매일같이 광고와 드라마에서 나오는 스타 옆에 있다. 화보 촬영장에선 하루 종일 카메라와 옷 사이에 있다. 그래서 인터뷰를 위해 만나자고 했을 때, 그가 ‘좋아요’란 문자메시지를 보냈기에, 어렵지 않게 그를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려 두 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도쿄와 밀라노로, 다시 도쿄로 가야 했고, 숨 가쁘게 돌아가는 청담동 어딘가에 매일 붙잡혀 있었다. 그가 밀라노에 가버린 뒤에야 알았다. 그가 그 자신을 위한 시간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 직업은 다른 사람에게 빛을 주는 것

    “내 직업이 남들에게 빛을 주는 거잖아요. 내 인터뷰인데, 생각하니까 다른 일정 뒤로 계속 밀리더라고요.”

    그는 내가 태어나 처음 본 모양의 넥타이, 즉 매듭이 없는 목걸이 모양에 주름이 풍성한 비비안웨스트우드의 넥타이에 발렌티노의 더블브레스트버튼 재킷을 입고 있었다. 정 대표 같은 체형엔 더블브레스트버튼을 입지 말라는 게 스타일링 원칙 아니냐고 물었다.

    “슬림한 더블은 괜찮아요. 몸에 꽉 맞게 입는 거야. 피가 안 통하고, 살이 터져 나올 정도로 꽉 맞게. 멋있다는 말 듣기가 쉬운가요, 멋쟁이들은 몸이 아파야 정상이에요. 여자들은 하이힐 신어야 하고 남자들은 꼭 조이게 슈트를 입어야 해요. 난 봄에 겨울컬렉션 선보이면 입고, 가을에 여름컬렉션 옷 입어요. 빨리 입고 싶어서. 그래서 1년 내내 감기에 들어 있어요. 그런데 동아 독자가 이런 얘기를 재미있어 할까.”

    ▼ 이 인터뷰가 ‘신동아’에 실릴 거라고 이미 말씀드렸다. 시사월간지 신동아를 아는가.

    “그럼요, ‘전과책’ 잡지잖아요. 지성인들의 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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