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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황혼일기

  • 이응수

황혼일기

2/11
×월 ×일 로맨스그레이

중앙로 지하철역. 5년 전인가, 정신 나간 사람의 방화로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곳이다. 지하철을 타려고 지하1층 광장을 지나는데 한쪽 구석에서 옛날 가요 ‘화류춘몽’가락이 구성지게 흐른다.

“꽃다운 이팔청춘….”

4인조 밴드 반주에 중년 한 사람이 여남은 명의 행인에 둘러싸여 부르고 있었다. 어차피 시내 바람 쐬러 나온 거, 바쁜 일도 없고 해서 나도 걸음을 멈추고 기웃거린다.

색스혼, 아코디언, 기타, 드럼으로 구성된 4인조 밴드. 연주자는 모두 우리 나이의 실버들. 좋게 말해 로맨스그레이들. 도리우찌 모자며, 빨간 나비넥타이, 반짝이는 금테안경 등의 액세서리로 그 나이의 사람들로서는 한껏 멋을 낸 차림들이다.



전문악단은 아니고,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굳이 이름을 붙여본다면 ‘아마추어 실버악단’이라고나 할까. 모르긴 해도 자기네들의 음악적 기량을 발표할 공간을 찾다가 마땅한 곳이 없고 해서 그런 곳을 물색, 양해를 구해 연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분이라도 조씸더. 노래실력도 묻지 안슴다. 기냥 노래 부르고 시픈 양반은 남녀노소 누구라도 조흐이 나와가꼬 마이크를 잡아주이소. 물론 돈도 안 받지예. 노래방이라 생각하고 나와서 한 곡조 날리믄 댑니다. 자, 담 손님 어서 나오이소.”

‘화류춘몽’이 끝나자, 그중 색스혼을 불던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다음 손님을 찾는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몇 번인가 권하자 아주머니 한 사람이 나간다. 이름이 아주머니지, 할머니뻘 중늙은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더니 과부 마음은 아무래도 과부밖에 모르는 것 같다. 아주머니가 부르는 곡은 ‘비 내리는 영동교’. 주현미가 부르는 것처럼 제대로 꺾이고, 감치는 맛은 없지만 그런대로 구성지게 흘러 들을 만했다.

노래방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가수로 만들어놓았다고 하더니만 전혀 빈말이 아닌 것 같다. 노래를 따라 흐르는 아코디언 가락은 언제 들어도 사람을 홀리게, 간장을 녹게 만든다. 나는 아직 아코디언 소리만큼 내 마음을 빼앗는 악기를 못 보았다. 늙어서 한 가지 악기를 만질 줄 알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살아왔는데 문득 또 그 생각이 후회로 살아난다.

2년 전, 하모니카를 하나 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좀 분 가락이 있는데다가, 어느 날 한 할아버지가 ‘인생은 60부터’라는 TV프로그램에 하모니카를 들고 나와 부는 걸 보고, 그때 그 기분을 한번 찾아본다고 구입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뿐 옛날 그 가락도, 그런 기분도 안 나왔고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청승스러울 뿐이다. 어디서 들었는지, 집구석에서 그런 걸 불면 뱀 나온다고 아내가 역정을 내는 통에 드러내놓고 만질 수도 없다. 다만 어쩌다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때 도둑연주를 한 번씩 해보는 게 고작이다.

‘황혼이 짙어지면 푸른 별들이…’로 시작되는 ‘금박댕기’나,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는 듣는 사람마다 입을 벌렸는데, 이젠 내 귀에도 어색한 걸 보니 세월은 육신만 허무는 게 아니라 마음도 허무는가 보다.

저기 아마추어 실버악단 한쪽 자리에 내가 하모니카를 들고 섰으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한번 생각해본다.

×월×일 가훈

시민회관 앞을 지나오는데 전시실 입구에 가훈전시회를 한다는 현수막이 드리워져있다. 호기심이 발동, 한번 들여다본다.

오늘날 사회가 이처럼 혼란스럽고 갈등, 불화, 질시로 시끄러운 데에는 가정훈육이 잘못된 데에 원인이 크다고 보고, 이를 바로 잡는 차원에서 가정훈육을 새삼스레 돌아보게 되었다는 게 이 전시회의 취지라고 팸플릿은 얘기하고 있었다.

가훈을 가정훈육(家庭訓育)의 줄인 말이라고 설명해놓았는데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긴 하나 그럴싸하게 보인다.

전시장에는 좋은 말이 많았다.

‘一日三省’ ‘惜福’ ‘盡人事待天命’ ‘家傳忠孝’ ‘百忍堂中有泰和’ ‘信望愛’ ‘밝고, 참되고, 아름답게’ ‘三思一言’ ‘日日新’ ‘一日一生’ 등등. 가훈을 찾는 세대들이 한자를 익히고 쓰던 세대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대부분 한자성어였다.

전시를 겸한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캠페인도 병행하고 있어, 원하는 분들한테는 하나씩 써주고 있기에 나도 하나 골라 받았다. ‘笑軒’으로 했다. ‘웃음소리가 나는 집’이다. 웃음소리가 나는 집이면 그만큼 행복한 집이 아닐까, 그럴싸하게 생각되어 잡았던 것이다. 또 웃음은 세상과 화해의 손짓, 또는 화해하는 수단의 기능도 있기에 여기에도 무게를 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가훈 같은 건 모르고 지냈다. 윗대에서 그런 게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한테 이어진 건 없었다. 직장생활 할 때 기업문화의 일환으로 가훈을 하나씩 갖자며 제창한 일이 있었지만 일과성 행사여서 흐지부지 끝나버렸을 뿐이다.

집에 와서 아이들한테 ‘笑軒’을 꺼내놓고 내 의도를 밝혔다. 모두 심드렁했다. 또 황혼연설을 한다는 눈치 같았다.

“지금 저기 걸어논 거 저건 뭡니까. 저게 그런 거 같은데 저걸 새로 빠꾼다 말입니까. 하나 더 걸어놓는다 말입니까.”

벽에는 남석(南石) 이성조 선생의 글씨가 하나 걸려 있다. ‘自勝者彊 自知者明’.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연전에 선생의 서방(書房)을 들러 직접 받아온 글이다.

“요새도 가훈 같은 거 걸어놓는 집이 있습니까. 개인의 창의성에 영향을 준다고 회사에는 사훈(社訓)도 없앤다고 하던데요.”

하나같이 떫은 표정이다. 가훈을 구속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여담으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간다.

“애들한테 교실에 걸어둘 급훈을 모집했는데 이런 말들이 나왔대요. ‘니 성적에 잠이 오냐’‘십분 더 공부하면 여친(여자친구)이 바뀐다, 대학가서 미팅 할래 공장가서 미싱 할래’…. 희한한 놈들이잖아요.”

“요새 하는 연속극, 거실에 걸린 거 한번 봤습니까. 가훈이라면서 빚보증을 서지 말자고 써 붙여놨더구만요.”

모두 그런 투의 이야기들이다. 한마디로 세상은 날고 있는데 엉금엉금 기어서 어떻게 따라가겠느냐는 이야기다. 할 말이 없다. 한집에 한솥밥을 먹고, 한 화장실을 쓰고 살지만 세대차이가 현격하게 나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그날 전시장에 우리 같은 중늙은이 대여섯만이 뒷짐을 지고 오락가락하던 까닭을 그때서야 알 것 같다.

각주구검(刻舟求劍). 잃어버린 칼을 찾는데 내 방법은 이미 녹이 슬었다. 더군다나 막내는 대화가 안 된다는 듯 아예 들은 척도 않고 TV에다 눈을 박고 있다. 막내의 영악스러움은 가끔 나를 황당하게 만든다.

언젠가 막내랑 같이 차를 몰고 나오면서 주유소에 들른 일이 있다. 기름을 넣고 값을 치르면서 오늘치 스포츠신문 없어, 하고는 있으면 그걸로 한 장 달라고 했다. 덤으로 휴지나 신문을 곧잘 주기에 내가 선택한 것이다.

한참 나와서 막내가 말을 걸었다.

“아버지. 아까 주유원한테 왜 말을 놓습니까?”

아마 내 언행이 못마땅했던가 보았다.

“그 친구 늬 나이밖에 더 되냐. 자식뻘인데 좀 놓으면 어때서.”

“….”

제가 원했던 대답이 아니었던지 조용했다. 묻는 의도도, 듣고 보니 내가 경솔했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어떤 대답이 나오는지 한번 튀어본 것이다.

“왜 말이 없냐?”

“제가 주유원 같으면 저도 같이 놔버립니다.”

“임마, 이거….”

“아버지도 참, 잘못된 건 인정하셔야죠.”

“….”

이번엔 내가 말을 아꼈다. 그 자리에서 인정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패한 건 사실이다. 이런 아이들한테 가훈을 들고 나왔으니 그게 먹혀들어갈 턱이 없다. 시도부터가 잘못되었다.

이날 결론은 ‘아버지 좋도록 하이소’였다. 저네들 의견은 충분히 전했으니 결정은 날보고 하라는 것이다. 공감대가 뒷받침 안 된 결정은 별 의미가 없다. 결국 ‘笑軒’은 내 가슴에 묻어두고 혼자만 한 번씩 꺼내보곤 하는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다만 나도 ‘아버지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남겼으니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가훈이 들어서기엔 이미 시대가 너무 멀리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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