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시민사회의 그늘, 폭력

  •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kimhoki@yonsei.ac.kr│

    입력2009-03-03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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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사회의 그늘, 폭력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조성식 지음/ 동아일보사/ 363쪽/ 1만3000원

    먼저 조성식 기자와의 개인적 만남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듯하다. 내가 조 기자를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 ‘신동아’에 우리 사회의 지식인과 이념 구도를 연재할 때였다. 실제로 만나 본 조 기자의 모습은 그가 전문적으로 취재해온 딱딱한 사건들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대학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소설가 지망생 스타일, 다소 수줍어하면서도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이후 조 기자를 아주 드물게 봐왔다. 하지만 그가 잡지에 써온 글들은 비교적 많이 읽는데, 글을 볼 때마다 글 속의 조 기자와 실제의 조 기자를 비교해보기도 했다. 대학 이야기를 하기가 좀 멋쩍지만, 조 기자와 내가 함께 다닌 모 대학 문과대학은 나름의 독특한 색깔을 갖고 있다. 특히 1980년대가 그러했는데, 80년대의 학생운동 분위기와 문과대학 특유의 자유주의적 흐름이 공존하고 있었다.

    짧은 서평에 서두가 길어졌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것이다. 즉, 젊은 시절의 체험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이후 그 개인의 삶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 삶은 대체로 젊은 시절에 갖게 된 사고방식과 태도에서 그렇게 자유롭지 않다는 게 내 판단이다. 특히 대학 시절 체험한 자유주의적 사유는 조직생활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꺾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마음 한구석에선 쉼 없이 되살아나 다양한 변주를 낳기도 한다.

    조성식 기자의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를 읽으면서 맨 먼저 떠올린 건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조폭(조직폭력배)’ 또는 주먹의 세계를 기자가 전문적으로 다루기란 쉽지 않다. 주먹에 대해 한두 번 글을 쓸 수는 있겠지만, 일관성을 갖고 그들의 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탐사의 대상을 확장하려는 자유주의적 열정이 발휘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서 이 책에는 기자 조성식의 자유주의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화하는 주먹세계



    사회학적으로 폭력은 사회를 재생산하는 주요 수단의 하나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국가란 물리력, 즉 폭력의 정당한 사용이 허용되는 공동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국가가 경우에 따라서는 정당성을 결여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데,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당시 군부 세력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폭력은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 법적으로 부정되지만, 여전히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이런 폭력의 재생산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먹의 세계다. 일본 야쿠자나 미국 마피아가 그러하며, 소련과 중국처럼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도 주먹은 존재한다. 주먹 세계가 갖는 특성을 고려할 때 이를 책으로 다루기가 결코 쉽지 않은데, 조 기자는 여기에 과감하게 도전한 셈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제1부에서는 일종의 주먹의 사회학이라 할 수 있는 주먹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다. 여기서 조 기자는 현장기자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주먹들에 관련된 주요 사건의 실상과 이면에 감춰진 사실을 생생하게 전한다. 주먹들의 계보와 판도, 주먹과 정치의 관계, 주먹들의 경제활동, 나아가 그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다.

    제2부에서는 지난 몇십 년 우리 사회에서 화제가 됐던 주먹세계의 주요 인물들을 다룬다. 그들의 다양한 개인사를 읽는 것은 상상 속의 주먹에서 현실 속의 주먹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또한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이면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이들의 삶을 다채롭게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탐사기자 조성식의 직업의식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지막 3부에서는 주먹 수사의 대부로 알려진 조승식 전(前) 검사의 수사비화를 다루고 있다. 조승식 검사는 그동안 주먹 수사와 검거에서 이름을 날린 법조인이다. 조승식 검사의 활약을 통해 우리는 공적 권력의 시각에서 본 주먹의 세계를 알 수 있다. 특히 퇴임 후 이뤄진 그의 인터뷰는 주먹과 권력의 관계 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더불어 결코 간단치 않은 우리 현실의 복합성에 대한 여러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조 기자에 따르면, 최근 주먹세계는 진화하고 있다고 한다. 사업과 조직의 공존을 추구하고, 일부 주먹들은 사회봉사활동까지 한다고 한다. 과거처럼 조직끼리 자주 싸우지도 않고, 친목 모임을 결성해 우의를 다지고 이른바 ‘전쟁’을 예방한다고 한다. 조 기자는 이런 변화가 ‘범죄와의 전쟁’을 겪으며 얻은 교훈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하는데,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흐름을 보면 조 기자의 이런 관찰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전 영역에서 재생산되는 폭력

    이 책을 통독한 다음에 든 생각은 세 가지다. 첫째는 앞서 말했듯이 기자라 하더라도 결코 쉽게 다루기 어려운 주제로 한 권의 책을 묶어낸 조 기자의 자유주의적 정신이다.

    둘째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담긴 외부의 시선과 내부 시선의 차이다. 외부적 시각에서 조직폭력은 사회적 악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내부에도 조직을 재생산하는 네트워크와 규범이 존재한다. 이른바 계보와 의리가 그것이다. 조 기자는 주먹세계에 대한 외부적 시선과 내부적 시선을 적절히 결합시켜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현실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물리력의 정당한 사용은 오직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에만 허용된다. 하지만 우리 현실의 공적 영역은 물론 사적 영역에서 폭력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조직적 폭력과 일상적 폭력은 바로 시민사회의 그늘이다. 주먹이라는 독특한 프리즘을 통해 조 기자는 우리 시민사회가 갖는 또 하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폭력은 타인의 삶과 법치를 훼손하기 때문에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을 둘러보면 폭력은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으며, 주먹처럼 조직화된 형태로 존재하고 또 진화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나라이건 관찰되는 이런 모순적 현실에 관심을 둔 이들에게 이 책은 결코 작지 않은 흥미와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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