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자녀 안심하고 학교 좀 보내자

  • 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입력2009-04-01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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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안심하고 학교 좀 보내자

    ‘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 로테 퀸 지음/ 황금부엉이/ 272쪽/ 9500원

    자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초등학교 입학만큼의 충격은 아니어도 한 차례 통과의례를 치른다. 저학년 ‘놀이’ 수준의 학교생활이 끝나고 드디어 본격적인 ‘학습’ 모드로 돌입하기 때문이다. 이때 의외의 복병이 과학과 사회 과목이다. 각종 선행학습으로 충분히 단련된 국어, 수학은 곧잘 따라가던 아이들도 과학과 사회라는 익숙지 않은 세계와 맞닥뜨리면 헤매다 못해 충격적인 점수를 받아오기도 한다.

    ‘일하는 엄마’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우리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1학기 중간고사에서 60점에 가까운 사회 점수(과학은 그보다 약간 나은 수준)를 받고 좌절한 아이는 뻔뻔하게도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서 사회와 과학이 제일 싫어. 그러니까 앞으로 공부하라는 말 하지 마.” 아이는 ‘공부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나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이때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학원 종합반에 등록하는 것이다. 학교 진도보다 1.5배 빨리 선행학습을 시켜주고, 과제물도 챙겨주고, 시험 기간에 맞춰 미리미리 공부를 시켜주니 일석삼조다. 이렇게 학원 종합반의 길에 들어서면 대학입시 때까지 학원과 함께 가게 된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실린 ‘학교, 사교육 이길 수 있다’는 기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기자가 유명한 사교육의 달인에게 물었다. “서울대 합격생을 많이 배출하면 우수한 학교일까?” 달인의 대답.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학교가 잘 가르쳤는지 그 학생이 다닌 학원이 잘 가르쳤는지 누가 알겠나.” 교사 출신인 달인의 대답이 너무나 솔직해서 말문이 막혔다.

    대체 학교에서 뭘 배우는 거지?

    공교육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독일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네 아이를 키운 엄마 로테 퀸이 쓴 ‘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최근 들어 전쟁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군인들에게만 믿고 맡길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지금 학교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통찰을 하기 직전이다. 배움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한 동시에 민감하고 실패하기 쉬운 과정이기 때문에 학교와 공무원 신분의 교사들에게만 맡겨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저 앞에 있는 내 어린 아들을 휙 낚아채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

    이 엄마는 왜 이렇게 노골적으로 교사들을 비판할까? 일하는 엄마가 직장에서 돌아오면 이번에는 아이들이 산더미 같은 일거리를 내놓는다. 큰애의 국어 숙제에 맞춤법 실수가 없는지 살펴봐야 하고, 둘째는 생물시간에 배운 광합성 과정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매달린다. 5학년인 셋째는 81을 9로 나누면 몇인지를 놓고 반 시간 넘게 고민 중이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막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단어를 물어보고 받아쓰기를 시키다가 산수 문제를 풀어주고, 부실한 학교 운영을 돕기 위해 크리스마스 장신구를 만들고, 학교 바자회를 조직하고, 현장학습에 따라가고, 급식을 도와주러 가야 한다.

    책 읽어주는 엄마, 우유 나눠주는 엄마, 조직하는 엄마, 이렇게 엄마들은 너무나 분주하다. 그리고 문득 일어나는 분노. “대체 학교에서 뭘 배우는 거지?”

    ‘바랄 걸 바라라’

    ‘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는 독일에서 출간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교사들과 교원단체가 분노한 만큼 학부모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물론 저자는 이 책에서 “그래도 훌륭한 교사들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 내 아이는 그런 선생님을 만나지 못할까, 한탄하는 부모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 책의 백미는 부록으로 실린 한국의 학부모가 쓴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다’라는 제목의 글이다.

    “내가 학교에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작고 당연한 일이다. 제발 내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달라! 교과과정에 나온 것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쳐달라! 하지만 이런 내 작은 바람을 비웃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특히 주위의 엄마들이 그렇다. 그들은 나보고 말한다. ‘바랄 걸 바라라. 빨리 정신 차리고 좋은 학원이나 과외 선생님을 찾아봐. 그렇지 않으면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피눈물 흘릴 거야’.”

    이처럼 도발적인 내용이 편집자에게도 퍽 부담이 된 듯 “교사와 학부모가 바람직한 교육의 미래에 대해 때로 격렬하게 맞부딪치며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는 공론의 장이 펼쳐지길 기대한다”는 말을 추가해놓았다. 철저하게 학부모 시각에서 씌어진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통쾌하다. 독일 학교와 한국 학교의 상황이 어쩌면 이렇게 같을 수가, 감탄마저 나온다. 하지만 대안이 없다. 가르치는 데 성의를 보이지 않는 교사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아이에게 불이익만 돌아올 뿐.

    그 대신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직업인이 된 선생님들이 꼭 읽었으면 싶은 책이 있다. ‘내 인생을 바꾼 선생님’과 ‘에스퀴스 선생님의 위대한 수업’이다.

    자녀 안심하고 학교 좀 보내자

    ‘내 인생을 바꾼 선생님’ 에른스트 페터피셔 지음/ 안성찬 옮김/ Y브릭로드/ 247쪽/ 1만원

    아이들이 할 수 있다는 걸 믿어달라

    ‘내 인생을 바꾼 선생님’은 한때 낙제생이었던 한 소년이 저명한 대학교수가 되어 학창 시절 선생님의 가르침을 60가지의 이야기로 정리한 책이다. ‘축제를 즐겨라. 그리고 그 이후를 책임져라’‘오페라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일찍 도착해라’와 같은 소박한 조언에서부터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할 때까지 항상 다른 사람이 된다’는 철학적 가르침까지 하인리히 하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때로는 여행지에서 학생들이 꼭 알아야 할 인생의 지혜를 툭툭 던져놓곤 했다. 예순 살에 접어들어 저자는 하네 선생님의 가르침이 참된 교육이었음을 깨닫는다.

    다음 주인공은 레이프 에스퀴스 선생님이다. 그는 미국 LA 빈민가에 있는 호바트 불르바 초등학교의 교사로 22년 동안 재직했다. 그가 가르친 아이들은 대부분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이민가정 출신이지만 그의 반(56호 교실)은 항상 표준화 시험(미국의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상위 1%에 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호바트 셰익스피어 연극반이 매년 셰익스피어 희곡을 원작 그대로 LA와 런던의 극장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다. 56호 교실에서는 열 살짜리가 ‘헨리 4세’를 하룻밤 만에 읽어낸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할까? 에스퀴스 선생님은 “대부분의 학생은 충분히 읽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걸 제발 믿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교과목으로서 독서가 아니라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덕분에 56호 교실을 거쳐간 아이들은 평생 독자가 되었다.

    이번에는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시험에 대해 생각해보자. 학교는 공부를 하기보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존재하는 곳처럼 보인다. 56호 교실 아이들도 매주 맞춤법 시험과 어휘 시험에다 주에서 지시한 수학 시험을 치른다. 1년에 세 번씩 주에서 지시한 과학 시험이 있는데 4~6시간씩 이어지는 이 시험 때문에 아이들은 진을 뺀다. 또 외국어로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을 교육청에 증명하기 위해 영어 시험을 본다. 모든 학생이 교육청에서 후원하는 네 번의 읽기, 쓰기 시험 때문에 10시간의 수업 시간을 빼앗긴다. 또 학생들은 매년 3편의 에세이를 교육청에 제출해야 하고, 매년 2주에 걸쳐 주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본다.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시험에 시달린 아이들은 더 이상 시험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자신이 쓴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관심조차 없다. 교사들도 성적에만 매달릴 뿐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공부해야 효과적인지는 연구하지 않는다.

    자녀 안심하고 학교 좀 보내자

    ‘에스퀴스 선생님의 위대한 수업’ 레이프 에스퀴스 지음/ 박인균 옮김/ 추수밭(청림출판)/ 320쪽/ 1만2000원

    시험은 온도계와 같다

    이럴 때 에스퀴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런 부당한 시험은 볼 필요가 없다고 집단 거부를 할까? 아니다. 56호 교실 아이들은 수업의 연장선상에서 시험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다음은 수학 시험 전날 에스퀴스 선생님과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의 방식이다.

    “내일 무슨 일이 있지?” “수학 시험을 봐요.” “그게 전부야?” “정수 부분을 볼 거예요.” “오늘밤 무엇을 할 건지 말해줄 사람 있니?” “전 265쪽을 볼 거예요. 정수 단원 복습이거든요.” “하지만 우린 그걸 이미 마쳤잖니. 꼭 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거기 문제들이 내일 선생님이 내실 문제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시험 때와 비슷한 상황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문제를 푸는 동안 무슨 음악을 들을 거니?” “아무것도 안 들어요. 내일 시험을 볼 때 음악을 틀어놓고 문제를 풀진 않을 거잖아요. 내일 시험을 볼 때와 똑같은 환경에서 공부해야 해요.” “문제를 풀다 이해가 안 되면 오늘 저녁 무엇을 해야 할까요?” “친구한테 전화하면 돼요.” “선생님께 전화해도 돼요?” “물론 그래도 되지요. 아마 밤늦게까지 공부할 것 같은데, 그럴 건가요?” “아니오!!!” “정말요? 왜요?” “일찍 자야 해요. 잠자는 건 중요해요. 푹 자고 일어나야 내일 시험을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

    ‘에스퀴스 선생님의 위대한 수업’을 읽다 보면 이 지면이 허락하는 한 옮기고 싶은 사례가 너무나 많다. 에스퀴스는 “시험은 온도계와 같다”고 말한다. 그냥 단순한 측정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학생이 곱셈 시험을 망쳤다면 그것은 한 가지 의미밖에 없다. 아직 곱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교사는 ‘기꺼이’ 그 학생에게 곱셈을 다시 가르쳐주면 된다. 그것이 시험이다.

    교과학습 진단평가든 일제고사든 시험으로 온 나라가 법석을 떠는 우리 현실에서 “시험은 온도계와 같다”는 말을 곱씹어본다. 진단평가를 강행하는 정부나 이를 저지하는 교원단체나 곱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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