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Classic Shoes

남자의 시간을 정직하게 담은

  • 남훈│‘란스미어’ 브랜드매니저 alann@naver.com│

    입력2009-04-03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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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트를 멋스럽게 차려입고 나간 중요한 약속. 빈틈없이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신발을 벗어놓아야 할 때면 진땀이 난다. 이른 아침 공들여 ‘불광’을 냈으나 어제도 신고 그저께도 신은 구두는 발을 빼는 순간 줏대 없이 찌그러진다. 고급 호텔이나 식당, 백화점의 ‘서비스 달인’은 신발만 봐도 고객의 수준을 정확하게 읽어낸다.
    Classic Shoes


    시대가 변해도 신사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명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적 탐구심, 여성을 배려하는 자세, 민주주의의 원칙, 가족을 지키는 책임감, 타인을 배려하는 옷차림 등 남자의 삶을 채우는 가치는 역사 속에서 그 의미가 재해석되면서 계속해서 존재해왔다. 우주인이 탄생할 정도로 문명이 발달하고,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옷 제작 기술도 혁신적으로 진보했지만, 전세계 남성은 여전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장을 입는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만큼 간편하고 실용적인 옷차림도 없지만, 비즈니스나 외교, 정중한 예식이나 즐거운 연회를 앞두고 남자들은 언제나 품위 있는 정장을 떠올리며, 슈트 차림은 늘 품질 좋은 구두로 마무리된다.

    슈트나 재킷 없이 남자의 온전한 스타일을 생각할 수 없듯이, 구두를 제외한 정장 차림도 불완전하다. 따라서 ‘그 남자를 제대로 알려거든 구두를 보라’는 말은 시대를 넘어선 탁월한 통찰이다. 누구나 슈트 차림에는 신경을 쓰지만, 구두를 대하는 태도는 천차만별이다.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 구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습관과 생활 태도, 성격, 심지어 직업까지 짐작할 수 있다.

    벗어놓은 자존심, 신발

    1970년대 미국의 한 고급호텔 도어맨은 누가 투숙할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비결은 바로 손님의 구두에 대한 정교한 관심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고 세계적 브랜드의 향수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고 세련된 화술을 구사하더라도 구두가 진실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이 일화는, 최고급 호텔의 지배인은 물론 명품 매장의 직원들까지 고객의 신발을 유심히 살펴보고 서비스하는 트렌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서양식 복식이나 에티켓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로선 구두에 신경 써야 하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다. 특히 우리 같은 좌식 문화에선 신발을 벗어둘 일이 종종 있다.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비즈니스로 음식점에 갔을 때, 타인에게 벗어놓은 구두와 발뒤꿈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방에 들어가 폼 잡고 앉아 있는 동안, 최근 마련한 좋은 슈트를 옷걸이에 걸어두는 사이, 굽이 심하게 닳고 주름이 깊게 파인 너저분한 구두는 당신을 초대한 호스트나 식당 종업원, 때때로 클라이언트에게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을 속속들이 폭로할지 모른다.

    구두는 슈트만큼 중요하며, 개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안목과 취향까지 보여주는 섬세한 품목이다. 시간을 들여 관리한 덕분에 은은한 광택이 우러나는 가죽 구두를 신은 남자와 구두 앞코에 주름이 깊게 파인, ‘군만두’ 모양의 구두를 신은 남자의 차이는 돈으로도 메우기 어렵다. 구두는 스타일이 중요하지만 발을 편하게 보존하는 기능성까지 갖추어야 한다. 구두가 잘 맞지 않으면 인생이 괴로워질 수 있다. 다른 액세서리나 심지어 슈트를 살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과 주의를 기울여 구두를 골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구두만큼은 (농담이지만) 아내를 고르는 것보다 더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영국 구두와 이탈리아 구두

    슈트를 비롯한 남성복의 본류가 영국이듯, 현대적인 의미의 구두도 영국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영국식 구두는 귀족들의 부츠나 군화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춥고 습기가 많은 날씨에 강한 전통을 갖고 있다. 구두 바닥 또한 이탈리아나 프랑스 구두에 비해 두껍고 튼튼하다. 따라서 처음 신었을 때 묵직한 느낌이 들고, 단단한 구조와 무게 때문에 발에 익숙해지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 구두가 발에 익숙해지면 놀랍도록 편안한 착용감을 준다. 전세계 클래식 슈트 애호가들이 영국 구두에 애정을 표하는 이유다.

    한편 이탈리아 구두는 가볍고 날씬하며 처음부터 발에 꼭 맞는 스타일을 지향한다. 지중해의 반도국가 이탈리아의 온화하고 습도 적은 기후에서 비롯된 특성이라 하겠다. 특히 끝(Last)이 영국 구두에 비해 뾰족하고 발가락 부분은 실내화처럼 낮으며 밑창이나 굽이 얇은 편이다.

    구두를 브랜드에 의존해 구입해서는 안 되고, 입고 있는 옷에 조화롭게 선택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지역색 때문이다. 어깨 부분에 힘이 들어간 영국 새빌로(Savile Row)식 슈트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정중한 권위를 발산하는 영국식 구두가 어울리고, 이탈리안 개성이 곳곳에 스민 나폴리식 슈트를 좋아하는 남자에게는 라스트가 길고 가벼운 이탈리아 구두가 제격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남자들의 체형이 제각각이듯,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각기 발전해온 구두의 역사를 이해하면, 옷차림에서 남다른 안목을 획득하게 된다. 관리되지 않은 싸구려 구두가 우리의 품위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면, 올바르게 선택한 구두는 그 남자의 수준을 200% 업그레이드해준다. 구두란 그런 것이다.

    Classic Shoes

    좋은 구두는 바닥에서도 표가 난다. 바닥이 가죽으로 처리돼 있어야 한다.

    한국 시장에 클래식 슈트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모든 옷이 클래식으로부터 출발해 트렌디 스타일로 재해석되고 진화하는 것이 복식 발전의 자연스러운 흐름인 데 반해, 한국 패션의 역사는 트렌드에 대한 관심이 과잉되고 클래식 영역은 극단적으로 좁았다. 그러나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빛나는 ‘은갈치’ 양복을 멀리하게 하고, (무심결에 입어온) 몸을 구속하는 딱딱하고 각진 로봇 슈트를 다시 생각하게 했으며, (가죽과 상극인 물, 불, 기름으로 구두를 두 번 죽이는) ‘불광’을 내지 않게 한 것만도 클래식 복식의 존재감이 일궈낸 큰 소득이라 하겠다.

    옥스퍼드와 슬립온

    슈트에 흰색이나 밝은 색 양말을 신는 남자가 여전히 많지만, 클래식 복식의 확산은 그것을 손가락질하기보다 구두의 색상은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지, 그렇게 선택한 구두에 어떤 양말을 신으면 좀 더 품위 있어 보이는지에 관한 문화적 배경을 제공한다. 자유분방한 느낌의 캐주얼 반바지에 엄격한 구두가 어울리지 않듯, 클래식 슈트에 스니커즈를 신는 것도 자연스럽지는 않다. 와인에 잘 맞는 음식이 있듯 품위를 드러내는 정장 차림에는 클래식한 구두를 매치하는 것이 좋다.

    Classic Shoes
    남자의 클래식한 구두는 크게 옥스퍼드(oxford)와 슬립온(slip-on),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오래 고민한 끝에 용기 내어 클래식 슈트를 시도한 사람이 클래식한 구두라는 새로운 세계에 관심을 가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옥스퍼드다. 구두 윗부분이 발목 아래쯤 오고, 끈 구멍이 세 개 이상 있어 끈을 묶도록 되어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신기 시작한 이 고전적인 구두는 슈트를 입는 모든 남자가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슈트와 어울리는 또 다른 구두로 윗부분에 벨트 고리 같은 장식을 둔 몽크 스트랩(monk strap)이 있다. 벨트 고리 역시 끈의 일종으로 간주되기에 슈트 차림에 무리가 없다. 클래식한 옷차림에 탄력이 붙은 사람이라면, 벨트 고리의 색상이나 숫자에 변화를 주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편 슬립온은 기본적으로 끈이 없고 앞쪽 등가죽이 짧은 구두를 일컫는다.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이 구두는 1930년대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 폭넓게 유행했는데, 신고 벗기가 간편해서 캐주얼한 구두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비즈니스 캐주얼을 대표하는 재킷에는 잘 어울리지만, 포멀한 슈트를 입는 경우에는 권장할 만한 선택은 아니다.

    구두의 종류는 끝도 없다.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 물론 그 모든 구두가 다 잘 만들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구두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는 경우에만 발견되는 파랑새가 아닐까. 오래도록 입어 낡아 보이는 슈트에 시간을 들여 잘 손질된 구두를 신고 있는 중후한 신사를 보면 조용히 목례를 건네보시라. 인생의 굽이를 현명하게 잘 지나온, 그윽한 연륜이 마음 깊이 느껴질 것이다.

    좋은 구두의 조건

    남자의 구두란 그의 온 체중을 지탱하며 주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그를 싣고 따라가는 친구 같은 존재다. 오직 품질 좋은 클래식 구두만이 그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처럼 남자의 시간을 정직하게 기록할 정말 좋은 구두를 발견하고, 그것을 오래도록 소중히 신기 위한 지침을 소개한다. 누군가는 이미 즐기고 있을 지침이다.

    ▲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검정 구두를 애용하지만, 클래식 슈트에 잘 어울리는 구두 색상은 브라운이다. 역사적으로 품질이 좋은 소가죽은 갈색이었고, 그 가죽을 이용해 좋은 구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블랙 슈트나 턱시도 같은 예복에는 검정 구두가 합당하다.

    ▲ 구두의 질은 일단 가죽의 질에 의해 결정되며, 광택이 은은한 것이 좋다. 지나치게 광택이 나는 구두를 피하시라.

    ▲ 같은 구두를 이틀 연속으로 신지 않는 것이 사람의 건강과 구두의 품질 모두를 위해 현명한 방법이다. 몇 켤레의 좋은 구두를 마련한 다음 번갈아가며 신는 것이 바람직하다.

    ▲ 좋은 구두의 바닥은 가죽으로 처리돼 있을 것이다. 검게 만든 밑창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적당하게 결점을 가린 제품일 가능성이 있다. 고무 밑창은 캐주얼이나 스포츠용으로 적합하다.

    ▲ 구두를 신고 벗은 다음에는 항상 나무로 만든 슈 트리(shoe tree)를 넣어둔다. 구두 내부의 수분을 흡수하고, 구두가 위로 휘어지는 것도 막아준다.

    ▲ 비를 맞아서 구두에 소금기를 머금은 하얀 자국이 남았을 때는 식초와 물을 섞어서 잘 닦아준다.

    ▲ 모든 맞춤복이 완벽할 수는 없듯이 잘 만들어진 구두도 흠 하나 없이 완벽하기는 어렵다. 어떤 수제화는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으나 바느질이 불완전할 수 있다. 손으로 한 바느질이 오래간다.

    ▲ 구두를 살 때에는 항상 신발을 테이블 위에 놓아보시라. 구두 등 부분의 밑창(waist)이 약간 구부러지며 곡선을 이루는지 자세히 들여다본다. 굽의 앞부분은 테이블에 닿아야 하지만 뒷부분은 닿지 않는 것이 좋다. 구두코의 끝은 아주 약간 위를 향하는 것도 괜찮다. 어떤 걸음걸이를 갖느냐는 구두의 균형이 맞는지에 달려 있으므로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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