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중년의 사랑’ 연기하는 배우 최명길

“나이 들어도 모든 걸 거는 사랑에 대한 꿈은 멈추지 않죠”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9-04-07 18: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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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운관 속 그녀는 강하다. 독하다. 권력의 생리를 꿰뚫었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그걸 휘두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카메라가 멈춘 순간의 그녀는 부드럽다. 미소를 잃지 않는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믿는다. 그녀에게 ‘여배우가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법’에 대해 물었다.
    ‘중년의 사랑’ 연기하는 배우 최명길
    여배우가 나이 먹으면 초조하지 않으냐는 질문을 많이들 하시는데 저는 전혀 나이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지난해에는 지난해의 내 나이를 사랑하고, 올해는 올해대로 올해의 내 나이를 사랑하고 마흔이 되면 마흔의 내 나이를 사랑하면 되잖아요.…주름이 있으면 어때요. 20대는 그런 주름 못 만들어요. 20대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30대가 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잖아요.”

    1995년 그녀가 ‘신동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드라마 ‘결혼’과 영화 ‘장밋빛 인생’으로 무려 아홉 개의 국내외 연기상을 수상한 직후, 본인 말로는 ‘한참 잘나가던 때’였다. 당시의 인터뷰에서 전진우 전 동아일보 대기자는 ‘내면을 응시하며 생의 진실을 좇는’ 최명길의 눈빛에 주목했다. 삶의 고통과 인간의 허위의식을 다루는 작가주의 영화 속 그녀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이후 그녀의 행로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정치계에 첫발을 디딘 작가 김한길과의 결혼, 두 아이의 출산, 선거판을 누비는 국회의원 부인과 장관 사모님으로 살아가는 동안 ‘용의 눈물’ ‘대왕세종’ 같은 사극에서는 권력의 생리를 꿰뚫는 냉혹한 왕비 역할로 주목을 받았다. 십수 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카리스마를 가진 여성의 상징 같은 배우. 문득 궁금해졌다. 그 평범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인터뷰 장소는 일산 KINTEX의 드라마 촬영현장 인근. 재벌가의 정략결혼과 첫사랑과의 재회, 불륜과 배신, 복수를 다루고 있는 ‘미워도 다시 한번’은 고전적인 소재에도 수목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최명길씨의 역할은 주인공인 대기업 CEO 한명인 회장. 그 주에 찍어 그 주에 방영하는 빡빡한 촬영일정 때문에 인터뷰는 저녁 7시에야 시작됐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졌지만 사진기자의 카메라 플래시에 피곤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빛난다. 역시 경력 28년의 프로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 제 장모님이 드라마의 열렬한 팬이세요. 사인을 꼭 받아달라고 하시더군요. (웃음) 1980년대 스타일의 줄거리와 전개가 중년 시청자를 흡입하는 것 같더군요. 최명길씨를 비롯해 박상원, 전인화 같은 중견 배우들의 연기도 그 세대에 어필하는 것 같고요.

    “그래서 이 드라마가 의미가 있어요. 그동안에는 젊은 층 위주의, 10대를 타깃으로 만든 드라마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실패하면 ‘40~50대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는 역시 안돼’ 할 테니까 부담도 많았죠. 분명 신선한 소재는 아니지만 다행히도 진지하게 연기하는 걸 많은 분이 사랑해주시니 안도감을 가져요. 아직 이런 스타일이 통하는구나 하는. 선배 연기자들한테 격려 전화도 많이 받았어요. 저는 운 좋게도 나름 중심 있는 배역을 맡아왔지만, 요즘 제 나이 또래의 연기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주인공의 이모나 고모 정도였잖아요. 이 드라마를 계기로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연기할 수 있었으면 싶기도 하고요.”

    ▼ 눈썹 그린 모양이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쪽으로 치켜 올라간, 사나워 보이는 눈썹 화장이라고 할까요.

    “의도적인 건 아니고요, 제가 눈썹과 눈의 사이가 좀 넓은 편인데다 연기할 때 눈을 치켜뜨는 버릇이 있어요. 눈썹의 모양에 따라 인상이 많이 달라지죠. 그런 눈썹 모양이 드라마 속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 자리에 앉을 때도 항상 다리를 포개고 허리를 곧추세운 자세를 취하더군요. 팔을 살짝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도 눈에 띄고요. 강한 인물의 고전적인 포즈랄까요. 그런 자세를 이미지 트레이닝할 때는 누군가를 염두에 두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누굴 흉내 내는 건 아니에요. 역할에 맞는 자세를 연구한 거죠. 물론 CEO라고 해서 꼭 그런 자세를 취하진 않죠. 대중이 갖는 이미지와 실제는 다를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대리만족의 기대치가 있어요. 드라마 주인공이 그 이미지에 못 미치면 뭔가 아닌 것 같다고 느끼죠. 연기자는 실제보다는 그 이미지에 맞춰서 인물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앉아 있는 자세 하나로도 포스를 느낄 수 있도록.”

    ▼ 집에서도 그런 자세나 포즈를 유지하는 편인가요? 생활조차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해 지내는 연기자들도 있습니다만.

    “아휴, 그렇게는 안돼요. 집에 가면 집에서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걸요. 결혼 전에는 일상생활에서도 배역의 느낌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그게 불가능하더라고요. 다만 이번 드라마를 하는 동안에는 전과는 또 달라요. 캐릭터가 묻어나는 모양이에요. 스태프들과 얘기하다가 문득 ‘아 내가 한명인으로 얘기하고 있구나’ 느껴질 정도로. 남편도 저보고 한 회장이라고 부르며 놀려요. ‘아 회장님 오셨습니까’ 하면서.(웃음)”

    ▼ 기억에 남은 장면 중 하나가 정확히 눈물이 흘러야 할 타이밍에 1초의 오차도 없이 두 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자로 잰 듯 계산하는 건 아니에요. 긴 세월 연기하다 보니 몸에 익은 거죠. 주인공에 몰입하면 대본 속의 리듬도 제 것이 돼요. 감정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거기에 나를 맡기니까 타이밍도 딱 맞아떨어지는 거죠. ‘대본대로 이쯤에서 화를 내야겠다’가 아니라 정말 그 지점에서 화가 나요, 정말 그 타이밍에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요. 작가의 리듬을 부정하면 저와 드라마 속 주인공이 따로 놀게 돼요. 좀 아니다 싶은 부분이 있어도 몸을 맡겨야 하는 거죠.”

    ‘권력에 어울리는 이미지’

    ▼ 근래에는 강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 더 화제가 되고 주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혹시 본인의 원래 성격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웃음)

    “아니에요,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정말 미치겠어. (웃음) 잔잔하고 조용한 역할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흔히들 센 역할, 강한 연기가 좋은 연기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에요. 사실 예전에는 도회적이면서도 따뜻한, 남자들이 기댈 수 있는 여성 이미지에 가까웠어요. 라디오 DJ를 워낙 오래 했으니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용의 눈물’을 하면서 그게 확 바뀌었죠. 전장(戰場)에서 위기에 빠진 남편을 구하기 위해 칼을 차고 뛰어나가는 여인이란 이전 한국 사극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 한 장면으로 지금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해요.”

    ▼ 그렇지만 그런 캐릭터가 차곡차곡 쌓여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킹메이커 노릇을 하는 왕비랄지, 대기업 CEO랄지. 그것도 하나의 전략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드라마의 담당PD가 “최명길 외에 다른 캐스팅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더군요.

    “의도된 전략 같은 건 없어요. 다만 감사한 일이죠. 결혼 전에는 따뜻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고, 이후에는 또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스스로 이번에 제가 연기경력의 한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느껴요. 처음 촬영할 때만 해도 드라마상의 아들이 20대 후반인 게 와 닿지 않더라고요. 제 아이는 아직 둘 다 초등학생이니까요. 그런데 촬영하면서 그걸 뛰어넘었어요. 받아들이게 된 거죠. 한 사람의 연기자로서 혹은 한 사람의 여자로서 시간이 흐르는 걸 수용하게 됐다고 할까요.”

    ▼ 강하다는 건 다른 말로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복수를 위해 주가를 조작하거나 하는 이번 역할이 바로 권력이겠죠. 기분 나쁜 말일 수도 있지만, 왠지 ‘권력에 어울리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본래의 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집에서 나고 자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이에요. 다만 선배님 한 분이 ‘그동안 네가 지내온 시간이 부지불식간에 이번 캐릭터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여당 원내대표의 부인은 의원 부인들을 아우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잖아요. 장관 부인으로서도 챙겨야 할 일이 많았고요. 그렇게 십수년간 살아온 길이 연기에서도 보이는 거죠. 저는 정말 몰랐거든요.

    그렇지만 한명인이라는 역할이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그랬다면 제가 이렇게 몰입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내면에는 상처와 슬픔과 외로움이 있는 인간적인 역할이잖아요.”

    드라마 속 한명인 회장은 “오늘따라 아름다우십니다!”라는 중역의 아부에 “아직도 내가 여자로 보입니까?”라고 호통을 치는 ‘철의 여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시절 첫사랑에 실패하고 30여 년간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지속해온 쓸쓸함을 안고 있는 캐릭터다. 남편의 30년 외도를 알고 ‘처절하게 짓밟아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오열하며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두 개의 얼굴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모티브다.

    “사람들은 강하기만 한 건 좋아하지 않아요. 강해 보이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굉장히 여리죠. 자기가 허하기 때문에 그 허점을 감추려고 더 독하고 집요해지는 거예요. 콤플렉스죠. 물론 어떻게 보면 그런 겉과 속의 괴리도 대중이 갖고 있는 이미지겠죠. 강한 사람에게 약한 면이 있기를 원하는 거라고 할까요. 언젠가는 원래의 제 성격에 맞는, 서민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연기가 하고 싶고, 또 제대로 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괴리 혹은 차이

    ▼ 그렇지만 연기하는 걸 보면 기싸움이랄까, 그런 측면에서 남다른 ‘재능’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후배들이 시선을 맞추면 순간 대사를 까먹더라는 일화도 그렇고, 얼마 전 CD 사건도 그렇고.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화내는 연기를 하면 젊은 후배들이 순간 대사를 잊어버려 다른 곳을 쳐다보고 연기한” 에피소드를 말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패기만만한 젊은 앵커 최윤희(박예진 분)와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들고 있던 CD를 부러뜨리는 모습을 연기하다 파편에 손을 다치기도 했다.)

    “예진이는 처음 기싸움하는 장면을 찍고 몸이 아팠다고 하더라고요. 저한테 저도 모르는 그런 포스가 있나 봐요. ‘대왕 세종’에서 함께 연기했던 김영철 선배님이 저한테 ‘내가 너처럼 기가 센 여자는 처음 본다’고 하셔서, 그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고민 되게 많이 했어요. (웃음) CD 일만 해도, 대본에는 부러뜨리라는 말이 없었는데 카메라가 도는 순간 감정의 흐름상 부러뜨리는 게 맞다 싶더라고. 생각보다 단단해서 잘 안 되는 걸 있는 힘을 다해 끝내 부러뜨렸죠. 그것도 분명 제 내면의 일부이긴 할 텐데, 카메라가 돌아갈 때만 튀어나오나 봐요.

    평소에는 대단히 부드러운 편이고, 주변에서 인기도 좋아요. 스태프들이 절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웃음) 사람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항상 최선을 다하려 애쓰거든요. 연기할 때 전혀 다른 인물이 될 수 있는 건 배우로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결혼 전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 그런 걸 많이 느껴요. 인생이라는 게 뭘까, 사랑이라는 게 뭘까, 평소에 그런 생각을 누가 하겠어요. 연기를 통해 그런 걸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배우는 것 같아요.”

    ‘중년의 사랑’ 연기하는 배우 최명길

    1월30일 ‘미워도 다시 한번’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전인화, 박상원, 최명길(왼쪽부터).

    ▼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흔히 연기자들의 진심은 진심이 아니라 연기라고 오해받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연기자라는 직업의 숙명일 수도 있겠죠. 특히 남편의 선거를 돕는 과정에서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도 같고요.

    “연기가 곧 거짓은 아니에요. 그 역할의 진심을 표현하는 거니까요. 지나온 시절을 얘기하자면 (웃음) 너무나 절절하게 지역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시간이 있거든요. 사람들은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정말 잘 알아요. 건성으로 악수하는 것과 사랑을 담아 두 손으로 하는 건 느낌이 달라요. 아무리 뛰어난 연기자라도 그걸 속일 수는 없어요. 오히려 그걸 믿기 때문에 드라마 속 인물의 진심도 표현할 수 있는 거겠죠.”

    ▼ 간혹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세요? 속으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겉으로는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괴로움이랄까요. 적잖은 배우가 그런 상처 때문에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문제 때문에 공허감을 느꼈을 만한 20대 때에는 라디오를 하면서 음악의 위로를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이후에는 가정을 꾸리면서 덜 상처받았던 것 같고요. 워낙 오랜 시간을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거나 하지는 않아요. 마음 아픈 일이 있어도 그냥 지나가는 건가 보다 생각하죠. 얽매이면 사람이 힘들어져요.

    일부러 밝은 모습만 비치려 애쓰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 에너지를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돌보는 데 더 많이 썼죠. 조바심내지 않았던 거죠. 그런 문제로 힘들어하는 후배가 있다면 꼭 얘기해주고 싶은 게, 여배우가 관심을 쫓아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 날 주목하지 않는지 고민하면 안 된다는 거죠. 연기를 열심히 하면 관심은 따라오게 마련이니까요.

    저는 현명함이란 상황판단이라고 생각해요.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조바심 내지 않고 접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최면처럼 어떤 끈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해요. 나는 마흔이 되면 어떤 연기를 할 거야, 이 다음에는 꼭 세계영화제에 나갈 만한 작품을 할 거야, 스스로 그런 다짐을 하는 거죠. 실현되지 않아도 중요치 않아요. 끈을 놓치지 않고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거죠.

    다행히 저는 제 남편의 안목이 꽤 높은 편이라고 믿거든요.(웃음) 남편이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 거라고 자기최면을 걸곤 해요. 결혼 전에는 부모님이 있었고요. 어떤 분은 제가 혼자 살아도 잘 살았을 거라고 하시는데, 저는 정말 혼자 못 있어요. 그랬으면 밖에서는 강하지만 안에서는 외롭기 그지없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죠.”

    때가 아니면 엎드려 있어라

    ▼ 배우 못지않게 시선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정치인일 테고, 역시 대중의 관심에 항상 목마른 직업입니다.

    “직접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조하는 것뿐이니 잘은 모르지만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많죠. 쉽지 않아요. 정치도 상황의 부침이 심하고 스트레스가 심하니까요. 선거만 해도 그렇죠. 남편은 서울시 최다득표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은 정치인이었지만 탈당 같은 어려운 결정을 내린 적도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그 일이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결정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걸 빨리 깨달아야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저는 남편이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사극할 때 기억에 남은 대사 중에 ‘때가 아니면 엎드려 있어라’는 게 있어요. 그런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대사를 보면 ‘이 뜻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여배우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웃음) 앞으로의 시간도 잘 보내야겠다 싶은 게, 이제 아이들이 엄마가 배우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나이가 됐어요. 엄마가 어떤 드라마를 하는지,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최고라고 추켜가며 격려도 해줘요. 그걸 보면 정말 잘해야겠다 싶죠. 다른 말이 필요 없어요, ‘잘’ 해야 되는 거고 ‘잘’ 살아야 되는 거죠.”

    한 발짝 한 발짝

    ▼ ‘중년의 사랑’이 지금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의 소재입니다. 그런 사랑에 동의하십니까. 부와 명예와 목숨까지 거는 그런 사랑이 그 나이에도 과연 가능할까요.

    “솔직히 드라마 속에서 이정훈(박상원 분)과 은혜정(전인화 분)이 나누는 게 사랑이냐,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말도 안 되죠. 아무리 첫사랑끼리라지만 유부남이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낳는 건 사기고 불륜이죠. 그럼에도 많은 분이 공감하시는 건 누구에게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리는 첫사랑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모든 걸 다 거는 사랑이 그 나이에도 가능할까…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모든 것에 지치면 가능하겠죠. 부와 명예의 덧없음에 실망하고 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세상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분명한 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런 사랑을 꿈꾸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공감의 이유죠, 일종의 대리만족으로서. 어느새 나이가 들고 흰머리가 늘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는 사랑이 남아 있다는.”

    ▼ 본인에게는 나이가 어떤 의미일까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결혼 전에는 예술성 강한 영화로 국제영화제에서 상도 받았지만, 정치인의 아내라는 길을 택한 후에는 대중적인 드라마에서 더 많이 연기한 게 눈에 띄더군요.

    “그건 아니에요. 결혼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그런 영화의 배역 제의가 줄어들긴 했고 욕심나는 배역이 사정 때문에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도 영화 출연을 하고 싶고 하려고 해요. 결혼과 영화는 전혀 별개였으니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죠.

    저는 제가 현재의 나에게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는 게 좋아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나이 든 배역을 맡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주도적으로 움직일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믿어요. 이 다음에 더 나이가 들면 또 어떤 배역을, 그 다음에는 또 어떤 연기를 하고 싶다고 꿈꾸는 것도 좋아요.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쯤에서 눈치 챈 독자도 있겠지만, 지난 14년의 만만치 않은 삶에도 시간을 마주하는 그녀의 생각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대중에게 비친 이미지는 바뀌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대로였다. 어쩌면 다시 14년 뒤 환갑을 마주해도 역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남았다. 그것이 여배우 최명길이 세월의 흐름을 타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방식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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