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남북관계 파행은 ‘인간미(人間味) 결핍’ 탓

  • 허만섭│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

    입력2009-04-09 15: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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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관계 파행은 ‘인간미(人間味) 결핍’ 탓

    금강산 육로 관광로.

    아규먼트(argument·논쟁 또는 논증). 이 지(知)적 어둠으로의 도전은 역사 발전과 공익 증대의 원동력이었다. 논란의 여지없는 완전무결한 입증이란 기존 지식의 ‘동어반복’이거나 ‘자기복제’에 불과할 수 있다. 앎의 확장은 독창적 주장을 그럴듯한 정황과 논리로 ‘완벽하진 않지만 타당성 있게’ 입증하는 ‘논쟁적 나아감’을 통해 획득된다. 이는 팩트(facts)와 논평의 결합이며 ‘새롭게 구성한 이야기’다. 이 논증의 바다에 던질 두 번째 소재는 ‘남북문제’다.

    케이블TV ‘쿠키미디어’의 권기식 부사장은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인 1998년 ‘한겨레’ 기자를 그만둔 뒤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는 ‘국정상황실’을 설치했다. 부서명도 직접 작명했다. “각종 국가 현안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정확하게 대응한다”는 취지다. 그날그날 보고받아 결정하는 언론사‘편집국 데스크’의 기동성을 청와대에 이식해본 것이다.

    그는 국정상황실에서 정치상황국장을 맡았다. 국내외 현안, 남북문제 관련 고급 정보가 매일 그에게 보고됐다. 권기식 국장-장성민 국정상황실장-김대중 대통령의 직보(直報) 체제도 구축됐다. 그는 이 자리를 4년 역임했다. 정권 내에는 여러 의사결정 구조가 존재한다. 장성민-권기식 라인은 “이념 문제에 유연한 실리추구형”이라는 게 당시 여권의 대체적 평가였다고 한다.

    “남북관계 모순 인정해야”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후보는 ‘국정 경험과 정치 감각을 겸비한 실전용 참모’가 필요했다. ‘권기식’은 상품 가치가 있었다. 요직인 대선후보 비서실 부실장에 임명됐다. 12월 대선 승리 후 그는 ‘청와대 국정상황실 개편안’을 노무현 당선인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한 측근이 임의로 이 보고서를 노 당선인의 오른팔 이광재 현 의원에게 갖다줬다고 한다. 이것이 이광재 의원이 국정상황실장 자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라고 한다. 외부 접근이 차단된 권부 핵심층에서 일어난 일이니 이렇게 추정될 뿐이다. 어쨌든 이후 권기식-이광재의 인사 대립구도가 형성됐고 그 갈등은 이광재 의원이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차지하면서 종결됐다. 여권 내 ‘구(舊)집권층’에서 ‘신진 386측근’으로 향하는 권력이동의 서곡이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권씨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한양대 국제대학원 아태지역연구센터 연구부교수를 거쳐 현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겸임하고 있다. 4년간 한반도 정보를 주물러온 이 대북 전문가는 민간 전문가나 각료, 정치인과는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편하게 만난 자리에서 “요즘 남북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군사충돌 가능성도 높아졌다. 원인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인간미(人間味)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의 배경설명은 이렇다.

    “남북관계는 근본적으로 모순관계다.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로 우리를 위협하는 주적(主敵)이면서 통일과 번영으로 함께 나아가야 할 동족이다.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하는 것은 독재정권인 김정일 체제를 도와주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만약 지원을 끊으면 북한은 중국에 예속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순되는 이런 두 면 중 어느 한 면만 보려 하면 대북정책은 실패한다. 원칙,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은 좋다. 동시에 리스크가 증대되지 않도록 적정 수준에서 관리해야 한다. 가난하고 사고를 자주 치는 형제가 용돈 달라고 찾아오는데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 계속 못 본 체하면 불화는 커지고 그 형제는 홧김에 화염병이라도 던져 집안을 홀랑 태워버릴 수도 있다. 한국은 남북관계의 모순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은 싫든 좋든 ‘같은 민족이라는 특수 관계’다. 싸울 부분은 싸우더라도 인도적인 부분은 도와주면서 ‘인간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무대에 오르지 않는 배우

    2008년 2월 이명박 정권 출범 후 대북정책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단절, 후퇴, 긴장, 충돌의 연속이다. 한국에서 정권이 보여주어야 할 양대 퍼포먼스는 ‘한반도 문제’와 ‘경제 문제’다. 그런데 막이 오른 뒤 전체 공연시간의 5분의 1이 지나갔는데도 배우가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지켜보는 관객은 답답하다. ‘남북문제는 정권의 관심 밖인가’라고 웅성거릴 만도 하다.

    올 들어 북한은 대남 전면대결태세 선언(1월17일), 남북한 합의사항 무효화(1월30일), NLL 인근 해안포 사격훈련(2월24일), 대포동2호 미사일 발사 시사(2월24일), 개성공단 육로통행 차단(3월13일) 등 긴장을 한껏 고조하고 있다. 여권에서는 “북핵 폐기를 위한 진통”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북측이 원인을 제공 한 면이 크다.

    그러나 ‘13개월의 대북 진공상태’는 꽤 비정상적이다. 한국의 대북 교섭력 상실이 한반도 이슈에서의 주도권 약화로 이어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원칙은 아름답다. 그렇다고 북한이 끌고 가는 현 상황에 대해 원칙적인 관전평만 하는 듯한 정권에 대해선 믿음을 갖기 어렵다”(조선일보 2월25일 보도). 지난 정권 때 발생한 서해교전 등은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쪽에서 교전을 해도 다른 쪽에선 관광객과 물자가 왕래했다. 외국자본이 탈출하지도 않았고 주가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세계적 경제·금융위기의 여파에 남북한 군사충돌까지 겹치는 건 불길한 일이다.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남북 대화나 교류가 단절되고 전투태세로 들어간 상황에서 실제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이 언제 ‘데뷔’할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됐다. 그간 남북문제를 다뤄온 ‘태도’를 점검해볼 시점이 됐다. 이명박 정권이 천명한 대북정책의 제1 키워드는 ‘상호주의’다. 일종의 ‘거래’다. 대표적 대북정책인 ‘비핵개방3000’에 잘 녹아 있다. ‘비핵 개방하라’, 그러면 ‘1인당 소득 3000달러 만들어 주겠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거래가 성사되기 위해선 ‘묵시적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다. 이런 인간관계의 ‘기본’이 깔려 있지 않으면 거래고 뭐고 답이 없다. 이명박 정권은 이 기본에 얼마나 충실해왔을까.

    취임식, 비료, 김태영

    이명박 정권과 북한이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 대선 직후인 2008년 1월 북한은 신년사설에서 이례적으로 ‘반(反)한나라당’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명박 당선인을 공식 인정하고 기대감을 보인 것”으로 여권은 해석했다. 이 대통령은 이에 화답하듯 TV인터뷰에서 “대북정책은 더 평화적으로, 더 협력적으로 나갈 것” “동족으로서 신뢰를 가지고 대화해야 한다”며 대북 포용기조를 분명히 했다. 북측 고위인사의 이 대통령 취임식 참석으로 남북화해가 본격화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정권 내부의 미숙함과 엇박자로 혼란이 일었다. 인수위 핵심 인사의 ‘북한 특사 파견 및 취임식 초청’ 계획 누설, 이에 대한 인수위원장의 공개경고, 보수단체의 반발로 모양새가 구겨졌다. 북측의 취임식 참석은 이뤄지지 않았다. 동시에 인수위 측에서 “통일부를 폐지하겠다” “햇볕정책은 실패한 정책” “북측에 대한 지원은 비핵을 전제로 한다”는 대북 강성 발언이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인수위 한 핵심 인사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10·4 남북정상회담 합의사항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며 북측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 발언은 두고두고 이명박 정권에 족쇄가 됐다.

    지난해 1~2월에 이렇듯 미세균열이 생긴 데 이어 3~4월엔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3월26일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이 소형 핵무기를 개발해 남한을 공격할 경우 어떻게 대처하겠느냐”는 질문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적이 핵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장소를 확인해 타격하는 것”이라고 했다. 북측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없었다. 가정을 전제로 북측 영토에 대한 공격을 직접 언급한 것은 북측에 대한 불필요한 자극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다음날 개성공단의 우리 당국자 11명을 추방하고 그 다음날엔 서해상 함정에서 단거리 미사일 3발을 발사했다. 남북관계의 파행이 가시화된 순간이었다.

    이 시기 이명박 정권은 지난 10여 년간 계속되어온 북측에 대한 비료제공을 중단했다. 올해도 비료는 제공되지 않았다. 늘 해오던 인도적 지원마저 끊어버릴 때 받는 쪽 처지에서는 서운함이나 야속함이 더 커질 수 있다. 홍사덕 의원은 “북측이 그런 심정일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올해 신년사설에서 식량문제는 “현실의 절박한 요구”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에선 “배고프면 받겠죠”라는 비아냥이 흘러나왔다(경향신문 2008년 12월6일 보도). 한 대북 전문가는 “비료문제를 지켜보면서 북측에서는 ‘더 기대할 것도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위원장 공격에 ‘폭발’

    이어 남북관계는 본격적인 파행국면으로 접어든다. 정부는 6·15공동선언 및 10·4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 대화를 제의했지만, 이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 발언이 이어졌다. 북측은 “6·15공동선언 및 10·4선언을 전면 부정했다”며 반발했다. 이 대통령의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발언, 비핵개방3000의 입안자인 현인택 교수의 통일부 장관 임명 등이 북측을 자극했다. 탈북자 단체는 김정일 위원장의 복잡한 여자관계 의혹이 담겨 있는 대북 삐라를 대거 북측으로 날려 보냈다. 북측의 중단 요구에도 삐라 살포는 계속됐다.

    북측은 특히 남북정상 공동선언 재검토, 신병이상설, 여자관계 등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타깃으로 하는 남측의 언행이 이어지자 ‘폭발’하는 반응을 보였다. 국정원의 김정일 위원장 신병이상설 공개는 우리 측에서도 빈축을 샀다.

    북측은 현 장관 임명에 대해선 “우리와 끝까지 엇서 나가겠다는 것을 세계 면전에 선언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남북육로 통행 제한, 개성관광 중단, 개성공단 축소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지난해 12월2일 “북한이 하고 있는 전술이 ‘벼랑끝 전술’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제발 벼랑 끝에만 가고 벼랑에서 뛰어내리지는 말았으면 한다”고 비꼬았다.

    이상희 국방장관은 2월20일 “적의 미사일이 날아왔을 때 미사일 발사지점은 공격받아야 한다”고 했다. 서해교전과 같은 해상교전에 비해 영토에 대한 직접 공격은 확전의 위험성이 훨씬 크다. 이명박 정권 군 수뇌의 ‘북한 영토 공격’ 발언은 벌써 두 번째다. 이번에도 가정(미사일이 날아왔을 때)을 전제로 했다.

    이명박 정권은 주로 ‘말’로 북측을 자극해왔다. 자극적 언급-유화적 언급-자극적 언급을 반복하는 패턴을 보였다. 북측도 호전적인 말과 행동을 병행해 대응했다. 이런 공방 속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북측의 불신과 적대감은 높아졌다.

    상대편에 대한 공격의 빈도, 수위로 보면 북한이 더 심했을 수 있다. 한국이 한마디 하면 북한은 열 마디 하고 거기에 별의별 액션까지 동원한다. 그런데 북한은 원래 그런 나라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그들의 체제보존 방식이었다. 동일 수준에서 남북을 비교하는 건 난센스다. 중요한 것은 이쪽 태도의 진정성이다.

    남북 대화가 중단된 상황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대북발언은 대북정책의 중요한 집행수단이다. 정책 일관성의 유지, 발언 수위 조절에 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상대에 대한 신중함, 인내, 배려도 필요하다. 비록 상대를 비판할 때도 ‘궁극적으로는 상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제시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은 번번이 실패했다는 인상을 줬다. 이래서는 신뢰 구축이 어려워 보인다.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가 진정성을 가지고 대화에 나서주는 태도를 아직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별 실익도 없이 상대를 약 오르게 하고 자극할 뿐인 발언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 이는 단순 실수로 보기 어렵다. 대북정책의 의지, 철학 자체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상황이 된다. 전임 진보성향 정권에서 의욕이 지나쳐서 탈이었다면, 이명박 정권에선 정반대로 동족을 향한 열정, 온기, 신의가 너무 부족해 보인다. 의지가 부족하면 ‘인간미’가 나올 리 없다.

    대북정책의 탈인격화

    이명박 정권의 전반적 정책기조는 지금도 ‘신자유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북정책의 철학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에 따르면 대북정책의 ‘상호주의’는 실상은 ‘계약-실행-이익 분배’의 경제행위에 다름 아니다. 자연히 대북정책은 계산적이고 냉정한 ‘탈인격화’ 성향을 띠게 된다. 남북관계 파행의 원인 역시 북한의 체제보장 전략, 경제적 지원 얻어내기, 후계구도 등 주로 ‘이해득실의 관점’으로만 파악한다.

    이처럼 대북정책의 목표, 태도, 원인분석에 이르기까지 이명박 정권이 남북관계의 인간적 특수성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기다린다고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다. 지난해 뉴욕 월가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번영으로 이끄는 유일사상’이던 신자유주의는 그 권위에 큰 손상을 입었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에피스테메(episteme·진리)의 영역’에서 ‘독사(doxa·믿음)의 영역’으로 내려앉고 있다. 이즈음하여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 기조도 수정, 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벽에 부딪혔을 땐 ‘헌법정신’으로 돌아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헌법 전문(前文)). 헌법은, 대북정책에서 통일의 열정, 민족애와 인도주의를 보완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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