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내가 겪은 ‘인간 김수환’

‘미사 예물’로 100만원 받고 조의금으로 100만원 내고

  • 구중서│문학평론가 kwangsanjsk@yahoo.co.kr│

    입력2009-04-09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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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김수환 추기경의 침묵에서 신비에 찬 신앙을 느낀다. 인간의 진실은 영원에 이어지며 불변한다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의 그늘을 느낀다는 것도 그의 그러한 믿음으로부터 어떤 평화를 전해 받은 것이다.” -구중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중에서
    내가 겪은 ‘인간 김수환’
    지난해 겨울부터 김수환 추기경을 회고하는 평전을 준비 중이던 나는 서재에서 작업 중에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결국 이러한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인가.

    지난해 가을 추기경이 장기 입원한 이래 병문안도 갔었고 병환이 너무 심할 땐 병실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린 적도 있었다. 사경을 헤매신다는 소식이 들려올 땐 마음의 준비도 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좀 더 버텨주시리라 믿고 있었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을 처음으로 가까이 대하게 된 것은 1971년의 여름이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직영하는 가톨릭출판사에서 월간 ‘창조’ 잡지를 창간하게 되었는데 내가 편집 책임자가 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창조’ 잡지와 가톨릭출판사 간행물 전체의 발행인이었다.

    그해 9월, 창간호 편집계획을 작성해 추기경 집무실에 가서 김수환 발행인에게 보고했다. ‘지성의 사회적 실천’ ‘근대화, 어떻게 되어가나’ 이런 제목의 글들을 청탁하는데, 3선(選) 개헌 후 공화당의 영구집권 계획을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이해 4월에 이미 김수환 추기경은 대선에 임하는 공명선거 촉구 시국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다. 부정선거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한 후였다. 김수환 발행인은 ‘새 역사 창조 위해’라는 제목으로 ‘창조’ 잡지의 권두언을 쓰게 되었다.



    잡지 편집계획에 대한 내 보고가 끝났는데 발행인인 김수환 추기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당시 김 추기경은 가톨릭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입각해 교회의 사회참여 사명에 충실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한편 나는 사회적으로 문단의 참여문학 계열 문학평론가로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리얼리즘 문학론을 발표한 바 있었다.

    교회의 사회참여나 문학의 사회참여는 모두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사회를 구현하려는 것이고 그 궁극은 진리에 귀일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환 발행인과 편집주간인 나는 어떤 토론의 필요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마음 편하게 잡지를 발행할 수 있었다. 김 추기경은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972년 4월호 ‘창조’에 김지하의 장시 ‘비어’를 게재했는데 그것이 당국의 비위를 거스른 것이다. 나와 김지하 시인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중앙정보부는 20여 일간 나를 닦달하며 잡지에서 손을 떼라고 강요했다.

    성탄절 카드

    어느 날은 내 담당 수사관이 내 앞에서 정보부 국장에게 발길로 얻어맞기까지 했다. 그 수사관이 나에게 애걸까지 하는데 나보다 그를 위해서 더 버티고 싶지가 않았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나는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내려와 가톨릭출판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집으로 갔다. 내 한 몸이 그만둠으로써 회사와 발행인, 심지어 수사관까지 편해질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발행인인 김수환 추기경이 내 사표를 늦게 받아보았다는 것이다.

    “내가 발행인인데 왜 편집주간이 혼자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가. 몸이 피곤할 터이니 3개월간 집에서 쉬도록 하고, 월급은 다 보내주겠다. 그 다음에는 무조건 출근해서 함께 계속 일을 해야 한다.”

    김 추기경은 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 10월에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언론자유는 완전히 봉쇄되니 잡지를 발행할 이유도 없어져버렸다. 교구가 ‘창조’ 잡지의 자진 정간을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가톨릭출판사의 총괄 편집주간으로 계속 근무하게 되었다. 그렇게 10년 동안 나는 김수환 추기경의 그늘 아래서 험난한 시대를 버티게 된다.

    1980년의 광주항쟁이 있기까지 이 10년 동안 내 가톨릭출판사 생활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복판을 걸어 다니는 것이었다. 가톨릭출판사가 서울대교구청 주교관과 ㄱ자로 이어져 있어 같은 마당을 김 추기경과 내가 걸어 다녔다.

    우연히 마당에서 마주치면 김 추기경은 내게 지낼 만하냐고 염려하듯 묻곤 했다. 그러다 성탄절이 오면 같은 마당에서 보는 사이인데도 집으로 카드가 우송되어왔다. 김 추기경은 만년필로 손수 적은 카드에서, 나를 붙들어놓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아 죄송하다고,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 시절 나는 희생을 한 것이 아니라 보호를 받고 있었으며, 인간 김수환 추기경의 꾸밈이 없는 천품을 접하며 지내는 것이 마치 낙원에서 지내는 것 같은 심경이었다.

    내가 겪은 ‘인간 김수환’

    잡지 ‘창조’의 발행인은 김추기경이었고, 필자는 주간이었다.

    추기경 집무실과 가톨릭출판사 편집실은 마당을 7m쯤 걸으면 오고가는 거리이니 거의 한 건물 안에서 지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떤 날 일과가 끝나는 시간쯤에 김 추기경은 가톨릭출판사 사장실로 와서 나를 부른다. 가 뵈면 반소매 차림이다. 그해 부활절 메시지를 썼는데 한번 읽어보고 고칠 데가 있으면 지적해달라는 것이다.

    물처럼 흘러오고 흘러가는

    나는 그 원고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읽어 보는데 고칠 만한 데가 거의 없었다. 다음날 회사에 나와서 주교관으로 건너가 그대로 돌려드렸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회사 안에서 근무하는 셈이고 전문적인 문필인이니까 세상에서는 김 추기경의 글이나 강론 원고 작성에 내가 많이 협력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순탄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강론 원고나 글을 손수 집필했다.

    다만 격무로 인해 도무지 시간이 없을 경우에만 나를 불렀다. 가서 만나 뵈면, 어느 언론재단 기관지에서 ‘언론자유의 사명’에 대해 원고 청탁이 왔는데 시간이 없어 쓰기가 어렵다고 했다. 내가 대필을 해 줄 수 있으면 청탁을 받아들일 것이고 쓸 수 없다고 하면 청탁에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는 우리 사회에서 언론자유가 봉쇄되어 있었으니 이 주제를 살려 김 추기경 명의로 글을 발표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대필을 하겠다고 했다. 가톨릭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나는 가톨릭교회의 역대 교황 회칙과 바티칸의 사목교서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이 문헌들은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 논의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현대 세계 최선의 지혜이며 현실 문제들에 대응하는 진정한 해결 지침들이다.

    언론에 관한 지침인 ‘일치와 발전’을 보더라도 쉬운 표현으로 적절하고 심오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이 생각할 자유에 알고 알릴 권리가 따른다. 교회는 바깥세상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 시대의 징후를 아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이 말씀하는 방법이다.”

    이 외에 더 많은 원리가 있다.

    내가 원고를 써서 드린 후 어느 날 추기경 비서실 여직원이 흰 편지봉투를 하나 내게 가져왔다. 언론재단에서 원고료가 왔다는 것이다. 나는 추기경님 명의로 된 원고였으니 내가 받을 수 없다고 해 돌려보냈다. 즉시 여비서가 다시 돌아왔다. 내가 원고료를 받지 않는다고 추기경님이 역정을 내신다며 놓고 간다 해 할 수 없이 나는 그 원고료를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돈에 대해서는 아무 감각이 없는 것 같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나는 김 추기경이 받거나 또는 어디에 제공하는 돈의 심부름을 중간에서 한 일이 있다.

    김 추기경과 동성학교 동창인 한 사회 원로가 추기경님을 모시고 가족을 위한 생 미사(산 사람을 위한 축복 기원)를 드리고 싶은데 건강이 안 좋아 거동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러니 미사 예물(돈)을 추기경님께 전해드리고 기도를 부탁드려 달라고 했다. 현찰 100만원이 든 두툼한 봉투를 가져다 드리니 김 추기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돈을 받았다.

    여러 해 후 구상 시인이 별세한 빈소에 김 추기경이 문상을 하고 돌아가며 내게 흰 봉투를 하나 건넸다. 봉투에는 아무 글씨도 씌어 있지 않았지만 조의금을 접수시켜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받아가지고 접수 데스크로 가서 세어보니 현찰 100만원이었다. 나는 봉투 겉에 ‘근조,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써서 접수시켰다. 그에게는 돈이 그냥 물처럼 흘러가고 흘러오고 하며 고여서 남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이어서 한 시인이 문상을 마치고 응접실에 들어와 함께 술을 한잔 들 때 내가 김 추기경의 조의금 내는 자세에 대해 여담으로 들려주었다. 그는 “그런 돈은 내게 맡기셔야 잘 떼어먹을 텐데” 하고 농담을 했다. 그렇게 마음이 담담한 김수환 추기경에게 어울리지 않게 시국의 격동하는 정세는 끊이지 않고 밀어닥쳤다.

    추기경이 나서야 했던 사건

    1970년대에 온갖 커다란 시국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우선 1971년 ‘성탄절 자정 미사 강론’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였다.

    위수령이 발동되는 시국 상황에서 언론이 극도로 통제되어 있는 가운데 국민 대중에게 생중계 방송 중에 민주화 촉구 의사를 발표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명동성당의 자정 미사 강론을 이용한 것은 김수환 추기경만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에서 이렇게 따졌다.

    “이른바 국가보위법은 국회의 동의 없이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발동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헌정 질서에 어긋나는 이 법의 제정은 국민의 양심적 발언을 막으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었던 이 이의 제기에 국민은 좌절에서 깨어나 다시 민주화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김 추기경의 시국 발언은 계속되었다. 1972년 8 ·5 시국성명에서 김 추기경은 “7· 4 남북 공동성명이 남 ·북 정권의 기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념과 제도를 초월해 하나의 민족으로 만나자는 선언을 꼭 실천에 옮겨야 한다” 고 촉구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남북 당국의 기만으로 끝났다.

    내가 겪은 ‘인간 김수환’

    대학교 동창들과 함께한 김수환 추기경. 왼쪽 끝이 김수환 추기경, 오른쪽 끝이 지학순 주교.

    어려운 시절, 추기경이 나서야 했던 사건은 셀 수 없이 많았다. 1974년 개헌청원 서명, 민청학련 사건과 지학순 주교의 투옥사건, 인혁당 공개재판 촉구, 1976년의 명동성당 3·1절 구국기도회 사건을 거쳐 1980년의 광주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문제의 해결과 민주화 추진 운동에서 김 추기경은 대열의 선두 또는 복판에 서 있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이러한 모든 일은 김수환 추기경이 정치활동에 취미가 있어서 간여한 것이 아니었다. 양심선언 사건으로 투옥된 지학순 주교 석방을 건의하느라고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할 때 김 추기경은 말했다.

    “사회정의 운동은 정치 쪽에서 잘해서 국민을 편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니까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간에 나는 가톨릭출판사 근무 외에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홍보이사도 맡으면서, 교회의 민주화운동 대열에 동참해 김 추기경과 연대하고 있었다.

    신원 보증

    그러던 중 시련이 또 찾아왔다. 1980년 여름에 나는 계엄포고령을 위반했다 하여 구속되고 서대문교도소 미결감에 투옥되었다. 계엄 포고령 위반이라니 마치 내가 꽤 과격한 행동이라도 저지른 것 같다. 그 혐의의 내용은 이러하다.

    첫째로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경주집’이라는 추어탕 집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회의가 열린 일이 있는데 거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회의에서는 아무것도 결정한 일이 없었다.

    둘째로 ‘지식인 선언’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결혼식장에서 소설가 이호철씨가 내미는 백지에 내가 무심히 서명한 일이 있었다. 당시 육군소장 전두환이 본부장으로 있던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후 나는 그 ‘지식인 선언’의 내용을 처음 보았다. 최규하 내각 과도기 단축, 학원 자율화, 언론자유 등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뭐가 나쁘냐”고 내가 반문하자 수사관은 알겠다고 하더니 바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내가 구속영장 대기과정에서 종로서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김말룡 가톨릭 노동상담소장을 통해 내 영치금이라고 금일봉을 종로경찰서장에게 보냈다. 이날 신경림·조태일 시인과 내가 3층의 한 방으로 옮겨졌다. 나는 김 추기경으로부터 하사받은 돈을 가지고 이날 밤에 복도의 간수를 설득했다. 비밀리에 소주 두 병을 사다가 셋이서 파티를 열었다.

    영장이 집행된 뒤에도 김 추기경은 나의 석방을 당국에 요구해 나와 신경림 시인이 함께 서대문교도소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알게 된 일인데 당시에 김 추기경이 가톨릭교회 쪽의 오태순 ·장덕필 신부, 아피 여성 수도자 1인, 평신자 구중서, 가톨릭학생회원 7명이 부당하게 시국사범으로 구속되어 있으니 석방해줄 것을 당국에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나는 뒤늦게 대학원 박사과정 시험에 합격해 있었는데, 일찍 8월 말경에 석방되지 못했으면 학위과정 입학이 취소될 뻔했다.

    그 뒤 내가 대학의 전임 교수로 전직할 때에도 내 신원조회가 문제되자 김 추기경은 직접 신원 보증서를 쓰기도 했다.

    “개인의 일에 어떻게 추기경님이 나서십니까. 저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하고 만류했지만 김수환 추기경은 “공자님도 밥은 먹어야 했다”고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가톨릭의대 신입생 선발에서 신체장애 학생 3명이 불합격되자 심사 교수들에게 간곡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김 추기경은 “약자를 더 사랑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생각해 재심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 장애 학생들은 결국 교수들의 재심을 통해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추기경의 손길을 기다리는 크고 작은 세상일들이 있었다. 피로할지라도 그는 그런 일들을 피하지 않았다.

    긴 조문 행렬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1987년 6·10 민주항쟁을 마무리한 것이다. 반독재 시위 학생 300여 명이 명동성당 구내에서 엿새 동안 농성을 한 사건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을 엄호하고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다.

    경찰의 진입을 막았고, 학생들에게는 돌과 화염병을 손에서 내려놓도록 했다. 그 결과 비폭력 항쟁의 명예로운 승리가 이루어졌고 이 대세가 6 ·29 선언을 통한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여기까지가 역사상 김수환 추기경의 업적이다. 그 다음의 일들은 뒷세대의 사명이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한 이라도 늙어서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유한한 존재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인의 역할이나 영향에 관계없이 당대의 중심 세대는 모든 일에서 책임을 지고 감당해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물며 지난 시대 20여 년에 걸쳐 엄혹한 군사독재의 벽을 무너뜨리는 어려운 일에 앞장을 서고 정신과 행동으로 큰 위상을 지녔던 이에 대해 소홀히 폄하하는 오류를 뒷세대가 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 인간성의 결함을 드러내는 모습이며, 그러한 이들은 자기네의 당대에서 역사를 역으로 후퇴시키게 된다.

    근래 이른바 노무현 정부 시대에 염증을 느낀 국민이 선거를 통해 집권정당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또 다른 혼란과 실망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국민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듣고 역사상 유례가 드문 긴 조문 행렬을 이루었다. 존경과 그리움이 대중의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정당한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자유와 책임의식에 바탕을 둔 도덕적인 힘에 의한 사회를 부지런히 형성해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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