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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특별함 ③

애플 CEO 스티브 잡스

위기, 그리고 기회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애플 CEO 스티브 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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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CEO 스티브 잡스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 내빈으로 참석한 스티브 잡스.

출생과 입양, 대학 중퇴

잡스는 1955년생으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러나 빌 게이츠의 부모가 변호사와 대학 이사라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데 비해 스티브의 환경은 딴판이었다. 원래 스티브를 입양하기로 했던 변호사 부부가 막판에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스티브는 해안경비대원 출신인 폴 잡스와 클라라 부부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폴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스티브의 생모는 무척 화를 냈다. 입양을 성사시키기 위해 폴과 클라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스티브를 대학 교육까지 시키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스티브의 친부는 시리아인이다. 친부 압둘파타 잔달리는 훗날 시리아에서 정치학과 교수가 됐다. 스티브의 친부모는 대학원을 마친 뒤 결혼했으나 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이들의 딸(스티브의 여동생) 모나 심슨은 소설가가 됐다. 스티브는 성공한 후에 친모인 조안 쉬벨과 여동생 모나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친모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에게 부모는 이미 세상을 뜬 폴과 클라라 잡스뿐이었다. 폴과 클라라 부부는 툭하면 집안의 전자제품을 망가뜨리는 스티브를 전혀 말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부수고 맞추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스티브는 고교 시절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친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렇지 않아도 반항적이고 집요한 스티브의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자신이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확실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부모에 대한 공허함과 슬픔을 잊기 위해 스티브는 컴퓨터를 파고들었다.

‘취미로 컴퓨터를 조립하는’ 천재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 것도 이 때쯤이었다. 워즈니악이 잡스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스티브’는 곧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워즈니악 역시 대학 홈페이지를 해킹하다 콜로라도대에서 퇴학당한 괴짜 중의 괴짜였다. 훗날 스티브는 워즈니악을 설득해 자신의 집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하게 된다.



캘리포니아 쿠페르티노에서 성장한 스티브는 꼭 시애틀의 리드 대학교(Reed College)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스티브는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자퇴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스티브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학교 등록금은 굉장히 비쌌고, 그 때문에 부모님은 평생 모은 저축 대부분을 써야 할 형편이었다. 굳이 그같이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학교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자신이 잡스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스티브는 20대의 전반을 히피 생활로 보냈다. 게임제작업체에 취직해서 돈을 모아 인도 여행을 떠나는가 하면, 마약에 손을 댄 적도 있었다. 그는 인도와 히말라야 일대를 돌아다니다 옴에 걸리기도 하고, 마른 개울바닥에서 모래구덩이를 파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스티브는 내면에서 들끓는 열정과 공허함, 친부모에 대한 상실감을 메우고 싶었을 것이다.

인도를 떠돌던 스티브는 삭발한 머리에 노란색 법복을 입고, 맨발에 샌들을 신은 차림새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은 스티브의 나머지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스티브는 불교도이자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돼 있었다. 억만장자임에도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살고 늘 검은 티셔츠와 리바이스501 청바지, 맨발에 캔버스 운동화를 고집하는 그의 절제된 생활은 이 같은 젊은 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간결하고 금욕적인 삶의 방식은 그의 생활뿐만 아니라 아이맥과 아이팟 등 디자인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5년 가을, 워즈니악이 컬러 화면을 구동할 수 있는 회로기판을 만들어 스티브에게 보여주었다. 회로기판을 본 순간,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 팔면 장사가 되겠다는 직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는 워즈니악을 꼬드겨 1976년 자신의 집 창고에서 컴퓨터 회사 ‘애플’을 창업했다. 그즈음 스티브는 오리건 주의 사과농장에서 선(禪) 애호가들과 자주 참선수양을 했는데, 이 때문에 회사 이름이 자연스럽게 ‘애플’이 됐다. 그러나 회사 이름 때문에 스티브는 자신이 광적으로 좋아하는 비틀스의 ‘애플 레코드’와 오랫동안 상표 분쟁을 벌여야만 했다.

아무튼 스티브는 이렇게 해서 젊은 시절의 방황을 접었다. 입양, 대학 중퇴, 열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집요한 성격, 어디로 보나 스티브는 비뚤어지기 쉬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선불교와 동양사상, 그리고 컴퓨터에 의해 스티브는 첫 번째로 찾아온 인생의 위기를 벗어났다.

회사가 설립되고 워즈니악이 개인용 컴퓨터 ‘애플I’과 ‘애플II’를 만들어내자, 스티브는 놀라운 마케팅 능력과 시장을 읽어내는 혜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애플I과 애플II의 개량 버전들이 계속 출시되며 ‘개인용 컴퓨터’, 즉 PC의 시대가 열렸다. 1980년 12월, 창업 4년 만에 애플은 증시에 상장되었고, 상장 하루 만에 주가는 32% 상승했다. 4년 전까지 맨발에 샌들을 신고 다니던 히피 청년 스티브는 나이 스물다섯에 2억5000만달러 이상을 보유한 억만장자가 됐다.

애플을 잃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애플은 10년 만에 직원 두 명인 회사에서 종업원 4000명에 20억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애플은 최고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다, 나는 막 서른이 됐고, 그리고 해고당했다.” (2005.8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

첫 번째의 위기가 개인적인 문제였다면, 두 번째 위기는 좀 더 심각하고도 복잡했다. 애플은 스티브를 이사회 결정을 통해 축출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티브는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누구보다 새로운 비전을 일찍 알아차리고, 놀라운 마케팅 능력을 갖고 있지만 스티브는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CEO였다. ‘포천’ 표현대로라면 그는 ‘벤츠를 거리낌 없이 장애인 주차지역에 주차하는’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인데다 타협을 모르는 경영 스타일을 구사하는 잡스는 신제품 개발의 하나하나를 다 챙기며 직원들을 가혹하게 독촉했다. 사내에선 점점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2년 스티브가 ‘타임’ 신년호 표지모델로 실렸다. 불과 스물 여섯 살의 청년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러나 ‘타임’ 지를 펴본 스티브는 경악했다. 기사 도처에 가시가 돋친 말들이 박혀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직원은 스티브에 대해 “프랑스 왕이 됐으면 잘할 사람이다”라고 빈정거렸고, 죽마고우이자 공동창업자인 워즈니악마저 “스티브는 회로판 하나, 코드 하나도 직접 만들지 않았다”고 그를 비난했다. 기사 속 스티브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교묘하게 조종해서 떼돈을 벌어 챙기는 사기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스티브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스티브는 고집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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