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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시네마 테라피 ⑤

가족, 상처의 근원이지만 희망의 근원

  • 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가족, 상처의 근원이지만 희망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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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상처의 근원이지만            희망의 근원

‘파리-텍사스’

이재용 감독의 ‘정사’는 가정의 행복에 대해 도발적으로 되묻는다. 이 도발적 질문은 행복한 가정의 대명사였던 서현이 다른 이도 아닌 동생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서현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섹스를 나눴다는 점에서 남편을 배신하고 그녀가 이루고 있는 가정에 균열을 불러온다. 한편 자신의 여동생이 사랑하고 또 결혼을 약속한 대상과 욕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혈육으로 이뤄진 가족에 또 한 번 흠집을 낸다. 행복한 가정의 표본과도 같았던 서현이 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혼돈의 핵심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여동생은 언니 서현이 선물한 화석을 들고 와 서현의 집 한켠에 자리 잡은 어항을 향해 던져버린다. 화석으로 상징되던 서현의 침전된 욕망과 예쁘고 깔끔하지만 숨 막혔던 서현의 가정은 어항이라는 상징을 통해 무너진다. 화석에 어항이 깨지듯 서현이 유지해왔던 완벽한 가정의 허상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동생에게 불온한 관계를 들키고 남편에게 불륜을 고백한 서현, 그렇다면 그녀의 그 후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아주 먼 곳으로의 이동이라는 추상적 답을 제시한다. 이혼한 서현, 동생과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 가버린 언니는 비행기를 타고 이름도 낯선 지구본의 반대쪽을 향해 떠난다. 사실, 목적지는 그녀가 살던 이곳, 한국과 그녀의 가정에서 멀다는 것 그 자체를 충족시키는 것이지 구체적 지명으로서의 장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재용 감독은 완벽해 보이는 중산층 중년 여성의 일탈을 통해 우리가 이른바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행복한 가정이라는 균형감각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인지 보여준다. 가정의 행복은 부부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의 욕망이 개입될 때 부부의 가정은 두 남녀의 오월동주(吳越同舟)로 뒤바뀐다. 부부는 가정의 근본적 단위이기도 하지만 영원히 결합할 수 없는 이질적 욕망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파리-텍사스’는 그런 점에서 행복의 정점을 나누었음에도 그 하강과 파멸을 함께할 수 없었던 두 남녀를 헤어진 부부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행복했던 두 남녀, 부부가 서로에게서 도망쳐 영원한 타인이 되어야만 할 때, 그들이 낳은 사랑의 산물이었던 아이가 전리품처럼 남아 사랑의 흔적을 환기하는 순간, 가정은 고통의 기록으로 다가온다. 사막을 헤매는 트레비스의 모습에서 시작된 영화는 그가 아들을 되찾고 마침내 아내를 찾아 나서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트레비스는 퍼즐조각처럼 흩어진 가족을 재구성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아내 제인이 꼬박꼬박 돈을 보내는 은행을 찾아 휴스턴으로 간 트레비스, 그런데 트레비스는 그곳에서 핍쇼(peep show)로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아내와 마주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반투명 유리 건너에 앉아 있는 그녀, 제인은 이미 그의 아내가 아니다. 트레비스는 전화기 너머 아내, 제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트레비스가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지독한 사랑과 집착의 이야기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트레비스는 그녀를 냉장고에 묶어 때리고 감금하기까지 한다. 잘못된 사랑과 소유욕은 그녀를 영영 다른 곳으로 떠나게 만든다.

과거 속에만 있는 행복

영화 ‘파리-텍사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트레비스와 제인 부부가 신혼시절 바닷가에서 찍은 캠코더 영상물을 보는 장면이다. 트레비스는 자신의 기억 속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영상으로 보며 후회와 그리움의 눈물을 쏟아낸다. 영상물 속에 남겨진 그들의 가정은 ‘행복’의 사전적 정의처럼 보일 정도다. 그토록 행복했던 그들의 가정이 지금, 이 순간 유리벽과 전화기 너머에 있는 타인의 관계로 바뀌어 있다. 추억 속에서 행복은 더 완전해지고, 늘 같은 순간만을 반복재생해서 보여주는 영상물 속에 행복은 박제돼 있다. 남편에게 신물 난 아내가 결혼식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아이의 울음에 지치고 아내의 무관심에 상처 받은 남편이 신혼여행 사진을 보며 위안을 받는 우리의 일상처럼 트레비스의 행복도 언제나 ‘과거’ 속에 있다. 그에게 행복은 ‘과거 완료형’이다. 추억이 된 사진의 프레임 속에서 행복은 그렇게 완전해진다. 서로 지나치게 사랑하는 남녀가 다정한 부부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완전한 연인과 행복한 부부가 꼭 동의어일 수만은 없는 셈이다.



부부가 서로 멀어질 때 그렇다면 그들 가운데의 아이, 아이에게 불화는 무엇으로 기억될까? 공지영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는 가족으로부터 치명적 상처를 입은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사형수 정윤수는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기억을 지니고 있다. 한편 정윤수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문유정은 지나치게 가식적이며 허영에 찬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정윤수의 어머니는 “나도 좀 살자”라며 아이를 거리로 내몰고, 문유정의 어머니는 강간당한 딸을 “수치스러운 것”이라며 비난한다. 어머니, 모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두 영혼은 사형수와 상습 자살미수자로 성장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사회부적응자로 성장한 두 명의 인물을 통해 불온한 가정이 불안한 성장의 원인임을 역설한다.

트라우마가 된 가족

흉포한 연쇄살인범이나 범죄자를 다룬 심리극은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성장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의 관계가 잘못 정립됐을 때 나타나는 무의식의 고장과 곤란함이 성격 결함과 대사회적 문제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식으로 말이다. 많은 영화가 개인이 겪는 고통의 원인으로 가족사를 제시한다. 물론 영화들이 골칫덩어리 가족을 대하는 방식은 가지각색이다.

불온한 가족사와 불행한 개인사는 선후관계는 있지만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불행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스펙트럼은 인과관계의 획일성을 벗어나 있다. 오히려 어떤 작품들은 불온한 가정을 통해 성숙한 개인이 탄생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간혹 가족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태도로 관조적이고 성숙한 시선을 제공하기도 한다. 조니 뎁이 주연을 맡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지체장애아를 연기했던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바로 후자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길버트 그레이프의 가족은 말 그대로 골칫덩어리 집안이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몸무게가 230㎏이 될 때까지 먹는 것에만 열중한다. 엄마는 이제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도, 문밖을 나갈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른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동생 어니는 정신연령이 7세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아이처럼 착하고 순수하지만 틈만 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형 길버트는 걸핏하면 동생을 구조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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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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