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일본 최고의 노인요양병원’ 세운 재일한국인 강인수

“어머니 치마저고리 떠올리며 한국인 긍지 잊지 않아”

  • 이민호│통일일보 서울지사장 doithu@chol.com │

    입력2009-06-03 17: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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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최고의 노인요양병원’ 세운 재일한국인 강인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05년 7월 어느 일요일. 강인수(65)는 아침나절부터 푹푹 찌는 날씨에 속옷까지 흠뻑 젖은 채로 야치요(八千代)병원 일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노인을 태운 휠체어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저 실례합니다만 이 병원의 오너(owner)입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당신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제가 고백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노인과는 진작 알던 사이다. 강인수가 야치요에서 수년째 치료와 요양을 받는 환자를 모를 리 만무했다. 휠체어를 밀던 이는 노인의 장남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를 붙잡았던 것일까.



    “어머니를 야치요로 모시기 전에 히로시마 인근 요양원 8곳을 돌아봤는데 야치요의 시설이 가장 좋았습니다. 가족회의로 결정하던 날 저는 반대했습니다. ‘오너가 한국사람이라 불안하다’고 했죠. 다른 형제들이 일단 믿어보고 좋지 않으면 즉시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해서 마지못해 야치요로 오게 됐습니다. 벌써 3년이나 지난 일이군요. 어머니가 여기 생활을 그렇게 편안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태 한 번도 불평하신 적이 없어요. 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한국인을 차별하고 있었던 것이 아직까지도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이사장님을 뵙고 꼭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가족처럼 보살펴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일본인 환자 가족에게 감사인사를 받는 순간 강인수의 머릿속에는 야치요를 세울 때 고생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가혹하고 까다로운 일본사회였던가. 그에게 병원 설립은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다가가면 갈수록 온갖 구실이 따라붙었다. 어렵사리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조건이 생겨났다.

    지성이면 감천한다

    그가 병원 설립 허가 신청을 내자 당장 일본의사협회부터 반대하고 나섰다. 약사단체도 반대했다. 이에 가세해 일부 주민은 ‘한국인의 병원 설립을 돕지 마라’는 전단까지 뿌리고 다녔다. 관청의 불가 방침은 확고했다. 서류를 완비해 찾아가도 뚜렷한 이유 없이 ‘허가 대상이 아니다’라고 앵무새 소리를 할 따름이었다. 다시금 관청에 설립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일본 정부의 보조금은 한푼도 받지 않겠다’는 조건까지 내걸었지만, 돌아온 답은 또다시 불가였다.

    강인수는 1988년 5월 히로시마에 병원 개설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3년이 넘는 기간을 인가 받는 일에만 매달렸다.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허송세월이었다. 그 사이 사업으로 모아놓은 자금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내는 군소리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도왔다. 그때 아내는 남편 몰래 처녀 시절부터 애지중지 모아왔던 다기(茶器)를 내다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아내도 같은 재일동포로서 누구보다 그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강인수는 궁지에 몰릴수록 ‘반드시 병원을 세우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막무가내로 불가를 고집하는 일본사회의 부조리에 무릎 꿇기 싫었다. 일본에서 가장 훌륭한 노인병원을 세울 자신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길이 옳다’고 확신하면서도 무기력하게 물러서야 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변의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병원을 세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약한 현실이었지만 어떻게든 스스로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의 모든 이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았지만, 저는 제 생각에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지치고 일본사회가 넘을 수 없는 ‘철의 장막’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일본도 민주주의 국가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주국가는 국민이 주인이고 그래서 국회의원도 표로 뽑잖아요. ‘마을주민들이 야치요병원 설립에 찬성표를 준다면?’ 갑자기 희망이 보이는 겁니다.”

    강인수는 병원 건립예정지 인근 주민들을 설득하기로 작정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주민들을 붙들고 자신이 세울 병원의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야치요마을에 가족 이상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병원의 이상향을 세우겠습니다. 몸이 아픈 환자와 환자 가족을 병원의 주인공으로 모시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러기를 수십 차례. 동감하는 주민이 늘기 시작했다. 무작정 반대 진영에 섰던 주민들 중에도 강인수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둘 생겨났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던가. 마을주민 1만여 명 가운데 76%가 병원 설립에 지지 서명을 했다. 주민들은 ‘우리 마을에 그런 병원이 세워진다면 환영한다’고 호응했던 것이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다시 구청에 주민들의 서명을 첨부한 설립신청서를 제출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설립 허가가 나왔다. 그동안 꿈쩍도 않던 완강함은 온데 간데없어졌고, 담당 공무원이 규정에 없는 서비스까지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오해를 푼 주민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야치요 건립에 발 벗고 나섰다. 모두가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孤立無援)의 형국이던 강인수의 처지가 하루아침에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처럼 역전됐다. 그것도 적들을 모두 아군으로 돌려놨으니 말이다.

    ‘일본 최고의 노인요양병원’ 세운 재일한국인 강인수
    탄광 노동자 아들로 태어난 조센진

    병원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92년 5월 마침내 히로시마현 아키다카다시(安藝高田)시에 그가 그토록 간절히 염원해온 노인복지병원 야치요가 세워졌다. 강인수는 병원의 캐치프레이즈로 ‘정성을 다해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持て成しの心·모테나시노 코코로)’을 내걸었다. 이 문구 속에 몸은 물론이거니와 마음까지 세심하게 보살피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자신과의 다짐, 그리고 서명으로 그를 지지해준 히로시마 주민들과의 약속을 담았던 것이다.

    강인수는 1944년 양친이 강제징용을 당해 끌려온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의 탄광 막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일본에서도 경관이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우베이지만 일제 때 그곳은 한국인에게 ‘공포의 땅’이었다. 수많은 동포의 목숨을 앗아간 생지옥이었다. 일본인들은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의 좁은 갱도로 한국인들을 밀어 넣고 탄을 캐라고 강요했다. 당장 갱도가 무너져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베 외곽의 해저탄광 조세이(長生)에서는 갱 속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200여 명의 한국인 청년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던 한국인 징용자들의 비참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아버지는 광복이 1년만 늦었더라도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개처럼 부려먹고선 급료는커녕 말 한마디 좋게 한 적이 없다고 원통해 하셨죠.”

    어린 시절의 강인수에게는 아버지의 분노가 그저 푸념으로만 느껴졌다.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학교에서는 일본인인 양 살았다. 그는 지금까지 초등학교 3학년 가을운동회 날을 잊을 수 없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교정에 나타난 어머니를 보자 그 자리에서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어머니가 친구와 선생님들 앞에서 ‘내 아들 강인수는 한국인’이라고 만천하에 광고한 꼴이었다. 머릿속은 친구들이 ‘조센진(朝鮮人)’이라 놀리는 모습으로 가득 찼다.

    그는 학창시절 내내 ‘일본 속의 이방인’이란 관념을 떨쳐내지 못했다. 마침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1959년 12월 재일동포 북송선이 떴다. 그 이듬해 시집간 큰누이도 금의환향(錦衣還鄕)의 부푼 꿈을 안고 북송선을 탔다. ‘차별 없는 공평한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긴 그도 하굣길에 구청에 들러 귀국신청서를 썼다.

    그로부터 1주일쯤 지났을까. 집에 오니 초저녁부터 아버지가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있었다. 아버지는 강인수를 보자마자 뛰쳐나와 그의 양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하나 있는 아들놈까지 떠나면 우리는 무슨 낙으로 살란 말이냐?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은 떨어져선 안 되는 법”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렇게 심하게 성을 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알고 보니 그날 구청 직원이 아버지에게 미성년자 강인수의 보호자로서 ‘승낙 사인’을 받으러 다녀간 참이었다. 아버지의 강경한 반대로 귀국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그는 훗날 두고두고 아버지의 애정에 감사하면서 살았다.

    북송선 탄 누나와 눈물의 해후

    1959년부터 북송된 재일동포의 수는 9만3000여 명. 동포들은 그저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당시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산다는 사실이 익히 알려져 있어 일본에서 차별받느니 돌아가서 잘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일본의 여론도 남한보다 북한에 우호적이던 시절이었다. 서점에서는 공산주의 관련 책들이 인기를 끌고 매스컴은 김일성 정권이 주장하는 ‘지상낙원’ 선전물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재일동포 북송은 일·북 적십자사 간 ‘인도적 조치’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일본이 북한과 야합해 자국 내 한국인들을 내쫓으려는 공작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념에 따라 북한으로 간 동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강인수는 북송된 누이와 만난 적이 있다. 야치요병원을 건립하던 1992년 5월 히로시마일본상공회의소 방북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갔다. 다른 이들은 해산물이나 농산물 수입과 같은 비즈니스가 목적이었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누이와 만나는 일 뿐. 돌아오기 이틀 전 드디어 상봉의 기회가 찾아왔다.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던 중 장내 방송으로 “히로시마에서 온 강인수씨 누님을 만나는 시간이 왔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헤어진 지 32년 만에 만난 누이와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는 평양 고려호텔 근방의 일식집에서 누이와 함께 한 식사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누이는 스시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물만 들이켰다. “많이 들라”는 그에게 “일본을 떠나온 이래 스시를 맛보는 건 처음이구나. 먹으려니 목이 메일 것 같아 삼킬 수가 없구나”라고 귀엣말을 하는 것이다.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누이를 보며 어찌나 가슴이 저리던지…. 그 뒤 누이와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만남은 그게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강인수의 민족성은 집안에서 길러졌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재일동포 가정이었다. 온 가족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물을 주우러 다니고, 밤이면 ‘야미주(밀주)’를 빚어 팔았다. 재일동포들은 마땅한 직업을 가질 수 없으니 생계를 꾸리려면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부모님의 고집으로 집에서만큼은 경상도 사투리를 전용어로 썼다. 그의 아버지는 경남 진주, 어머니는 경남 통영이 고향이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마친 강인수가 취업을 하자 조용히 그를 불러냈다.

    “인수야 운동회 일로 어미 원망 많이 했지? 네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아 그날 일부러 치마저고리를 입고 학교에 갔단다.”

    어머니의 고백을 듣자 10년 전과는 또 다른 부끄러움에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그토록 지독하게 차별받고 궁핍했던 시절이었지만 아들의 민족성만은 지키고 싶었던 어머니는 스스로 굴욕을 달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양손을 붙들고 굵은 눈물을 쏟았다.

    심각한 독거노인 문제

    그의 꿈은 의사였다. 일본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의 전기를 읽고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오지의 빈민들을 찾아다니며 병을 고쳐주던 노구치처럼 불쌍하고 힘든 이들을 돕고 싶었다. 의사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집념은 여전했다. 강인수는 병원 이사장으로서 의료인의 길에 다가서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노인복지병원을 세운 계기가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병환을 오래 앓다 숨졌는데, 병간호를 하던 친구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곁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더욱이 노인문제는 세계 최고령 국가인 일본에서는 진작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독거노인의 사체(死體)가 수개월이 지난 뒤 발견되는 게 흔한 뉴스다.

    강인수는 자신과 주민들에게 약속한 대로 야치요병원을 ‘가장 훌륭한 노인복지시설’로 만들어냈다. 풍광부터가 압권이다. 히로시마 시내에서 북쪽으로 40분 거리로 구불구불 동해로 흘러가는 강과 완만한 산들이 병원 일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마을을 두르며 강이 흐르는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강줄기가 병원을 휘감아 돌고 있다. 봄이 되면 산 능선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 한국의 산골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할 정도다.

    야치요는 병원이지만 병원같지 않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특급호텔에 와 있는 듯하다. 특유의 소독약 냄새도 나지 않고, 바닥은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지만 전혀 미끄럽지 않다. 일류 주방장이 만드는 요리에 수영장과 온천장까지 구비돼 있으니 호텔보다 오히려 낫다. 동행한 임일규 히로시마한국교육원장으로부터 “하루에 청소만 7번 한다”는 귀띔을 받고 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고 야치요가 이런 외형적인 시설로만 일본 최고 노인복지병원으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보듬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찾은 그날 오후에는 음악 공연이 있는 날로, 노인들이 아코디언 연주자의 반주에 맞춰 동요와 옛 가요를 따라 부르며 흥이 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10여 년 전 강인수가 실어증에 걸린 환자가 동요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음악 공연 서비스는 직접 병실을 찾아다니는 맨투맨으로도 행해진다. 음악을 치료 보조 수단으로 도입한 이래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노래를 듣고 전신마비였던 환자가 거동하는가 하면, 치매에 걸려 가족마저 못 알아보던 환자가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다 기억을 되찾기도 했다. 이 밖에 야치요에서는 매일 오후 마술쇼와 포크댄스, 노래경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찔레꽃’ 목 놓아 불러

    강인수는 누구하고도 격의 없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친화적인 사람이다. 주변을 배회하는 환자를 보면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다. 환자들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모습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웃고 있어도 진심이 담긴 행동이 아니라면 남이 가짜라는 걸 아는 법입니다. 언제나 가슴속에서 우러난 정성을 다하려고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환자와 직원들은 제 피붙이 같은 분들이에요.”

    이 같은 강인수의 진정성에 처음에는 가시눈으로 그를 흘겨봤던 일본인 직원들의 인식도 180도 달라졌다고 한다. 모두 서로 가족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됐다. 야치요에는 의사와 간호사, 간병인 등 1000여 명의 직원이 있는 데 마주치는 이들마다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물었다. 이사장인 강인수가 정성을 다해 사람들을 대하는 걸 지켜보면서 어쩌면 직원들이 따뜻한 애정의 손길로 환자를 돌보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살겠다’는 그의 신조는 중국 땅에도 손길이 닿아 있다. 2006년부터 지린(吉林)성 옌볜에 탈북 고아 보육시설인 신성관(新星館)을 건립해 20여 명의 아이를 뒷바라지하고 있다. 꽃제비가 돼 구걸로 연명하는 동족의 어린아이들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한창 뛰어놀고 공부할 시기에 보호자도 없이 외국 땅에서 거리를 헤매는 건 너무 가혹합니다. 부모 잃은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는 얼마 전 탈북어린이들로부터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대우를 받았다’ ‘죽으려 했는데 희망을 찾았다’는 편지를 받고서 신성관을 확대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강인수는 노래 부르고 춤추기 좋아하는 영락없는 한국사람이다. 흥에 겨워 한껏 기분을 내며 애창곡인 ‘찔레꽃’을 목 놓아 부르는 사람이다. 그의 취미는 병원 13층에 있는 접객실에서 KBS ‘가요무대’ 녹화테이프를 보면서 병풍처럼 나 있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다.

    “보름날 밤 여기 앉아서 창 밖을 보면 둥그런 달이 산을 넘어갑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찔레꽃을 부르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뛰어놀던 고향으로 간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져요.”

    지난 2월 강인수는 경남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날의 10분 남짓한 연설을 위해 한 달 넘게 우리말 연습을 하고 왔다고 했다. 그러나 차오르는 감격에 목이 메는 바람에 그날 그의 우리말 실력은 평소보다 못했다. 녹음기를 틀어 연설 내용을 재구성해보니 그가 목표로 하는 인생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었다.

    “흰머리가 늘수록 ‘뿌리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열 살 때 운동회 날 학교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타나 한국인임을 보여준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는 까닭은요. 그때의 선명한 기억이 제 삶의 가치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야치요를 친절과 배려로 가득한 완벽한 병원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것도 바로 그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발점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일본인들로부터 한국인이 하는 병원에 가면 ‘인생의 피날레’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겁니다. 그게 제 프라이드를 지키는 길이고 부모님과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효(孝)라고 생각합니다.”

    야치요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펼치는 아코디언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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