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호

주류 역사학에 시비 거는 비주류의 긴장감

  • 하세봉│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ha29sb@hhu.ac.kr│

    입력2009-07-01 16: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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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류 역사학에 시비 거는 비주류의 긴장감

    ‘역사학의 세기: 20세기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 도면회 윤해동 엮음/ 휴머니스트/ 555쪽/ 2만8000원

    동아시아 삼국이 국민국가를 만드는데 처음부터 근대역사학이 동원된 사실을 들어 편자는 20세기를 ‘역사학의 세기’로 명명한다. 20세기가 역사학의 세기라면 그 역사학이 어떻게 생산되었고 그 논리는 무엇인가를 ‘역사학의 세기: 20세기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은 집중적으로 묻는다. 역사학의 생산과정과 논리를 묻기 이전에 필요한 것은 오늘날 역사학이 사회 속에 서 있는 위치는 어디인가 하는 물음이다.

    직업적인 역사가들은 대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데 인색하거나 기피한다. “도대체 지금 누가 사학사를 필요로 할까?” 이 책에서 도베 히데아키의 글은 이 질문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이어서 “역사연구와 사회의 상호작용이나, 연구자 공동체 자체의 변질이나 분해에 대한 분석 없이는 타자를 회복시키고 타자를 향해 자기를 제시하며, 그것을 통해 자기의 학문 산출행위가 처해 있는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 책의 편찬 주체인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이하 역사포럼)’은 설립 취지를 “미래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과거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담긴 성찰적 동아시아 역사상의 구축”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취지를 뒤바꾸어 보면, 오늘날 한일의 역사학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결여하고, 과거에 대한 자기반성이 없다는 진단, 한일의 역사학은 여기에 위치해 있다고 규정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헤게모니와 동원의 장치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역사포럼은 여러 차례 워크숍을 열고 그 성과를 이미 두 권의 책으로 냈는데, 당시 한국사회에 국사 해체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와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국사가 헤게모니와 동원의 장치였다는 점을 폭로한 역사포럼의 치열한 자기반성은 역사학계를 넘어서서 사회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이렇듯 국사의 절대성에 균열을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면 다음으로는 ‘성찰적 동아시아 역사상의 구축’으로 걸음을 옮길 만하다. 그러나 ‘동아시아 역사상의 구축’으로 가지 않고 근대역사학의 분석으로 돌아서서 애초의 취지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 한국학계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풍미함에도 “한국 측이 동아시아를 정면으로 다룰 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편자의 고백은 한국학계가 이후 짊어져야 할 숙제의 확인이기도 하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적 역사상’ 그리고 ‘지적 실천으로서의 동아시아’ 등으로 표출된 역사포럼의 의지는 연구행위와 사회현실 사이에 고민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학자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계승은 ‘자기반성’까지일 뿐 ‘자기반성’ 이후 공유할 수 있는 방향과 인식은 수렴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역사포럼 참가자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으로 서로 대치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장차 한국에서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다시금 정치적 갈등의 소재가 될 가능성이 있고, 그럴 경우 역사포럼 참가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러한 논란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역사포럼의 행보는 진보주의와 실증주의를 모두 비판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작업이 지난함을 보여주지만,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정치적 조소와 야유와 낙인찍기로 논의 자체를 말살시키는 언어폭력에서 벗어날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다.

    제도 속의 역사

    이 책은 역사학의 생산과 논리를 제도와 인물 두 가지를 교직시켜 접근하고 있다. 1945년 이전의 역사학에 관해서는 제도에 치중하고 이후의 역사학은 학자 개인의 서술에 무게 중심이 두어져 있다. 랑케 사학이 일본에 아카데미즘 실증주의 사학을 성립시키는 근간이 되었다는 통설과 달리, 고야마 사토시는 랑케 사학이 가진 세계사의 이념이 ‘도덕적 에네르기’라는 개념으로 윤색되어 총력전 체제를 이념적으로 지지하는 기둥의 하나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이 분석은 랑케 사학의 수용과정을 일본의 대학 제도 내부의 사제 관계를 끈으로 살피고 있는데, 그것은 시라토리 구라키치를 예로 들어 일본 동양사학을 성립시킨 지적 기반을 대학이나 학회 연구소 등과 관련해 따져나가는 미쓰이 다카시의 방식이나, 경성제국대학 사학과의 편제 속에서 식민지 조선의 동양사학의 기획을 살핀 박광현의 방식과도 유사하다. 이러한 분석은 대학이라는 제도가 없으면 근대 역사학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근대역사학의 태생적 기반을 보여준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역사교과서와 통사의 서술을 거쳐 성립된 한국의 근대역사학은 그 반대였다. 일본과 청의 영향을 받으면서 창출된 한국의 근대역사학은 그러나 일제강점으로 인해 제도 속의 역사학으로 자리 잡지 못했고, 그 서술도 왕조정통론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고 도면회는 언급한다. 재일조선인의 상황과 일본인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광복 후 십수년이 지나서야 재일조선인의 역사가 연구되기 시작했다는 도노무라 마사루의 글은 재일조선인의 역사 연구도 역사학이 제도 속에 자리 잡지 못할 때 어떤 운명을 맞는지를 보여준다.

    1945년 이후의 역사학에 대한 분석은 학자에 치중되어 있다. 자유와 평등을 원리로 해서 한국사학의 과학성을 정립하고자 한 이기백의 역사학에 관해 김기봉은 실증사학의 한계, 역사에서 공간적 요소의 배제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에 관해, 윤해동은 민족주의와 발전론 그리고 서구 근대를 전범으로 삼는 근대 지상의 논리를 내장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국가와 대립하는 외양과는 달리 민족을 매개로 협력관계를 유지해, 이제는 사회변화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육영수는, 한국의 입장에서 서양근대사를 해명하고자 한 민석홍의 서양사가 비판적 지식인에서 근대화론의 기수로 전변한 궤적을 짚었다. 한국을 대표했던 역사학자들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현재 역사학계의 주역들이 전수받아 공유하는 논리라는 점에서 안이하게 적힌 글들이 아니다. 주류의 역사학에 시비를 거는 비주류의 긴장감이 묻어난다.

    제도는 어디로?

    그런데 이들 대표적인 역사학자에 대한 비평에는 역사학의 존재와 대학 등 제도와의 관계가 중요함에도 1945년 이전의 근대역사학 분석에 비해 제도의 문제가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다. 광복 이후 한국의 대학과 사학과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이들은 어떤 위상에 있었고 그들의 지적 계보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분단사학을 주장한 강만길 등을 포함해 당대의 대표적인 역사학자들에게 대학이라는 제도는 계몽적 지식인의 역할을 부여하는 강단이었다.

    당시의 역사학자들은 대중을 계몽하는 지식의 발신자였다. 전근대에는 대중은 관료나 지식인의 교화를 받아야 할 대상일 뿐 대변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는 대중이 스스로를 대변할 존재를 필요로 했고, 이 때문에 역사학자가 역사적 지식의 생산을 독점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그 독점은 대학이라는 제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그들 대표적 지식인은 서울의 명문대학 교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일본의 역사학자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 이후 어느 사이엔가 사회는 진리를 찾는 대변자로서 역사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역사학은 제도와 시장에서 소비되는 물품으로 전락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대표적인 역사학자가 중앙학계의 학자라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학계를 검토한 글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일국(一國)의 역사학의 논리를 중앙학계의 역사학자를 통해 접근하고 있다. 물론 영향력이 가장 강했고 수준 높은 글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사실상 근대역사학은 제도 바깥이나 지방에서 형성될 수 없었고, 그곳은 근대역사학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곳에 불과했다. 바로 이 점은 성립기 근대역사학이 갖는 본질적인 측면의 하나일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방에서는 지방사 연구 정도가 가능할 뿐 더욱이 외국사 연구는 사실상 어려웠다. 일본도 사정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터이다.

    한일 학계의 거리와 공명

    이 책에서는 1945년 이전의 경우 일본의 근대역사학은 통치와 침략의 도구로 파악하고, 한국의 근대역사학은 일본의 근대역사학에 대한 모방과 저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1945년 이후 일본의 역사학에서 인접국은 어떻게 배치되었는가. 이성시는 니시지마의 동아시아론을 분석해 그의 동아시아는 서양을 의식한 일본인의 논리였지, 동아시아에 거주하는 사람들과는 무관한 논리였다고 짚었다. 1960년대 니시지마의 동아시아론은 동아시아를 망각한 동아시아론이었다는 것이다.

    1945년 이전 식민지 조선의 근대역사학은 제국 일본의 근대역사학이 빚어낸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1960,70년대 일본의 역사학에서 타자가 망각되고 1인칭의 동아시아뿐이었다고 하지만, 1945년 이후의 한일 역사학의 공명이 역사포럼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는 점은 새삼스럽다. 1980년대 초반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일본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또한 시차를 두면서 역사학계 내부의 진영 배치나 사회 속의 위상이 다르면서도 유사하게 전개되었다는 점도 역사포럼을 탄생시킨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역사포럼이 의미 있는 이유의 하나는 제도 바깥에서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인문한국(HK)지원사업, 일본에서는 COE 같은 대규모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는데, 이러한 프로젝트가 역사포럼 같은 자생적 논의와 열린 만남의 자리를 남겨두지 못하고 제도 내로 흡수돼버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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