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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마지막회

김수환 추기경

우리 시대 ‘어른’의 성(聖)과 속(俗) 순례길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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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 신민 아님, 소감 없음’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8일(음력)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보현은 1868년 무진박해 때 가톨릭 신자로 순교했고, 아버지 김영석은 박해를 피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가 가톨릭 신자인 서중하를 만나 김수환을 낳았다. 5남3녀의 막내였다. 김수환은 5세 때 경북 군위로 옮겨 살았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그에게 어머니는 삶의 전부였다.

어릴 적 그의 꿈은 장사꾼이 되어 25세에 장가를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김수환과 세 살 터울의 형 동환을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신부가 된 후에도 추기경은 황혼 무렵 초가집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마음속 고향처럼 그리워했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김수환은 1933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에 진학,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5년제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원주와 전주교구장을 지낸 지학순 주교와 전재덕 주교가 그의 입학동기다. 동성상업학교 시절 김수환은 꾀병을 부려 학교를 그만두려고도 했으나, “신부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니다”는 꾸중만 들었다. ‘하느님’이 그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김수환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일본천황의 칙유(勅諭)를 들은 황국신민의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에 대해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므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뺨을 맞기도 했다. 당시 교장이 제2공화국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였다. 김수환은 퇴학을 각오했는데 오히려 도쿄의 가톨릭계 대학인 조치(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조치대학 시절 김수환은 독일 출신의 게페르트 신부를 만났다. 게페르트 신부는 김수환의 가슴속에 있는 ‘뜨거운 불덩어리’, 곧 일제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인해 ‘화상’을 입겠다며 그를 신부의 길로 이끌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게페르트 신부님, 그분은 잊지 못할 나의 ‘영적 스승’”이라고 회상했다. 게페르트 신부는 6·25전쟁 직후이던 1960년 서강대학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이 됐다.

김수환 추기경

1968년 김수환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에서 사제들이 순명서약을 하고 있다.

모든 이의 ‘밥’

1944년 졸업을 앞둔 김수환은 학병으로 징집돼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이듬해 일본의 패전으로 조치대학에 복학했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에 올라 서울 혜화동 성신대학(가톨릭대학 신학부)으로 돌아왔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입장과 관련, 김수환은 한 선배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명답으로 오랫동안 기억했다. “좌익과 우익의 중간에 하느님당(黨)이 있는데 나는 그 당원이다. 하느님당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우는 게 아니라 하늘로 곧장 올라간다.”

경북 안동성당(현 목성동 주교좌 본당) 주임신부로 첫 사목활동이 시작됐다. 본당 사목에 한창 뜨거운 불이 붙던 1955년, 그는 김천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직을 겸했다. 이제 초로에 접어든 1회 졸업생들과는 얼마 전까지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 옛 추억을 나누곤 했다. 졸업생 중 두 명의 제자는 수녀회 총원장수녀를 지내기도 했다. 김 추기경에게는 그 시절이 꿈처럼 아름다웠다. 이 무렵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끈 어머니가 그의 무릎에 기대어 세상을 떠났다.

1956년 김 추기경은 독일 뮌스터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에서 회프너 교수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유학시절 신부 김수환의 교회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거대한 바람을 몰고 왔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사목적 목표를 내세운 것이다. 가톨릭으로서는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1963년 독일 체류 7년 만에 귀국한 그는 이듬해 가톨릭시보사(현재 가톨릭신문) 사장을 맡았다. ‘세상을 위한 교회’를 향한 발길도 잦아졌다. 김 신부는 이 시절 교도소를 자주 찾았고, 행려병자와 장애인 수용시설 등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신앙인의 삶이란 예수처럼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 모든 이의 ‘밥’이 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1966년 3월 김수환 신부는 부산교구에서 분리돼 새로 세워진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이 됐다.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해 5월 김수환 교구장은 ‘여러분과 또한 모든 이를 위하여’를 사목 표어로 내세워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着座式)을 치렀다. 이 사목 표어는 김 추기경과 평생을 함께했다.

민주화운동의 진지

마산교구장 시절 그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를 겸임했다. 청년노동자를 위한 선교 단체인 이 조직과 관련된 사건이 1967년 강화도 삼도직물 노동조합에서 발생했다. 회사 사장이 천주교 신자이던 노동자를 해고하고 강화본당 주임신부를 용공분자로 몰아 협박했다. 그는 임시 주교회의에서 주교단이 서명한 공동성명을 발표,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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