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호

메이저 신문은 서거의 ‘화풀이 대상’ 되어 과도하게 시달리고 있다

미디어 비평

  • 김동률│KDI 연구위원·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박사(매체경영학) yule21@kdi.re.kr│

    입력2009-07-07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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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저 신문은 서거의 ‘화풀이 대상’ 되어 과도하게  시달리고 있다

    6월8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언론소비자주권캠페인 회원들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메이저 신문 광고 기업 불매운동 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의사, 변호사가 진료나 변론을 탈법적으로 하면 폐업을 당한다. 그뿐인가, 그 정도가 심하면 자격이 박탈되고 인신구속에 이른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이치에서 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것 없다.

    기자는 몰래카메라를 사용하거나 사법기관을 사칭하는 등 비합법적인 취재로 사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는 벌을 받는 시늉은 잠시뿐 화려한 찬사와 함께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영예의 퓰리처상이 품에 안긴다. 이것이 저널리즘의 세계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미국 미주리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펴낸 교재(News Reporting and Writing)에 등장하는 얘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둘러싸고 언론책임론이 뜨겁다. 언론책임론의 요지는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에는 그와 관련한 검찰 수사를 보도해온 언론에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주로 노 전 대통령 재임시절부터 그와 대립각을 세워온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메이저 신문을 겨냥하고 있다.

    본말 전도된 ‘언론책임론’

    일부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은 이번 노 전 대통령 서거의 주된 책임은 검찰에 있다고 답했다(복수응답). 검찰(56%)에 이어 언론도 절반에 가까운 49%를 차지해 언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경향신문, 한겨레, MBC 등 일부 신문과 공중파 방송은 “비판 대신 증오…죽은 권력 물어뜯기로 지면을 도배했다”고 메이저 신문을 공격했다. 이에 대해 메이저 신문은 이들 언론을 향해 “서거 전 비판모드, 서거 후 미화모드”로 표변했다고 역공을 폈다.



    논리적 이성적 비판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언론책임론이 한쪽이 쓰면 다른 쪽이 맞받아치기를 되풀이하는 살기 넘치는 진흙탕 싸움이 되고 있다. 양쪽 진영 공히 “이번 싸움에서 밀리면 우리 회사는 끝장”이라는 인식 아래 엄청난 지면을 할애하고 지나간 보도까지 들추어내면서 상대편을 공격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관련 언론 보도태도는 언론윤리 측면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례로 학계는 물론 일반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논쟁 자체가 이처럼 해묵은 감정싸움으로 커지면서 본말이 전도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 필자가 심판관으로 나설 뜻은 없다. 그 밑바닥에는 노 전 대통령과 특정 언론사 간의 뿌리깊은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에 더욱 그러하다. 이번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현 정권 및 살아있는 권력에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 군림하는 정치 검찰에 있다. 그럼에도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이란 이름 아래 메이저 신문이 상대적으로 화풀이 대상으로 과도하게 시달리고 있다고 본다. 이 자리에서 미디어 윤리, 수사단계 보도관행 등 노 전 대통령 서거의 언론책임론이 타당한지 규명해보고자 한다.

    캐내도 욕먹고, 안 캐내도 욕먹고

    윤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다. 윤리가 제대로 지켜져야만 우리 공동체가 안정되고 풍요로워짐은 물론이다. 다원화한 현대사회에서 기자들은 취재 과정에서 여러 윤리적 문제에 부딪힌다. 문제는 다른 일반 직업군과는 달리 언론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치규범인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구현하도록 요구받는 데 있다.

    언론이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윤리기준을 무시한다면 국민은 그러한 언론 보도내용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신뢰받지 못하는 언론은 점차 도태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윤리적인 면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사회악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할 경우에도 언론은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다. 이 대목에서 기자의 취재윤리가 흔들리고 언론인은 외부로부터 욕을 먹게 돼 있다.

    탤런트 고(故) 장자연씨 접대 리스트 보도나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는 전직 대통령의 호소를 보더라도 기자들의 취재 행태는 논란의 대상이고 그 중심에는 윤리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언론윤리’란 그 자체가 서로 어울리지 않은 두 개의 단어, 즉 ‘언론’과 ‘윤리’를 억지로 조합한 옥시모론(Oxymoron·모순어법)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지켜도 욕을 먹고 지키지 않아도 욕을 한 바가지 먹는 것이 취재윤리라는 것이다. 속속들이 캐내면 선정주의 옐로 저널리즘, 저급한 저널리즘으로 매도당한다. 점잖게 대응하면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한 직무유기로 욕을 먹는다. 언론사 내부에서 취재기자는 데스크로부터 “무능하다” “기자 체질이 아니다”라는 질책을 받는다.

    오늘날 통용되는 언론윤리는 크게 두 가지다. 공리주의 원칙(Utilitarian Principle)과 의무의 원칙(Duty-Based Principle)이 그것이다. 이중 공리주의 원칙은 취재활동의 윤리적 기준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다. 공리주의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과 존 스튜어트 밀(J.S. Mill)에 의해 제기됐다. 어떠한 행위의 윤리적 옳고 그름은 그 행위의 결과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에 기여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좋은 결과가 나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The End Justify The Means).

    메이저 신문은 서거의 ‘화풀이 대상’ 되어 과도하게  시달리고 있다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가운데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취재진이 분주하게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많은 언론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놓는 ‘국민의 알 권리 충족(People′s Right to Know)’이라는 명제의 밑바닥에는 공리주의 원칙이 있다. 취재기자가 권력기관을 사칭하거나 개인의 사생활 침해, 명예훼손 피소까지 감수하면서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찾아내 공중에게 폭로하는 행위가 정당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도 바로 공리주의 원칙이다. 언론이 노 전 대통령 비리의혹 검찰수사를 보도하는 것도 이 원칙에 기대고 있다.

    ‘노무현 수사’ 보도의 공리주의

    공리주의 원칙에 따르면 권력자의 비밀스러운 행위가 폭로됨으로써 당사자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지 모르지만 국민의 알 권리는 충족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부정부패는 감소하고 정의가 실현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구현된다. 따라서 개인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이 같은 보도는 큰 어려움 없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국민의 알 권리를 핑계로 검증되지 않은 폭로를 일방적으로 일삼는 무책임한 언론은 공리주의 원칙의 시각에서조차 비판에 직면한다. 이는 ‘먹레이킹 저널리즘(muckraking journalism)’이다. ‘거름더미(muck)’를 갈퀴로 ‘파헤친다(raking)’는 의미로, 선정주의 저널리즘보다 한술 더 뜨는 무책임한 폭로 저널리즘을 지칭한다.

    ‘먹레이킹 저널리즘’은 ‘하이에나 저널리즘’으로 곧잘 이어진다. ‘하이에나 저널리즘’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선 순하디순한 양처럼 보도하고 죽은 권력에 대해서는 하이에나처럼 날뛰는 언론의 행태를 비유한 말이다. 노 전 대통령 수사 관련 보도에서 보듯 검찰이 슬쩍 흘린 정보를 확인된 사실처럼 보도하거나 공직자, 연예인 등 유명인의 신변잡기만 보도하는 언론이 일정부분 이에 해당한다. 품위 있고 책임 있는 언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라는 명제로도 정당화되기 힘들다.

    공리주의 원칙은 완벽한 윤리기준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라고 하지만 국민이 진심으로 알고 싶어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최대 다수’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기준이 무엇인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덧붙여 “소수의 행복은 늘 다수의 행복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도 쉽사리 풀리지 않는 숙제다.

    몇 년 전 황혼의 부부가 88억원을 암 연구기금으로 써달라며 서울대병원에 기부했다. 노부부는 자신의 신분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많은 언론이 이 사연을 비중 있게 다뤘다. 그런데 모 신문은 이 노부부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다. 독자의 알 권리에 부응했다고 하나 보도윤리 측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독자의 단순한 호기심과 독자의 알 권리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알 권리는 국가나 정부 등 공공기관이나 정치인 등 공인(public figure)에 대해 주장할 수 있다. 지위가 높을수록 공적인 영역이 커지고 지위가 낮을수록 사적 영역이 커진다. 이는 지위가 높을수록 사생활도 공적활동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위직의 사생활에 대한 보도는 법적 면책사유(legal defense)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에 대해서는 다르다. 우리에게는 거액을 기부한 노부부의 신원과 사생활을 알 권리는 없다.

    공리주의 시각에 의한 취재 관행에 자연인이 대항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프라이버시 권리’다. 프라이버시권은 간섭을 받지 않고 사적 행위와 관계를 즐길 수 있는 자율권(autonomy), 개인적 공간을 가질 수 있는 은둔(seclusion)의 권리, 그리고 정보의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정보적 프라이버시(informational privacy) 권리 등 세 가지로 대별된다. 우리 헌법은 17조에서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며 사생활 보장을 절대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단순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권리(the right to be let alone)에서 나아가 언론의 횡포로부터 개인의 권익을 보호받을 수 있는 비밀 보장권(the right to privacy)으로 발전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러한 개념에 기초해 사생활을 보장해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고위직의 사생활 보호 요구는 공동체적 공리주의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외면받기 십상이다.

    칸트는 노무현을 옹호한다

    공리주의 원칙의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원칙이 ‘의무의 원칙(Categorical Imperative)’이다. 이는 칸트(Immanuel Kant)의 도덕철학에 기초한 윤리관이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절대적인 윤리적 기준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면 남을 속이는 행위는 비윤리적이므로 인간은 그러한 행위를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는 공리주의처럼 행위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따지지 않는다. 따라서 공리주의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의무의 원칙에선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비윤리적인 행위가 되고 예외는 인정되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 사저 건너편 언덕에 진을 치고 밤낮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이 하는 취재행위는 정당한 절차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라는 공리주의적 주장은 칸트 앞에서는 공허한 언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인은 윤리적 절대성을 강조하는 의무의 원칙에 대해 융통성 없고 비현실적인, 한마디로 세상물정 모르는 주장이라며 애써 무시한다.

    특히 언론인은 의무의 원칙을 따를 경우 취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현실은 복잡하고 취재의 장벽은 날로 높아져가기 때문에 칸트적인 취재윤리의 절대적인 기준을 따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 중요한 도덕적 명분이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비윤리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또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질극을 취재하는 방송이 인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잠시 거짓 보도를 할 때 그러한 보도행위를 비판하기 어렵다. TV 뉴스에 동원되는 몰래카메라 취재기법은 취재대상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점에서 비윤리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시청자는 몰래카메라가 들추어낸 부정과 불법 사례를 보며 쾌감을 느낀다. 아무도 그 수단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다.

    공인이 가지는 프라이버시 공간은 일반인이 지닌 공간에 비해 억울하리만큼 좁고도 작다. 유명인사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 큰 공인의 경우, 어디서 밥 먹고 사람 만나는 것 같은 시시콜콜한 사생활도 공적 영역으로 보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그러니만큼 저 세상으로 떠난 노 전 대통령은 이 점에서는 너무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유서를 통해 전직 대통령은 공인임을 알렸다. 이승을 떠나는 자로서의 초탈한 면모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언론이 公人 들볶는 건 당연

    언론의 보도 관행도 국민의 질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언론은 “수사 단계부터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한 속보경쟁에 매달렸다”는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비판자들은 “노 전 대통령 관련 보도가 본질에 대한 접근보다는 흥미 위주로 흘러갔다”고 날을 세운다. 노 전 대통령에게 비교적인 호의적인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물론 전체 언론이 검찰의 일방적인 발표를 마치 사실처럼 중계하는 식의 보도를 일삼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취재기자 처지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다. 검찰에서 나온 얘기는 쓸 수밖에 없는 한국적 상황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게 일선 기자들의 볼멘소리다. 부모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사에 어렵게 취업해 검찰 출입기자가 된 자신의 자녀가 검찰청 쓰레기장을 뒤져 기삿거리(찢어진 수사 관련 서류 조각 등)를 찾는 모습을 본다면 놀랄 것이다. 검찰 관련 취재는 매우 중요하고 동시에 매우 어렵다. 뉴스 가치가 크고 분초를 다투는 검찰 사건기사를 두고 실제로 그 같은 완벽한 확인이 가능하냐는 것이 변명의 요체다. 속보경쟁은 언론의 숙명이고 이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언론은 없다.

    물론 선진국의 경우 피의자의 인권을 무겁게 여기고 기소 단계 이전에는 무죄 추정 원칙에 기반해 신중하게 보도하는 추세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피의자의 자백에만 의존한 경찰의 수사 발표는 살인혐의라고 해도 신문에 게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급하게 특종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사건보도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권장의 수준이지 강제는 아니라는 의미다. 이 또한 살인적인 경쟁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 언론과는 거리가 먼 그들만의 얘기다. 서울에서만 10개 이상의 종합 일간지가 경쟁하는 우리와 비교하기란 애시당초 무리다.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피의자 인권이 점차 강화되는 추세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에서도 그렇다. 교통사고 사망자 명단은 인권보호 차원에서 싣지 않는다.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일도 없다. 특히 영국의 경우 “피의자의 자백이 있었다”는 사실 보도나 “엄벌해야 한다”는 식의 사설도 ‘법정모독죄’에 걸린다. 피의자가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를 언론의 자유보다 우위에 놓는 것이다.

    검찰 기사는 두 얼굴의 괴물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전과 서거 후 달라진 언론의 보도 태도는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조롱의 대상’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보도 태도가 표변했다는 것이다. 비판론자는 “서거 전날까지 노 전 대통령을 정치적 파산자로 몰아붙이고 가족, 주변에까지 인간적 모멸을 주던 언론이 하루아침에 ‘노비어천가’로 돌아선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논란도 언론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전 보도는 언론의 비판 고발 기능, 즉 감시견 기능(watch dog)에 충실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대다수 국민은 언론의 이 같은 고발 보도를 보면서 대리만족의 효과를 느꼈다.

    다만 사회고발 보도에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노 전 대통령 관련 기사를 거듭 보게 되면 노 전 대통령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조차 그에게 냉소적인 마음으로 바뀐다. 고위직의 부정부패가 드러나 처벌을 받게 될 경우 사람들은 통쾌하고 후련하다가도 결국 마음이 불편하고 무거워지는 것이다.

    특히 방송은 현실보다 더 생생한 리얼리티, 이른바 ‘슈퍼 리얼리티(super reality)’를 제공한다. 부엌 냉장고에 있는 사과보다 TV 화면 속 미인이 한입 베어 먹는 사과가 훨씬 더 맛있어 보이는 것과 같다. 노 전 대통령 관련 보도와 같은 과도한 감시견식 보도는 전체 국민의 사회에 대한 냉소를 키우게 된다. 개혁을 주창한 노 전 대통령과 386인사도 부패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이는 “우리는 어쩔 수 없다” “한국사회는 희망이 없다”와 같은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일종의 ‘미디어 부정주의 효과(media malaise effect)’다.

    이처럼 검찰 관련 언론보도는 양면을 칼날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시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학적 시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나쁜 뉴스가 곧 좋은 뉴스(bad news is good news)”인 언론 속성으로 인해 검찰 관련 기사는 여전히 독자의 관심 대상임은 분명하다. 검찰 기사는 두 얼굴을 가진 괴물이고 독자는 그 괴물을 새겨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언론이 그를 추모하는 보도 태도를 보인 것은 우리 국민에게 풍부한 연민의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정부패 의혹 사건에 대한 대중의 태도는 당사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해 미움에서 연민으로 바뀌었다. 많은 외신이 지적하듯 우리 국민은 근본적으로 감성적(sentimental)이다 못해 감정적(emotional)이기까지 하다. 언론은 국민의 이 같은 보편적 정서를 외면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 서거 전후 극명하게 달라진 언론의 보도 태도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특성의 자연스러운 반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언론의 잘못인 양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가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볼 수도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비록 노 전 대통령이 “Don′t be sorry. Don′t blame anyone(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유서에서 당부했지만 “Koreans are blaming themselves(대다수 한국인이 자책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직 대통령이 바위산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상상 이상의 충격을 줬고 후폭풍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언론사 간 싸움이 정권과 검찰수사의 문제점 규명이라는 이번 사태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드세지고 있어 안타깝다.

    이번 사태는 언론에 몇 가지 교훈을 던져줬다. 언론은 각종 의혹에 대해 최대한 사실여부를 확인하려 노력해야 하고 검찰의 공식 발표조차 철저하게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 뒤 보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론은 형사소송법에 명시돼 있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더욱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 기소나 법원 판결 이전에 수사 대상자의 혐의가 마치 확정된 사실인 양 보도하는 관행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수사 대상자의 반론도 균형 있게 반영해야 함은 물론이다. 수사의 본류와는 무관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사나 인격적으로 매도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기사는 지양해야 한다.

    기자들, 위축되지 마라

    그러나 이번 사태로 언론 본연의 기능이 위축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부정부패를 파헤치는 심층 보도는 언론의 기본 사명임을 언론인은 명심해야 한다. 비록 전직 대통령을 낭떠러지로 몰아넣은 상황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계기로 표현의 자유를 옥죄려는, 감정적인 책임론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이다.

    덧붙여 언론사 간의 해묵은 감정싸움으로 인해 언론 자유 자체가 흔들려서도 안 된다. 언론 자유는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전제다. 언론 자유를 제한하려는 책임론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 엄격한 기준에서 논의돼야 한다.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언론은 다른 영역보다 우월한 지위(preferred position)에 놓여 있다. 언론 자유란 모든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자유이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봉하마을에서 기자들은 한 달여 ‘뻗치기’ 취재를 했다. 컵라면으로 삼시 세끼를 때우고 빗물을 모아 빨래하고 씻다보니 피부병에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문명시대에 그들이 그런 고생을 했을까. 일선 취재기자의 직업정신만큼은 국민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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