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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②

일제 고등경찰 피살 사건 미스터리

의문의 권총 두 발이 응징한 사이가 시치로의 전력

  •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presskr@empal.com│

일제 고등경찰 피살 사건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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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고등경찰 피살 사건 미스터리

사이가가 암살당한 원남동 지도. 원남동 우체국 건너편에서 살해되었다. 사이가의 집이 있던 원남동 124번지는 시마호텔 뒤쪽이었다.

독립운동가·사상범 수사 20년

암살당한 1945년 11월, 사이가는 47세였다. 역산하면 1898년생이다. 그에 관해서는 일본 시코쿠의 가가와(香川)현 출생이라는 사실 외에 학력이나 성장 배경 같은 기본 정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의 성 사이가는 한자로 ‘齊賀(제하)’로 알려져 있지만, 수사기록 원본에 쓰인 자필 서명은 ‘齋賀(재하)’로 되어 있다. 비슷한 글자이고 일본 발음으로는 다같이 ‘사이가’이기 때문에 ‘제하’로 통용됐던 것 같다.

사이가의 경력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총독부가 매년 발행한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과 조선경찰신문사가 발행한 ‘조선경찰직원록’을 참고했다. 앞의 자료는 계급이 경부보 이상인 간부급 경찰관만 등재되기 때문에 그 이하 순사의 이름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1910년부터 1943년까지 매 연도의 자료가 남아 있다. ‘경찰직원록’에는 전국의 하급 경찰관까지 모두 수록되어 있지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지 않고 빠진 연도가 많다.

1945년 11월에 사이가가 암살당했을 때 ‘경성일보’는 20년에 걸쳐 허다(幾多)한 우리 우국 선각을 잔혹하게 고문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경찰에 몸을 담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사이가의 이름은 1932년 12월에 발행된 ‘경찰직원록’에 처음 등장한다.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기록을 종합하면 사이가는 1932년 무렵 동대문경찰서에 근무하면서 경성농업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독서회사건(1932년 4월)을 수사했고, 그해 7월에는 전차 철폐반대 주민대회의 집회를 단속했으며, 1934년 2월 경기도 양평의 적색농민조합사건 관련자를 검거하기 위해 양평경찰서에 지원을 나가 관련자를 체포했다. 이밖에도 더 많은 수사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1934년 3월2일자 총독부 관보(2141호)에는 도경부보(道警部補) 시험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다. 같은 해 8월에는 동대문경찰서 소속이면서 평안북도 정주경찰서에 가서 ‘의열단’ 사건을 수사했다. 신문조서에 그의 직책은 ‘경성 동대문경찰서 사법경찰관 사무취급 경기도순사 齊賀七郞’으로 돼 있다.

사이가는 경부보로 승진해 1935년에 종로경찰서로 전근했다. 독립운동 관련 수사에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승진과 함께 고등계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종로경찰서 경찰서장은 경시(警視)였고, 경부(警部) 4명, 경부보(警部補)가 6명이었다. 경부보 6명 가운데는 유일하게 사이가가 훈(勳) 8등에 욱일장(旭日章)을 받은 신분이었다. 고등계 경찰로서 충성도가 높고, 독립운동가와 사상범을 다루는 능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받은 훈장이었을 것이다.

언론인 안재홍·이승복 수사

종로경찰서에서 사이가가 담당했던 주요 사건 가운데 안재홍(安在鴻)과 이승복(李昇馥)이 연루된 중국 군관학교 사건이 있었다. 1936년 5월 안재홍이 정태운(鄭泰運)이라는 청년을 중국 난징(南京)의 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중국에 있는 김두봉(金枓奉) 등에게 추천장을 써 주었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사이가는 안재홍을 비롯하여 10명이 넘는 연루자를 조사해 5명을 구속하고, 이승복 등 5명을 불구속으로 송치했다.

안재홍(1891~1965)은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논객이자 민족운동가로 이미 여러 차례 투옥된 경력이 있었다.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미군정 치하 민정장관에 선임되었고, ‘한성일보’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가 납북된 언론인이자 정치가다. 이승복(1895~1978)은 독립운동가이면서 언론인이었다. 일찍이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에 망명해 국권회복 운동을 벌이다가 일제에 체포 투옥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고, 일제 치하에 발행된 3개 민간신문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2개 신문사의 영업국장을 맡아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간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광복 후에는 ‘민주일보’ 부사장을 지냈다.

사이가는 경기도 경부보로 재직하면서 안재홍과 이승복 등 연루자들을 심문했는데, 이 때도 심한 고문을 가했을 것이다. 안재홍은 4회, 이승복은 3회에 걸쳐 심문한 기록이 남아 있다. 2개월여 수사를 벌인 끝에 7월16일 검찰에 송치해 이듬해 안재홍은 2년 징역형을 선고받도록 했다. 사이가가 작성해 검찰에 송치한 의견서 원문에는 피의자들의 행위를 독립운동과 관련시키기 위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연루시켜서 범죄를 증명하기 위해 치밀하게 수사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이 사건의 수사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5’(중국지역독립운동 재판기록 3: 2001년)에 일어 원문과 국한문 번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일제 고등경찰 피살 사건 미스터리

단파방송사건 수사기록에 남아 있는 사이가의 친필 서명. 홍익범을 검찰에 송치한 서류에 ‘齋賀七郞’으로 서명했다.

사이가는 안재홍을 ‘직업적 혁명 운동자’로 규정하고 그 ‘죄상’을 다각도로 분석하였다. 안재홍은 조선에서는 비합법적인 활동이 곤란하기 때문에 신문에 원고 투고, 팸플릿 발행, 혹은 강연·좌담회 등으로 민족주의를 선전선동함으로써 조선민족 독립의 필연성을 고취하여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자발적인 독립운동을 하도록 상시 집요하게 불온언동을 일삼는 악당이라고 결론지었다. 1936년 7월16일자로 사이가가 검찰에 보낸 의견서 가운데 안재홍에 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피의자 안재홍은 일한병합 당시부터 조선독립을 몽상하였고, 주의를 위해서는 일생을 희생으로 바치겠다는 것을 각오하여 실행운동을 계속하여온 자로서 조선민족주의자 간에는 절대 신용을 갖고 널리 내외주의자 사이에 알려져 있는 자로서 피의자 이승복과는 소화 3년경부터 친교관계를 갖고 있다.’

안재홍은 이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년 반쯤 복역하다가 보석으로 출옥했으나 2년형이 확정돼 다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승복에 대해서는 ‘항상 조선독립을 몽상하여온 자로서 1923년경부터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해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연구를 하였으며, 1927년 2월15일 민족 단일당을 표방하는 신간회가 창립되자 총무간사가 되었고, 1928년 9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기 위하여 탈퇴하였다’는 요지로 씌어있다.

사이가는 그 후로도 종로경찰서에 근무하는 동안 독립운동사건을 수사하거나 시국 관련사건을 단속 감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래 열거하는 몇 건의 자료는 사이가가 담당했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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