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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와인 ⑧

레르미타 vs 핑구스

전통품종 중심 블렌딩으로 승부수 이방인의 단일 토착품종 고집

  • 조정용│와인평론가 고려대 강사 cliffcho@hanmail.net│

레르미타 vs 핑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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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미타 vs 핑구스

레르미타 라벨

블렌딩의 안전성

프리오라토는 오늘날 스페인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 나오는 산지로 유명하다.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져있다. 로마시대에는 지금보다 휠씬 많은 인구가 모여 살았다. 그러니 포도밭과 양조장도 발달했을 게 틀림없다. 오래전 와인으로 유명했던 프리오라토는 오랜 세월 무명의 신세였지만 역사서적과 기술서적을 통달한 일단의 와인 양조가들에 의해 1970년대 들어 재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옛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프리오라토가 생산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데는 양조가 르네 바르비에르의 도움이 컸다. 그는 양조장 클로 모가도르를 세워 잊혔던 로마시대 와인 생산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를 따르는 젊은 양조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각기 양조장을 건설하면서 스페인에는 새로운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통 품종인 가르나차에 천착했다. 남프랑스에서 ‘그르나슈’로 불리는 이 검은 포도는 스페인의 대표 품종이다.

프리오라토는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남동쪽의 바다로 향하는 경사면을 제외하고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발 600m에 조성된 포도밭에는 가르나차와 카리녜나(남프랑스의 카리냥)가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아 잡초처럼 자랐다. 양조가들은 이런 포도와 국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을 함께 재배했다. 대부분 보르도에서 수학했던 이들은 단일 품종보다 여러 품종이 섞인 와인에 애착을 보였다.

블렌딩의 매력은 어느 한 가지 품종에 흠결이 있어도 다른 품종의 특성으로 덮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의 절묘한 배합을 몸소 체험한 이들은 가르나차의 장점을 살리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결함을 다른 품종으로 만회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시행착오는 보르도에서 견습을 하고 있던 한 젊은이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이름은 알바로 팔라시오스, 그가 레르미타를 탄생시킨다.



오늘날 스페인의 위력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위세가 그 옛날 대서양을 주름잡았던 무적함대에 근접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피카소, ‘클레이코트의 제왕’ 나달,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살인마를 연기해 오스카상을 거머쥔 하비에르 바르뎀, A매치 35게임 무패 기록을 달성한 스페인 국가대표 축구팀과 함께 예약자 명단이 6개월 이상 밀려있는데도 여전히 예약 전화가 빗발친다는 레스토랑 ‘엘 부이’만 봐도 그렇다.

와인 명산지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최고급 와인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와인의 맛은 품종, 지역의 다양성, 사람에 달려있다. 여기서 품종은 토착 품종을 가리킨다. 보르도의 카베르네 소비뇽, 부르고뉴의 피노 누와, 피에몬테의 네비올로, 토스카나의 산지오베제, 독일의 리슬링, 오스트리아의 그뤼너 벨트리너 모두 토착 품종이다. 스페인의 리베라 델 두에로에는 템프라니요가 있고, 프리오라토에는 가르나차가 있다.

두 번째 요소는 지역의 다양성이다. 와인 메뉴는 다양해야 질리지 않는 법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폭넓은 와인세계를 널리 인정받는 것도 이런 다양성의 결과다. 프랑스에 육박하는 면적의 국토에서 다양한 와인을 길어 올리는 스페인은 지역의 다양성에 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와인의 핵심은 사람이다. 이제부터 논의하는 두 사람이 현재 스페인에서 가장 촉망받는 양조가이며, 각기 스페인 최고 와인 중 하나를 빚어내고 있다.

레르미타를 만드는 사람은 알바로 팔라시오스(Alvaro Palacios)로 스페인 출신이다. 핑구스를 만드는 피터 시섹(Peter Sisseck)이 덴마크 출신인 점과 뚜렷이 구분된다. 프리오라토의 잠재력을 간파한 알바로는 1965년생으로 40대 기수다. 리오하에 있는 집안 양조장 팔라시오스 레몬도에 합류하지 않고, 자신의 양조장을 건설했다. 그는 보르도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한 후 샤토 페트뤼스와 샤토 트로타누아에서 견습했다. 이탈리아의 명품 와인 사시카이아가 샤토 라피트 로쉴드에서 포도나무를 받아 최고의 슈퍼 토스칸 와인이 된 것처럼, 레르미타는 페트뤼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농익은 포도의 생동감

청운의 꿈을 품은 그는 고향 대신 프리오라토에 자리 잡았다. 프리오라토에서 가르나차 품종이 번성하는 것을 목격하고, 페트뤼스의 메를로 같은 잠재력을 발견했다. 그리고 1993년에 첫 출시된 레르미타를 통해 페트뤼스와 호주 그랜지의 공통적인 장점을 표현하려 시도한다. 풍부한 향기, 균형 그리고 놀라운 숙성력이 그가 추구하는 목표다. 레르미타의 포도는 아주 가파른 등성이에서 재배되는 탓에 사람 손 외에는 별다른 수단이 없다. 비탈길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면 다음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는 매일 투지를 보이며 밭으로 나간다.

그는 소출을 극도로 줄여 농익은 포도로 키운다. 60년 이상 묵은 포도나무, 어떤 것은 100년 넘게 묵었다. 이런 나무는 소출이 많지 않다. 그러니 저수확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잠재력을 동원해 소출을 극대화하지 않고 오히려 잠재력을 줄이고 줄여서 농익은 포도알 획득에 몰두한다. 품종은 가르나차 외에 카리녜나와 카베르네 소비뇽이 조금 있다. 매년 3000병 정도 병입한다. 로마네 콩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양이다.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지만 애호가 한 사람이 한 달도 안 걸려 다 마셔버릴 만큼 소량이 들어온다.

레르미타는 와인 이름이자 밭 이름이다. 포도밭이 있는 산봉우리에 들어선 작은 교회를 보고 알바로가 붙인 이름으로, 불어의 ‘에르미타주(Hermitage)’와 가깝다. 실제로 남프랑스 론강 유역에는 에르미타주 마을이 있고, 그 마을 어떤 산 봉우리에는 교회가 있는데, 유명 양조장 폴 자볼레의 에르미타주 라 샤펠르가 거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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