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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사라지는 기능공들

이주 앞둔 ‘마찌꼬방’ 기능공들의 한숨 “한때는 제조업 강국의 토대, 아직은 떠나고 싶지 않다”

  • 김수영│자유기고가 futhark@hanmail.net│

[르포] 사라지는 기능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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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사라지는 기능공들

하왕십리 ‘마찌꼬방’거리를 한 상인이 지나가고 있다.

15~16년 전에 1500만원씩 주고 산 기계는 이제 수십만원짜리 고철덩어리가 되었다. 5대의 기계를 모두 팔고 마찌꼬방을 정리해도 그는 빚더미에 앉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지폐감식기 금형. ‘바다이야기’ 게임이 단속대상이 되면서 다 만들어놓은 금형값도 못 받았다. 이후 1년 동안 단 한 건의 일감도 없어서 한달에 80만원씩 벌써 8개월치 월세가 밀려 있다. 언제 차압이 들어올지 몰라 그는 답답해하고 있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난 시간, 벽 너머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옆집은 나무를 조각하는 집이다. 그러나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나무 조각은 단가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하루종일 깎아도 집세가 밀리는 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문을 잠가야 한다며 일어서더니 구석에서 엽총을 하나 꺼내갖고 왔다.

“이거 예전에 내가 금형 만들 때 쓴 겁니다. 샘플로 갖고 있는 거니까 경찰서에 총기신고하지 않은 거죠. 부도를 맞아 너무 힘들 때 돈 떼먹는 놈들 가만두지 않으려고 갖고 있었습니다.”

6월26일 금요일 오후 4시. 왕십리 3구역 대로 안쪽의 한 식당. 마찌꼬방 사장 10여 명이 삼겹살과 오징어를 구우며 왁자지껄하게 환송연을 벌이고 있었다. 식당 밖에는 검은색 대형 벤츠 한 대가 길을 꽉 막고 서 있었다. 환송연의 주인공은 이 골목에서 태어난 70줄의 사업가다. 그는 이 일대의 마찌꼬방을 비롯해서 건물을 여러 채 갖고 있는 덕분에 상당한 이주보상비를 받았다. 그가 고향을 떠나면서 그동안 함께 울고 웃었던 이웃들에게 한턱 내는 날이었다. 양복바지에 셔츠를 입은 그는 기름밥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한눈에 봐도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뒤 예닐곱 명이 남았다. 그중에는 마석의 공단에서 일을 하는 박 사장, 포천에서 주물공장을 하는 강 사장 등 외부로 떠났던 인사들도 끼여 있었다. 그날의 화제는 단연 이주보상비였다.



“이사를 가고 싶어도 못 가. 다른 데를 알아보고는 있는데 자리가 없어. 버틸 때까지 버텨볼 거야.”

3구역 대로변에서 한 블록 안쪽에 있는 일흥정밀, 신흥금속 같은 크고 작은 마찌꼬방 사장들의 고민은 월세였다. 현재 이들은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100만원을 내고 있다. 그런데 마찌꼬방들이 한꺼번에 이주하면서 때아닌 전세난이 일어난 것이다. 왕십리에서 갈 만한 곳은 성수동과 용두동, 조금 멀리 영등포구 문래동 일대와 서울 인근으로는 경기 부천과 시흥이 꼽힌다. 이들의 사정을 훤히 아는 집주인들은 기존의 세입자를 내보내고 세를 올려 왕십리에서 온 마찌꼬방을 받으려고 한다. 성수동과 용두동은 1년 새 월세가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왕십리와 비슷한 수준의 장소를 얻으려면 보증금 2000만원에 150만원은 내야 한다.

성동구청에선 송파에 새로 생긴 동남권 유통단지를 추천하지만 임대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 평범한 마찌꼬방 사장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곳은 애초 청계천 복원으로 이주해야 했던 마찌꼬방을 위해 특별분양됐지만, 임대료가 비싸 아무도 입주하지 않자 답답한 집주인들은 전매제한을 풀어달라고 농성 중이다.

송파 유통단지는 그림의 떡

“어떻게 된 게 일반 가정집이나 공장이나 이주비가 똑같아. 2000만~3000만원선밖에 안돼. 세금 못 낸 거 내고 월세 내고 나면 이사할 돈도 없어. 압류 풀고 나면 얼마나 남을지….”

이주비는 공장의 크기와 기계 대수 등을 감안해 책정된다. 20평 남짓한 공간에 7~8대의 기계를 갖춘 마찌꼬방의 경우 3300만원 정도가 나왔다. 이 정도면 제법 규모가 큰 마찌꼬방이다. 조만간 이사를 해야 하지만 갈 곳을 정한 곳은 많지 않아 보였다. 다만 용역회사에서 벽이나 전봇대에 붙여놓은 철거와 이사 스티커가 이주를 실감하게 한다. 한때 500여 업체가 가입해 있던 왕십리금속연합회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송연 자리는 끝이 났지만 뒤늦게 합석한 몇 사람 덕분에 술자리는 다시 불이 붙었다. 30년 넘게 판금을 하고 있는 송 사장은 근처 행당타운에 살고 있다. 그는 그래도 알뜰하게 재산을 모은 축에 속한다. 아파트는 한 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1년 전 8명의 직원을 데리고 마찌꼬방을 시작한 그는 제법 규모가 큰 공장의 공장장 출신이다. 그가 세 들어 있는 곳은 기역자 구조의 한옥으로 문설주며 기와, 서까래 등이 언뜻 봐도 행세깨나 하던 집이다. 성수동에서 이 정도 규모의 공장을 얻으려면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150만원으로 현재의 두 배가 넘는 돈을 주어야 한다. 송 사장은 공장자리를 보러 다니는 것을 포기한 상태다.

“나 혼자서 일해도 지금 인건비가 안 나와. 몇 달째 월세 못 내는 건 둘째 치고 집에 단돈 몇십만원도 못 갖고 갔는데 어디 가서 지금 공장을 구해.”

왕십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송 사장은 전북 정읍 출신이다. 그의 별명은 ‘59년 왕십리’. 애창곡이 ‘59년 왕십리’인데다 정읍에서 왕십리로 올라온 게 1959년이라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지난해 프레스에 손가락 세 개와 팔뚝 살점을 뜯겨버렸다. 30년 동안 두부공장을 하던 그는 몇 년 전 업종을 바꿔 프레스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거의 쓰지 못하는 오른손에는 거친 목장갑이 끼워져 있다. 그의 눈을 젖게 만드는 것은 짓뭉개진 손이 아니라 한순간의 실수로 금의환향하려던 평생의 꿈이 날아가버렸다는 사실이다.

한때는 화이트 칼라보다 월급 많아

송 사장 옆에 앉은 박씨는 경남 산청군 신득면 출신으로 성북동에서 살고 있다. 지금도 수첩을 만들고 있는 양지사에 다닐 때 3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다 1969년에 왕십리로 스카우트됐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왕십리에서 받은 첫 월급은 7만6000원. 당시 대학등록금이 3만원 정도였으므로 그가 받은 월급은 한국은행이나 다른 화이트 칼라보다 많은 파격적인 액수였다. 당시 기준으로 그가 가진 조각기술은 최첨단 기술이었고, 왕십리 일대는 벤처기업단지쯤 되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대신 동생 셋을 대학까지 뒷바라지하는 것으로 배움에 대한 한을 풀었지요. 총각 때 모은 돈을 불려주겠다던 이모가 돈놀이로 다 날려버렸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는 조각, 금형에 이어 지금은 사출을 하고 있다. 플라스틱 제품의 수요가 늘면서 사출이 인기를 얻자 힘든 금형일을 버리고 사출을 택했다. 그의 10평 남짓한 마찌꼬방에는 반자동 사출기 두 대가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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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자유기고가 futh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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