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호

빌 클린턴

미국인들이 너무도 사랑하고, 또 미워했던 한 남자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09-09-08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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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지 않은 미국인이 섹스 스캔들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이 바람둥이 대통령에게 넌더리를 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클린턴이 바람둥이인 동시에 아주 유능한 대통령이자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이었다. TV 토크쇼에 출연해 색소폰을 연주하고 로데오 경기에 즉흥적으로 뛰어드는 클린턴 특유의 친화력은 인생의 고비마다 그를 승리로 이끌었다.
    빌 클린턴

    빌 클린턴 <BR>● 1946년 8월19일 아칸소 주 호프에서 출생<BR>● 1963년 소년단원 자격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 만남<BR>● 1964년 조지타운대 외교학부 입학<BR>● 1968년 로즈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 철학·정치·경제 통합과정 전공<BR>● 1971년 예일대 로스쿨 진학<BR>● 1975년 힐러리 로댐과 결혼, 1978년까지 아칸소 로스쿨 교수로 재직 <BR>● 1978년 아칸소 주지사 당선<BR>● 1980년 외동딸 첼시 출생. 아칸소 주지사 재선 실패<BR>● 1982년 아칸소 주지사 재출마 당선. 이후 1992년까지 주지사로 재임<BR>● 199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 제42대 미국 대통령 당선(지지율 43%)<BR>● 1996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재선(지지율 49%)<BR>● 1998년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대통령 탄핵동의안이 하원 통과, 상원에서 부결됨<BR>● 2000년 힐러리 클린턴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 당선<BR>● 2001년 대통령 퇴임 <BR>● 2009년 전 미국 대통령으로는 두 번째로 방북, 김정일 면담

    8월4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전격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클린턴은 회동 하루 뒤인 8월5일, 북한에 5개월째 억류되어 있던 커런트 TV의 두 여기자, 로라 링과 유나 리를 데리고 미국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CNN은 캘리포니아 버뱅크 공항에 도착한 두 여기자가 가족과 눈물 흘리며 포옹하는 감격적인 장면,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클린턴 전 대통령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을 생중계했다. 실로 번개같이 이루어진 ‘미국발 깜짝 쇼’였다.

    그러나 세계를 감탄시킨 이 깜짝 쇼는 클린턴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의 방북은 9년 전부터 계획된 숙원사업이었다. 2000년 말, 두 번째 임기 막바지에 이른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우선순위에서 중동 평화협상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다. 북한을 방문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던 클린턴은 자신의 후임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에게 “지금 북한에 가면 북한과 미사일 개발 금지 협정을 맺을 수 있다”고 말했으나 부시 당선자는 대답을 피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해빙 무드였던 북미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아무튼 모든 미국인에게 ‘너무도 특별한 한 남자’였던 빌 클린턴(Bill Clinton) 전 대통령은 이번의 ‘여기자 구출 작전’으로 다시 한 번 특별한 이미지로 전 미국인에게 각인되었다. 사실 클린턴은 1992년 대통령선거전 때부터 늘 특별한 남자였다.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클린턴은 1992년 만 46세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46년생으로 최초의 베이비붐 세대 대통령, 8년의 재임기간 중 미국 경제를 지속적 호황으로 끌어올린 대통령, 민주당 출신으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다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등등.

    1992년 미국 대선후보로 나설 당시 빌 클린턴은 완전한 무명인사였다. 그러나 12년에 걸친 아칸소 주지사 경력이 전부인 클린턴은 선거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를 꺾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버스를 타고 미국 전역을 도는 신선한 방식의 선거유세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으로 미국인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은 점, 그리고 젊고 잘생겼으며 절로 마음을 쏠리게끔 하는 매력적인 연설솜씨 등이 승리의 원인이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의 행보는 대체로 순탄했다. 선거 공약대로 미국의 경제를 최대치의 호황으로 끌어올렸고 교육개혁에서도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또 이스라엘과 중동 간 평화협상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고 1998년 체결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굿 프라이데이’ 협정)에 막후 해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2000년 클린턴이 대통령직을 떠날 당시 미국의 재정 흑자 규모는 5590억달러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러한 성과 때문에 미국인의 66%는 클린턴이 대통령직에서 퇴임하는 순간까지 그를 지지했다. 클린턴의 뒤를 이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8년의 임기를 아프간, 이라크 전쟁과 전세계로 퍼져나간 미국발 경제위기로 마감한 것과 비교하면 클린턴의 유능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정책적으로 성공하고, 도덕적으로 실패한 대통령

    빌 클린턴

    8월4일,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클린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동하고 두 명의 여기자를 석방시키는 ‘깜짝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럼에도 적잖은 수의 미국인은 그를 맹렬하게 ‘미워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미국인은 그를 정말로 싫어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미워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클린턴은 임기 내내 섹스 스캔들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대통령선거 당시 불거졌던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12년에 걸친 외도뿐만 아니라 폴라 존스와의 성희롱 소송, 결정적으로 집권 2기에 터진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 때문에 클린턴은 탄핵으로 대통령직을 상실할 위기에 몰렸다. 하원에서는 과반수 찬성으로 탄핵 동의안이 통과되었지만, 상원에서 부결됨으로써 그는 대통령직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직은 지켰다 해도 400쪽에 달하는 ‘지퍼게이트’ 보고서와 낱낱이 까발려진 사생활 등으로 그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진 후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탄핵 사태까지 간 이유가 그의 업무상 과실이나 실책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클린턴의 가장 개인적 문제, 즉 외도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표면적인 이유는 위증죄와 사법방해 혐의였지만). 미국인은 그를 뛰어난 대통령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몇 년째 폭로에 폭로가 거듭되고 도청, 성희롱, 심지어 그의 정액이 묻은 드레스까지 등장하는 상황에 넌더리를 냈다.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앨 고어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패한 것은 고어 개인이나 민주당의 문제가 아니라 클린턴에 대한 유권자의 혐오감이 빚어낸 결과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빌 클린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 같은 스캔들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말 바꾸기와 거짓말을 시도한 클린턴의 유들유들한 태도였다. 예를 들면 TV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가 없었나?”라는 질문에 “르윈스키와 관계는 없다(There is no relationship with Rewinsky)”라고 현재형으로 대답하는 식이었다. 즉, ‘과거에는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지만 현재는 없다’는 의미의 대답이었고, 이런 방식으로 그는 위증죄를 교묘하게 피해갔다. 보수적 경향의 ‘워싱턴 포스트’는 클린턴을 가리켜 ‘태양 아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빌 클린턴

    클린턴-힐러리 부부와 딸 첼시는 한때 이상적인 가족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힐러리와 결혼한 직후부터 여러 여자와 외도를 즐기고 있었다.

    정책적으로는 성공한 대통령,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실패한 대통령. 이것이 클린턴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상반된 두 모습을 대중 앞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을까? 이 비밀의 열쇠는 그의 유년 시절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클린턴은 남부 아칸소의 블루칼라 가정 출신이라는 보잘것없는 배경에도 명문 조지타운 대학에서 2년 연속 학년회장을 지냈으며 3학년 때는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일찌감치 정계 진출을 꿈꾸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전 미국에서 32명만을 선발하는 로즈 장학생이 되어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하고 유학 후 다시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하는 등 엘리트 코스에서 승승장구했다. 그가 이 세 명문을 거치며 사귄 친구들은 훗날 아칸소 주지사와 미국 대통령선거에 나설 당시 큰 자산이 되었다. 남부 사투리를 쓰는 덩치 큰 시골뜨기 클린턴은 동부 출신이나 명문가의 자제들이 다니는 조지타운과 예일 대학에서 놀라운 친화력을 발휘하면서 친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클린턴에게는 친구 대다수가 잘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알코올중독자인 양아버지의 폭력이었다. 클린턴은 자서전인 ‘빌 클린턴: 마이 라이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어렸을 때 나의 생활은 친구들과의 놀이, 지식 습득의 기쁨 등으로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내 내면에는 불확실성과 분노, 그리고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클린턴의 인생에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며 영광의 절정과 고통의 맨 밑바닥을 롤러코스터처럼 오가야 했다.

    남부 출신 시골뜨기

    클린턴의 본명, 즉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은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주니어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아칸소 주 호프에서 태어나 핫스프링스에서 자란 빌(윌리엄의 애칭)은 다섯 살 때까지 야채가게를 하는 외조부모의 손에서 컸다. 생계가 막막해진 어머니 버지니아 카시디가 아이를 떼어놓고 다른 도시에 있는 간호학교에 다녔기 때문이었다. 마취담당 간호사가 된 버지니아는 빌이 다섯 살 때 핫스프링스에서 자동차 대리점을 하는 로저 클린턴과 재혼해서 5년 후 빌의 이복동생 로저를 낳았다.

    로저 클린턴, 즉 빌의 양아버지는 결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구제불능의 알코올중독자, 도박중독자였으며, 술에 취하면 아내를 심하게 때렸다. 심지어 가위로 버지니아를 찌르려 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버지니아는 이혼할 결심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 나오기도 했으나 결국 로저가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둘은 갈라서지 않았다. 열 살 아래의 동생을 무척 사랑했던 빌은 열네 살 때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성을 블라이드에서 클린턴으로 고쳤다. 나중에 동생이 컸을 때, 형과 성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혼란을 느낄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빌은 로저 클린턴을 자신의 친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폭력 속에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면서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친아버지는 분명 더 나은 모습이었을 거란 믿음을 갖고 살았다. 그 믿음은 어린 빌에게 결코 작지 않은 희망이었다. 열두 살 때 외가에 놀러간 빌을 보고 지나가던 누군가가 말했다. “너 빌 블라이드의 아들이로구나! 아버지랑 똑같네.” 빌은 이 말을 듣고 며칠 동안 싱글거리며 다녔다. 아버지의 폭력을 경험하며 자란 형제였지만, 친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빌과 아버지의 폭력성이 자신에게도 유전되었을 거란 두려움에 떨었던 로저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훗날 빌이 아칸소 주지사를 거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때, 로저는 코카인 밀매 혐의로 감옥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다

    고교 2학년 때 소년단원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클린턴은 이 잠시 동안의 만남에서 ‘정치가’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짓게 된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해서 로버트 케네디, 마틴 루터 킹 등 진보적인 정치가들은 그의 우상이 되었다. 고교 3학년 때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듣고는 감격한 나머지 한참을 울기도 했다. 그리고 남부 출신으로는 드물게 동부의 가톨릭 명문인 조지타운 대학교 외교학부에 입학하는데, 학업 성적이 뛰어났던 그가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외면하고 굳이 조지타운을 선택한 것은 이 학교가 미국 정치의 중심인 워싱턴 DC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타운은 아칸소 출신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대학이었다. 동급생들은 대부분 동부의 명문 사립고교 졸업생이었고, 외교관이나 상원의원 아버지를 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클린턴은 이런 환경에 겁먹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입학하기 전부터 대학 기숙사에서 남부 출신이거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학생들을 찾아내 모조리 친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친화력을 기반으로 해서 외교학부 1,2학년 학생회장에 연속으로 당선된다. 그로서는 최초의 정치적 경험이었던 셈이다.

    유복하거나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클린턴이 밝고 활달한 성격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아들이 자신의 잘못된 결혼으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생각한 버지니아는 클린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았다. 클린턴은 자신이 고3 때 신청했던 한 장학금 지원서류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뒤늦게 발견한 적이 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이 편지가 빌에 대한 저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바랍니다. 직업 때문에 제가 빌에게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빌이 하고 있는 일, 그리고 빌이 앞으로 해내는 일에 대한 칭찬은 모두 빌 혼자서 받아야 합니다. 빌은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남자입니다.”

    ‘자수성가한 남자’라는 어머니의 평가는 정확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배경도, 또 경제적 풍요나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아버지도 없었다. 조지타운에 입학할 당시 양아버지는 암으로 인해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클린턴은 어머니와 동생을 양아버지의 폭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두고 떠나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이 ‘자수성가한 남자’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일하며 ‘정치가의 꿈’을 향해 한발을 내디디게 된다.

    빌 클린턴

    아칸소주지사 시절. 클린턴은 서른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어 12년간 재임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여자’

    훗날 로즈 장학생 선발을 위한 에세이에서 클린턴은 자신이 조지타운에 온 것은 ‘실천적인 정치가로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며, 옥스퍼드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자신이 이미 깊이 빠져버린 정치 세계의 압박에서 잠시라도 떠나길 원한다고 썼다. 클린턴은 남부 지역에 할당된 네 명의 로즈 장학생 중 한 사람으로 최종 선발되었다. 외교위원회에서 상사로 모시고 있는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처럼 로즈 장학생이 된 것이다. 특유의 친화력과 밝고 확신에 찬 화술, 그리고 유머감각 덕분에 그는 인터뷰나 대중 연설에서 늘 상대방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빌 클린턴은 힐러리를 가리켜 ‘내가 인생에서 만난 모든 여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여자’라고 말하곤 한다. 클린턴의 예일대 법대 동창인 힐러리 로댐은 탁월한 변호사인 동시에 아동복지 전문가였다. 공부에 매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울했던 2년간의 옥스퍼드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온 클린턴은 1972년 예일대 로스쿨의 강의실에서 커다란 안경을 낀 힐러리 로댐을 만나게 된다. 힐러리는 당시 로스쿨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소문나 있었다. 법대의 남학생들은 너무나 똑똑하고 빈틈없는 힐러리를 경계했지만 클린턴은 바로 그 같은 똑똑함 때문에 힐러리에게 끌렸다.

    로스쿨 졸업 후 두 사람은 각각 아칸소 로스쿨 교수와 매사추세츠의 아동보호재단에 취직해 떨어져 있게 되었다. 그러나 클린턴의 강력한 추천으로 힐러리는 아칸소 로스쿨로 직장을 옮겼고, 두 사람은 1975년 10월11일 빚을 내 산 집의 거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어디로 보나 젊고 평범한 부부였지만, 클린턴의 가슴속에는 더 큰 야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치에 대한 야망이었다. 처음 나선 하원의원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워싱턴을 목표로 한 야심을 약간 수정했다. 자신의 고향인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기로 한 것이다.

    남부에 위치한 아칸소는 작고 보수적인데다 대다수의 미국인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였다(이 때문에 1992년 대통령선거 당시, 공화당은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면 미국인들 모두가 아칸소 사람들처럼 평생 닭털이나 뽑아야 할 것’이라는 비방광고를 하기도 했다). 대신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진 아칸소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 적절한 지역이었다. 클린턴은 아칸소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주유소, 교회, 잡화점에서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목장에 가면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즉석에서 로데오 경기에 나서고 마을 축제의 토마토 빨리 먹기에 참가해 식탁 위의 토마토를 모조리 먹어치우기도 했다. 아칸소 주민들은 명석한 머리와 능란한 화술을 갖춘 동시에 이웃집 청년처럼 친근해 보이는 젊은 후보에게 매료되었다. 이런 장점을 등에 업고 클린턴은 약관 서른둘의 나이로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된다.

    아칸소 주지사로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유능한 행정가, 그리고 자상한 아버지와 남편이었다. 그는 아칸소를 다스리며 추진력 있는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발휘했다. 예를 들면, 1985년 일본의 산요전기가 아칸소 포레스트시티에 있는 TV 부품공장을 닫으려 하자 클린턴은 직접 오사카로 가서 산요전기 회장을 설득했다. 그가 내놓은 카드는 “철수하지 않으면 월마트에서 산요전기의 TV를 팔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산요는 이 제안에 동의했고, 이후 8년간 월마트는 2000만대 이상의 산요 TV를 팔았다.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로 취임할 때, 부부의 외동딸 첼시는 두 살이었다. 첼시는 유치원 선생님이 부모의 직업을 물으면 “엄마는 변호사고 아빠는 전화하고 커피 마시고 연설해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클린턴은 주지사 집무실에 딸을 위한 작은 책상을 가져다두고 첼시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곤 했다. 그것은 그의 친아버지가 결코 누릴 수 없었던 행복이었다. 이상적인 남편과 아버지인 주지사의 모습은 아칸소 주민들에게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끔 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클린턴은 지역방송국 기자인 제니퍼 플라워스를 비롯한 여러 여자와 외도를 즐기고 있었다.

    ‘소년 주지사’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주지사 정도의 직위에서는 그의 외도가 걸림돌이 될 수 없었지만 대통령선거라면 문제가 달랐다. 1992년, 걸프전 승리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7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클린턴은 민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그의 텃밭인 아칸소 주에서도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밀릴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클린턴에게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자신의 장기인 풀뿌리 민주주의 방식의 선거운동, 그리고 주지사로 쌓아온 행정가로서의 능력, 여기에 더해 12년간 계속되어 온 공화당 집권을 종식시키고픈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민주당 예비경선은 그의 예상대로 돌아갔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동안인 그는 ‘소년 주지사’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송거스, 브라운, 봅 케리 등 다른 후보들을 차근차근 물리쳐나갔다. 유권자들은 일단 그의 잘생긴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 능력에 매료되었고, 두 번째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그리고 여성과 유색인종을 배려하는 정강정책에 기울었다. 여성, 백인 블루칼라, 흑인 유권자들이 그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중간에 제니퍼 플라워스 스캔들, 마리화나 복용 문제, 병역기피 등 갖가지 악재가 터져 나왔지만 놀랍게도 대중의 지지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와 맞붙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화당 측은 ‘남부의 가난한 촌놈’으로 그를 비난했고, 보수적인 TV대담 프로그램은 클린턴을 불러놓고 20분 내내 혼외정사에 대한 질문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대중의 지지도는 더 올라갔다. 어차피 미국인 대다수는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중산층이며, 그런 중산층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클린턴은 인간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도 매력적인 후보였기 때문이다. ‘뉴욕 포스트’는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이처럼 유례없이 비난을 받고도 클린턴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치가로서 그의 자질이 그만큼 훌륭하다는 점을 증명한다”라고 쓰기도 했다.

    아칸소 주지사선거 시절 목장과 주유소, 잡화점을 방문했던 것처럼 클린턴은 부통령후보인 앨 고어 부부와 함께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오하이오,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를 거치는 1600㎞의 버스 유세에 나섰다. 군중이 모여 있으면 어디에나 멈춰 서 즉석 유세를 하는 방식의 선거운동은 클린턴의 이미지만큼이나 새롭고 신선했다.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세 번에 걸친 TV 토론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CBS TV에서 방송된 후보 토론회가 끝난 후, 시청자의 53%는 클린턴 후보가 가장 잘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중산층 유권자들은 TV에 비친 클린턴의 모습에서 어딘지 모르게 친구 같은 느낌을 받았고, 이는 곧 그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반면, 조지 부시 후보가 잘했다는 평가는 25%에 불과했다.

    빌 클린턴

    1991년 대통령 선거전 당시 클린턴은 45세였다. 젊고 쾌활한 그의 모습은 대중에게 매력적인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공약에서도 클린턴 캠프는 공화당을 앞섰다. 클린턴 캠페인의 세 가지 핵심 공약, 즉 ‘변화 / 문제는 경제다 / 의료보험을 기억하라’는 1990년대 초의 미국인들에게는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반면 조지 부시 후보는 걸프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김으로써 지지 기반을 급격하게 상실했다. 선거 결과는 변화를 원하는 미국인들의 갈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클린턴은 43%의 지지율로 37.4%의 표를 얻은 조지 부시, 18.9%의 로스 페로 후보를 꺾고 미국 제 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불과 마흔여섯 살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에 이어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섹스 스캔들, 또는 우익의 음모

    1998년, 클린턴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한창 궁지에 몰려 있을 때, 힐러리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것은 우익의 음모’라고 맞받아쳤다. 실제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가 진행한 4년간의 조사는 클린턴 개인을 옭아매려는 공화당의 음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국민 대다수는 백악관의 인턴을 데리고 불장난을 한 클린턴의 처신을 비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만큼 심각한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니카 르윈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국방부 인턴이던 르윈스키는 1995년 11월부터 1997년 3월까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클린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인 린다 트립에게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했고, 트립은 이 전화 내용을 녹음해서 스타 검사에게 전했다. 이 와중에 클린턴의 정액이 묻은 르윈스키의 드레스가 증거물로 등장해 미국인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클린턴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인턴과 성관계를 했다’는 것이 위법일 수는 없다. 스타 검사 측이 탄핵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클린턴이 성관계를 하고도 관계가 없었다고 위증했으며, 르윈스키에게도 위증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대통령 탄핵감으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오히려 범죄라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4년 동안 4000만달러의 예산을 쓴 스타 검사 측이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예를 들면 스타 검사가 린다 트립에게 면책특권을 약속하고 르윈스키와의 대화를 녹음해 22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만든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익의 음모’라는 힐러리의 공격은 분명 일리가 있다. 국민 대다수는 당연하게도 클린턴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의료보험이나 교육, 실업률, 총기 규제 등 실생활에 연관된 정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대부분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더욱이 집권 2기를 맞고서도 클린턴의 젊고 신선한 이미지가 여전히 어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당은 더더욱 클린턴 끌어내리기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공화당원들이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을 중심으로 하원에서 클린턴의 탄핵 동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이 문제를 질질 끌고 감으로써 국민들에게 “어휴! 이제 클린턴이라면 지긋지긋해”라는 혐오감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다. 어차피 대통령 탄핵은 상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하는 문제였다. 상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공화당의 ‘클린턴 흠집내기’는 성공한 셈이다.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를 누르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텍사스 출신의 부시 후보는 매우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성향의 후보였고, 이런 면모는 클린턴의 ‘리버럴함’에 신물난 유권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고어의 선거운동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클린턴은 고어에게 “선거운동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워싱턴 포스트’ 사옥 앞에서 당신에게 채찍으로 맞아도 좋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대체 왜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위험천만한 불륜을 저질렀던 것일까? 이미 그는 민주당 후보 시절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스캔들로 한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몇 년째 끌고 있던 폴라 존스와의 성희롱 소송 재판으로 인해 재산의 반 이상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그는 또다시 르윈스키와 2년에 걸친 밀회를 즐겼던 것이다. 일부 언론은 클린턴이 힐러리와 결혼한 직후부터 외도를 시작했으며, 그가 불륜관계를 맺은 여성이 100여 명에 달할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정신분석학자인 제롬 레빈 박사는 ‘클린턴 신드롬’이라는 책을 통해 클린턴이 일종의 섹스중독증, 즉 섹스를 통해서 자신의 성공을 확인하려 하는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정신적인 고독을 채우지 못한 중년 남성들이 모험적인 섹스에 집착함으로써 이 허전함을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이 책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들의 섹스중독증은 ‘클린턴 신드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채울 수 없었던 아버지의 빈 자리

    그렇다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클린턴 신드롬’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클린턴은 출생 직후부터 다섯 살 때까지 부모가 아닌 외조부모의 손에서 컸다. 아버지는 아예 없었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아이를 떼어놓고 간호학교에 다녔다. 외조부모 역시 야채가게를 운영하느라 늘 바빴다. 다섯 살 때 생긴 양아버지는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클린턴은 자서전 ‘빌 클린턴: 마이 라이프’에서 “나는 열 살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라고 쓰고 있다.

    10대의 클린턴은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정치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꿈을 이룸으로써 자신의 롤 모델들 못지않게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인생의 롤 모델이라는 것이 과연 외형적인 성공만을 가르쳐주는 사람일까? 그에게는 함께 축구나 낚시를 하고 수학문제를 풀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아버지가 없었다. 케네디나 킹 목사는 훌륭한 롤 모델이었지만,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함께 살을 맞대고 때로 어깨를 기댈 수 있는, 따스하고 든든한 아버지의 존재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클린턴은 대단한 독서가다. 특히 문학과 역사책을 좋아해서 조지타운 시절 강의 시간에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다가 들키기도 했다. 옥스퍼드와 예일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역사와 문학서적을 읽었고 신혼여행길에도 읽을 책을 여러 권 가져갔다. 명민한 남자 클린턴은 분명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었고, 책을 통해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 애썼던 것이다. 그러나 한 아이의 어린 시절에 드리워진 문제는 때로 그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결정적이다. 클린턴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행복한 말년

    2000년 대통령선거 기간 부시와 체니 후보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 클린턴은 공화당이 집권하면 8년간 자신과 민주당이 추진해온 정책들이 원점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예감에 사로잡혔다. 특히 경제, 환경, 국제 문제에 대한 부시 당선자의 보수적인 관점은 클린턴과 너무도 달랐다. 클린턴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부시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부유층을 중심으로 한 큰 폭의 세금감면을 실시했고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였다. 클린턴이 5590억달러까지 끌어올려놓았던 재정흑자는 8년 만에 1조달러가 넘는 재정적자로 급선회했다. 또 부시 행정부의 무모한 패권주의로 인해 미국과 전세계 국가들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클린턴의 예상대로 모든 것은 원점으로, 아니 원점보다 더 나쁜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며 클린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클린턴의 업적이 모두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 오바마 행정부가 총력을 기울이는 의료보험 개혁 프로그램은 16년 전 클린턴이 추진하다 좌절되었던 의료보험 개혁안과 상당부분 비슷하다. 또 국무장관으로 입각한 힐러리를 비롯해 과거 클린턴의 행정부에서 일했던 각료들 중 상당수가 오바마 행정부에 다시 기용되었다. 마이너리티를 배려하고 갈등과 대결보다는 대화와 통합을 중시하는 오바마의 국정철학은 분명 클린턴과 닮은꼴이다. 클린턴은 강대국 미국 호(號)를 8년간 성공적으로 조종한 훌륭하고도 명민한 정치가였다.

    클린턴은 퇴임 후 아칸소 주 리틀록에 ‘클린턴 도서관’을 세웠고 에이즈 퇴치, 지구온난화 방지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는 윌리엄 J 클린턴 재단의 대표로도 활약하고 있다. 폴라 존스와의 소송비용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빚도 강연과 저술 수입으로 다 갚았다는 후문이다.

    8월5일, 귀환하는 여기자들을 맞은 버뱅크 공항의 환영 인파 중에는 ‘커런트 TV’의 설립자이자 클린턴의 러닝메이트였던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있었다. 8년간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이었던 ‘왕년의 사나이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뜨겁게 포옹했다. 세월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들은 여전히 멋졌다. 조금 지친 표정이었지만, 막 어려운 임무를 끝낸 클린턴은 몹시 만족스럽고 또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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