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호

국가대표급 낙오자들이 선사하는 웃음과 눈물

  • 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9-09-09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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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의 한국 영화에는 멋지고 화려한 주인공들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 최근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주인공들은 남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의 낙오자들이다. 그런 ‘국가대표급’ 낙오자들이 비주류 스포츠를 만나 진정한 운동선수로 멋들어지게 변신한다. 그리고 관객은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소박한 염원이 스크린 속에서 충족되는 광경을 보며 주인공들과 함께 울고 웃는다.
    국가대표급  낙오자들이 선사하는 웃음과 눈물

    영화 ‘국가대표’는 비인기 종목인 스키점프에 대한 이야기다. 불과 다섯 명으로 이뤄진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의 기상천외한 훈련 모습이 절로 웃음을 선사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발달해왔다. 맨 처음 이야기는 신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을 구원해낸, 인간을 초월한 신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그 다음은 영웅이었다. 혈통도 인격도 완벽한 자들이 주인공이었다. 오이디푸스도, 햄릿도 모두 ‘왕자’들이었으니까. 그 후부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점점 평범해지기 시작한다.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 감자를 훔치는 복녀, 너무나 순진해서 괴로운 테스까지. 근대 이후, 현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녀라든지 거지, 사회의 하층인물인 경우가 더 많았다. 사실 주인공은 대부분 현실 속에선 별 볼일없는 인물이 더 많다.

    루저 - 새로운 주인공들

    그런데 최근의 영화들은 별 볼일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낙오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곤 한다. 삼류 깡패, 나태한 형사, 뚱뚱한 여자, 약물중독으로 선수 자격을 박탈당한 국가대표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저평가되거나 무시당하는 인물들이다. 직업도 변변치 않고 직업이 있다 해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다. 최근 흥행에 성공한 한국 영화들을 보면 이러한 특성들이 더욱 두드러진다.

    국가대표급  낙오자들이 선사하는 웃음과 눈물

    한 무능한 형사가 얼결에 희대의 탈주범과 맞닥뜨리고, 끝내 탈주범을 잡는 과정을 그린 영화 ‘거북이 달리다’.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적 낙오자들은 독립영화의 시선으로 바라봐주어야 했던 약자들이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촌구석을 떠도는 그룹 멤버나 직업전선에 뛰어든 젊은 여성들은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 상업영화는 루저(loser)들을 불러내 농담하는 주체들로 내세운다. 그들은 종종 마지막에 가서 성공을 거두고 루저의 모습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또 많은 이가 그저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꼭 세속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도 아니다.

    루저를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최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균 이하다. 대한민국에서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버라이어티 쇼의 홍보문구도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버라이어티’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시사적이다. 사실 실패한 낙오자들이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주목받는 인물들로 성장할 때, 우리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낀다. 설사 그들이 세속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일희일비하는 세상의 장삼이사와 닮은 낙오자 주인공들은 우리의 팍팍한 삶에 한 줄기 위안을 선사한다. 어쩌면 정말 사람다운 사람처럼 보이는 주인공이야말로 루저일지도 모른다.



    집념의 아저씨, 조필성

    아저씨는 아줌마만큼이나 편견이 많은 호칭이다. 아저씨는 배가 나오고, 굼뜨고, 어딘가 조금 변태스럽고 뻔뻔한 남자들을 지칭한다. 아저씨라는 호칭 속에는 수줍은 소년도, 멋진 훈남도 없다. 섹스어필은 가장 먼저 휘발된다. 아저씨는 대한민국 불쌍한 아빠들의 공공의 낙인이라 봐도 무방하다. 아저씨라고 불리는 순간, 남자로서의 한 사람은 지워진다. 아저씨 조필성은 잘하는 일도, 열심히 하는 일도 없는 형사다. 네 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지만 집에서는 오래돼 소음만 심한 냉장고 취급을 받은 지 오래다.

    동네 사람들과 협잡해 푼돈이나 얻어먹던 필성은 이 사실이 밝혀져 불명예스럽게도 정직당한다. 능력 없는 남자는 자존심도 센지라, 아내의 쌈짓돈을 훔쳐 소싸움에 건다. 어, 그런데, 이런! 조필성이 딴다. 게다가 판돈의 여섯 배나. 문제는 운 없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것. 필성은 운 없는 놈의 대명사라 1800만원을 땄는데 만져보지도 못하고 전부 도둑맞는다. 게다가 상대는 희대의 탈주범. 필성은 돈만 뺏기는 것이 아니라 실컷 얻어맞고 형사 이름에 먹칠까지 하게 된다. 가장으로서, 형사로서 수모를 당한 필성은 이제 인생의 목표를 바꾼다. 탈주범 송기태 잡기! 영화 ‘거북이 달린다’는 기기밖에 못하던 거북이가 끝끝내 토끼를 잡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기면서 달리는 토끼를 잡아내는 형사 조필성의 이야기는 무능한 아버지의 일화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는 경찰서에 있으나마나한 무용지물 형사이기도 하지만 집안에서도 역시 오래 묵어 쓸모없는 가구보다 더 천대받는다. 돈도 못 벌어다주고 주변머리도 없는 조필성은 아버지로도 그리고 남편으로도 낙제감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거북이 달리다’에서 조필성이 변모하는 과정이다. 조필성은 대오각성한 후 멋지게 탈주범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늘 하던 대로 엉뚱하고 띄엄띄엄한 방식으로 해낸다. 그가 변모한 점이라면 절실히 그를 잡고 싶어했고 그만큼 열심히 뛰어다녔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니라 끈덕지게 그를 쫓은 결과, 잡아낸 것이다. 말 그대로 거북이가 토끼가 된 것이 아니라 거북이 근성 그대로 토끼를 잡는다.

    조필성의 끈질김은 충남 예산이라는 배경을 통해 구체화된다. 어딘가 어설프지만 끈덕진 조필성의 캐릭터는 예산이라는 촌의 정서로 수식된다. 영화 초반 늘 2등이라고 멸시받던 ‘곰이’가 유력 후보 ‘태풍’을 물리치고 우승 소가 되듯이 실패한 아버지 조필성은 날고 뛰는 송기태를 잡아 영웅이 된다.

    영화 ‘거북이 달리다’는 소싸움, 그리고 충청도라는 코드를 통해 끈질기게 오래, 천천히 해내는 근성을 그려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근성으로 낙오자 조필성은 멋지게 제복을 차려입은, 권위 있는 아버지 조필성으로 돌아온다. 속옷 차림으로 쫓겨났던 필성이 멋지게 제복을 입고 돌아오는 것이다. 필성은 범인을 잡고 영웅이 돼 가족에게 귀환한다. 딸들과 아내는 멋진 사회적 제복을 입고 돌아온 아빠를 환대한다.

    ‘아버지’는 속옷이 아니라 사회적 계급이나 계층을 나타내는 상징적 옷이다. 제복을 입고 있을 때에야 아버지로서 대우받을 수 있다. 일일교사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아빠, ‘거북이 달린다’에는 아빠, 남편으로서 당당히 걸어오고 싶은, 이 시대의 낙오자 아버지의 그림자가 담겨 있다.

    국가대표급  낙오자들이 선사하는 웃음과 눈물

    시골마을 소녀들이 역도선수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 ‘킹콩을 들다’ 역시 주변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관객에게 감동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촌구석의 소녀들, 세상을 놀래다

    소녀의 이름은 영자다. 촌스러운 이름만큼이나 모습도 초라하고 버려진 우유곽을 뒤져 남은 우유를 마실 만큼 가난하다.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영자는 당장의 끼니가 걱정인 소녀다. 찌질하다고 말하기에는 가슴 아프지만 모습 자체로는 영락없는 사회적 낙오자다. 그런 소녀가 서울에서 온 엉뚱한 선생님 덕분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역기를 들면서 소녀의 삶은 달라진다.

    운동 하나 잘하면 학교의 명예가 드높아지던 시기, 비인기 종목인 역도는 보성여중을 새롭게 빛내줄 스포츠로 각광받는다. 하지만 우락부락하니 위험하기도 하고, 남성적인 스포츠라 가난하고 힘든 여학생들만 하나둘 모여든다.

    ‘킹콩을 들다’는 전형적인 비주류 스포츠 드라마의 계보에 속한다. 최근의 비주류 스포츠 드라마들은 스포츠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 위에 루저들의 삶을 겹쳐놓는다. 사회적으로 낙오된 인물들은 스포츠를 통해 새로운 인물들로 거듭난다. ‘킹콩을 들다’에서는 가난하고 살기 힘들던 소녀들이 ‘역도’를 통해 미래를 만나고 선생님과의 새로운 유대감을 갖게 된다.

    ‘거북이 달리다’가 예산이라는 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면 영화 ‘킹콩을 들다’는 전남 보성이라는 다른 시골에서 시작된다. 걸쭉한 사투리를 쓰는 교장선생님은 역도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중생들도 천연덕스럽게 사투리를 내뱉는다. 사투리의 발랄함 위에 가난하지만 천진한 아이들의 시선이 보태진다. 1994년으로 되돌아간 시간은 운동이 미래가 되기도 했던 한 시절을 추억으로 되돌려주며 덤으로 운동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가난한 아이들의 삶을 얹어준다. 그러니까 ‘킹콩을 들다’는 단순히 감동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드라마틱한 코미디인 셈이다.

    최근의 많은 영화가 ‘촌’을 수색한다. 예산, 보성 이런 촌의 정서에는 대도시의 팍팍한 삶에 결여된 또 다른 질감이 놓여 있다. 비인기 스포츠 종목에 대한 관심도 또 다른 질감이 주는 훈훈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연봉이나 계약조건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순수한 의미의 멘탈 스포츠, ‘킹콩을 들다’의 감동은 그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우,생,순’에서 시작된 마이너리티 취향은 ‘킹콩을 들다’‘해운대’를 거쳐 ‘국가대표’로 이어진다. 김용화 감독의 ‘국가대표’는 한국형 스포츠 영화의 계보를 따라간다. 줄거리는 이렇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스키점프팀이 급조된다. 스키는 알지만 점프는 모르는 열외인간들이 군대나 면제받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둘 모인다. 조금 다른 이유로 국가대표가 된 차헌택은 해외입양아다. 그는 자신을 버린 엄마가 ‘차헌택’을 찾도록 하기 위해 무주로 향한다.

    ‘국가대표급’ 낙오자들과 비주류 스포츠의 만남

    영화 ‘국가대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낙오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말하듯이 그들은 이른바 ‘쓰레기’들이다. 흥철은 스키선수였지만 약물 상용혐의로 메달을 박탈당하고 야간업소 웨이터로 살아간다. 그나마도 술 취한 여자 손님들 치마나 들추고 여자들 엉덩이나 졸졸 따라다니는 생각없는 녀석인 걸 보면 루저 중의 루저라고 할 수 있다. 칠구 봉구 형제는 사고로 부모를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게다가 동생 봉구는 정신이 온전치도 못하다. 부모님이 계시던 시절 탔던 스키는 이제 사치품에 불과하다. 부모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온 차헌택은 미국 국적을 가진 입양아이니 그 역시 마이너리티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 주변부 인물들이 모여 한다는 운동이 폼나는 인기 스포츠가 아니라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스키점프다. 사회적 낙오자들이 비인기 스포츠 종목을 선택한다. 이제 이야기는 시작된다.

    ‘국가대표’는 비주류 스포츠에 주변부 인생을 결합시켜 즐거운 웃음을 창조해낸다. 웃음의 코드는 주로 찌질한 낙오자들의 엉뚱한 행동들, 그리고 열악한 스키점프의 환경에서 비롯된다. 여자들 뒤꽁무니 따라다니는 흥철은 간단한 영어도 못 알아듣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봉구는 두려움도 없이 몸을 쓰다 사고를 친다. 아직 공사 중인 스키점프대 때문에 다인승 승용차에 발을 고정시켜 바람에 적응하고, 후룸라이드 레일에 비닐 장판을 갈아 활강 연습을 한다. 어딘지 모자란 선수 동생과 무언지 수상한 코치 딸은 엇박자로 어설픈 낙오자들의 공간에 웃음을 보탠다. 어설픔이야말로 ‘국가대표’의 웃음을 견인하는 핵심 코드인 셈이다.

    이는 영화 ‘국가대표’의 정서가 웃음에서 감동으로 바뀌는 순간이 어설픈 인간들이 멋지게 날아오르는 그때임을 짐작케 한다. 어설프다 못해 시시해 보이던 선수들은 우여곡절 끝에 제대로 된 선수로 거듭난다. 이러한 모습들은 ‘킹콩을 들다’나 ‘거북이 달리다’에서도 발견된다. 어설픈 낙오자이던 인물들이 이런저런 사연을 겪고 난 이후 멋지게 바뀐다. 이제 더는 그들을 낙오자라고 부를 수 없다. 관객은 이미 루저들이 새로운 인물로 거듭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고작 다섯 명으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스키점프 대표선수들은 예상을 뒤엎고 동메달을 딸 뻔한다. 중요한 것은 동메달을 딴 게 아니라 ‘딸 뻔’했다는 점이다. 비주류 종목을 소재로 삼은 최근의 스포츠 영화들은 이기는 결말이 아닌 모르는 결말, 혹은 지는 결말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국가대표’ 역시 유사한 결말을 향해간다. 고독한 ‘록키’처럼 고생 끝에 링 위의 황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생은 했지만 패자가 되어 돌아온다.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국가대표’는 삶의 희로애락을 그려낸다. 영웅이 제공하는 환상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의 소소한 체험에 관객의 공감이 쌓이는 것이다.

    국가대표급  낙오자들이 선사하는 웃음과 눈물

    2001년 개봉 영화 ‘파이란’은 한국 영화에서 낙오자가 의미 있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최초의 작품이다.

    우리는 한국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루저로 ‘파이란’의 강재를 기억하고 있다. 강재는 아침에 눈을 떠서 개수대에 소변을 눌 정도로 ‘개념이 없는’ 인물이다. 일을 할 생각도 그렇다고 사기라도 쳐 큰돈을 벌 생각도 없이, 그러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인 셈이다. 그러던 그가 무심코 받아들였던 서류상 아내 ‘파이란’의 편지를 통해 새사람으로 거듭난다. 거듭나는 순간은 강재의 긴 울음으로 묘사된다. 관객은 그렇게 길게 꺼이꺼이 우는 낙오자 강재를 보면서 시시하게 흘러가는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강재로 대표되는 낙오자들의 삶은 그렇게 우리에게 눈물을 주었다. 떠도는 낙오자들로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불평등한 삶을 생각하게 한 영화들도 있다. 사회적 소수자, 가난한 약자들의 삶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삶이 실상 혜택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낙오자들이 주는 소소한 웃음

    그런데 지금, 최근의 한국 영화들은 루저들을 등장시켜 소소한 웃음을 주고 눈물 어린 감동을 준다. 감동의 질감은 ‘강재’들이 주었던 그 눈물과는 다르다. 최근의 영화들 속에 등장하는 낙오자들이 주는 눈물은 좀 더 가볍고 또 시원하다. 관객은 얼굴에 검댕칠을 하고 있던 소녀가 역사(力士)로 성공해 올림픽 무대에 설 때, 그리고 바보라고 불리던 아이가 스키점프대 위에 섰을 때, 마치 자신의 구질구질한 삶과 결별하는 것 같은 쾌감을 느낀다. 웃음과 눈물 끝에 선수들이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관객에게도 전이되는 셈이다. 최고의 승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분명 어제의 낙오자는 아니다. 관객은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어딘지 모자라고 부족한 낙오자 주인공들은 관객을 무장해제시킨다. 그들은 우리보다도 열등해 보인다. 나보다 나을 것 없는, 열등한 낙오자들이 시간이 지나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낸다. 그들을 멋지게 만들어준 것은 재력도 그렇다고 대단한 재능도 아니다. 단지 진심과 시간이 소용되었을 뿐. 사람들은 진심과 시간에 대한 응답으로 멋진 모습을 얻은 그들을 보며 세상에 공평한 대가가 지급되었다고 느낀다. 문제는 세상사라는 것이 결코 뿌린 만큼의 대가를 공평무사하게 되돌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 속에서만큼은 낙오자들이 무엇인가 하나씩 소중한 것을 찾아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 낙오자라고 할지라도, 부족하고 열등한 인간들일지라도 시간과 정성이 있다면 아니 ‘진심’이 있다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조금의 기대감과 가능성을 선사하는 것이다.

    국가대표급  낙오자들이 선사하는 웃음과 눈물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우리는 그 기대 속에서 유쾌한 웃음과 건강한 눈물의 절대 배합을 맛본다. 평범한 삶 속에도 보답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열등한 인물들을 통해 전달되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주인공들이 등장한 소소한 이야기를 본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바라는 가장 작지만 어려운 기대, 노력하면 뭔가가 이루어진다는 바람이 이 영화들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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