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호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려 했던 유의(儒醫) 조헌영

  • 입력2009-09-09 1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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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려 했던  유의(儒醫) 조헌영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허준의 동의보감.

    한의학에는 두 부류의 의사가 있다. 사회정의 실천을 위해 의료를 시행하는 유의(儒醫)와 경제적 목적을 위해 의료를 이용하는 세의(世醫)가 그것이다. 유의는 유가문화로 대표되는 전통문화와 선비문화를 연구하고 실천했다. 그들에게 의료는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방편이었다.

    반면 세의(일반의)는 뛰어난 실질적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작은 기술도 비밀로 하여 전승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사유재산으로 삼아 대대로 물려주며 잇속을 챙기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론은 적고 실용만이 추구되는 의료행위였다. 진료형식은 주로 비방(?方)에 의지했는데 맞는 증세에 대해서만 효과가 있을 뿐 다른 기술적 변화와 진전은 없었다.

    전통의학인 한의학이 소멸되지 않고 명맥을 이어온 데는 유의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들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의학상식을 잘 숙지하고 이해했다. 또 자신과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건강을 보살피면서 임상과 경험 수집, 이론적 추론을 통해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저서를 집필해 널리 보급했다.

    동·서양 의학의 통합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표적인 유의를 꼽으라면 많은 이가 조선시대 유성룡 선생이나 정약용 선생을 꼽는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도 참다운 유의라 할 만한 이는 있었다.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조헌영 선생이다. 그가 생전에 가졌던 공식적인 직책만 봐도 그의 존재감, 무게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공동으로 구성한 신간회 도쿄지회장,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을 역임했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제헌국회 의원으로도 참여했으며 평생을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의 삶에는 유학적 전통이 깊이 배어 있었다. 경북 영양군 출신인 그의 집안은 대대로 퇴계 이황 선생의 가르침을 추존해온 남인계통이었다. 인격수양과 도덕중시의 학풍을 물려받은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학습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을미 항일 의병전쟁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승기 선생이고 아버지는 조인석이다. 조헌영 선생의 아들은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조지훈이다.

    조헌영 선생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떠나 와세다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했다. 한의학에 입문한 것은 30대 때였다. 자신의 저서인 ‘통속한의학원론’에서 그는 늦깎이 한의학 연구자가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한의학에 관한 저서를 쓴다는 것은 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삼십이 되어서 한의학서를 처음 펴보게 된 것은 한의학이 대중의료에 가장 공헌이 많은데도 쇠퇴해가는 것이 애석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이렇게 밝혔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일본유학 시절에 만난 기생이 폐결핵에 걸려 치료해주고자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나 하듯 조 선생은 1934년 ‘폐병치료법’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이유야 어찌됐건, 그가 한의학에 매료되고 심취한 것은 가난하고 병든 민중의 삶을 외면하기 힘들었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1935년 ‘신동아’에 기고한 그의 글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양의는 훌륭한 진단기계를 많이 갖추어야 하고 약품도 대규모의 설비로 제제해야 하므로 돈이 많지 않으면 치료를 충분히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한의는 약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치료도 하등의 설비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민중의료에 접밀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려 했던  유의(儒醫) 조헌영

    드라마 ‘허준’의 한 장면.

    그렇다면 질병으로 고통에 빠졌으나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는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고자 했던 그가 현실적인 삶에서도 유의로서의 생활에 만족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염치없는 환자들을 향해 뼈아픈 말을 쏟아낸 그의 글에서는 인간적 면모도 물씬 묻어난다.

    “현재도 의가에 가서 남의 바쁜 시간은 생각지도 않고 병 이야기를 두세 시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말 없는 말 다해가며 처방을 얻어가지고 가면서 미안하거나 감사하다는 표정도 없이 가는 무례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유의학자들의 인술에 어린 양하던 민중의 버릇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선생이 저술한 ‘통속한의학원론’은 현대 한의학의 시작이 됐다. 그는 전통적인 한의학에서 벗어나 현대의학과의 접합점을 찾고 이를 보편적, 합리적으로 논증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각기 다른 진리는 진리가 될 수 없으며 동양과 서양의 진리는 단지 다른 모양으로 나누어진 것일 뿐이라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장(腎臟)의 개념에 대해 현대의학적 관점을 차용, 신장이 비뇨뿐 아니라 생식, 내분비작용을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보면서도 호르몬작용에 맞춰 한의학적으로 신장 개념을 설명했다. 그는 침구학에서도 동서양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개념을 도입했다. 음적인 경락은 간지럼을 잘 타며 보호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움츠린다고 말했다. 구타당할 때 복부를 움츠리는 것도 이런 경락작용의 연장이라는 설명이었다.

    동의보감 번역에 참여

    그가 동서양의 의학을 보편적으로 통합할 필요를 느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한의학이 현대의학적 방법을 채택하면서 한의학적인 치료법을 상실해갔기 때문이다. 조 선생은 일본한의학이 증상에 따른 개인 차이를 무시하고 같은 약물로 치료하는 현대의학적 한방요법을 일방적으로 도입, 시행해 한의학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의학이 합쳐져 키메라 같은 괴물이 나왔다고 봤다. 1950년 보사부가 보건의료행정법안의 의료인 규정에서 한의사를 배제하는 법안을 제출하자 민족의학을 말살시켜서는 안 된다며 한의사제도를 지켜낸 것도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다.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려 했던  유의(儒醫) 조헌영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現 갑산한의원 원장.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 이사, 한의학 박사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6·25전쟁 때 납북되어 북으로 간 뒤에도 그는 한의학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세계적 문화유물인 동의보감을 번역하는 작업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동의보감의 경우 한자를 해석한 번역본은 있어도 의미를 번역한 완역본은 현재도 별로 나온 게 없다. 그런 점에서 그가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는 동의보감 번역은 글자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시대에 맞게 문화, 음식, 관제, 복식, 의료 등의 전반적 삶을 고증한 작품으로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북한 보건부 동의원이 만들고 여강이라는 회사에서 출간했다.

    한의학 개혁에 대한 그의 마지막 열망은 유의의 부활에 있었다. 유의적 한의사를 배출하는 것인데 그는 한의사를 뽑는 면접에서 인격적 신망을 가장 중시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 배경에는 민중의 신망을 얻기 위해 의료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한 그의 원칙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유의로서의 한의사는 우리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갑자기 우리의 모습이 두렵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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