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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방청석에서 바라본 재판

  •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

방청석에서 바라본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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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디!

증인신문을 방청하면서 나는 판사로서 증인신문을 하던 일을 다시 회상하게 되었다. 증인신문은 재판의 핵심이다. 증인을 불러놓고 검사, 변호사, 피고인, 재판장이 질문하고 답변을 요구하는 절차다. 증인 입에서 어떤 진술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소송의 승패에 치명적 영향이 있기 때문에 관계자들이 바짝 긴장한다. 증인은 보통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이미 진술서를 썼기 때문에 법정에서도 대체로 그 내용대로 진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막상 법정에 와서는 다른 말을 하는 증인도 수두룩하다. “진술서에는 일일이 말하기 싫어서 그렇게 썼는데 사실은 말입니다…”라면서 검사도 변호인도 예측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럴 때에는 즉석에서 그 상황에 맞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질문’을 해야 하므로 “그 말은 납득이 가지 않는 설명입니다”라는 식의 ‘평가’를 해서도 안 된다.

보기에는 쉬워도 막상 해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순발력이 요구된다. 예리하고도 적절한 질문을 기습적으로 던져서 증인의 모순된 진술을 이끌어냄으로써 판사의 심증을 흔들어버리는 순발력 좋은 변호사도 있다. 그런 질문 하나가 수십 쪽의 서면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은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개는 충실하고 진정성을 담아서 쓴 서면이 무엇보다 위력적이다.

검사나 변호사가 쟁점에서 벗어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 동료 판사가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증인신문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내 방에 찾아와서는 증인신문할 때 법정 한가운데 “뭣이 중헌디!”를 적은 플래카드를 써 붙여놓고 싶다고 푸념해서 크게 웃은 적도 있다.

엉뚱한 질문은 재판장도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기억력이 비상한 판사도 많지만 나는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편이다. 사건이 복잡하고 증인이 많고 신문이 몇 시간째 이어지면 증인들이 한 말을 다 이해하고 기억하기가 나로선 쉽지 않았다. 하루에만 예닐곱 명씩 신문하다보면 일주일만 지나도 사람을 각목으로 때린 사람이 A였는지, B였는지부터 헷갈린다.



재판의 상당 부분은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과거의 어두운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도둑처럼 숨어 있는 기억을 식별해서 현재의 조명 아래 소환하는 일이다. 판사로서 살던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기억과 싸우는 일이었다. 기억을 보완해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수단도 강구하고 싶었다. 요즘은 재판 과정이 대부분 녹음되기 때문에 다음 재판을 준비할 때 이전 재판 과정을 녹음 파일로 들어보면서 기억을 환기하기도 한다. 막상 들어보면 내가 이런 말을 했던가, 할 정도로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가 많다.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한때 나는 법원에 피고인과 증인의 법정 사진을 한 장만이라도 기록에 편철해놓거나 개인 컴퓨터로 볼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었다. 지금은 피고인이나 증인의 사진이 증거로 제출되지 않은 이상 기록에 편철되지 않는다. 나는 활자 자체를 기억하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사람의 얼굴이나 풍경 사진을 보면 기억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유엔국제재판소에서 일할 때에는 증인들과 피고인의 사진이 증인신문조서 앞에 붙어 있어 기억을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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