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금융권 두 거목 황영기 강정원

공격적 영업 주도한 승부사 VS 리스크 관리 중시한 정통 뱅커

  • 류정일│헤럴드경제 시장경제부 기자 ryus@heraldm.com│

    입력2009-10-08 17: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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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우리은행장 재직시 파생상품 투자 실패로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으면서 4반세기 평행선을 달려온 황 회장과 강정원 국민은행장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각각 검투사와 황소에 비유되면서 상반된 경영 스타일을 보인 황 회장과 강 행장. 국내 금융계 성층권 인사들 가운데 이들처럼 대조적인 경영 스타일과 행보를 보인 경우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금융권 두 거목  황영기         강정원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왼쪽). 강정원 국민은행장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은 국내 굴지의 삼성그룹에서,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외국계 은행에서 주요 경력을 쌓아 다른 듯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금융권에서 두각을 나타낸 출발점은 비슷했다.

    이들은 우선 ‘범(汎)이헌재 사단’으로 일컬어진다. 과거 이헌재 펀드 출범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던 황 회장은 ‘헌재 리’도 인정하는 인물이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고교(경기고) 후배인 강 행장은 과거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시절 서울은행장에 발탁됐다. 조금만 시곗바늘을 되돌려보면 두 사람은 1980년대 중반 투자은행 뱅커스 트러스트에서 함께 근무하며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금융권에서는 30대에 뱅커스 트러스트에서 근무했던 시절부터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길을 걸을 준비 과정을 마쳤다고 보고 있다.

    1975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했던 황 회장은 파리바은행을 거쳐 1982년 8월 뱅커스 트러스트 서울지점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국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씨티은행 본사에 입사한 강 행장은 1983년 12월 뱅커스 트러스트에 합류한다. 1989년 4월 황 회장이 친정인 삼성그룹으로 복귀할 때까지 두 사람은 6년 가까운 세월을 뱅커스 트러스트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지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나란히 30대의 대부분을 보낸 뱅커스 트러스트는 어떤 회사였을까. 미 샌디에이고대학 법대 프랭크 파트노이 교수는 1980년대 중후반 살로먼 브라더스, CS 퍼스트 보스턴과 함께 뱅커스 트러스트를 시장의 기만과 부패를 불러일으킨 주범으로 평가했다. 파트노이 교수는 2003년 저서 ‘전염성 탐욕’(Infectious Greed)에서 1987년 찰리 샌포드 회장이 취임한 이후 뱅커스 트러스트는 호기심 많고 도전적이며 창의력이 풍부한 젊은이들에게 수십만달러의 인센티브를 내걸고 은행 자본을 투기적인 거래에 베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썼다.

    세계 각국 통화를 대상으로 위험천만한 파생상품 거래를 하면서 뱅커스 트러스트는 천문학적인 투자이익을 냈고 곧장 다른 투자은행들이 따라 하면서 뱅커스 트러스트의 위험한 베팅은 선진 금융기법으로 포장돼 전세계로 감염돼나갔다. 그러나 1988년 결산에서 수년간 천문학적 금액의 파생상품 거래에서 발생한, 그러나 당시 회계 시스템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던 8000만달러에 달하는 손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뱅커스 트러스트는 수년간 큰 곤욕을 치러야 했고 10여 년 뒤 도이체방크에 매각됐다.



    황은 영업현장, 강은 리스크 관리

    30대 후반이던 두 사람은 뱅커스 트러스트 시절부터 스타일이 사뭇 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 회장이 영업현장을 누볐다면 강 행장은 주로 리스크 관리와 경영에 관여했다. 한 금융계 인사는 “1980년대 후반 실화에 근거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증권 브로커인 주인공이 결국 수갑을 찬 채 끌려가는 장면이 나와 화제가 됐지만 사실 영업현장을 뛰는 금융인 중 영화의 비극적 결말보다는 영화 중반 엄청난 인센티브와 호화로운 생활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1990년대 초반까지 연이은 미국발 금융부정 사건을 외신으로 접하면서 국내 금융계에서도 영업맨과 관리인력 사이에서는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고 회고했다.

    뱅커스 트러스트에서 두 사람의 보다 구체적인 행적에 대한 증언은 없지만 미국 본사 사정이 여의치 않자 ‘확장’보다는 ‘수성’전략을 택했고 이에 따라 관리통인 강 행장의 입지가 굳어지면서 황 회장이 뱅커스 트러스트를 먼저 떠났다는 설도 있다. 이후 황 회장은 삼성 회장 비서실 국제금융담당 이사, 삼성전자 자금팀장, 삼성생명 전무, 삼성증권 사장 등을 거쳤고 강 행장은 뱅커스 트러스트 컴퍼니 서울지점 대표와 도이체방크 서울지점 대표, 서울은행장 등을 거치며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금융권에서는 당시 형성된 각자의 경영 스타일-성장 중심인 황 회장의 공격적인 경영 방식 대 안전성 위주인 강 행장의 신중한 경영 방식-이 이후 은행 경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2004년 드디어 국내 1,2위 은행의 수장으로 다시 만난다.

    2004년 금융권에는 2가지 빅 이벤트가 있었다. 통합 우리은행(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의 합병 은행) 2기를 이끌 회장과 행장 선임건과 김정태 행장 이후 국민은행을 이끌 수장의 모색이었다. 그해 4월에는 황 회장이 우리금융 회장 겸 우리은행장으로 금융권 중심에 화려하게 급부상했고, 11월에는 강 행장이 국내 최대인 국민은행장으로 등장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부실 은행이 정리되고 몇 개 남지 않은 은행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모 은행장의 표현을 고스란히 빌려 ‘가문의 영광’임에 틀림없었지만 두 사람의 출발선상에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기류가 흘렀고 이는 다시 한번 두 사람의 경영 스타일을 구분 짓는 계기로 작용했다.

    은행장으로 등장한 두 사람

    2004년 3월초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는 황 회장을 서울 명동의 은행회관으로 호출했다. 기업은행장에 오른 고 강권석 행장과 함께였다.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삼성 출신인 황 회장의 우리금융행(行)에 난색을 표했지만 이 부총리가 ‘황영기 카드’를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그 결과 사실상 내정이 확정된 직후였다. 이 부총리는 황 회장에게 공적자금 100% 회수와 주가 관리를 당부하면서 “야무지게 경영하라”고 특별히 지시했다. 민영화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이에 황 회장은 “지배구조가 안정될 때까지 회장과 행장이 분리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회장과 행장을 겸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요구했고 이 부총리는 “공부를 좀 했구먼.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괜찮군”이라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현직 부총리의 신임을 바탕으로 우리금융 회장과 우리은행장을 겸임하게 된 황 회장은 내정이 발표된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증권사뿐 아니라 보험사도 매물로 많이 나와 있다. 어떤 회사를 인수할지 검토할 계획”이라며 취임도 하기 전에 자신의 구상을 밝힐 정도로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반면 그해 11월 어느 날 신임 국민은행장으로서 당시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을 인사차 방문한 강 행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윤 위원장의 첫마디는 “축하합니다”가 아닌 “국민은행이 큰일입니다”였던 것이다. 접견실에 앉은 강 신임 행장에게 윤 위원장은 금감원 종합경영실태평가 결과라며 두툼한 서류 뭉치를 보여줬다. 자산건전성, 수익성, 자본적정성 및 경영관리 부문에서 취약점이 드러난 상태였다. 국민은행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당시 국민은행은 자산이 200조원에 달했지만 급격한 자산증가 속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며 “감독당국에서는 ‘이러다 망한다’는 위기감이 매우 컸다”고 회고했다.

    감독당국 수장과의 첫 만남에서 덕담 대신 경고를 받은 강 행장은 큰 부담을 안고 임기를 시작했으며 당연히 경영의 초점을 안정성에 맞췄다. 그 결과 2004년 9월말 3.26%로 은행권 최고였던 국민은행의 연체율은 올해 3월말 1.05%로 은행권 최저 수준으로 안정됐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도 13.16%로 국내 최고 수준으로 개선됐다.

    강 행장은 2000년 공적자금이 투입된 서울은행 행장으로 재직할 당시 은행경영 및 조직쇄신과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을 잡음 없이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을 받았다. 2000년 6월 서울은행장에 취임한 그는 일선업무와 후선업무 경계를 없앴고 마케팅 강화, 견제 시스템 정착 등 조직을 대대적으로 혁신했다. 그러나 국민은행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못 됐고 강 행장은 이후 3년간 경쟁 은행들이 중기대출, 주택담보대출, 해외진출, M&A 등으로 외연을 키우는 동안 바짝 엎드린 채 몸 추스르기에 전념해야 했다.

    금융권 두 거목  황영기         강정원

    2008년 KB금융지주 출범행사에서 황영기 회장(맨왼쪽)과 강정원 행장(왼쪽에서 세 번째)

    대립각

    강 행장 전임인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은 35년 금융인생을 접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금융시장의 발전은 규제당국과 시중은행이 싸우는 과정에서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김 전 행장의 이런 생각 때문에 국민은행은 감독당국과 불편한 관계로 지내왔고 다른 은행들은 그 뒤에 숨어 반사이익도 봤지만 강 행장은 달랐다. 2004년 처음 취임하며 “감독기관과 원만한 관계 유지가 중요하다”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당시 금융당국 최대 골칫거리였지만 김 전 행장이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반대했던 LG카드 지원 문제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평소 은행권을 향해 독설을 퍼붓던 윤증현 당시 금감위원장이 “강 행장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금융계 관계자는 “평소 온화하고 합리적인 강 행장의 인간적인 스타일이 감독당국과도 잘 조화된, 그래서 국민은행이 강 행장 체제에 접어들어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반면 황 회장은 감독당국은 물론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예보)와도 투쟁의 시간을 보냈다. 우선 우리금융 회장 겸 행장 임기 3년간 우리금융의 자산을 100조원이나 늘린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황 회장 특유의 공격적인 경영 스타일이 빛을 발하며 우리금융은 눈부신 외형성장을 했지만 감독당국 입장에서는 그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감독당국 관계자는 “치솟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심지어 주택담보대출 관련 전산을 막도록 지시하기도 했지만, 황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며 “우리은행 안팎에서 영업을 강화한다는 말만 흘러나와도 바로 은행권 전체에 경고성 전화를 돌리느라 바빴다”고 말했다.

    하지만 황 회장에 대한 노골적인 제재는 없었다. 이처럼 우리은행의 위험스러운 공격적 투자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금융당국 책임론도 거론된다.

    한편 황 회장이 공공연히 민간 출신 첫 금융당국 수장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면서 감독당국의 심기도 불편해졌다. 황 회장은 평소 대주주인 예보를 두고 “상머슴 정도에 불과하다”고 거침없이 표현해왔다. 그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우리금융은 국민의 소유”라며 “공복으로서 예보는 국민에게는 머슴이고 고작 예보가 상머슴, 우리금융이 하머슴에 불과한데 머슴끼리 너무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분기마다 예보가 정해둔 경영이행약정(MOU)의 이행 정도를 예보에 보고하는 자리를 일컬어 황 회장은 “손톱검사하고 머리 감기고 감방에 다시 가두는 식”이라며 치욕스러워 했다. 황 회장은 또 초과 성과급 지급 문제로 예보로부터 수차례 경고, 징계 및 선지급 격려금 회수 등의 조치를 당했다.

    깊고 깊은 갈등의 골은 2007년 3월 황 회장의 우리금융 회장 임기 만료 당시 연임불가로 결론지어졌다. 당시로서는 화려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황 회장은 최종 면접을 볼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물론 당시 예보 내부의 “차기 회장은 황영기만 아니면 된다”는 분위기를 감안하면 놀랄 만한 반전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시기 국책은행장으로서 이례적으로 연임에 성공한 고 강권석 기업은행장과 강정원 국민은행장의 행보와는 비교되는 초라한 퇴장에 황 회장 스스로 자괴감이 컸을 것이다.

    최근 황 회장에 대한 금융당국의 제재와 관련해 여러 가지 설이 나온다. 황 회장을 변호하는 측에서는 황 회장이 정치권 파워 게임에서 밀린 뒤 괘씸죄에 걸렸다고 주장한다. 금융당국 수장을 지낸 한 인사는 이와 관련해 “재임 시절 결정했던 사안이 퇴임 후 문제가 됐다는 황 회장 측의 해명은 부적절하다”며 “지나친 단기 성과주의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재임시절 결정한 사안의 판단 유효기간이 훨씬 길어졌다”고 판단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그는 “황 회장의 지나친 개인성향과 뱅커답지 않은 공격적인 경영행태, 예보 등 정부로 대변되는 주주에 맞서는 부적절한 처신 때문에 화를 키운 꼴”이라고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같은 은행장 자리였지만 운신의 폭은 크게 달랐다. 국내 금융계 메가딜이었던 외환은행과 LG카드 인수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국민은행의 건전성이 어느 정도 확보된 뒤 강 행장은 성장전략의 일환으로 외환은행 인수전에 참여했고 우선협상대상자까지 가봤지만 LG카드 인수 의지를 불태웠던 황 회장은 예보에 제동이 걸렸다. 민영화를 앞두고 공적자금 투입 기관이 무리하게 인수전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민감한 얘기지만 보수 측면에서도 황 회장은 강 행장에게 밀렸다. 취임 초 강 행장은 70만주에 달하는 스톡옵션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받았지만 황 회장은 2005년 초 스톡옵션 부여를 추진했다가 또다시 예보에 밀려 부결됐다.

    승부사 VS 전략가

    그럼에도 황 회장의 승부사 기질은 변함없었다. 큰 그림이 완성되면 자잘한 부작용과 관계없이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황 회장이 우리은행 경영전략회의에 참석한 영업본부장들에게 단검을 선물했고 비슷한 시기 강 행장은 펜을 선물했다는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경영 스타일과 성격을 극적으로 드러낸 일로 호사가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또 “우리 등에 칼을 대면 우리도 뒤통수를 치겠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불사하면서 공격적인 영업 전략을 구사한 점도 승부사로서 황 회장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런 황 회장의 승부수로 3년간 우리은행만 놓고 볼 때 60조원 이상의 자산 증가세를 이뤘다. 웬만한 은행 하나를 인수한 것에 버금가는 성장이었다. 황 회장의 화끈한 공격적 경영에 우리금융의 주가는 취임 무렵 8000원선이던 것이 퇴임 직전에는 2만3000원 수준까지 치솟았고 이에 증시라는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투자자들은 검투사 황 회장의 화끈한 퍼포먼스에 꽃을 뿌렸다.

    황 회장은 우리은행 시절, 직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해왔다. 공적자금이 투입돼 어깨가 처진 은행원들에게 채찍을 가하며 실적 극대화를 요구했지만 결국은 열패감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그는 “금융회사는 기본적으로 자산 규모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며 임직원에게 폭탄주를 돌리며 독려했다. 예보의 경영 가이드라인인 MOU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수차례 특별성과급을 지급하기도 했다. 황 회장 시절, 우리은행 본점이 위치한 서울 회현동 인근에서는 밤만 되면 황 회장이 개발했다는 건배 구호인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를 연신 외치며 폭탄주를 들이켜는 우리은행 임직원들이 넘쳐났다.

    삼성이라는 친정을 뒀다는 점 때문에 황 회장은 징계를 받기도 했다. 삼성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에게 차명계좌를 개설해줬다는 혐의로 금융당국으로부터 주의적 경고를 받았고, 삼성생명 전무 시절에는 삼성자동차 등 계열사를 부당 지원한 혐의로 1999년 말 문책경고도 받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초대 금융위원장과 산업은행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끝내 낙점을 받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자로 잰 듯한 정교한 경영 스타일로 한때 ‘시어머니’란 별명을 얻었던 강 행장은 스스로 즐겨 쓰는 사자성어 ‘호시우보(虎視牛步·호랑이처럼 예리한 관찰력과 소처럼 신중한 행보)’를 실천하듯 집무실에 부서별 업무보고서를 정리해두고 사안에 따라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눠 진행상황을 치밀하게 점검하면서 성장해나갔다. 일례로 강 행장은 취임 직후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지적을 받았지만 치밀한 전략을 세워 실천한 끝에 자존심을 회복했다. 이는 다름 아닌, 국민은행이 가장 큰 은행이지만 가장 불친절한 은행이라는 지적이었다. 10여 년 전 국내 금융계 대표적인 엘리트 집단이던 한국장기신용은행을 인수한 뒤 고품질화를 추구했지만 강 행장 취임 전 대표적인 서민은행인 주택은행이 새로운 식구로 편입되면서 급격하게 커진 몸집의 국민은행은 창구를 찾은 고객에게 “줄 잘 서라”고 거만하게 소리치기 일쑤였다.

    강 행장은 곧장 고객만족도를 최상의 가치로 부여하고 내부 신상필벌에 이를 적극 반영했다. 과거 고객만족부의 부장이 맡았던 ‘민원조정협의회’ 의장직을 본인이 직접 맡으며 행장 직속으로 수직 격상시켰다. 그리고 2006년 12월 강 행장은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특별 방송을 진행하면서 한국생산성본부가 선정해 발표하는 소비자 만족지수인 국가고객만족도(NCSI) 조사에서 은행부문 1위에 올랐다는 내용을 알렸다. 평소 무미건조한 말투의 강 행장이었지만 이날 그는 ‘가슴이 벅찬’ ‘국민은행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어떤 성과와도 바꿀 수 없이 대단히 소중한’ ‘한편의 서사시와 같은 감동’ ‘신기원을 이뤄낸’ 등 화려한 수사를 거침없이 사용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보호신청을 하기 10여 일 전인 지난해 9월초 황 회장은 당시 산업은행이 인수를 추진 중이던 리먼에 대해 투자 차원의 접근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만 그는 “산은으로부터 직접 요청을 받지는 않았다”며 “아마 강 행장에게 연락이 갔을 텐데 잘 안 돼서 나한테는 따로 연락이 오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9월말 국민은행 사외이사인 조담 전남대 경영학과 교수는 “강 행장이 부채담보부증권(CDO) 투자를 요청받았지만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다”며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발행한 CDO는 수익률이 높긴 하지만 위험 역시 높다는 것은 상식이란 점에 강 행장은 주목했다”고 말했다.

    실제 강 행장은 원칙주의자이고 머니게임에 강한 냉정한 기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단적인 예로 불경기 중소기업 금융과 관련해 은행이 우산을 뺏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강 행장은 서슴없이 “그것이 은행의 속성이고 금융의 현실이다. 우산을 빼앗지 않으면 결국 은행에 국민 혈세인 공적자금이 들어가는 것 아니냐”고 잘라 말했다. 또 국민은행이 해외진출의 회심작으로 투자한 인도네시아 BII 은행의 보유지분 매각을 통한 특별이익 발생과 관련해서도 그는 “800여만달러를 투자해 연평균 41%의 수익을 올린 셈이고 우리가 욕하는 론스타처럼 해외에서 멋지게 ‘먹튀’를 한 셈인데 금융은 이런 걸 잘해야 한다”고 자평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백아절현(伯牙絶絃)?

    지난해 국민은행이 지주회사로 전환을 선언하고 새로운 회장을 물색하면서 시장의 관심은 강 행장의 겸임 여부에 모아졌다. 강 행장도 내심 바랐다. 그러나 연초 금융위원장과 산업은행장 선발 과정에서 고배를 마셨던 황 회장이 막판 뒤집기에 성공하며 제1대 KB금융지주 회장에 낙점됐다. 검투사와 황소의 동거를 두고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평가와 한바탕 잡음이 일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물론 작은 충돌은 있었다. 올 초 임기가 만료되는 일부 사외이사 연임 문제를 두고 두 사람은 의견이 갈렸지만 적정선에서 합의했다. 그리고 KB지주가 증자를 하면서 황 회장은 2조원 이상을 생각했지만 강 행장의 반대로 1조원 증자에 그쳤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강 행장의 1승1무로 결론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사실 두 사람은 물론 KB지주와 국민은행에 별다른 사건이 생길 틈이 없었다. 새로운 공격경영의 일환으로 취임과 함께 황 회장은 ‘대등합병론’을 내세웠지만 곧바로 터진 리먼 사태로 M&A 시장이 급랭하면서 사실상 지난 1년간 황 회장은 잠행을 거듭해야 했고 강 행장은 묵묵히 행장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황 회장의 일신상 이상 기류가 감지된 것은 올봄. 친정이던 우리금융이 잇따라 실적을 발표하면서 대규모 파생상품 투자 손실의 규모가 드러났고 황 회장에 대한 성층권의 내사설이 나돌았다. 강 행장에 비해 비교적 정치적인 줄타기를 잘했다는 황 회장이었지만 이번만은 녹록지 않았다. 실제 그는 연임을 염두에 두고 2006년말 우리은행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전격 선언했고 연임의 고배를 마신 뒤 마주한 지난 대선에서는 이명박 캠프에 몸을 담은 뒤 예상을 깨고 KB지주 회장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한 금융권 고위인사는 “5월께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 때 수행단 명단에서 황 회장이 제외되면서 일각에서는 ‘정권 내부의 파워게임에서 힘을 잃은 것 아니냐’는 추측이 급속도로 퍼졌다”며 “현 정권 실세 친인척의 도전으로 황 회장이 좌초했다는 말도 있지만 공격적인 스타일에 지나치게 스마트한 황 회장에 대한 견제와 도전도 많았다”고 말했다.

    백아절현(伯牙絶絃).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진나라에서 고관을 지낸 거문고의 달인 백아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 종자기가 있어 우정을 나눴다. 그러나 갑작스레 종자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다며 애지중지하던 거문고 줄을 스스로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뜯지 않았다.

    30대 젊은 시절을 한 회사에서 보냈고 국내 1,2위 은행의 수장으로 경쟁했으며 결국 KB에서 회장과 행장으로 만나 동고동락해온 황 회장과 강 행장. 백아절현까지는 못되더라도 애증이 뒤섞이며 4반세기를 이어온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 또는 마무리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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