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호

MB의 ‘역사적 소명’

  • 입력2010-01-05 1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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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경인년(庚寅年)은 6·25전쟁 60주년이고, 4·19혁명 50주년이자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다. 더 멀게는 한일강제합방 100주년이기도 하다.

    영국의 사학자 E. H 카의 말대로 역사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우리의 위정자들도 어느 행사에 비중을 두고 더 많은 예산을 집행할 것인지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과거와 진지한 대화부터 해보는 것이 옳은 자세일 터다. 역사에마저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 어떤 기념행사는 성대하게 하고, 어떤 기념행사에는 상징적인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마저 금하게 한다면, 그 좀스러운 작태가 진정 역사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보수우파 정권이라면 좀 더 어른스러워야 한다.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따로 떼어내어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세기의 역사로부터 이번 글을 시작하는 것 도 그런 연유에서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昇遐)하자 둘째아들 순조가 11세 어린 나이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1805년 정순왕후가 죽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실권을 잡았다. 안동 김씨, 외척세력의 세도정치는 그렇게 막을 열었다. 순조의 손자인 헌종은 1834년 11월, 8세에 즉위했다. 이번에는 순조의 비(妃)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1849년 6월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의 세도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강화도령’ 원범을 왕위에 올렸으니 그가 바로 철종이다. 원범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로 아버지가 역모에 연루된 죄로 강화도로 유배됐던 젊은이다. 열아홉 살 농사꾼에서 졸지에 왕위에 오른 철종이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벽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조 사후(死後) 반세기 넘게 지속된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정치는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민생을 도탄(塗炭)에 빠뜨렸다. 일문(一門)의 영달(榮達)에만 눈이 어두웠던 외척세력은 권력을 독점하고 백성을 수탈했다. 인재를 뽑던 과거제도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의 장터로 변질되었고, 돈으로 양반을 사는 세상이 되면서 신분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전국 곳곳에서 탐관오리들이 극성을 부렸고, 세수(稅收)가 줄면서 기층 민중인 농민에 대한 착취가 극심해졌다. 그 결과 제 땅에 농사짓던 이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소작인은 농사일을 버리고 떠도는 유민(流民)이 되었다. 그러나 유약했거나 무능했던 임금들은 세도정권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격이어서 나라의 근본이 무너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하지 못했다.

    1863년 12월, 12세의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정치는 막을 내렸다. 대원군은 내정에 대한 일대 개혁에 나서 기운 왕조를 바로 세우려 힘썼다. 그러나 그는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나라 밖 흐름을 척화(斥和)의 쇄국(鎖國)으로 막으려 했다. 그의 완고한 쇄국정책은 성인이 된 고종이 친정(親政)에 나서는 1873년까지 지속됐다.



    한편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黑船)의 위협에 굴복해 개항(開港)했다. 그 후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봉건막부체제를 타파한 뒤 서양 문물과 과학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치를 세웠다. 일본은 불과 8년 후인 1876년 조선을 압박해 그들이 미국에 당한 것과 똑같은 불평등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조선 침략의 첫발을 뗀 일본은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1910년 마침내 조선을 병합했다. 결국 정조 사후 한 세기에 걸쳐 조선과 일본에 나타난 판이한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역사가 두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일제(日帝)의 식민통치와 남북분단, 전쟁으로 점철되는 20세기의 비극은 ‘통한(痛恨)의 19세기’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겠으나 100년 전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남북이 분단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참혹한 전쟁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 후 60년이 지나도록 정전(停戰)상태에서 적대와 갈등을 반복하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 되지도 않았을 터다. 정조 사후 100년을 ‘통한의 역사’라고 하는 이유다.

    일제에 병합된 1910년 이후 100년은 이전 세기에 비한다면 ‘기적의 역사’일 수 있다. 비록 36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고 분단과 전쟁, 가난과 독재의 고통을 겪어야 했으나 대한민국은 이제 더는 약소국이나 개도국이 아니다. 선진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 중 후진국에 원조를 하는 최초의 나라가 됐다. 세계 주요나라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중심 국가가 됐다. 100년 전의 눈으로 본다면 실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대한민국 국민에게 ‘당신은 우리 역사가 자랑스럽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자신하기 어렵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국민이 과연 얼마일지 두렵다.

    물적 성장은 이루었지만 정신적 안정을 얻기에 대한민국 사회는 지나치게 갈등적이다. 고속성장을 이루는 데 바탕이 된 강한 평등의식은 급속하게 진행되는 빈부 양극화 아래서 계층 간 갈등을 첨예화하는 독소로 작용하고 있다. 뿌리 깊은 지역주의는 여전히 사회의 질적 발전을 저해하고 있으며, 부자가 존경받지 못하는 풍토 또한 천민자본주의의 구습과 맞물려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킨다.

    우파 성장론자들은 반(反)기업정서를 탓하지만 일부 재벌의 2세, 3세들이 회삿돈을 빼돌려 해외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리는 등의 작태를 근절하지 못하는 한 보편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하물며 그런 재벌의 총수가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래서 검찰이 수사에 머뭇거리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중첩된 여러 요인 중에서도 대한민국 사회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최대 요인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리더십에 있다고 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그가 추구했던 가치에 대한 평가야 어떠하든 가치 실현을 위한 리더십이 미숙하고 분열적이었다는 점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노무현의 가치’를 대체로 인정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어떤가.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CEO(기업 최고경영자)형 리더십이다. 절차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경험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도 가미된다. 청계천 성공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4대강도 문제없다는 식이다.

    이제는 여기에 ‘역사적 소명(召命)’까지 부가됐다. 욕먹어도 좋다, 인기 없어도 상관없다. 오로지 나라의 선진화를 위해 나의 길을 가련다. 나중에 잘했다는 소릴 들으면 되지 않나. 비판은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이며 그런 비판여론쯤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무시하거나 통제되어야 마땅하다. 여러 차례 공언한 약속을 깨고 국민에게 사과를 하면서까지 세종시 원안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양심’(이 대통령은 양심상 세종시를 원안대로 건설할 수 없다고 했다)의 차원을 넘어선 역사적 소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고 권력을 가진 지도자로서 대통령은 부박한 민심만 좇아선 안 된다. 미래를 위해 때론 여론을 거스르는 결단을 해야 한다. 역사적 소명을 위해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 격렬한 반대에 의연하게 맞서는 용기도 보여줘야 한다.

    1930년대 초 미국의 대공황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보수파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뉴딜정책을 수행함으로써 미국경제를 파탄의 위기에서 건져냈다. 그 외에도 지도자의 결단이 역사의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례는 적지 않다. 이 대통령이 사례로 들기 좋아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하나의 예다.

    하지만 지도자의 결단이 반드시 역사적 소명에 근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업적 쌓기나 정파적 이익을 위한 독선일 수도 있다. 더구나 아무리 역사적 소명이라고 해도 다수 국민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노력조차 생략한 채 건설공사 공기 단축하듯 밀어붙인다면 부실공사의 위험도가 높아지는 건 둘째 치더라도 비민주적 절차에 대한 저항과 사회세력 간 갈등으로 세상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개발독재가 먹히는 시대도 아니지 않은가.

    다시 역사로 돌아가자.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반공(反共)은 시대적 소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반공을 무기로 독재와 부패를 일상화했다. 4·19혁명은 그래서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재론할 지면은 없다. 명백한 것은 그의 근대화 노력이 민주화의 토대가 됐다고 할지언정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마저 호도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80년 5월 광주항쟁’에 대한 얘기도 길게 할 여유는 없다. 한 가지 지적한다면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만행이 대한민국에 자생적 좌파를 출현시켰고, 그 후유증이 오랜 시간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끼쳐왔다는 사실이다.

    MB의 ‘역사적 소명’
    全津雨

    1949년 서울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 초빙교수

    저서: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오늘날 이 대통령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은 무엇인가. 경제성장과 빈부 양극화 완화다. 선진화의 초석을 깔기 위해 개헌도 해야 하고, 행정구역도 개편해야 하고, 교육제도도 바꿔야 하고, 우파정권의 재창출도 이뤄내야 한다지만 ‘성장을 통한 골고루 잘사는 사회’야말로 이 대통령에게 부여된 시대적 역사적 소명이다. 2010년 우리 경제는 5% 이상 성장하지만 고용사정은 여전히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성장과 분배의 상충하는 목표를 이루는 최선의 방책은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종시와 4대강 사업도 이 역사적 소명의 하위개념이자 실천수단일 수 있다. 하위개념과 실천수단에 집착해 조급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정작 목표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빚어서야 되겠는가. 새해에는 보다 긴 호흡으로 역사적 소명을 생각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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