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호

역사의 뒤안으로 스러질 소금땀, 구슬땀의 흔적

첫 번째 르포 : 가리봉동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0-01-06 15:3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서울은 헐리고 새로 지어지면서 근대를 맞았고, 다시 헐리고 새로 지어지면서 탈근대를 살아간다. 2010년 상반기 가리봉시장이 철거되면 ‘가리봉동’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도시를 내버려둬 자라게 하는 일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역사의 뒤안으로 스러질 소금땀, 구슬땀의 흔적
    수도권 전철 1호선은 구로역에서 둘로 갈린다. 3, 4번 승강장서 천안행 열차, 인천행 열차가 제가끔 불을 밝힌다.

    가산디지털단지역 4번 출구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향한다. 4번 출구로 나가면 ‘밸리’ ‘타워’라고 이름 붙은 고층건물군을 만난다. 가리봉동, 가산동엔 밸리 타워가 유난히 많다. 아파트형 공장인데 겉모습, 속살이 아름다운 건물은 별로 없다.

    가리봉동은 구로구에서 옛 정취가 가장 많이 남은 곳이다. ‘가리봉’에서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 야트막한 봉우리가 이어붙어 고을(谷)을 이뤘다 해서 가리봉이란 명칭을 얻었단 말도 있다.

    가리봉시장으로 가려면 3번 출구로 나가야 한다. 3번 출구의 가파른 계단을 오른 뒤 공단오거리 쪽으로 걷는 서민(庶民)의 뒷모습은 급강하한 수은주처럼 얼어붙었다. 가리봉동은 해보다 일찍 아침을 연다. 새벽부터 일용직 노동자로 북적인다. 막품팔이 자리를 찾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다. 구직자들은 폐목(廢木)을 태우면서 추위를 피한다.

    ‘노가다’ 시장엔 한국인, 중국동포가 섞였다. 비율로 보면 8대 2로 한국인이 더 많다. 외국인이 일용직으로 일하는 건 불법이다. 한국 저소득층을 보호하려는 국가의 조처.



    가리봉동은 촌스러움의 대명사다.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친 가수가 노래를 불렀고, ‘다방 레지 미쓰김’은 커피를 나르면서 웃음을 팔았다. 지금도 공인중개사 사무소보다 ‘중부인력’ ‘남부인력’ 같은 간판을 내건 인력회사가 더 많은 저개발 지역.

    가리봉동의 소금땀, 구슬땀이 한국을 키웠다. 1970, 80년대엔 운동권 학생들이 위장취업을 해 치열하게 노동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가리봉시장에 밤이 익으면

    피가 마르게 온 정성으로

    만든 제품을

    화려한 백화점으로

    물 건너 코 큰 나라로 보내고 난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두며

    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박노해 시인이 1984년 지은 시 ‘가리봉시장’의 한 대목이다. 산업역군→가출청소년→중국동포 순서로 거리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시장골목엔 지금도 몸 비벼 밥 버는 이들의 땀냄새, 발냄새가 가득하다.

    ‘산업체 야간학교 뒤늦은 에이 비이 씨이 배우던 옹골찬 누이들’(정세훈 시 ‘물새’ 중에서)은 ‘겨레의 슬기와 땀방울을 하나로 모아 수출산업의 터전을 닦고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서울디지털산업단지 선포기념 표지석 비문) 이곳에서 가족을 먹이고, 대한민국을 키웠다.

    ‘가리봉동’은 가리봉균형발전촉진지구개발사업에 따라 2010년 상반기 가리봉시장이 철거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밥벌이의 고단함을 위로받고 싶거나, 고무줄처럼 질긴 사람 냄새를 맡고 싶다면, 더 늦기 전에 가리봉동에 가보라! 누이, 형, 어머니,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역사의 뒤안으로 스러질 소금땀, 구슬땀의 흔적
    금단반점 아가씨

    오전 11시, 중국식당이 하나둘씩 문을 연다. 삼팔교자관은 궈바로우, 가지볶음, 마파두부를 잘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인 내외의 성격이 깔끔해선지 수저를 티슈로 일일이 닦아 상에 올린다. 왕중왕미식성은 100명 넘는 손님을 동시에 받을 만큼 규모가 크다. 1층에선 꼬치를 팔고, 지하에선 요리를 낸다. 10명이 회식해도 술값 포함 10만원이면 돈이 남는다. 하얼빈맥주, 라오콴맥주에 즈란에 찍은 양꼬치를 곁들이면 요기가 된다. 둥베이(東北)요리를 내는 금단반점서 일하는 중국인 웨이트리스는 곱다. 고운 색 티셔츠 하나 걸쳤는데도 귀티가 난다. 옷소매로 땀을 훔치면서 심줄꼬치를 굽는데, 밑반찬을 내오면서 나를 보고 수줍게 웃는다.

    가리봉시장은 한국에 온 중국인, 중국동포가 가장 먼저 찾는 곳이다. 中國食品, 菊花館 國際電話房 같은 간판을 내건 상점이 줄을 이뤘다. 이 골목에선 컵술보다는 커우베이주, 건두부보다는 간더우푸, 연변보다는 옌볜이라고 발음해야 소통이 쉽다. 한글로 적은 메뉴도 없고, 종업원도 한국어를 잘 못한다.

    한국계 중국인이 가리봉동에 자리 잡은 때는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진 뒤부터다. 구로공단이 번성하던 1970년대 쪽방촌이던 이곳에 저렴한 숙소를 찾는 중국동포가 입소문을 타고 몰려들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동포 밀집지역으로 변모했다.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통계에 잡힌 사람만 4000명이 넘는다. 1만5000명 남짓한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중국동포. 김용필 중국동포타운신문 편집국장은 “중국동포들이 구로공단이 쇠락한 후 슬럼화한 가리봉시장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보증금 100, 월세 15’라고 적은 벽보가 곳곳에 붙었다. 중국동포들은 보증금 100만~200만원, 월세 15만~25만원짜리 방에 2명씩 사는데 둘이 눕기엔 비좁을 만큼 방이 작다. ‘쪽방’은 1970년에 지은 양옥인데, ‘벌집’이라는 세간의 말 그대로 방이 다닥다닥 붙었다.

    사글셋방이 부담스러운 이도 많다. 보증금 100만원조차 아쉬운 이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면서’ 쉼터에서 잔다. 쉼터는 쉬는 곳이 아니라 숙소다. ‘남자전용쉼터’란 간판을 내건 한 업소의 숙박료는 하룻밤 7000원. 1주일 숙박권은 4만5000원, 15일 숙박권은 8만5000원, 1개월 숙박권은 14만원에 팔린다.

    중국동포들의 바람은 돈을 벌어 영등포구 대림동, 관악구 신림동·봉천동, 광진구 자양동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대림동 사글셋방은 보증금 500만~2000만원, 월세 25만~50만원 수준이다.

    보증금 100, 월세 15

    가리봉동과 대림동을 잇는 5618번 버스는 중국동포가 주 고객이다. 5618번 버스에서 만난 박동길(43)씨는 “2년 전 가리봉동을 떴다”면서 웃었다.

    가리봉동 중국직업소개소에서 만난 중년 남성에게 “한국에 살아보니 어떠냐”고 묻자 “돈 벌긴 좋다”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할아버지 고향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돈 모으면 흑룡강으로 돌아간다”고 딴청을 부렸다.

    다른 남자가 대화에 낀다. 하얼빈에서 온 김수응(44)씨다.

    “길 가는 조선족한테 물어보소. 중국이랑 한국이랑 운동경기하면 누구 응원하는지.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동족으로 대해준 적 없어. 뭣하러 한국을 좋아하겠소. 그런데도 나는 중국 공민보다 한국 국민이 되고 싶소. 조건을 맞추는 대로 국적을 회복할 거요.”

    그는 대림동에서 식당을 운영한다. 가게를 내는 데 5000만원이 들었단다. 3000만원이면 작은 식당을 낸다고도 했다.

    “겉으론 동포라고 부르면서 속으론 무시하는 거 우리가 다 알지. 중국의 고향보다 서울이 좋다는 나 같은 사람 별로 없을 게요.”

    지금은 크게 줄었지만 과거엔 임금을 체불하거나 근로자를 학대하는 일이 많았다. 12시간 넘게 일하는데도 월급이 60만~70만원인 곳도 허다했다. 중국동포 시인 김윤배는 ‘조선족의 노래’라는 시에서 모국의 야박함을 고발한다.

    우리를 동포라고 부르지 마라

    우리는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에서 온

    조선족일 뿐 중국동포라고 부르지 마라

    살아 생전 가리봉시장 메케한 중국 거리

    건두부와 컵술로 분노를 달랬었지만

    조국이 우리를 배신했다고 말하지 않으마

    내 조국 땅에 숨어 들어와 일하는

    조선족, 노임 깎고 체불하고 구타했다고

    말하지 않으마 밥이 치욕인 줄 알아버린 탓이다

    중국경제 부상과 함께 중국동포 처지도 좋아졌다. 자양동에 살림집을 가진 중국동포는 한국인을 상대로도 장사한다. 개중엔 대박을 터뜨려 부(富)를 일군 사람도 많다. 마포구 연남동, 중구 명동의 중국식당과 다른 건 탕수육, 자장면, 짬뽕이 아니라 양꼬치, 훠궈 같은 오리지널을 판다는 점이다.

    삼팔교자관, 금단반점 같은 곳도 투자이민 형식의 사업체다. 창업 형태로 투자하면 영주자격이 나오고, 국적 획득도 수월하다. 이영환(41)씨는 “중국은행에 저축해놓았던 돈을 원화 환율이 바닥칠 때 역송금해 한국에서 가게를 차린 조선족이 적지 않다”면서 “한국 국적을 회복하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지하철 2, 7호선 건대입구역에서 내린 뒤 6번 출구로 나가 70m가량 걸어가면 延吉冷麵, 松花羊肉串, 梅花飯店 같은 간판이 어깨 싸움하는 거리가 나온다. 600m 길이 골목에 중국식당만 60여 곳. 가리봉동, 대림동에서 목돈을 모은 뒤 ‘2호선을 타고’ 이주해온 것이다.

    대림역 맞은편에 위치한 ‘스촨훠거’의 국물요리는 입에 맞지 않았다. 화장품 냄새가 나는 향신료 탓. 훠거를 먹던 중국동포 최규철(48)씨는 중국동포의 한국 정착을 돕는 일로 돈을 번다. “대림역 주변에선 옷가게, 화장품가게, 미용실도 다 조선족이 운영한다. 한국인도 조선족을 상대로 장사해 돈을 번다”면서 그는 웃었다.

    역사의 뒤안으로 스러질 소금땀, 구슬땀의 흔적
    지하철 2호선

    한국에서 외국인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대림동이다. 외국인 3만7000명이 영등포구에 사는데, 대림동에만 1만4000명이 거주한다. 대림동에 사는 외국인의 90%가 중국동포.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대림동에만 2만명 넘는 중국동포가 거주한다. 중앙시장과 대림역을 잇는 상권은 중국동포에게 넘어간 지 오래다.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동포 수는 불법체류자 단속강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직전부터 2003년 2월까진 불법체류자 단속이 없었다. 불법체류 사실을 스스로 신고하면 1년간 체류기간을 연장해줬다. 가리봉동에 중국 노래방이 등장한 때가 그 무렵이다. 2003년 3월 집중단속이 이뤄졌는데, 가리봉동 사람들은 대림동 골목골목으로 숨어들었다. 2004년 5월 대림동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불법체류자들이 용의자로 몰려 수난을 겪는다. 2005년 불법체류자가 출국한 뒤 1년 뒤 재입국하면 3년간 체류를 허용하는 정책을 도입하면서 2006~09년 중국동포들은 지하철 2호선을 따라 자양동 신림동 봉천동으로 퍼져나갔다. 역세권 저개발지를 개척해 죽은 상권을 되살려낸 것.

    중국동포 수는 앞으로 더욱 빠르게 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2월 정책이 또다시 바뀌어서 단순노무직 종사 포기각서를 제출하면 재외동포 체류자격비자(F-4)를 얻는다. 방문취업비자(H-2)로 입국해 3년 만기를 채운 이들도 고용주가 쓴 재고용 확인서를 제출하면 중국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영주자격 얻기도 전보다 쉬워졌다. F-4비자를 가졌거나 H-2비자로 들어온 중국동포 가운데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서 제조업 농축산업 어업에 종사하면서 근무처를 바꾸지 않고 4년 넘게 일했으면 영주자격을 얻는다. 또한 연 소득이 한국인 1인당 국민소득보다 높거나 가족 자산이 3000만원이 넘고 생계 능력을 가졌으면 영주자격 획득이 가능하다.

    외국인 혐오증

    2009년 5월 한국 거주 외국인이 100만명을 넘어섰다. 구로구, 영등포구에 사는 중국 출신 이주민은 5만9485명(2008년 현재). 실제로는 10만명이 넘으리라는 게 동네 사람들의 생각이다.

    용산구 이태원동은 미국 군대의 뒷마당이 아닌 다문화 마을로 변모한 지 오래다. 흑인과 백인,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존한다. 종로구 혜화동(필리핀), 중구 광희동(러시아·중앙아시아·몽골), 서초구 방배동·반포4동(프랑스), 용산구 이촌동(일본)의 외국인 마을도 확장세다.

    중국동포를 포함한 외국인 유입이 저출산, 고령화로 고민하는 서울의 인구 증가를 이끌고 있다. 2008년을 예로 들면, 서울 인구가 3만4000여 명이 증가했는데 이 중 외국인이 2만6000여 명. 서울 전체가 다문화 도시로 뒤바뀌는 것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2015년께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100만명을 넘어서리라고 내다본다.

    외국인 수가 늘어나면서 외국인혐오증(Xenophobia·제노포비아)도 싹튼다. 일부 한국인들의 파시즘적 행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혐오의 대상은 중국동포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출신 외국인. 더럽다거나 냄새난다 같은 인종차별 발언은 형법의 모욕죄에 해당한다. 실제로 검찰이 기소한 예는 몇 안 되지만.

    최근 어떤 일간지가 외국인 폭력조직 실태를 시리즈로 실었다. 중국인으로 이뤄진 옌볜흑사파, 헤이룽장파가 백주에 주먹을 휘두르고, 베트남·태국·방글라데시·필리핀 조폭도 확장세란다. 외국인 조폭과 한국 조폭이 연계했으며 옌볜흑사파는 강남을 다음 타깃으로 정했단다. 가리봉동 상인들이 방탄조끼를 입고 지낸다는 기사도 있었다.

    서울 구로갑이 지역구인 이범래 의원은 2009년 국정감사 때 강희락 경찰청장에게 “A신문 기사를 보면 외국인 조폭이 횡행한다”면서 실태와 대책을 따져 물었다. 그런데 가리봉동의 중국인, 한국인은 “기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웃는다. 외사과 형사들도 “외국인 범죄가 늘긴 했지만, 한국식 폭력조직이 창궐한다고 보긴 어렵다”면서 손사래를 친다. 제노포비아는 외국인을 타자(他者)로 보는 데서 비롯한다. 서로 다름을 관용하는 건 다문화 사회의 근간이다.

    빨간 구두 아가씨

    지금 가리봉동은 더럽고, 냄새난다. ‘쓰레기 삼진아웃제’가 시행 중인데 규격봉투가 아닌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담아 배출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무단 투기하는 사람한테 경종을 울리고자 골목마다 쓰레기가 방치돼 있다. 상인들이 떠날 채비를 하는지라 추가 투자가 끊겨 가리봉시장은 을씨년스럽게 변하고 있다. 공무원이 벌써부터 짐을 챙긴 가리봉동주민센터는 황량하다. 동사무소는 주민들보다 먼저 가리봉동을 떠났다.

    오후 8시, 상점마다 걸어놓은 백열등 불빛을 받으면서 시장통을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엔 따스한 기운이 오른다. 가리봉시장의 밤이 익으면 몸 비벼 밥 버는 사람들도 열이 오른다.

    하루치 노동을 끝낸 이들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떠든다. 초두부 전문점은 문전성시(門前成市)다. 속눈썹을 붙인 빨간 구두 아가씨가 짝퉁 루이비통백을 들고 시장통을 걷는다. 남자들의 시선이 미니드레스 밑 검정색 스타킹으로 꽂힌다. 크리스마스트리로 멋 부린 상점도 눈에 띈다. 2009년 12월25일은 ‘가리봉동’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다. 상인들은 시장골목이 사라지는 게 아쉬운 눈치다. 식품점 하는 한국인 이강희(44)씨는 “재개발도 좋지만 시장의 흔적이 사라지는 건 안타깝다”고 말했다.

    금단반점, 삼팔교자관이 떠난 자리엔 호텔, 컨벤션센터, 연구개발(R·D)단지, 랜드마크 빌딩이 들어선다. 청사진대로라면 그렇다. 1970년대 구로공단과 1990년대 이후 중국동포 밀집지역의 흔적을 담은 사진으로 새로 짓는 건물의 지하를 연결하는 통로를 도배해 옛 흔적을 남기겠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밸리’ ‘타워’보다는 사람 냄새나는 건물이 들어섰으면 좋겠다.

    가리봉시장과 함께 가리봉이란 동(洞)이름도 이미지가 나쁘다면서 사라진다. 새 이름을 공모했는데, 당선작 없이 ‘첨단동’이 우수작으로 뽑혔다. 구로구는 광주에 첨단동이 있는데다 발음이 어렵다면서 2013년 가리봉동 재개발이 완료될 때 새 이름을 찾기로 결정했다.

    서울은 헐리고 새로 지어지면서 근대를 맞았고, 다시 헐리고 새로 지어지면서 탈근대를 살아간다. 느리고, 더딘 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숲이 저절로 울창해지듯 도시를 내버려둬 자라게 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밤 10시, 금단반점은 복닥복닥하다. 걸게 놓인 꼬치 한 입 베어 물면 밤이 절로 익는다.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날씨가 춥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