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호

달러 위기론과 국제통화질서의 현주소

  • 유승경│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seungyoo@lgeri.com│

    입력2010-01-07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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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대외채무에 의존해 국내 경제를 지탱해왔다. 달러화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통해 수출주도 성장을 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로 흘러들어가고, 아시아 국가들은 그 달러화로 외환보유고를 확대하기 위해 미 재무부 채권을 매입해 미국의 재정적자를 보전해주는 구조로 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무한정 유지될 수 없다.

    미국은 장기적으로 성장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상수지를 대폭 감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재정균형을 달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출 증대를 위해 달러가치를 절하할 필요성이 있다. 미국은 달러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면서 달러를 평가절하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다. 달러가치가 ‘급격히 무질서하게’ 조정되는 위기상황을 피할 수 있는지는 미국 정부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는지에 달려 있다.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 글로벌 경제와 한국 경제의 큰 흐름을 따라잡는 일은 더 이상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새해 ‘신동아’는 국내외 주요 경제연구기관들이 매달 작성, 발표하는 연구결과물을 검토해, 일반 독자가 거시경제의 한 복판을 쉽게 꿰뚫을 수 있도록 도와줄 보고서를 한 편씩 골라 게재한다. 그 첫 순서는 2009년 11월말 LG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달러 위기론과 국제통화질서의 현주소’다.

    달러 위기론과 국제통화질서의 현주소
    세계 경제는 2010년부터 경기침체에서 벗어나 미진하나마 성장세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의 경제위기가 미국 금융시장의 파열이라는 예상하지 못한 충격에 의해 본격화한 만큼, 또 다른 뜻밖의 충격이 다시 오지 않을까하는 우려감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우려를 낳고 있는 여러 사안 중에서 가장 논쟁적인 것은 미국 경제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에 큰 타격을 준 금융위기가 달러 위기로 이어져 국제통화질서가 급변할 가능성에 대한 논의다.

    달러 위기론의 대체적인 내용은 미국 재정적자의 자본조달원인 미국으로의 순자본 유입이 급격히 감소하거나 역전되어 달러가치가 폭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세계 경제의 가장 큰 구조적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s)이 더는 지속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글로벌 불균형이란 21세기 들어 한층 심화된, 미국과 나머지 세계 간의 심각한 경상수지 불균형을 지칭하는데, 미국의 국가채무의 과도한 누적과 수출 주도성장을 추진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막대한 외환보유고의 축적이라는 비대칭적 상황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미국은 만성적으로 재정적자에 허덕여왔지만, 2001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재정적자가 더 악화되었고 가계저축률도 크게 하락해 경상수지 적자폭도 크게 늘어났다. 더욱이 금융위기는 재정적자를 급격히 악화시켰는데 2009년에는 GDP 대비 11.2%라는 기록적인 수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금융시장이 안정을 회복하고 경제가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더라도 사회보장, 의료보험 부문에서 지출증가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특별한 개혁이 없는 한 재정위기는 장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초에는 균형에 가까웠던 미국의 경상수지는 2006년 적자 규모가 GDP 대비 6%에 이르렀고 2008년에는 약간 회복되었으나 4.9%에 달한다.

    한편 아시아의 신흥 경제국은 1997~98년 외환위기를 경험한 이후 자본 자유화에 따른 세계금융시장의 높은 변동성에 대비해 외환시장을 통제하며 수출증대에 힘써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축적했다. 글로벌 불균형은, 달러화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통해 수출주도 성장을 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로 흘러들어가고 아시아 국가들은 그 달러화로 외환보유고를 확대하기 위해 미국 재무부 채권을 매입함으로써 미국의 재정 적자를 보전해주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이 같은 비대칭적 균형이 유지되는 것은 달러화가 미국의 정치경제적 리더십에 힘입어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로서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외 국가들의 외환보유고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갚을 것을 재촉받지 않는 부채’인 셈이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의 특권에 힘입어 재정 적자와 경상수지 적자가 주는 당장의 제약에서 벗어나 확장적인 대내외 전략을 추진할 수 있었다.

    대외부채를 통해 국내 경제를 지탱해나가는 미국 경제의 이 순환구조는 무한정 유지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해 MIT 교수인 L. 서로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한 나라에서 경상수지가 적자가 계속되면 다른 나라에서 돈을 빌려와야 한다. 빚이 증가하면 이자가 늘어나고…시간이 흐르면 빚이 쌓이는 속도는 빨라진다…마침내 부채와 이자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다른 나라는 필요한 만큼의 돈을 빌려주지 못한다. 바로 그때 극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극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때, 글로벌 불균형의 순환이 한계에 달하는 시점이 언제냐에 있다. 극단적인 위기론자들은 그 ‘심판의 날’이 목전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달러 위기론과 국제통화질서의 현주소
    위기의 메커니즘

    오바마 행정부도 쌍둥이 적자의 누적이 안고 있는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더 이상 세계 상품의 최종소비자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정책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로렌스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도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의 동력이 “소비에서 수출로” “금융 공학에서 생명·소프트웨어·토목공학 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달러화는 제로에 가까운 연방기금금리 등의 요인으로 인해 약세 기조를 지속하고 있다. 미국이 장기적으로 성장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상수지를 대폭 감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재정 균형을 달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출 증대를 위해 달러가치를 절하할 필요성이 있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의 위험성을 오랫동안 지적해온 프레드 버그스텐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소장은 ‘포린어페어즈’ 2009년 11/12월호 기고문에서 “미국의 정책담당자들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달러의 패권, 대규모 자본유입이 더 이상 미국의 이해와 맞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달러 패권의 포기와 평가절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달러 평가절하 정책은 정책적 딜레마를 야기한다. 미국은 경기침체로 인해 확장적인 재정-통화정책을 취해야 하고, 사회보장 지출 등 재정 지출 수요가 증대하고 있어 재정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그런데 경상수지 개선을 위한 달러의 지속적인 절하는 미국 국채의 자산 손실과 달러화에 대한 신뢰 훼손을 가져올 수밖에 없어 국채 발행을 어렵게 한다. 달러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면서 달러를 평가절하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달러가치가 급격히 무질서하게 조정되는 위기상황을 피할 수 있는지는 미국 정부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는지에 달려 있다.

    폴 크루그먼은 1995년에 발간한 저서 ‘통화와 위기(Currencies and Crises)’에서 “무역적자가 엄청나고, 다른 한편으로 외국투자자들이 달러 약세 덕택에 싼값에 많은 미국 자산을 매수했다…해외로부터의 자본유입이 중단되어 미국 경제가 금융경색(financial squeeze)에 빠지는 것은 단순히 가능성이 아니다. 그 과정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쌍둥이 적자가 지금에 비할 바 못 되는 때의 이 언급이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가 한층 취약해진 현 시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달러 위기론과 국제통화질서의 현주소
    1990년대 말 이후 수출주도 경제성장을 추진하고 있는 아시아의 신흥경제국들과 석유수출국들은 달러가치 하락에 따른 수출 둔화와 달러표기 보유자산의 자본손실을 우려해 달러가치를 지지해왔다. 그런데 미국이 경상수지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약한 달러 정책을 지속한다면 미국 국채의 대량 보유국인 아시아 국가들은 자본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달러 위기론은, 이 같은 상황에서 채권국가들이 달러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외환보유고의 자산구성을 달러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변화한다면 달러가치 하락이 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만약 미국으로 유입되는 자본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민간투자자들도 손실을 예상하고 미국 경제에서 탈출한다면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하나의 극단적인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달러의 약세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서 각국 중앙은행과 민간투자자들에게 달러자산의 손실을 회피하려는 유인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무엇이 위기를 심화하는가

    글로벌의 두 대칭점에 있는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에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보유고에서 달러 비중을 급격히 줄인다면, 자신들의 최대 수출대상국인 미국 경제는 즉각적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 국채가격은 하락하고 이자율이 급등하면서 민간투자는 위축되고 경제성장은 가로막힐 것이다. 최대 교역국의 위기는 아시아 국가들도 위기로 몰아갈 것이다. 따라서 중국, 일본 등이 ‘황금을 낳는 거위의 목을 비트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선택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히려 달러화가 위기에 직면하면 관련 국가들이 공조해 달러를 구제할 수도 있다.

    공통의 이해관계가 중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렵게 하는 요인들도 상존한다. 우선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라는 역사적 체험은 국가 간 협력이 무척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상자기사 참조). 공통 이해관계는 유동적이고 국가 간 협력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의 상황 역시 많은 불안정 요인을 안고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와 골드풀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4년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우즈에서 각국의 대표들이 협의를 통해 탄생시킨 국제통화제도다. 이를 통해 미국의 달러는 금과 고정비율(1온스는 35달러)로 태환할 수 있게 됐고, 다른 통화는 달러와 ‘조정가능한 고정환율’로 교환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은 대외준비금으로 금과 달러를 보유한 금-달러 본위 제도였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은 금 1온스에 대한 달러가치 35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비공개적으로 골드풀(Gold Pool)을 만들어 정책적으로 협조했다. 달러의 평가절하가 수출증대를 어렵게 하기 때문이었다. 골드풀 참가국은 금의 시장가격이 공식적인 달러가격 이상으로 오르면 외환보유고의 금을 시장에 매각해 시장가격을 공식가격과 일치하게 했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미국의 금 보유고가 줄어들자, 달러의 평가절하와 금태환 정지 상황을 예견한 회원국들은 골드풀에서 탈퇴하고 금태환을 계속 요구했다. 그러자 닉슨 행정부가 1971년 8월 금태환 중지를 선언하고 금 창구를 폐쇄해 브레튼우즈 체제는 붕괴했다.

    당초 유럽과 일본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유지가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에 부합한다는 생각으로 골드풀에 참여했지만, 금의 달러가격에 상승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금의 공식적인 달러가격을 인상하거나 금 태환을 중지하기 전에 금으로 태환하는 것이 개별 국가에 이익이라는 판단이 서자 협력관계를 청산했다. 현재의 글로벌 불균형이 심화되는 상황은 골드풀이 붕괴하던 당시와 사뭇 유사하다.


    중앙은행은 장기투자자로서의 성격이 강해 자본 손실도 상당히 감내한다. 또한 관성에 따라 자산관리를 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앙은행들도 특정한 대세가 뚜렷하다면 자산 구성의 조정 속도를 높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한순간에 자산 구성을 큰 폭으로 조정하는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다. 이 같은 중앙은행의 행동방식도 급격한 변화를 완화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반면 1980년대 이후 자본이동에 대한 탈규제화가 진행됨에 따라, 민간투자자들이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자산 구성을 조정하는 데 대한 정책당국의 영향력이 매우 제한적이다. 정책당국이 외환시장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면 민간투자자들의 자산 재구성을 통제하거나 상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민간자본의 규모가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미국으로 유입되는 자본의 소유권 구성을 보면 외국 중앙은행의 투자금액은 총 자본유입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민간투자자들이 금융자산의 가격변동을 예상하고 먼저 움직이면 정책당국에 대한 압력은 위력적이다. 따라서 각국 중앙은행이 정책협조를 통해 달러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노력이 민간의 움직임에 의해 효과를 제대로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달러 위기론과 국제통화질서의 현주소
    문제는 신뢰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는 달러를 금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달러는 더 이상 금에 의해 뒷받침되는 통화가 아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단일통화 경제이자 정치·군사적 초강대국의 화폐라는 신뢰에 기초해, 달러는 비공식적이지만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견고히 유지해왔다. 달러 중심 통화체제의 위기를 논하기 위해서는 달러를 대체할 대안이 있는지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달러화 가치에 대한 불확실성이 점증하는 까닭에 달러 중심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자주 관찰된다. 인도 정부는 최근 달러에 대한 불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00t의 금을 67억달러에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2006년 루블 강화와 탈(脫)달러화(de-dollarization)를 결정하고 외환준비통화를 다양화하고 있다. 시장개혁 초기 외환보유고의 80% 이상이던 달러화 비중을 최근 정치적 전략에 의해 40%이하로 낮추고 그 자리를 유로화로 대체하고 있다.

    중국은 위안화의 국제화 전략을 점차 구체화하고 있다.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 총재는 2009년 3월 IMF의 SDR(특별인출권)에 기초를 둔 새로운 기축통화체제 구축을 제안해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SDR 표기 채권시장의 활성화 같은 사안의 경우 장시간을 요하는 제도개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제안은 미국 달러 패권에 대한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키기 위한 정도의 발언이었던 것 같다.

    중국이 의도하는 바대로 위안화를 국제적인 준비통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경제불안정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자본통제를 해제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수출국이 되어 중국 외 거주자들의 위안화 보유를 늘려야 한다. 또한 위안화가 대외준비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유동성을 보장하는 위안화 표기 채권시장의 발달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 모두 현실과는 아직 거리가 멀기 때문에 중국의 위안화 국제화 전략도 단기간 내에 실현되기는 힘들다.

    달러화를 위협하는 대체 통화는 미국 경제에 맞먹는 경제권의 화폐인 유로화다. 유로화는 10년간에 걸쳐 상당한 신임을 얻었고 유럽연합(EU) 및 지중해 연안의 인접경제권에서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달러 위기론이 분분하면서 그 지위는 더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1999년 유로가 처음 등장할 때 쏟아졌던 일반적인 기대에는 아직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감소했고 유로화 비중 증가가 눈에 띄지만, 달러의 독보적 지위에는 아직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

    기축통화는 단지 경제규모, 금융시장의 심도와 유동성 등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전략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유럽중앙은행의 경우 정책의 정당성이 국가주권이 아닌 협약에 기초해 있고, 정치·외교적 대외전략은 개별 국가단위에서 추진되고 있다. 또한 유럽중앙은행은 유로 국제화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 회원국들 간의 견해도 통일돼 있지 않다.

    달러의 위기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가장 잘 뒷받침하는 것은,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촉발된 이후에도 달러화가 안정자산으로 인정받으면서 오히려 상당기간 강세를 보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예견하지 못한 큰 위기 속에서도 달러화와 미국 재무성에 대한 신뢰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신뢰는 만들기 힘든 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일정 정도 하락해도 달러를 선호할 경제적 유인은 존재한다. 각국 정부는 자국의 부채나 주요 결제수단과 동일한 화폐단위의 외환준비자산을 선호한다. 각국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원활하게 개입하기 위해서도 달러를 보유할 유인은 아직 분명하다. 이 같은 네트워크 외부성(Network Externality·어떤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가 많을수록 그 상품의 사용가치가 크게 높아지는 효과)은 신뢰와 더불어 다른 경쟁통화가 기축통화로 부상하는 데 있어 진입장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국제통화체제에 큰 충격이 가해진다 해도 달러화가 일순간에 다른 통화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은 비현실적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압도적 경제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여전히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며, 달러화가 가진 국제통화로서의 기반을 고려하면 달러화는 상당기간 그 역할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질서를 위해

    다만 미국에 맞먹는 경제규모와 발달된 자본시장을 가진 유로화도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높여갈 것이며,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부상한 중국도 위안화의 국제화에 일정 정도 성과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달러를 비롯한 몇 개의 강세통화가 기축통화의 역할을 분점하는 상황이 예견된다.

    준비통화는 오직 하나라는 이론적 주장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국제거래에 상용하는 것과 동일한 통화를 사용하는 것이 비용을 최소화한다는 게 그 핵심근거다. 흔히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를 ‘운영시스템의 달러’라고 비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순간에 다른 표준으로 옮겨갈 정도의 큰 충격이 없다면 기존 기축통화는 그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그리 설득력이 없다. 영국의 스털링이 기축통화 역할을 하던 시기에도 유럽 내부에서 스털링은 세 번째 통화에 불과했고, 1920~30년 시기에는 프랑과 스털링, 달러가 역할을 나눠 갖고 있었다. 또한 유동성이 높은 시장에 준비금을 예치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다른 감안요인이 있다면 낮은 유동성을 감수하고 다른 시장에 투자할 수도 있다. 국제적 합의에 의한 대안적 국제통화체제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달러주도체제가 점차적으로 다기축통화체제로 진화해갈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다.

    물론 달러가 폭락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세계 경제, 특히 미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취약성은 심각한 상태다. 현재 달러화가 직면한 상황은 로버트 트리핀 예일대 교수가 1960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내적 모순으로 지적한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와 정확히 일치한다.

    트리핀은 국제적 기축통화로서 특정 단일국가의 통화를 사용하는 체제가 부딪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기축통화국은 국제유동성을 제공하기 위해 국제수지의 적자를 지속해야 하는데 이 적자는 기축통화에 대란 신뢰도를 떨어뜨리게 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긴축정책으로 유동성을 흡수하면 경제침체를 낳게 되어 통화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단일국가의 통화가 기축통화체제가 되면 기축통화국이 공공지출에 엄격한 규율을 가해야 할 당장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헝가리의 경제학자 야노스 코르나이는 연성예산제약(soft budget constraint)이라는 개념으로 국유기업이 비효율성에 빠질 가능성을 지적했다. 국유기업은 파산의 위험이 적기 때문에 예산제약이 엄격히 적용되지 않아 비효율성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지위는 미국 연방예산에 대한 제약을 연성화한 셈이다. 미국은 세금인상에 의존하지 않고도 국방과 사회보장 지출을 할 수 있었고, 미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는 그에 따른 대가인 셈이다.

    경제학자들과 정책담당자들 간에 특정국가의 통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하는 시스템의 허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IMF 특별인출권을 확충해 대외준비자산으로서의 활용도를 높이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이 방안은 대외준비금을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초국가적 국제통화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전향적인 것이다.

    달러 위기론은 달러 폭락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보다는 세계 경제가 현재 어떤 문제점에 봉착해 있는지를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달러 폭락은 더 심각한 경제위기의 재발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가능성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그러한 우려를 만드는 세계 경제 내부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해야 할 것이다.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이란

    특별인출권(SDR)은 국제 유동성 부족과 미국 달러화 불안을 대비하기 위해 IMF가 1969년에 창출한 국제준비 자산이다. SDR의 도입으로 IMF의 자금 공여 능력은 크게 확대됐다. 기금이나 외부 차입에 의존한 자금 공여 방식에서 SDR을 통한 외화 입수 및 자금 공여로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IMF 회원국들은 국제수지 악화 등 외국환이 필요한 상황에서 SDR을 사용해 자국의 외화 유동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

    발행 초기에는 SDR의 가치가 미국 1달러의 가치인 0.888671g의 순금과 같았다. 이후 SDR의 가치 설정 방식은 주요 통화들로 구성된 바스켓 방식으로 전환됐고, 현재는 미국 달러화, 유로화, 일본 엔화, 영국 파운드 등 4개 선진국 통화로 구성된 표준 바스켓 방식으로 매겨지고 있다.

    IMF가 할당한 보유량보다 SDR을 초과 보유하게 될 경우에는 이자가 발생한다. 다만 SDR이 국제결제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통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유형(有形)의 화폐일 수는 없으며, SDR 거래는 IMF의 SDR 계정을 통해 이뤄진다. SDR은 1970년 1월 34억 SDR이 발행된 이후 2009년 9월에는 2041억 SDR(미국 달러화 기준 3240억달러 규모)로 60배가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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