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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경협 관련 김정일 비공개 연설문

“현정은 회장을 꽉 쥐고 있으면 한나라당 것들에 압을 넣고 고립시킬 수 있다”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남북경협 관련 김정일 비공개 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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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은 현대그룹을 지렛대로 남북경협을 늘려가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경협에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한나라당에 대한 감정도 드러냈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수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현대그룹과 일하겠다는 북한의 의지엔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그간 네 차례의 고비를 넘었다. 1999년 발발한 1차 서해교전(연평해전)이 첫 번째 위기. 남북관계는 얼어붙었으나 평양과 현대그룹의 핫라인은 남북 간 정규전 뒤에도 유지됐으며,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타격받지 않았다. 현대그룹과 평양의 신뢰 덕분이었다.

두 번째 위기는 2003년 8월 정 전 회장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언론들은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이 선장을 잃고 표류하리라고 전망했으나 현 회장은 정 전 회장의 죽음에서 비롯된 두 번째 위기를 넘어섰다. 현 회장은 결국 정주영가(家) 며느리에서 현대그룹 회장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세 번째 위기는 2005년 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부회장의 거취 문제로 북한이 현 회장을 압박하면서 닥쳤다. 현 회장은 역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뚝심을 발휘했다. 네 번째 위기는 2006년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 2008년 7월 북한군 초병이 관광객 박왕자씨를 살해하면서 다섯 번째 위기가 시작됐는데, 이 위기는 지금껏 해소되지 않고 있다.

현 회장은 2009년 8월10~17일 평양방문 때 김 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관광의 조속한 재개 및 비로봉 관광 개시, 금강산 관광 편의와 안전보장 ▲육로통행 및 체류 관련 제한 해제 ▲개성관광 재개 및 개성공단 활성화 ▲백두산 관광 개시 ▲추석 때 남북이산가족 상봉 등 5개항에 합의했다.



그럼에도 현대아산은 정부가 금강산·개성관광 재개를 용인하지 않아 숙원인 대북(對北)관광을 재개하지 못했다.

“가족하고 통로를…”

“현정은 회장이 올리는 편지 보고와 대책적 의견에 대한 문건을 인차 비준해주지 않고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편지 보고’는 일반적 서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종의 관례다. 현 회장은 8월4일 금강산 접촉 때도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서신을 전달했다. 북한은 김 위원장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김 위원장을 만난 인사는 북한식 표현으로 ‘감사 편지’를 보내야 한다고 여긴다. 북한은 2002년 5월 박근혜-김정일 면담 뒤에도 박근혜 전 대표의 서신을 바랐다고 한다.

“날개탁에 앉은 특별수행원이라고 하는 기업가들을 보니 모두 소도적놈들처럼 생겼습니다. 정몽구는 쓸 것 같지 못합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 수행원으로 방북한 재계 인사는 정몽구 현대자동자 회장, 구본무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이다. 한국의 기업인을 바라보는 김 위원장의 시각이 엿보인다. 정몽구 회장을 따로 비판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전 회장과의 관계가 고려된 것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정몽헌을 생각해서라도 현정은 회장을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

정 전 회장에 대한 평양의 신뢰는 상당한 것 같다. 그럼에도 한국의 정권교체기 때 북한의 대남 라인이 물갈이되면서 현대아산은 한동안 평양의 고위층과 연결되지 못했다. 현대아산 임원들이 만나는 북한 인사의 격도 떨어졌다. 한 예로,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조사 명목으로 방북한 윤만준 당시 현대아산 사장은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인사 3명을 만나는 데 그쳤다. 현대그룹은 현대아산 직원이 억류됐을 때 북한 천도교청우당 중앙지도위원회 류미영(월북한 최덕신 전 천도교 교령의 부인) 위원장 쪽으로까지 접촉을 시도하는 등 채널을 구축하고자 다각도로 노력한 것으로 알려진다. 리종혁 부위원장이 현 회장을 만났을 때 “가족하고 통로를 하나 마련했으면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대남라인이 물갈이된 뒤 현대그룹-아태평화위원회 간 직통로가 부재했음을 암시한다.

북한은 2009년 11월30일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회귀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1990년대 기근 이후 북한에선 ‘계획’과 ‘시장’이 공존했다. ‘계획’이 ‘시장’에 기대어 버티는 형국이었다. 주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시장에 방임하고, 계획부문의 국영기업 군수공업을 유지했다. 계획부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국가능력이 강화됨에 따라”(12월4일자 ‘조선신보’) 화폐개혁을 통해 시장을 옥죈 것이다.

경제실리

평양은 남북경협도 ‘개혁·개방’이 아닌 ‘경제실리’로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아산의 관광사업은 민간 비즈니스지만 북한에 ‘현금 원조’를 하는 측면이 있다. 경제학의 다수설은 독재국가에 대한 현금 원조의 효용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개발지원과 달리 현금 원조는 수혜국의 거버넌스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고, 경제발전이나 제도변화를 이끌기보다는 엘리트 집단의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것. 물론 대북(對北)관광의 의미, 상징성을 효용 여부만으로 재단하긴 어렵다.

신동아 201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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