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호

1959년 ‘북송저지대’의 진실

앵커 마쓰시타 데라코는 대한민국 치안본부의 암호명이었다

  • 이민호│통일일보 서울지사장│

    입력2010-01-07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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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북송선이 니가타(新潟)항을 출항하기 한 달 전. 재일동포를 주축으로 한 북송저지대 66명이 일본에 급파됐다. 재일동포학도의용군 출신 41명, 경찰간부시험 합격자 24명, 예비역 장교 1명이었다.
    • 그러나 4·19혁명이 터지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작전은 중단됐다.
    • 국제라디오에 작전중지를 알리는 마쓰시타 데라코상의 메시지가 잡혔다. 북송저지대원들은 귀국선을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下關)로 결집했다.
    1959년 ‘북송저지대’의 진실

    2002년 10월15일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기간 중 부산 다대항에 정박했던 북한의 만경봉호가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항하고 있다.

    “靜かにして下さい。(조용히 하세요.)” 1960년 4월말, 일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국제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앵커 마쓰시타 데라코(松下寺子)상의 이 멘트를 듣고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했다. 본국으로부터 암호로 ‘작전중지, 즉각철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들은 ‘북송저지대’ 대원들이었다. ‘지상낙원’이라는 김일성 정권의 거짓 선전에 속아 북송선에 올라타는 재일동포들을 막으려고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 밀파한 공작원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북송저지 노력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들뿐이다. 이승만 정부는 재일동포 북송을 승인한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서울에서 50만명이 반대데모를 벌였다. 일본에서는 재일 민단 소속 청년들이 철로에 몸을 내던져 니가타항으로 향하는 열차를 가로막기도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북송을 막을 수 있는 방도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교가 수립돼 있지 않던 한국과 일본은 적국(敵國)처럼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일제식민지를 겪은 한국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일본도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던 이 대통령의 동해 수역 보호 활동과 이에 따른 일본어선의 나포로 한국에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들의 북송을 막기 위해 목숨을 내건 공작원들을 일본에 밀파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북송저지대 대원이었던 조승배(趙承培·76)씨는 당시 내무부 치안국의 경찰간부로부터 직접 호출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술 한잔 마시자는 연락을 받고 나갔더니 ‘조국을 위해 한번 더 일해보지 않겠나’라고 말하더군요.”



    치안국 경찰간부의 호출

    조씨는 6·25전쟁 때 재일동포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다.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이던 18세 때 최연소 학도병이 됐던 조씨는 조국 전장을 누비며 공산주의자들의 불의함을 몸으로 체득한 이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북송저지대원의 길을 선택했다.

    조씨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59년 9월초 서울 북한산 초입에 있는 우이동의 신원사(현 普光寺) 근방으로 불려갔다. 이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모인 대원들은 조씨처럼 재일동포학도의용군 출신 41명과 경찰간부시험 합격자 24명, 예비역 장교 1명 등 모두 66명이었다.

    공작원 교육은 3개 소대로 분리돼 이뤄졌다. 암호 해독 방법과 신분세탁법, 비밀연락, 특수파괴, 침투위장 등 특수공작 교육을 받았다.

    “각자의 임무는 혼자만 알 뿐 동료에게도 보안을 지켰습니다. 일본 사정을 잘 아는 저에게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대원들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연락망인 레뽀(レ一ポ)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럼 훗날 일본에서 라디오를 통해 지령을 내리는 ‘마쓰시타 데라코’상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조씨의 설명이다.

    “그땐 북한산도 민둥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6·25 직후 사람들이 땔감으로 나무를 다 베어갔으니…, 그런데 우리가 훈련받던 곳에는 수백년 수령의 아름드리 소나무(마쓰-松)가 많았고 그 근방에 신원사(데라-寺)가 있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소나무 숲에 있는 절 아래(松下寺)에서 훈련받았던 셈이죠. 지령을 내리는 사람이 여성이니까 마쓰시타 데라코(松下寺子)였고 곧 대한민국 치안본부를 지칭하는 암호였던 겁니다.”

    재일동포를 주축으로 한 북송저지대는 일본 사정도 잘 알고 현지 언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에 북송저지 활동을 펼치기에는 적임자들이었다. 대원들은 2개월가량 훈련을 받고서 곧장 작전지인 일본으로 투입됐다. 첫 북송선이 니가타항을 출항하는 12월14일을 약 1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도일(渡日) 방법은 밀항뿐이었다. 대원들은 부산과 마산, 통영 등 경상도 해안 도시에서 한 번에 10여 명씩 7차례에 걸쳐 어선 등으로 위장한 배를 타고 일본의 고쿠라(小倉), 고베(神戶), 구레(吳) 등지로 잠입했다. 그런데 6차 대원들에게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12월13일 ‘명성호(明星號)’를 타고 출항한 12명의 대원이 전원 실종된 것. 사고 경위에 대해서는 후쿠오카현 고쿠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거나, 니가타 인근 바다에서 북송저지 작전을 벌이던 중 일본 해경의 추격을 받다 전복됐다는 둥 설이 많았지만, 사고의 진상은 아직까지 미궁이다.

    66명의 밀항

    이들을 제외하고 일본에 상륙한 54명 대원의 활동 역시 난관에 부딪혔다. 일본 당국과 경찰의 치안 활동은 국가 비상사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극심했고, 공작의 무대인 재일동포 사회도 한국보다는 북한 정권에 우호적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1959년 12월4일 니가타 시바타(新發田)시에서 다이너마이트 12개를 소지한 한국인 2명이 체포되면서 일본의 경계수위는 최고조로 올라갔다. 일본 경찰은 수사결과 발표에서 이들이 북송예정자들의 임시거처였던 니가타 적십자본부를 폭파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당국이 한국의 첩보활동을 부처님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는 징후로 비쳤다. 그런 동안 처음에 갖고 간 3만엔의 공작금은 떨어졌고 일본경찰의 심한 감시로 대원끼리의 접선도 원활치 못했다. 하지만 계속된 악재 속에서도 공작 임무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작전이 무산된 결정적 계기는 일본이 아닌 본국에서 터졌다. 1960년 4·19혁명이 터지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본부와의 연락이 두절됐다. 국제라디오에 마쓰시타 데라코상의 메시지가 잡힌 건 혁명이 터지고 2주쯤 지난 뒤였다. “靜かにして下さい。” 작전중지, 즉각철수 명령을 받은 북송저지대원들은 5월초 귀국선을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결집했다. 선창 밑바닥에 들어가 출항을 기다리던 중 갑자기 배 위로 요란한 구둣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라이트가 자신들을 향해 비춰졌다. “어이 모두들 꼼짝 마.”

    이때 조승배씨를 비롯한 24명의 대원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밖에 도쿄에서 1명이 더 붙잡혀 모두 25명이 출입국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통상 한국인 밀항자에겐 국외추방이라는 관대한 조치를 내리는 게 관행이었음을 비춰보면, 당시 실형선고는 일본 당국이 이들을 얼마나 괘씸하게 봤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원들은 주일한국대표부에 석방 청원을 넣어도 봤지만 “이승만 박사가 보낸 자들을 왜 우리가 도와야 하느냐”는 냉소만 받았다. 그렇게 차갑던 대표부가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한 직후 “일본과 교섭에 들어갔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며 태도를 바꿨다고 한다. 조씨의 얘기다.

    “5·16이 일어나고 보름쯤 지난 무렵 석방됐습니다. 후쿠오카 하카타(福岡 博多)에서 통통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니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마중을 나왔습디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위로하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조국을 위해…

    하지만 북송저지대에 대한 정부의 호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부 대원들이 정부로부터 취업알선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경찰간부후보생이었던 대원들은 도일 전에 약속받았던 경찰 채용을 거부당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50년이 지났다. 이제는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할 정도의 시간. 올해 5월에야 비로소 순직한 재일동포북송저지대원 12명의 이름이 서울 국립현충원 위령비에 새겨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생존자가 정확히 몇 명인지 어디에 사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암울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두 번이나 목숨을 걸었던 북송저지대. 그들은 ‘지상낙원’이란 허언으로 재일동포들을 납치해가려는 북한에 맨몸으로 맞섰다. 이제라도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줘야 하지 않을까. 마쓰시타 데라코상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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