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호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여운형의 ‘친일’과 조선중앙일보 폐간 속사정

  • 정진석│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presskr@empal.com│

    입력2010-01-11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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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장지연의 이름이 올랐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보고서 명단에서는 장지연의 이름이 빠졌다. 장지연의 친일 여부가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반면 곳곳에서 친일 행적이 확인되고 있는 여운형은 검토 대상조차 아니었다. 어떤 시각으로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친일과 항일의 무게를 제대로 따지지 않으면 억울한 피해자를 낳을 수 있다.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경성일보사가 1944년 2월에 발행한 ‘반도학도 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는 ‘반도 2500만 동포에 호소함’이라는 여운형(呂運亨)의 글이 실려 있다. ‘반도’는 조선을 의미한다. 글의 머리는 “소화 11년(1936년) 10월 조선중앙일보 사장의 자리를 떠난 이래 꼭 7년간 침묵을 지켜온 여운형씨가 조선 동포에게 영광의 인생을 주려고 다시 일어났다. 그래서 ‘학도병에 지원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조선 동포의 영광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라고 조선 2500만 동포에게 전한 것이 아래와 같은 수기(手記)인 것이다”라는 편집자의 말로 시작된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확전(擴戰)에 필요한 병력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 시행규칙’(1943년 10월20일)을 공포한 후 11월20일까지 한 달 동안 각 학교 교장을 위시하여 각계 지도급 인사들에게 집중적으로 학병 입대를 권유하도록 강요했다. 이때 여운형, 안재홍, 문인보국회, 경성유지 등이 경성일보에 실었던 글을 엮은 책이‘반도학도 출진보’다. 여운형의 글은 1943년 11월11일자 경성일보에 실렸던 것으로 여운형의 친필 서명을 동판으로 떠서 신빙성을 높였다.

    나는 오랫동안 언론사(史)에 등장하는 여러 주요 인물을 연구해왔지만, 2005년 초까지는 여운형의 ‘친일’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의 저서 ‘역사와 언론인’(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에는 여운형이 1933년 2월17일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해 어려운 여건 아래서 신문사를 경영하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우승 때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신문 발행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내용을 다루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면서 일제 치하 언론인으로 활동한 여운형의 공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장지연의 친일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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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 2500만 동포에 호소함’이라는 제목 아래에 여운형이 직접 썼다는 의미로 ‘수기’라고 표시되어 있다.

    여운형의 친일을 엄중하게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건 2005년 3월5일자 경향신문이 장지연의 친일의혹을 대서특필로 보도해 논란이 일어난 뒤였다. 그해 3·1절에 정부는 여운형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追敍)했다. 이 훈장은 1등급인 대한민국장 다음에 해당하는 2등급 상훈이다. 경향신문은 여운형의 훈격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싣기도 했다.(2월21일 ‘기자메모’와 25일 ‘시론’). 그런 직후인 3월5일자에 경향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경남일보 주필 때/ 일왕 찬양 漢詩(한시) 게재’라는 제목의 기사를 제1면 머리에 대서특필했다. 3면에는 ‘장지연, 총독부 기관지에 내놓고 日(일) 찬양’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장지연이 경남일보 주필 시절 장기간에 걸쳐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근거는 일제강점 이듬해인 1911년 11월2일자 경남일보 2면에 실린 ‘한시’였다. 일본왕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여 일장기와 함께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시가 실렸는데 그것이 장지연의 작품일 것이며, 따라서 장지연이 친일을 했다는 것이다.



    추론은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1909년 11월5일자 경남일보에 실린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시 역시 장지연이 썼을 것으로 추정하여 그가 “앞장서서 일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썼다”고 주장했다. 신문의 날이었던 4월7일 밤 KBS ‘시사 투나잇’도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국사교과서나 초등학생들이 읽는 위인전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에서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비를 세우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장지연의 친일 논란이 불거져 무산됐다는 관련자 말도 소개했다. 하지만 경향신문이 증거로 제시한 그 한시를 장지연이 썼다는 근거는 아무 곳에도 없다. 이때부터 장지연의 친일 여부가 뜨거운 관심사가 되어 친일 척결을 내세운 매체들이 새로운 ‘증거’ 발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국적인 항일논객의 상징이던 장지연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작은 흠결이라도 없는지 낱낱이 찾아내어 추상같이 단죄하려고 하면서 여운형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을 주어야 한다고 치켜세운다면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형평에 어긋날 수 있다고 우려됐다.

    다시 논의돼야 할 功過

    여운형도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일제 패망 직후 한국에 진주한 미군이 작성한 첫 비밀 문건은 여운형을 ‘친일파(pro-Japanese collaborator)’로 규정하고 있었다. 미군 보고서에 무게를 두지 않고 장지연에게 들이댔던 것과 같은 잣대로 봐도 여운형이 친일을 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증거는 많다.

    노무현 정부는 좌파 진영의 요구를 받아들여 결국 여운형에게 훈장의 격을 최고등급으로 높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추서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한편 2009년 11월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들어 있는 4389명 가운데 장지연의 이름이 올랐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1005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 보고서 명단에서는 장지연이 겨우 빠졌다.

    나는 여운형을 친일파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친일적인 글이 남아 있더라도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써서 여운형의 이름으로 발표했으나 막을 도리가 없었다는 주장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일생에 ‘친일’과 ‘항일’이라는 상반되는 행위가 있었을 경우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를 비교해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장지연을 비롯하여 ‘친일 인물’로 규정한 기준대로라면 여운형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1936년에 있었던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과 그 이듬해 폐간에 따른 여운형의 공과(功過)도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을 교묘하게 미화하면서 같은 때에 동아일보가 겪은 고통과 피해 사실은 폄훼하는 역사 왜곡은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미 결정을 내렸음에도 일제 말기 여운형의 행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은 이미 알려진 일이지만, 일제를 향한 마지막 저항의 방법으로 스스로 폐간을 택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문사 자체의 소유권을 둘러싼 복잡한 경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였다.

    앞에서 언급한 여운형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랑하는 조선의 젊은 학도가 오늘도 미영(米英) 격멸의 횃불을 들고일어나 전열(戰列)에로 노도의 출격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해운대의 한 방에 병들어 누워있는 자신의 가슴에도 눈부시게 변천해 가는 조선의 역사를 새기는 소리가 다가왔다고 썼다.

    일본군 입대 미화와 권유

    “나는 대동아전쟁에 대해서부터 극히 엄숙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하여 이 전쟁에서 조선의 가야 할 길을 내선(內鮮-일본과 조선) 관계에서 결론을 이끌어냈다. 눈물겨운 혈서, 단호한 출진 결의의 웅비, 이것에 호응하여 우리 아들을 격려하는 부형과 은사…. 온통 조선의 산하는 임시특별지원병제의 영광에 용솟음 치고, 2500만 동포의 가슴은 놀랄 만큼 진동하고 있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대동아전쟁은 소극적으로는 구미 침략에 대한 대동아의 방위이며, 적극적으로는 그들을 몰아내는 데 있다. 상대는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과 영국이며 그것에 협력하는 세력이다. 이제 세계 신질서의 역사를 창건하는 성업을 하고 있는 추축국(樞軸國)의 유대를 강화하며, 대동아(大東亞)는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서 착착 건설되고 있다. 제국의 존망을 걸고 피로써 싸우는 이 일전(一戰)을 어떤 어려움과 쓰라림이 있더라도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완승할 것을 확신한다. 이 승리는 16억의 생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을 수호하는 것보다는 유구한 3000년의 역사와 그 영예를 가진 아시아 전체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다. 실로 이 일대 결전은 동아시아 10억의 생존권 획득전이다. 그래서 청년은 바다와 육지가 이어지는 세계를 향해 총을 들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여운형의 글은 계속된다. “세계 인류의 피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 조선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자기를 알고 조국을 연구하고, 세계관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조선의 전 신경과 살과 피를 찌르는 ‘임시특별지원병제’다. 이는 세기의 시금석(試金石)이다. 나는 이 지상(至上) 국명(國命)의 완수 여하가 조선 2500만의 운명에 달려 있다는 것을 뼛속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항일 논객의 상징이었으나 친일파 논란이 불거진 장지연.

    과거의 조선은 전혀 꿈의 나라였으며 문약(文弱)은 민족의 피를 흐리터분하고 무디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거기서 자란 허약한 기질은 외우내환(外憂內患)의 신음에 사로잡혀 지리멸렬하고, 방황하는 운명에 비틀거리게 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의 큰 광명이 비치게 될 것이다”며 일본군 입대를 미화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지나(중국)사변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대동아전쟁이라는 역사적 세계전쟁이 발발했다고 평가하고, 이 소화유신(昭和維新)의 거대한 봉화는 조선의 궐기를 재촉하였다. 조선은 점차 미몽에서 깨어났으며, 특히 지원병에 대한 정성은 피를 토해갔다. 조선을 짊어진 사상계도 교육계, 재계도 한길로 매진하였다. 완전히 급격한 발걸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친애하는 조선학도여, 조선을 응시하시오. 일본을 바로 보시오. 세계를 달관하시오. 2500만의 운명은 실로 학도의 양어깨에 달려있는 것이다. 숭고한 의무와 신성한 동아(東亞) 해방의 정의를 위해서 지금이야말로 뜨거운 피를 흘려야 한다. … 조선 동포는 대화(大和)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전 동아 민족의 맹주가 되어 이것을 지도하는 높은 사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이 지대한 자랑을 잘 느끼는 동시에, 병역의 의무 없이 일국의 한사람다운 영예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명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 결연히 일어나 2500만 동포와 고난을 같이하고 조선을 위해서, 일본을 위해서 대동아를 위해서 미력이지만 여생을 전부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바이다. 다시 한 번 말하기를 조선동포에게 말한다. 일본 없이는 조선은 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일제의 강력한 선전사업

    여운형의 글을 길게 인용한 이유는 친일논란의 자료로 제공하기 위해서다. 이 글이 여운형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변명의 여지도 없이 친일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여운형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 시기로 돌아가서 살펴본다면 그와 같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엄혹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일제는 전쟁의 당위성과 승리의 확신을 심어주는 강력한 선전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세계정세를 알 수 없도록 외국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고 통제하는 상황이었기에 개인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무력화할 정도였다. 주변의 군중심리도 개인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이었다. 1920년대에는 항일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절하여 하나 둘 친일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기미 33인의 한 사람인 최린(崔麟)이 그런 예다. 여운형의 글이 실린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조선 2500만 동포여 일어서 나가자.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장덕수(張德秀), 최남선(崔南善), 유억겸(兪億兼), 향산광랑(香山光郞, 이광수), 김연수(金秊洙)씨 등 조선의 교육계, 사상계, 재계, 문학계의 제1인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일어서 호령하고 격려하였다.”

    거론된 인물은 조선의 지도급 저명인사들이다. 이 책에 여운형과 안재홍의 글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부분이 있었다. 여운형의 ‘조선 2500만 동포에 호소함’(78~85쪽)은 제목 아래에 ‘여운형씨 수기(手記)’라고 표시된 반면, 이어 실린 안재홍의 ‘반도학도 궐기 천재일우의 가을’(85~88쪽)에는 ‘안재홍씨 담(談)’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여운형의 글은 그가 직접 썼고, 안재홍의 것은 기자가 쓴 것임을 명확히 밝혀둔 것이다. 편집자가 직접 쓴 글과 구술한 것을 구분해둔 것이다. 안재홍은 글을 많이 쓰는 논객이었다. 여운형도 글을 쓰기는 했지만, 논객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대의 논객인 안재홍이 글을 쓰지 않고 말(談)로써 총독부의 요구를 완곡하게 회피했던 반면에 여운형은 학병 권유의 글을 직접 썼다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운형이 경성일보에 학생들의 입대를 선동한 글을 실었다는 다른 증거도 있다. 1946년 2월10일자 대동신문(大東新聞)은 여운형의 학병 권유 기사가 실린 경성일보 지면을 복사해 두 개 지면에 걸쳐 실었다. ‘여운형의 충성, 친일의 활증(活證)을 보라’는 제목과 함께 경성일보 지면을 사진판으로 제시했다. 경성일보 지면에는 ‘학도여 전열(戰列)에/ 지금이야말로 보이자 황민반도(皇民半島)/ 여운형씨 마침내 일어나다(學徒よ戰列へ, 今ぞ示せ皇民半島 呂運亨氏 遂に起つ)’라는 제목 아래 여운형의 사진이 들어 있는 기사 한 건과 ‘반도동포에 호소함(半島同胞に?ふ)’이라는 여운형의 글이 실려 있었다. 바로 ‘반도학도 출진보’에 실린 글인데 여운형의 친필 서명도 있다.

    대동신문 공격에 呂, 무 반론

    대동신문은 ‘반성한 여운형의 고백/ 결국은 대지(對支: 중국) 공작의 전쟁범?’이라는 기사를 1946년 2월17일과 18일 두 번에 나누어 실었다. “최근 친일파 민족반역가 문제로 정계와 우리 회사에서 논하는 데 적반하장 격으로 친일파들이 친일파 제거를 논하니 우리 삼천만 민족에게 이들의 과거사를 소개하니 현명한 재단(裁斷)이 있을 것이다”면서 1943년 2월6일에 여운형이 일인 검사 스기모토(杉本寬一)의 심문에 답한 것이라는 진술서를 실었다. 진술서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는 것이다.

    呂의 자필 자작 시초(詩抄)

    대지(對支-중국) 공작은 소지(素志)이며 준비도 자신(自信)도 유(有)하야 실행기회를 득(得)코저 소회를 술(述)하오니 용서하십시오.

    砲煙彈雨又經筆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

    爲國請纓捨一身 나라 위해 젊은 목숨 바치기를 청하네.

    千億結成共榮日 천억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

    太平洋水洗戰塵 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

    ‘천억’은 일본을 맹주로 하는 동양을 가리킨다. 대강의 뜻은 번영된 일본과 함께 전쟁을 끝내고 대동아공영을 이루기 바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공영(共榮)’은 일본을 중심으로 함께 번영할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그 거주 범위를 선전한 ‘대동아공영권’과 통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아시아 대륙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정치 표어였다.

    대동신문의 공격에 대해 당시 여운형이 반론을 제기했다는 흔적은 현재까지 찾을 수 없다. 대동신문은 우익 논조의 신문이었는데 기사가 사실이 아니었다면 여운형 측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반론과 역습을 시도했을 것이다. 친일혐의는 정치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낼뿐더러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인신공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전향서와 詩文을 찾아달라”

    일제 말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복역했던 이인(李仁)도 여운형의 친일혐의를 증언했다. 여운형이 경찰에 검거됐을 때 일제에 진충갈력(盡忠竭力)하여 일본의 전쟁완수를 위해 헌신한다는 장문의 전향서와 시를 지어 바치고 석방됐다는 것이다. 대동신문이 폭로한 내용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다.

    “해방 후 내가 미군정 때 대법관과 대법원장서리 자리를 내놓고 검찰총장으로 앉게 된 지 1주 후에 지방법원 서기가 찾아와 신문지에 싼 형사기록을 나에게 준 일이 있다. 그 서기는 해방되던 때는 서울지방검사국 서기로 있었는데 8·15 해방 날은 일본인 직원은 전부 도망가고 한인 서기 2명만 남았었다. (중략) ○陽은 서울지검에 나타나 자기의 전향서와 시문(詩文) 및 이에 관한 형사기록(조선대중당과 아편관계의 20여 명의 기록)을 찾아달라 했으나 한 개인이 관청서류를 임의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陽이 그의 불명예스런 기록을 말살하려는 흉계인 듯해서, 복잡해서 찾지 못한다고 말해 돌려보내고 자기가 비장했던 것인데 나에게 제출한다기에, 나는 다망중이라 일별한 뒤 서기국장 윤지선(尹智善)에게 금고에 특별보관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陽은 문맥상 여운형임을 알 수 있다.)

    -이인, ‘해방전후 편편록’, ‘신동아’ 1967년 8월, 356쪽

    앞에서 소개한 대동신문 1946년 2월17일과 18일자에 실린 ‘반성한 여운형의 고백’이라는 수사기록과 한시가 바로 여운형이 찾던 문건이었을 것이다.

    재일 사학자 강덕상(姜德相)의 ‘조선인학도출진(出陣)’(岩波書店, 1997)에도 여운형이 경성일보에 쓴 글의 제목이 올라 있다. 제7장 ‘매스컴의 선동’(185쪽)에는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1943년 11월부터 학병을 권유하려고 내세운 슬로건(표 22)과, 신문에 등장한 집필자와 글의 제목(표 23)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있다. 표에는 당시 국내의 명망가들이 망라되어 있다. 보성전문의 교장이었던 김성수를 비롯해 교육자, 문인 등의 이름이 나열되었다. 그 가운데 여운형도 있었다.

    여운형이 경성일보에 쓴 글은 ‘지금이야말로 보이자 황민반도(今ぞ示せ皇民半島)’(1943년 11월9일)와 ‘반도동포에 호소함(半島同胞に?ふ)’(1943년 11월11일)이다. 대동신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자료다. 소설가 김동인의 증언도 있다. 김동인이 1949년 ‘신천지’ 7월호에 쓴 글이다.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경성일보’에 실린 여운형의 글. ‘반도동포에 호소함(半島同胞に?ふ)’이라는 제목 아래에 친필 서명이 있다.

    “어떤 날 거리에 나가보니, 거리는 방공(防空) 연습을 하노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간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매고 있었다. 몽양 려운형은 그런 일에 나서서 삥삥 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대체 몽양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말도 많지만 다 싹여버리고 말고, 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신천지’ 1949년 7월호, ‘문단 30년의 자최’ 11회, 148쪽

    조선공산당, “투쟁의식 연약했다”

    광복 직후 공산당도 “세상에서 여(呂)씨를 친일분자라고 하는 문제에 대하야 누구나 없이 변명할 이유가 없다”고 냉정하게 단정하였다. 이 자료는 6·25전쟁 당시인 1950년 11월1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노획한 조선공산당의 여러 문서 가운데 하나인데, ‘여운형씨에 관하야’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여운형이 1937년 7월(중일전쟁) 이후로 일제와의 투쟁의식이 연약했고, 그의 태도가 명확하지 못했다고 평하고, 여섯 조목의 예를 들었다. 그 가운데는 “소·독 전쟁이 개시되고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후, 여씨는 공개적으로 일본 동경 대화숙(大和塾·1938년 7월에 결성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소의 외곽단체)에 가 있었고, 학도병 지원 권고문을 발표했다”는 항목이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로 감옥에 있는 사회주의자의 전향적 석방운동을 감행하여 투쟁의식이 미약한 혁명자를 타락적 경향에 빠지게 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김태준(金台俊) 등도 여운형의 주선으로 전향해 가출옥(假出獄)했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특히 친일분자의 소멸을 당면적 정치투쟁 구호로 하는 우리로서 아름답지 못한 여씨의 명단을 신정부 지도인물로 제출하게 된다면, 그는 반동 진영에 구실만 줄 뿐 아니라 친일분자 소멸투쟁에 불리한 영향을 급(及)할 것은 명약관화 한 일인가 한다”고 결론지었다.(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 자료총서 12,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227~228쪽)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5년 9월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도 여운형을 ‘친일파’로 분명히 규정하였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여운형은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아마도 약 2000만엔-twenty million)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전쟁이 끝나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이며 미국은 진주하지 않을 것으로 총독부는 판단했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공중 집회를 개최할 권한과 사무실, 교통편과 비행기를 제공하여 선전삐라를 전국에 뿌릴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와 함께 조선의 모든 신문 방송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는 것이다. 정보보고서는 여운형을 여러 해 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well-known to the Korean people as pro-Japanese collaborator and politician)로 평가했다.

    조선중앙일보 폐간의 진실

    장지연 친일 논란이 있기 전인 2003년 8월16일 저녁에 KBS는 특별기획 ‘일제하 민족언론을 해부한다’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적대적인 신문으로 지목해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다가 마침내 거액의 소송을 제기한 때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친일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공교롭게 방영시기가 그렇게 잡힌 것인지, 때를 맞춘 기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KBS는 이 프로그램에서 1940년 동아, 조선 두 신문의 폐간을 총독부와의 ‘합작’으로 왜곡하는 한편,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와 관련한 폐간에 대해서는 사실과는 다른 이상한 해석을 내렸다. 프로그램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이 “확대되어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모두 정간됐으나 조선중앙일보는 친일파를 사장에 앉히라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해 폐간된 반면 동아일보는 해당기자를 방출하고 일제의 언론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겠다는 사과문을 실은 뒤 복간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역사의 창’(2006년 가을, 통권 3호)에도 이런 주장이 실려 있다.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의 의사를 최소한이라도 표현할 수 없다면 ‘조선중앙일보의 사명이 다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상황을 주도할 수는 없었지만 속간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중앙일보의 역사성을 지켰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11월5일자로 발행허가 효력이 상실되어 폐간되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종래의 언론관을 고수하면서 폐간을 선택했고, 동아일보는 기업이냐 민족이냐의 기로에서 전자를 택했다.”(장신, ‘일장기 말소사건과 언론의 선택’)

    동아일보는 총독부가 요구하는 대로 순응하여 해당기자를 쫓아내고 일제의 언론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겠다는 사과문을 실은 뒤 복간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중앙일보가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여 폐간을 선택했다는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중앙일보의 폐간 경위는 앞에서 소개한 ‘역사와 언론인’에서 상세히 고찰했다.(305~311쪽 참고)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시 발행된 월간 ‘삼천리’의 기사를 인용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소화 11년(1936년) 9월5일, 동업 동아일보가 같은 사건으로 경무국으로부터 발행정지의 처분을 받자, 중앙일보는 자진휴간의 거조(擧措)에 출(出)하야 1개년간이나 경무 당국의 속간 내락을 얻기에 진력을 하였으나 사태 불순하야 한갓 헛되이 일자를 끌어오다가, 만 1년을 지나 또 제 9조에 의한 2개월간의 기한까지 지나자 11월5일에 저절로 낙명(落命)하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래도 그 제명(題名)을 살려 다시 속간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야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말하자면 경미한 중앙일보만 낙명하게 되었느냐 함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잠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휴간 중에 현 사장(呂運亨) 지지파와 신 사장(成元慶) 지립파(持立派)의 알력이 있어 호상 대립이 되어 중역회에서나, 주주총회에서나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아(不絶)왔으며 거기다가 8만원 공(空) 불입 같은 것이 튀어나와 주식회사 결성 중에 큰 의혹을 남긴 오점까지 끼쳐놓았음이 후계 간부가 사무국을 이해시킬만 한 공작을 1년 내내 끌어오면서도 이루지 못한 등 여러 가지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파란 많은 역사를 남기고 끝내 무성무취(無聲無臭)하게 마지막 운명을 짓고 말았다.

    -‘삼천리’ 1938년 1월, ‘오호, 중앙일보 수 폐간, 20여년의 언론 활약사를 남기고’

    이처럼 조선중앙은 속간을 위해 자체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내분과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채 법에 규정된 휴간 기일을 넘기는 바람에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것이다. ‘삼천리’의 기사대로 조선중앙은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것이었고, 동아일보에 비해 경미한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총독부가 사장 여운형의 경질을 요구하여 여운형이 물러났던 것은 사실이고, 실무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는 아예 없었다.

    형평에 맞는 친일 기준

    여운형이 사장직에서 물러난 후에 조선중앙일보의 청산위원회가 여운형이 살던 신문사 소유의 집을 여운형의 부인 명의로 등기한 것이 또 논란이 됐다. 신문의 폐간으로 사원들의 생계가 어려운 때에 전직 사장에게 과한 혜택을 줬다는 비판이 일었다. 조선중앙의 폐간에 이상한 해석을 붙이는 것도 여운형의 ‘항일’을 미화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일본 강점 시기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 ‘보고서’의 명단에 포함된 인물 가운데는 친일의 과오에 비해 독립운동, 항일언론 문화 활동 등의 공적이 현저히 큰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친일의 흔적이 뚜렷한 여운형은 처음부터 검토 대상에조차 포함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 대해선 추상같은 검찰관의 자세로 애매한 혐의까지 과도하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단죄하는 한편, 좌파에 대해서는 변호사 입장으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눈감아준다는 의혹을 살 수 있다.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친일파가 아니라는 쪽에 편을 들고자 한다. 친일의 여러 정황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일생을 놓고 볼 때 항일 독립운동의 공적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친일을 했을 리 없으며 그런 글을 자발적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지연을 친일 인명사전에 올릴 정도라면 여운형은 그보다 더 무겁게 단죄되어야 한다. 젊은 학도들을 전쟁에 나가도록 선동한 행위는 많은 사람을 현혹하고 직접적인 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鄭晉錫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신문학),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대학 박사(언론학)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위원, 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정책과학대학 원장

    現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한국언론사’ 외 다수


    아까운 청춘, 독립국가의 인재가 될 젊은이를 전쟁터로 몰아넣은 이적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평화로운 시대에 친일로 보일 만한 글을 썼다는 혐의를 가진 장지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실증적인 증거들이 남아있다. 비단 장지연에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 가운데 여운형에 비해 훨씬 가벼운 친일 경력을 가진 이가 많을 것이다.

    여운형에게는 자신의 혐의를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여운형이 친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거나 훨씬 가벼운 다른 사람의 혐의도 모두 벗겨줄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또는 시대상황을 잘못 읽은 과오로 불가피하게 남긴 흔적으로 인해 친일파로 몰린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 다른 사람도 구제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여운형의 행적을 기준으로 친일과 그렇지 않은 경우를 판단한다면 변명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친일’의 족쇄를 차게 된 많은 사람이 혐의를 벗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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