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천신일의 ‘올림픽 심판 매수’는 거짓말

  • 허만섭|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10-01-29 1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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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신일(67)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세중나모여행 회장)은 1월6일 “박연차(65)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받은 15만위안(약 2500만원)을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기간 중 (외국) 레슬링 심판들에게 줬다”고 말했다. 그는 박 전 회장한테서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특정범죄 가중처벌법의 알선수재)로 기소되었는데,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이규진)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 나와 이 같은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천신일 발언으로 ‘국격’에 먹칠

    천신일의 ‘올림픽 심판 매수’는 거짓말

    천신일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그는 올림픽 심판들에게 돈을 준 경위에 대해 “후진국 심판들에게 화장실과 호텔 복도에서 만나 직접 돈을 건넸다” “특급 심판들에겐 내가 직접 호텔 방으로 찾아가 (돈을) 주기도 했고 그 아래 1급 심판들에겐 레슬링협회 간부가 줬다” “관례적인 일이었다”고 했다.

    이 같은 천 회장의 증언으로 우리나라 체육계는 충격에 빠졌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베이징올림픽에서 심판을 매수? 대한레슬링협회장 진술이 파문’이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하는 등 신속히 외신을 탔다. “이명박 대통령이 강조해온 ‘국격(國格)’에 먹칠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대한체육회 측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 실추가 예상된다”고 했다.

    강원도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공동위원장인 김진선 강원지사는 1월8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기본적으로 좋은 영향은 미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의 시선은 싸늘해졌다. 취재 결과, 천 회장 발언은 당일 IOC와 국제레슬링연맹에 바로 전해졌다. IOC와 국제레슬링연맹 측은 대한레슬링협회 측에 “문서로 경위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진상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일부 국내 언론은 “천 회장 발언이 사실이라면 그 일각이 드러난 셈”이라고 보도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한국은 심판 판정과 관련해 석연찮다는 시선을 받았다”며 22년 전의 ‘뜬소문’까지 기사화됐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자학’하고 국제사회에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처신하기 이전에, 검증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천 회장의 ‘베이징올림픽 심판 돈 매수’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인지 여부다.

    천 회장은 어떤 심판에게 얼마를 줬는지에 대해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진술에서 특이한 부분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인 그가 ‘직접’ 외국심판들에게 돈을 줬다는 점이다. 매개자 없이 직접 뇌물을 주고받으려면 적어도 양 당사자는 서로 아는 사이여야 하며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국제레슬링계가 구제불능한 부패의 온상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다.

    “호텔 달랐고, 심판 만난 적 없다”

    천 회장과 외국심판의 관계, 베이징올림픽 기간 양자(천 회장-올림픽 심판) 간 접촉 상황, 심판 매수를 통한 승부조작 여지, 레슬링종목 올림픽심판 사회의 문화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 주장의 신빙성을 알아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베이징올림픽 당시 천 회장의 동선(動線)과 레슬링 심판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김기정 대한레슬링협회 전무(국제심판)와 국제레슬링연맹 심판위원회 김익종 부위원장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서로 번갈아 말했는데 그 내용이 서로 일치했다. 다음은 이들과의 일문일답이다.

    ▼ 베이징올림픽의 레슬링 종목 심판은 몇 명이며 어떻게 선발됐나.

    “모두 60여 명이었다. 국제심판은 1,2,3등급이 있는데 1등급 심판 중에서 올림픽심판을 선발한다. 나라별로 1~2명만 선택될 뿐이다.”

    ▼ (천 회장이 ‘특급심판은 내가 직접, 1급 심판은 레슬링협회 간부가 돈을 줬다’고 한 것과 관련해) 올림픽 기간 중 심판진이 특급, 1급으로 구분됐나.

    “아니다. 모두 1등급일 뿐이다.”

    ▼ 레슬링종목 심판진과 천 회장은 같은 호텔에 묵었나.

    “아니다. 레슬링 심판 전원은 선수촌 인근 호텔에 함께 기거했다. 반면 천 회장 등 대한레슬링협회 관계자들은 거기서 자동차로 상당히 떨어진 도심 메리어트호텔에 숙박했다.”

    올림픽 기간 중 레슬링종목 심판진과 천 회장이 같은 호텔에 묵었다면, 천 회장과 심판은 화장실이나 복도에서 자연스럽게 접촉했을 수 있다. 확인 결과 그 가능성은 사라졌다. 천 회장과 심판의 접촉 여부는 중요한 사안이므로 이 문제를 더 물어봤다.

    ▼ 올림픽 기간 중 천 회장을 포함한 대한레슬링협회 관계자들은 레슬링 심판을 만난 적이 있는가.

    “심판 숙소를 따로 배정해 격리한 상황이었다. 레슬링협회 관계자가 심판과 만나는 일정은 없었고 협회 관계자들 중 누구도 심판숙소로 찾아가거나 심판을 불러내 만난 적이 없다.”

    ▼ 천 회장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인데 국제레슬링연맹에선 어떤 직함인가.

    “천 회장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으로서 주로 국내에서만 활동한다. 국제레슬링연맹에선 아무 직함도 없다. 국제레슬링연맹은 산하에 심판위원회를 두고 심판을 관리한다.”

    ▼ 국제레슬링연맹에 천 회장의 해외인맥은 없다는 것 같은데 천 회장은 지금까지 외국인 심판들을 직접 만나 아는 사이가 되거나 교류한 적이 있는가.

    “천 회장은 외국인 심판들을 만날 일이 없다. 그런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 천 회장이 외국심판들에게 찾아가 직접 돈을 주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뇌물의 실익 없어”

    천 회장과 올림픽 심판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매개인은 양자를 모두 잘 아는 김 전무와 김 부위원장 정도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인터뷰에서 “천 회장을 심판에게 연결해주지도 않았고 천 회장의 돈을 받지도 않았다”고 했다.

    천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장 자격으로 심판에게 돈을 줬다면 베이징올림픽 레슬링종목에서 한국선수에게 판정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레슬링은 동메달 1개에 그쳐 8년 연속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는 등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김익종 국제레슬링협회 심판위원회 부위원장은 “베이징올림픽에선 심판 몇 명을 매수해 유리한 판정을 얻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레슬링종목은 1경기에 4명의 심판이 투입되는데 경기직전 심판이 결정됐다. 60여 명에 이르는 심판 중 한국선수 경기를 어떤 심판이 맡게 될지 사전에 알 수 없었다. 선수는 경기 도중 판정에 이의가 있으면 비디오판독을 요청할 수 있었다. 심판이 임의로 판정할 수 없었다.”

    베이징올림픽 심판에겐 항공료, 체재비 외에 IOC와 해당 국가에서 상당한 액수의 수당이 지급됐다고 한다. ‘15만위안(2500만원)으로 심판들에게 나눠줬다’는 주장에 김 부위원장은 “레슬링 국제심판 사회는 꽤 수준도 높고 투명한 편이다. 올림픽기간 중 수백만원 뇌물로 자신의 명예를 팔 심판은 없다”고 했다.

    ‘심판에게 돈을 주는 게 협회의 관례’라는 점에 대해 김기정 전무는 “국제심판들 간에 서로 작은 선물을 교환하기는 하지만 협회가 국제심판에게 돈을 주는 관례는 없다”고 단언했다. 심지어 김 전무는 “천 회장이 박연차 전 회장에게서 받은 15만위안 중 일부를 레슬링협회 측에 올림픽 격려금으로 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심판에게 뇌물로 줬다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천 회장이 착각했을 수 있다”고 했다.

    레슬링협회장 즉각 사퇴해야

    천 회장은 ‘직접’ 돈을 줬다면서 돈을 받은 심판, 액수를 밝히지 않았다. 증언의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 대목이다. 김 전무와 김 부위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베이징올림픽 기간 중 천 회장 등 협회 측은 국제심판을 만난 일정이 없었다. 또한 천 회장은 국제심판을 거의 알지 못하고 둘을 연결해줄 매개인도 없어 비밀리에 국제심판을 만났을 개연성도 없었다. 뇌물을 주어야 할 이유도 희박했다.

    반면 천 회장에겐 ‘외국인심판 매수’ 발언을 해야 할 동기가 있었다. 그는 이날 공판에서 ‘징역 4년에 벌금 150억원’을 구형받았다. 검찰은 박연차 전 회장이 준 15만 위안은 세무조사 무마 청탁의 대가로 봤다. 천 회장 입장으로선 박 전 회장이 레슬링협회 부회장인 만큼 그에게서 받은 15만 위안을 착복하지 않고 ‘전액’ 레슬링에 썼다는 ‘용처’를 입증해야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용처를 입증하지 못하면 최소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둘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돈 받은 사람이 외국인이고 특정되지 않아 이 조건에 부합한다.

    천 회장이 ‘자기방어’ 차원에서 어떤 말을 하던 그것은 그의 자유이고 그의 책임이다. 다만 그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직을 계속 맡고 있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형사피의자의 변명 하나가 ‘우리나라 체육계를 대표하는 권위 있는 진술’이 되어 국익에 크나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

    천 회장은 대통령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주고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 ‘대통령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가 지금까지 그 덕으로 고위직책을 유지하면서 나라를 어렵게 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 것이라면 국민의 분노는 다른 곳을 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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