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대한민국 최고 술꾼 허시명

“달착지근하고 쌉싸래하고 시곰새곰한 술맛에 빠진 인생”

  • 송화선│동아일보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0-02-01 1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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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에 술 드신 게 언제예요?
    • “술이요? 어젯밤에도 마시고 오늘 아침에도 마셨는데….”
    • -아침부터 술을요?
    • “집 베란다에 내놓은 막걸리 몇 종류를 이거저거 조금씩….”
    • 대답하고는 멋쩍은지 피식 웃는다.
    • “다행이다” 싶어 마주 웃었다.
    대한민국 최고 술꾼 허시명
    허시명(49)씨를 만나자마자 이 질문을 던진 건 그가 ‘술꾼’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정한 외모를 하고 있어서다. 무테안경을 쓰고, 잘 정돈된 머리 모양을 한 그는 고등학교 윤리선생님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얼굴로 조석(朝夕)을 가리지 않고 술을 한단다.

    마시는 방법도 특이하다. 색을 보고, 향을 맡고, 그 뒤에 비로소 입을 댄다. 혀에 닿는 첫맛과 입속을 가득 채우는 맛, 삼킨 뒤 머무는 맛을 구별해 느낀다. 잔을 비우고 나면 물 한 모금으로 입을 헹군 뒤 새 잔을 채운다. 이렇게 석 잔을 마신다. 술의 참맛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스스로 만든, 나름의 주도(酒道)다. 술 회사의 술 감정사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런 방식으로, 그는 술이 품고 있는 매력의 100%를 빨아들인다.

    허씨가 직접 만들어 붙인 자신의 직함은 ‘술 품평가’. 이전까지는 드러내놓고 이렇게 자칭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는 ‘대한민국 1호’ 술 품평가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술 기행가’라고 했어요. 좋은 술 찾아 세상 곳곳을 여행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술에 대해 점점 알게 되고, 평가도 할 수 있게 되더군요. 그때부터 술 품평가로 바꿨습니다.”

    여행길에서 술을 만나다



    그의 본업은 여행작가다.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한때는 ‘샘이 깊은 물’이라는 그럴듯한 잡지의 기자였다. 전통 문화가 낡고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찾아 알리던 교양지다.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샘이 깊은 물’에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술 품평가’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의 삶을 바꿔놓은 건 잡지발행인이던 고(故) 한창기씨다. 한글, 잡지, 한옥, 판소리 등 한국 문화 전반에 해박한 식견을 갖고 있던 그는 기자들을 문화전문가로 키웠다. 일일이 글쓰기를 가르쳤고, 넉넉하게 취재할 공간을 배려해줬다. 하지만 5년간의 직장생활은 파국으로 끝났다. 기자들이 결성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는 회사를 떠나야 했다. 한창기씨는 그에게 문화적 심미안을 선사한 스승이면서 동시에 직장생활을 마감하게 한 존재다. ‘세계 최고의 직장’이라고 생각하던 곳을 떠나며 그는 “이제 자유롭게 글 쓰고 여행하며 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선택한 여행작가의 길에서 술을 만났다.

    대한민국 최고 술꾼 허시명

    허시명씨가 고두밥과 누룩, 생수를 섞어 술을 빚고 있다.

    ▼ 여행을 다니다 술의 매력에 빠져든 건가요.

    “그보다는 호구지책이었다고 하는 게 맞지요. 프리랜서 여행작가는 잡지사에 기획안을 내고, 그게 채택돼야 연재를 합니다. 주제를 잘 잡는 게 중요해요. 한 잡지사에 낼 아이템을 정하려는데 아내가 술 얘기를 꺼냈어요. ‘남자들 다 술 좋아하잖아. 시사지에 술에 대한 여행기를 기고하는 거 어때? 전국을 돌며 지역 명주를 소개하는 거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이거 되겠구나’ 싶었지요.”

    ▼ 원래 술을 좋아하셨어요?

    “아니요. 완전히 문외한이었지요. 아는 게 없을 뿐 아니라 많이 마시지도 못했어요. 집안 내력이 술을 못합니다. 큰형은 맥주 한 잔 마시고도 목욕탕에서 쓰러지고 아버지는 아예 주무시는 스타일이에요. 저도 많이 마시면 그냥 잠을 잤지요.”

    그는 어린 시절 호기심에 술을 입에 대봤다거나, 인사불성으로 취해 ‘사고’를 쳐본 기억도 없다. 대학교 2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술에 대한 첫 ‘추억’을 만든다. 과 친구들과 계룡산 신도안으로 답사여행을 떠났을 때다. 낮에는 지역 방언을 채집하고, 밤이 되면 집 앞으로 실개울이 흐르던 민박집에 모여 주인 할머니가 내주는 밀주를 마셨다.

    “부드러운 보름달 빛이 도는 노르짱한 막걸리였어요. 진짜 맛있었지요. 그때가 제 삶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계절은 한창 봄이고, 내 인생도 봄날이고….”

    첫사랑, 한산 소곡주

    2000년 2월, 한산 소곡주를 맛보기 위해 충남 공주로 첫 여행을 떠나며 그날 그 술자리를 떠올렸다. 술이라는 게 그렇게 맛있고 즐겁고 행복한 거라면, 호구지책일지언정 이 취재도 행복할 게 분명했다.

    ▼ 소곡주는 맛있던가요.

    “최고였죠. 그 뒤로 10년간 술을 마셔왔지만, 지금도 제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술 가운데 하나예요. 그걸 처음 만난 건 행운이었죠. 제 첫사랑이라고 말해요.”

    그는 소곡주를 “잘 익은 벼이삭처럼 노릇한 색깔에 첫맛은 달콤쌉싸래하고 술을 넘기면 혀가 알알하다”고 표현한다. 옛 사람들은 이 술을 ‘앉은뱅이술’이라고 불렀다. 마신 사람은 취했다고 생각지 않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허씨는 “그게 좋은 술의 조건”이라고 했다.

    “약주를 마시면 손끝발끝부터 취해요. 머리는 명정해지죠. 옛 선비들이 술을 마신 뒤에 시를 읊은 건 그 덕분입니다. 나쁜 술은 머리부터 취하는 술이지요. 손발에 힘이 남아있는데 골치가 쑤시니 깨부수고 때리고 사고를 치게 되는 거예요.”

    소곡주는 명주(名酒)였다. 몸은 노곤하고 취기가 도는데 머리는 맑아졌다. 술기운에 한산면 건지산성에 올랐다. 백제가 망한 뒤 유민들이 울분을 삼키며 모여 살았다는 그곳의 누각에 오르자 한산벌이 내려다보였다. 멀리 금강 줄기도 눈에 들어왔다. 자리 펴고 앉아 다시 소곡주를 마시니 천상의 맛이 따로 없었다.

    “붉고 통통한 볼에 눈이 맑은 여자 같은 술이여!”

    그날 밤 술 취해 잠들기 전, 그가 소곡주에 대해 끼적인 감상이다. 그는 정말로 감탄했다. 새로운 경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 술맛에 경치까지 더해져 더욱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원래 맛이라는 게 공간과 더불어 기억되는 겁니다. 저는 최고의 술은 경치 좋은 곳에서 혼자 마시는 술이라고 생각해요. 빼어난 술과 그것을 빚어낸 풍광, 옛 이야기까지 함께 마시면 얼마나 감동적인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세계에 발을 들인 거지요.”

    그렇게 몇 차례 술 여행을 다닌 뒤부터 그는 자신에게 ‘술 기행가’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행지에 가면 어디서든 “이 지역에서 술 가장 잘 빚는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술이 그의 삶 속으로 쑥 들어왔다.

    칼처럼 날카롭고 댓잎처럼 향기로운

    술을 잘 하지도 못하는 그가 술의 세계에 빠진 이유에 대해 그는 “폭음을 하지 않기에 오히려 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알면 알수록 술의 세계는 무림의 세계와 흡사했다. 도처에 지존이 있었다. 전남 진도 산골 마을의 이름 없는 닭볶음탕집에서 만난 산버찌술 이야기는 소설의 한 대목 같다. 그 식당에 기막힌 술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지만, 주인은 좀체 내주려 하지 않았다. ‘좋은 술을 찾아 전국을 떠도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우리 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간곡히 설명하자 부엌 뒤편 술독에서 딱 한 잔을 떠줬다.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40도 맑은 술이 쨍하고 목구멍을 두드렸다. 쌉싸래하지만 떫지 않은, 이제껏 느끼지 못한 맛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다 아무래도 후회할 거 같아 차를 돌려 찾아갔어요. 딱 한 병만 팔라고 졸랐지만 끝내 거절당했죠. 파는 술이 아니라고 하기에 그럼 반 병만이라도 달라고 졸랐어요. 간신히 반 병을 받아들고 돌아오면서 소줏병이 작은 걸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 그렇게 좋은 술을 왜 팔지 않고 꼭꼭 숨겨두고 있는 거죠?

    “길고 험악했던 밀주 단속의 역사가 영향을 미쳤겠죠. 사실 우리나라처럼 술 문화가 풍성했던 나라는 세계에 없을 겁니다. 몇 대만 거슬러가도 집집마다 제사와 집안 경조사에 쓸 술을 직접 빚었잖아요. 전국 곳곳에 수많은 명주(名酒)가 있었죠.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밀주단속법, 박정희 정부 때의 양곡관리법(쌀로는 술을 빚을 수 없게 한 법)으로 이 술들이 고스란히 비주(秘酒)가 된 겁니다.”

    한평생 술을 빚던 할머니, 어머니가 단속반에 고초당하는 걸 보며 후손들은 대부분 술 빚기를 포기하거나 초야로 숨어들었다. 전국 방방곡곡 이름난 술을 찾아다니다 그렇게 수십년 숨어 있던 술을 만나면 예사로 마실 수 없었다. 눈으로 마시고, 코로 마시고, 혀로 마시고, 목구멍으로 마시고, 종국에는 머리로 마셨다. 한 모금의 술이 이야기가 되어 흘러나올 때까지, 오감을 오직 술에만 집중했다. 그의 독특한 주도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술을 마실 때마다 그 맛과 향에 꼭 맞는 표현을 떠올리려 애쓴다. 전남 태인 죽력고의 색은 “연하고 투명한 쑥빛이 황홀하다”고 한다. 이 술의 향에 대한 표현은 더욱 주옥같다. “강렬한 알코올 향 사이로 쇳내 같고 잿내 같은 기운이 스며 나오는데 그 향이 마치 폭풍에 휩쓸린 대숲 소리처럼 맹렬하다.”

    그는 죽력고를 머금으며 대숲을 느낀다. 그 공간의 느낌이 술맛을 극대화한다.

    리쉬부르, 백화주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한때 큰 인기를 모았던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이 떠올랐다. 프랑스 와인 ‘리쉬부르’를 찬미하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이 와인 향을 맡는 순간 풀꽃으로 가득 찬 드넓은 평원에 선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글라스를 돌려 공기와 만나면 향긋하게 화려한 향이 비강을 간질인다. …호화로운 꽃다발을 건네받는 듯한 느낌. 마치 백가지 꽃향기를 모아놓은 듯한….”

    책 속에 펼쳐진 평화로운 꽃밭 풍경을 보며 “나도 이 와인을 맛보고 싶다”고 진심으로 바란 기억이 난다. 한국에도 이런 술이 있다는 건 허씨를 통해 처음 알았다. 전북 김제시 김종회씨 댁에서 빚는 백화주(百花酒)다. 그는 “엷은 콜라빛 술을 따르는 순간 뭉쳐놓은 꽃처럼 진한 향이 배어나왔다”고 했다.

    이 술 안에는 꼭 100종류의 꽃이 들어 있다. 모란 등꽃 절굿대꽃 패랭이꽃 때죽나무꽃 도장나무꽃 산딸나무꽃 백굴채 자운영 흰철쭉 댑싸리꽃 수국 인삼 층층나무꽃 갓꽃 후박꽃 아카시꽃 민들레 당귀 철쭉 병꽃나무꽃 고들빼기 찔레꽃 장미 토끼풀꽃 작약 꽃잔디 수영꽃…. 다 헤아리기도 힘든 이 꽃들은 모두 전북 김제의 산과 들에서 피어나는 것들이다. 김씨 가족은 매년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산천을 헤매며 꽃을 모은다. 수대째 해온 일이다. 이 술이 품고 있는 100종류 꽃향기를 맡으려면 김씨 가족처럼 정성을 다해 술잔을 들어야 한다. 허씨는 이 술도 석 잔을 마셨다.

    술 속에서 길을 잃다

    대한민국 최고 술꾼 허시명

    막걸리 열풍에 힘입어 우리 술을 가르치는 강좌가 크게 늘었다. 허시명씨가 서울 한의약박물관에서 단양주 빚기를 설명하고 있다.

    “한 잔 머금으면 달면서도 쓰고 쓰면서도 매웁하다. 넘기고 나면 입안에 침이 괴면서 신맛이 돈다. 두 잔을 마시고 나니 혀에 감기는 술이 탕약처럼 묵직한 게, 혹시 약을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다. 석 잔이 들어가니 몸에 알코올 기운이 퍼진다. 꽃밭을 거니는 것 같다.”

    귀한 술을 찾기 위해 전국을 헤매고, 술들이 품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에 감동하다가 그는 그만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아니 아예 술 밖으로 빠져나올 생각을 잃었다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중앙대 민속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전통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2005년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술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다.

    ▼ 세계 각국의 술을 섭렵하기로 한 건가요?

    “아니요. 우리 술을 더 잘 알기 위해서였죠. 양조장에 다녀보면 일본 말이 많아요. 일본 누룩을 쓰는 경우도 많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술 기술이 들어온 것 같기는 한데, 뭐가 우리 것이고 뭐가 일본 것인지 술 빚는 사람조차 잘 몰랐어요. 우리 술의 원형은 뭘까, 어떤 면이 변화되고 왜곡됐을까 알려면 일본 술이 뭔지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걸 괄호 쳐서 빼내면 우리 술만 남을 테니까요.”

    그는 일본 정부에서 운영하는 ‘주류총합연구소’에 들어갔다. 양조장 2세들이 술 빚기를 배우는 곳이다. 그곳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매일 술을 빚고 맛보고 연구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술 익어가는 그윽한 냄새가 가장 먼저 코끝을 간질였다. 그곳에서 맡은 향기는 아직도 그의 뇌리에 남아 있다.

    ▼ 다녀오니까 우리 술을 보는 눈이 달라지던가요.

    “그럼요. 우리 술과 일본 술의 차이점이 보이고 우리 술을 어떻게 개선하면 좋아지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우리 전통주 가운데 막걸리가 가진 매력에 대해서도 새삼 생각하게 된 계기였어요.”

    그가 막걸리 얘기를 꺼낸다. 사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막걸리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가을, 8주에 걸쳐 막걸리에 얽힌 문화와 역사, 막걸리 빚기 등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막걸리학교’를 세우고 교장도 맡았다. 막걸리학교는 막걸리 열풍과 맞물려 큰 관심을 모았다. 2기 때부터 교육기간이 10주로 늘어났고 3기생 선발 때는 40명 모집에 150여 명이 지원해 4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 막걸리의 인기가 갑자기 뜨거워졌죠.

    “저도 놀랐어요. 사실 지난해 이맘때쯤, 막걸리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출판사 하나 흔쾌히 받아주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온갖 출판사에서 책 내자고 전화가 오죠. 막걸리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도와달라는 만화가도 네 명이나 되고…(웃음). 겨우 1년 사이에 세상이 정말 달라졌어요.”

    ▼ 일본의 영향이라는 말이 많던데요.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막걸리가 인기를 끌면서 그 영향이 우리나라로 건너온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막걸리를 새롭게 인식한 계기가 일본에서였으니까요. 막걸리는 어찌 보면 우리 술의 막내 같은 거예요. 술을 빚어 잘 익은 청주를 떠내고 지게미 남은 거 버리기 아까우니 물 걸러서 먹는…. 서민 대중의 술이지만 ‘명주’라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동안 관심 밖에 있었죠.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 막걸리만의 독특한 술 문화가 생겼거든요. 그게 지금 막걸리를 세계적인 술로 만들고 있어요.”

    ▼ 막걸리 문화라는 게 뭔가요.

    “우선 노동주라는 거예요. 땀 흘린 뒤 먹기 좋은 술. 현대적으로 보면 레포츠 음료죠. 사람들이 등산하고 내려와서 막걸리를 먹잖아요. 갈증 해소 음료로 이만한 게 없거든요. 출출한 허기도 면하게 해주고. 일본에도 탁주가 있지만 우리 막걸리와 맛이 달라요. 도수도 높아서 땀 흘린 뒤 약간 취기 오를 만큼 기분 좋게 마실 수 없는 술이죠.”

    그가 말하는 막걸리의 또 다른 장점은 ‘파티의 술’이라는 점이다. 막걸리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왁자하게 술잔을 나누며 마시는 술이다. 일본 사람들은 탁주도 자기 병 하나 놓고 잔 하나 놓고 ‘도꾸리’로 마신다. 그들에게 가볍고 활기차고 맛있는 막걸리는 새로운 술의 세계로 보인다.

    칠레 와인 VS 한국 술

    ▼ 그래도 여전히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우리 술은 소주라고 하던데요. 연간 수출액이 1000억원에 달하고…. 막걸리는 아직 30억원대에 머물러 있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그건 맞아요. 일본 사람이 가장 잘 아는 한국어가 ‘진로’와 ‘김치’라고 하더군요. 막걸리가 특별한 건 술이면서 동시에 한국 문화이기 때문이에요. 한 일본 기자가 ‘한국 소주는 칠레 와인 같다’고 하는 걸 듣고 무릎을 쳤어요. 그 말이 딱 맞지요.”

    그에 따르면 와인의 본고장이 프랑스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는 칠레 와인을 마시면서도 프랑스의 와인 문화를 만난다. 일본인들에게 소주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희석식 소주는 독일에서 개발돼 일본을 거쳐 한국에 온 거예요. 일본 사람들은 진로가 한국에서 생산된 술이라는 건 알지만, ‘한국 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죠. 하지만 막걸리는 한국 술입니다. 김치 불고기 춘천닭갈비 비빔밥처럼, 음식이면서 곧 우리나라예요. 그게 그 사람들을 사로잡는 거고요.”

    그는 일본인들이 막걸리를 ‘마코리’라는 이름으로 상표 등록한다고 해도 흥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막걸리를 만들든,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우리 것이라면 막걸리는 우리 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막걸리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는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길 문화를 만드는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막걸리학교에서 바로 이 일을 하고 있다. 그를 만난 다음날, 마침 서울 대학로에서 막걸리학교 3기 개강식이 있었다. 저녁 7시, 강의실에 들어서자 영하 10℃의 한파를 뚫고 모인 40명의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부터 큐빅 박힌 머리띠를 한 아가씨까지, 성별도 연령도 다양하다. 1시간쯤 막걸리에 얽힌 문화와 역사를 강의하고 난 뒤 허씨가 “이제는 막걸리를 직접 맛볼 차례”라고 말한다. 전국 각지의 막걸리 5종류를 유리병에 담아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는 시간이다. 월매쌀막걸리, 부자생술, 배다리쌀막걸리, 참살이탁주, 능서쌀막걸리가 각각 얼굴을 가린 채 테이블에 올랐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허씨의 주도(酒道)대로 술을 맛본다. 색상과 탁도, 향기, 첫맛, 머금은 맛, 삼킨 뒷맛을 꼼꼼히 느끼고 평가한 뒤 서술형 ‘막걸리 평가표’에 적는다.

    달디달다, 달콤하다, 달보드래하다…

    대한민국 최고 술꾼 허시명

    술을 빚는 데 쓰이는 누룩. 직접 만들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누룩이 판매되고 있다.

    종이를 받고 잔을 받아든 채 막걸리 평가에 참가해봤다. 이렇게 기록할 게 있을까 생각하며 술을 넘기는데 입에 익은 막걸리 맛이 아니다. 첫 번째 마신 술에선 달콤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고소한 첫맛 뒤로 가볍고 산뜻한 향기가 이어진다. 두 번째 술은 탄산이 강하다. 담백한 술 뒤에 마시니 달콤한 탄산 맛이 꼭 사이다처럼 느껴진다. 세 번째 술은 진하고 끈끈한 뒷맛이 인상적이었다. 와인이라면 ‘묵직한 보디감’이라고 했을 법한 느낌이다.

    ▼ 막걸리에 이렇게 다양한 맛이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전국적으로 800여 개 양조장에서 수많은 술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가양주(家釀酒) 문화를 아직 이어오고 있는 집에서는 제 솜씨대로 술을 빚지요. 그 술들이 각각의 맛을 이어가며 존재해야 막걸리 열풍이 한때 지나가는 트렌드가 아닌, 우리 문화로 자리 잡을 거예요.”

    ▼ 막걸리 상표를 가린 채 마시고 맛을 평가하게 하는 수업 방식이 인상적인데요.

    “우리 술에 시시콜콜 시비를 거는 까다로운 감별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막걸리 맛을 평할 줄 알아야 자기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타인에게 권할 수 있고, 막걸리를 통해 우리 문화와 음식을 소개할 수 있게 되지 않겠어요?”

    그는 이런 공동 작업을 통해 우리 술을 평가하는 형용사를 규격화하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다. 한때 “내가 느낀 이 맛을 남들도 똑같이 느낄까. 내가 ‘맛있다’고 하는 것이 바다색이나 하늘색을 파란색이라고 단순화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수작이 아닐까” 강박관념을 느낀 적이 있다는 그는, 주관적일망정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맛의 표준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당도에 따라 가장 달면 ‘달디달다’, 단 맛이 좀 가벼우면 ‘달콤하다’, 혀끝에서 약간 움직이면서 단맛이 사라지면 ‘달달하다’, 달면서도 부드럽고 은근하다 싶으면 ‘달보드래하다’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달콤함 끝에 쓴맛이 느껴지면 ‘달콤쌉싸래하다’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형용사에 맞는 규칙을 만들면, 우리 술도 와인처럼 패키지만 보고 취향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는 단계로 진화하게 된다.

    “우리말처럼 형용사가 풍성한 언어가 또 있을까요. 우리말의 다양한 프리즘을 분석해 딱 맞는 맛과 맺어주는 건 국문과를 졸업한 ‘술 품평가’로서 제가 할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외국인들이야 우리말의 그 많은 느낌을 이해하고 술을 찾아 마시려면 힘 좀 들겠지만, 재미있잖아요(웃음). 그 과정에서 한국문화, 한국 것에 관심이 더 생길 테고, 그게 우리 술을 더 멋지게 만드는 또 다른 매력이 될 겁니다.”

    그렇게 그는 또 술의 세계에 깊숙이 발을 담갔다. 이제는 술 때문에 대학 졸업이후 접은 국문학 공부까지 다시 해야 할 판이 됐으니 말이다.

    ▼ 보통 작업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일단은 술을 많이 마셔보는 게 중요하겠죠. 제가 아침에도 술을 마시는 것처럼(웃음).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열심히 술을 맛보고 그 맛을 느끼고 기록합니다. 그러다보면 미세한 차이가 느껴져요. 이 술에 밀누룩이 들어갔나 쌀누룩이 들어갔나, 발효시간을 어떻게 잡았나, 보관상태가 어떤가, 감미료를 넣었나 안 넣었나. 이런 여러 변수를 집어내 표현하는 연습을 하면 점점 맛이 개발되죠.”

    그의 주량은 공식적으로 소주 한 병 반이다. 하도 묻는 사람이 많아 그렇게 답을 정해두었다. 하지만 즐길 수 있을 때까지 마시고 술 자체의 맛에 취할 그에게 주량은 별 의미가 없다. 그를 술꾼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나무하는 사람이 나무꾼, 사냥하는 사람이 사냥꾼이듯, 술을 ‘최선을 다해 전문적으로’ 마시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직접 술도 빚는다. 술의 세계를 거닐다 어느 순간 “이 정도 깊이에서 한 치도 더 들어갈 수 없겠다”는 막막함을 느끼고 부터다.

    “찹쌀 고두밥 1말과 누룩 2되를 섞은 반죽에 물 5ℓ 붓는 것과 6ℓ 붓는 것의 차이를 알기 어려웠어요. 귀로 술의 소리를 듣고 손으로 술을 만져보고 싶었죠.”

    ‘내 술’을 빚으면서 비로소 그는 본격적인 ‘술 품평가’가 됐다.

    집집마다 술이 익어가는 아파트

    이 기사를 쓰기 위해 그를 세 번 만났다. 세 번째 아니 만났다면 큰일 날 뻔했다. 마지막 만남에서 그와 함께 술을 빚었기 때문이다. 서울 제기동 한의약박물관에서 그는 식힌 찹쌀고두밥과 누룩, 생수를 내놨다. 술 빚기의 첫 단계는 이 모든 재료를 골고루 섞는 것이다. 빨래하듯 손바닥으로 열심히 치대 고두밥이 누룩물을 충분히 흡수하게 해야 한다. 이 과정을 충실히 해야 발효가 진행된다. 팔목이 욱신대다 등줄기까지 뻐근해질 때쯤 반죽한 술밥을 통에 담았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아파트가 술 빚기에 참 좋은 공간이에요. 특히 겨울이요. 난방을 하면 실내 온도를 20℃ 안팎으로 맞출 수 있으니 술 익기에 딱 좋죠. 이 통을 집에 가져가 온도를 잘 맞추고 매일 소독한 막대로 한 번씩 잘 저어주면 일주일쯤 지나 세상에서 유일한 ‘나만의 술’이 태어날 겁니다.”

    그의 집엔 늘 술이 한 동이씩 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술자리는 추운 겨울날, 따뜻한 온돌방에 좋은 친구들을 초대해 소박한 상에 직접 빚은 술을 올리고 밤을 새워 함께 마시는 것이다. 그때 그 자리에 있을 술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이야기고, 문화고, 추억이 될 것이다.

    한창기를 넘어설 때까지

    그와 함께 술을 빚은 다음날 ‘술은 잘’이라는 제목의 메일이 왔다.

    “술은 어떠한지요. 저도 한 항아리 담아온 술이 저녁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얼었더군요. 12시 갓 넘어 집에 와서 술항아리 온도를 재어보니 10℃에 걸려있고 술밥들은 추워서 한덩어리로 뭉쳐 언 살처럼 단단해져 있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 손을 넣어 치댔는데 손이 어찌나 시린지 계곡물에 넣은 듯하더라고요. 냄비에 물을 끓이고 그 위에 항아리를 얹어 뜨거운 김으로 항아리를 데우면서 손으로는 술밥을 뒤집어주기를 한참하니 간신히 20℃가 되었습니다.”

    헤어지는 길 ‘날이 추운데 퇴근하기 전에 술이 얼어버릴까봐 걱정’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나름의 방책을 알려준 듯했다. 편지를 읽으며 그가 인터뷰 도중 “내가 기른 강아지가 가장 귀엽듯, 내가 담근 술이 가장 맛있다”고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게 술은 생명체라는 게 새삼 실감났다. 정성을 다해 가꾸고 사랑하면 비로소 제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 그 술을 위해 그는 평생을 바치고 있다.

    그는 메일을 통해 인터뷰 내내 말하지 않던 자신의 목표를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살아오면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나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 삶의 모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만큼이나 크고, 어려운 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졌던 직장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문화인이라는 수식어를 앞에다 붙여줘야 마땅한 한창기다. …한국문화를 그만큼 잘 해석할 수 있을까, 해석한 것을 또 한국인에게 세계인에게 좀 더 살을 붙여 돌려줄 수 있을까? 한창기씨 만한 인간이 되어야 할 텐데, 내가 한때 부정했던 한창기씨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돼야 할 텐데,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술을, 한국 술을 다루면서, 그런 생각이 늘 나를 채찍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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