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예술병 걸린 4차원 소녀 예지원

“40대의 꿈?…‘생산’이죠, 남편은 시인이나 음악가? ”

  • 글·최영일│문화평론가 vicnet2013@gmail.com│정호재│동아일보 통합뉴스센터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0-02-01 2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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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병 걸린 4차원 소녀 예지원
    하필이면,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영하 15℃ 혹한이었다. 야외가 아닌 게 천만다행. 명품브랜드 본사의 지하카페에 나타난 예지원은 날씨에 아랑곳 않고 당당했다. 자태는 자못 도도한데…, 자리에 앉자마자 매니저 언니와 나누는 수다는 영 딴판이다.

    “나 변장 괜찮게 먹었어?”

    “응, 오늘 괜찮다, 얘.”

    예지원다운 분위기였다. 그녀가 누구던가? 바로 ‘올드미스 다이어리’와 ‘골드미스 다이어리’의 그 예지원이 아닌가. 그녀는 두 얼굴을 지녔다. 한 꺼풀 벗겨보면 더 많은 모습이 나올 것만 같다.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나이를 잊은 4차원 소녀가 있는가 하면 예의 바르고 배려심 많은, 한없이 이타적인 천사의 모습이 감춰져 있다. 자, 그럼 이제 아이스크림을 얹은 바나나 크레페와 얼그레이 티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대화를 시작해보자.

    # 명품



    생기 넘치지만 가끔은 거칠고 투박한 연기자라는 이미지도 강한 그녀. 만난 곳이 명품브랜드 본사 사옥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명품’부터 떠올랐다.

    ▼ 명품 좋아하세요?

    “좋아하죠. 전 세일을 사랑해요. 하지만 비싼 걸 사는 것이 아니라 요령 있는 소비자에 속하죠. 전 예쁜 건 다 좋아해요. 그런데 특히 명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제가 물건을 오래 쓰는 편인데 비싼 것이 질기고 오래가더라고요.(웃음) 무용을 하다보니 가방에 무언가 많이 넣어 무겁게 들고 다니는데 흠이 나도 멋있어요. 그런데 12년 쓴 가방이 드디어 며칠 전에 끈이 끊어졌지 뭐예요.”

    그녀는 떠오르는 단상을 정말 구김없이 쏟아냈다. 독특한 말버릇이 있다면, 대화 도중 갑자기 고개를 숙이면서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밀을 알려주듯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명품에 대한 질문에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제스처를 쓰며 갑자기 속삭인다. “그런데 아세요? 이 카페에 있는 모든 제품은 모두 여기 브랜드랍니다. 하나 가져다 쓰셔도 좋겠죠?”라며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는다. 물론 농담이다. 인터뷰이는 슬슬 인터뷰어를 녹여버리고 인터뷰이에 녹아드는 인터뷰어는 점점 즐거워진다.

    # 프랑스?

    ▼ 프랑스통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방송가에서 유명해졌는데 특별하게 메이킹된 경우도 있지만 제 성향도 반영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출연하기 위해 샹송을 연습했던 거예요. 그런데 누구나 프랑스 좋아하지 않나요? 왠지 공기부터 다르잖아요. 자유로운데다 특히 여성이 당당하잖아요. 어떤 차림을 하고 다녀도 별로 눈길을 받지 않지요. 게이건 레즈비언이건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존중하고요. 거리를 오가며 어느 장면을 봐도 그림이 나와요. 그런 거 있죠? 다니는 사람들이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생생한 캐릭터들. 불어로는 애니마이숑. 한번 다녀오면 눈이 바뀌어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오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 문화는 좀 다르죠. 전 어릴 때부터 특이한 패션으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자랐어요. 그런데 ‘빠롤레~’만 부르면 제가 4차원이라니. 어, 내가 왜 4차원이지?”

    이런, 그녀가 먼저 4차원이라는 말을 꺼내버렸다.

    # 4차원

    예지원만의 4차원 끼는 대중에게 익숙하다. 그녀가 영화와 방송에서 맡았던 캐릭터들, 예를 들어 ‘생활의 발견’에 등장하는 명숙은 남편이 있으면서도 여행 중인 주인공 경수를 유혹하고, 진심이 모호한 헷갈리는 여인이다. 시트콤과 극장판 영화로 예지원을 가장 널리 알린 ‘올드미스 다이어리(올미다)’에서도 자신만의 판타지에 빠져 사는 노처녀였고, ‘귀여워’의 순이는 아스팔트 위의 집시로 콩가루 삼부자 집 단칸방에 끼어드는 이상한 여자다.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그녀는 노래를 시키면 잔뜩 분위기를 잡으며 샹송을 부르고, 시시때때로 전공인 무용을 펼치며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만의 무드에 빠진다.

    예술병 걸린 4차원 소녀 예지원
    ▼ 4차원 이미지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데, 진실과 설정의 경계는 어디인가요?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친구들 사이에서 많이 튀었나봐요. 전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다들 반응이….”

    ▼ 어땠는데요?

    “뭐, 눈살 찌푸리고, 경악하고, 그러다가 서서히 무시당하고 외면당했죠. 그래도 전 별로 신경 안 썼어요.”

    ▼ 도대체 어떻게 입으셨기에?

    “특별히 고수한 스타일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날그날 느낌에 따라 빨강바지가 입고 싶으면 그냥 입고, 반짝반짝 액세서리를 걸고 싶으면 주렁주렁 걸고 그런 거죠 뭐.”(특유의 쾌활한 웃음)

    그녀는 자신이 머리가 좋지 않은 편이라고, 맹한 구석이 많다고 말하면서 계속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추구하는, 아니 ‘추구’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만의 본성이 내숭 없이 솔직하고, 한없는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의례적인 인터뷰 질문에 연신 틀을 깨버리는 답변으로 자신을 열어보였다. 그녀의 4차원성은 우리 사회에 아직까지 만연해 있는 근엄주의와 관습,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야만 하는 타성을 마치 무중력 외계인처럼 훌쩍 뛰어넘어버리는 근원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어쩌면 그녀가 걸려있다는 4차원 병은 하나는 자유지향, 또 하나는 예술지향이라는 성향의 바이러스일지 모른다.

    # 살짝 예술병?

    그녀가 또 예의 그 몸짓을 하며 속삭인다. “제가요, 예술병에 심하게 걸렸었거든요.”

    ▼ 예술병? 그건 또 뭡니까?

    “제가 예술에 미쳐요. 프랑스를 좋아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죠. 예전엔 예술영화만 찾아 봤어요. 신기하죠? 예술에 미쳐서 예술가들 많이 따라다니고. 그런데 예술의 ‘예(藝)’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뭐라고 답해야 할까 머리를 긁적이는데 그녀가 먼저 말해버린다.

    “저도 몰라요.(웃음) 제가 지식과 별로 안 친하다고 얘기했죠? 그렇다고 교수도 아니고요.”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보다 느낌으로 예술에 미쳐 스스로 예술병에 걸렸다고 이야기하는 여자. 그런 그녀에게도 동경하는 아이콘은 있을까.

    “줄리엣 비노쉬요. 제일 좋아하는 배우. 요즘은 좀 사그라졌는데 작년에 그 공연 보셨어요?”

    그녀가 말한 줄리엣 비노쉬의 내한공연은 2009년 초 안무가 아크람 칸 연출로 무대 공연된 무용극 ‘In-I’다. 40대 후반에 접어든 비노쉬는 전문무용수가 아님에도 1년간 아크람 칸과 땀을 흘리며 호흡을 맞춘 결과 세계 순회공연에 나선 바 있다.

    “네! 정말 감명받았어요. 나이는 상관없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그 노력. 그리고 그 표현.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고선 다시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한다. “하지만 나의 오만함으로 감히 말씀드린다면 제가 40대에 추는 춤은 비노쉬보다 더 나을 거라고 확신해요.”

    # 무용

    그녀는 예고시절부터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서울예대에 진학해서는 방송연예학과에서 연기를 배웠지만 무용은 꾸준히 하고 있다. 한국무용뿐 아니라 재즈댄스와 현대무용까지 그녀는 몸으로 표현하는 언어문법에 심취해 있는 듯했다.

    “이 대목에도 저를 4차원으로 말씀하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요. 많이들 헬스에 다니시잖아요? 헬스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좋은 운동이지만. 무용은 또 다른 차원이랍니다. 몸을 풀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고 영혼을 자유롭게 하죠. 그런데 연예인들이 헬스에 다니는 것은 당연하고, 무용을 하는 것은 특이하다? 전 절대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요.”

    ▼ 무용이 배우란 직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물론이죠. 같이 몸을 쓰는 직업이잖아요. 스트레칭 하면 아이도 잘 낳고요(웃음). 또 몸이 말을 해주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해요. 그래서 몸을 따라서 감정이 움직이기도 하죠. 그런데 춤을 춘다면 다들 이상하게 봐서. 한때 외국에 가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녀의 생각을 지지한다는 의도로 기자의 어머니도 오십이 넘어 무용을 배우셨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갑자기 대화 주제가 춤이론에서 여성론으로 옮아갔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는데 그렇게 됐다. 대화 주제는 그렇게 통통 튀었다. 분명한 건 그녀가 드라마 ‘선덕여왕’을 빼놓지 않고 봤다고 고백하면서 그렇게 됐다는 점이다.

    “미실 역에 푹 빠졌어요. 신라시대가 여성이 중심이 되는 모계사회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미실과 선덕여왕…, 생각해보면 우리 여성들이 그간 너무 억압돼 있던 것이 아닐까요? 현대에 들어 여성들이 제 역할을 하면서 나라도 다시 융성해졌잖아요.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요?(웃음)”

    # 예능 그리고 2010년

    그녀는 2009년 SBS 예능 프로그램인 ‘골드미스가 간다(골미다)’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통해 특유의 끼를 맘껏 펼쳐 보였다.

    ▼ 영화배우가 버라이어티 프로를 한다고 해서 조금 놀랐어요.

    “예능이 대세잖아요(웃음). 사실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저는 데뷔 초기부터 일본문화를 부러워했어요. 일본에선 톱배우들도 예능프로에 나와서 대머리가발 쓰고 망가지거든요. 배우이고 연예인이니까 대중도 그것을 재능으로 인정하고 함께 즐겨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예능 한다고 하면 ‘쟤는 배우로서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죠. 주눅 들게 만들어요.”

    ▼ 주눅 들지 않던데….

    “그럼요. 전 똑똑한 편은 아니지만 주변에 재능 있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는 재능을 가졌어요. 아마 그런 재주 때문에 오래 살아남았을 수도 있죠. ‘골미다’에서 만난 송은이 신봉선에게 홀딱 반해버렸어요. 제가 TV를 잘 안 봐서 몰랐는데 세상에 그런 천재들이 없는 거예요. 높은 시청률 기록하며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었죠.”

    그녀에게 올해의 계획을 물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인터뷰가 있기 하루 전 점심을 먹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올해 연극을 하나 하려고 기획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전화가 와서 영화에 캐스팅되었다고…, 너무 기뻤죠. 임권택 감독님 작품이에요.”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 감독이 ‘천년학’에 이어 101번째로 만드는 영화다. 전통한지를 만드는 장인에 얽힌 이야기로 박중훈, 강수연의 출연이 알려졌고, 드디어 예지원은 한지 장인 박중훈의 부인 역으로 주요 배역에 낙점됐다. 최근 예지원은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후속작에도 출연이 확정돼 겹경사를 맞았다.

    # 40대엔 생산(生産)

    곧 40대를 맞는 그녀, 40대의 꿈이 뭐냐고 물으니 고개를 낮추고 이렇게 속삭였다. “생산이요.” 더 나이 들기 전에 ‘생산’하는 것이 ‘엄마’로서의 책무라는 것이다. 참 당황스러운 얘기, 얼떨결에 물었다.

    ▼ 남편이 있어야 아이를 가지실 것 아닙니까? 어떤 타입을 좋아하세요? 역시 예술가?

    “예전엔 그랬죠. 하지만 이젠 싫어요. 그렇게 되면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재능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서 좋지 않을 것 같아요. 화가는 절대 아니고요, 시인은 저의 모자란 머리를 채워줄 것 같고, 음악가라면 삶이 즐거울 것 같고….”

    사실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신이 난 사람은 예술가이자 사진작가 역할을 한 사진기자였다. 인터뷰 중 그녀와 사진기자의 시간은 인터뷰어가 지켜보기엔 서로 몸으로 대화하는 교감의 시간으로 느껴졌다. 사진기자에게 살짝 질투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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