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월정사, 겨울 전나무 숲의 오연(傲然)

  •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입력2010-02-02 16: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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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정사 전나무 숲은 눈이 있어 더 아름답다. 눈 쌓인 숲길을 거닐다보면 그 아름다움에 눈이 행복해지고, 도시에서 경험할 수 없는 적막 안에서 온갖 번뇌가 말끔히 사라진다. 자연이 붓칠한 거대한 수묵화는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이 겨울 산사를 찾는 이에게만 그 위용을 드러낸다.
    월정사, 겨울 전나무 숲의 오연(傲然)

    월정사 전나무 숲의 설경.

    雨中月精 雪中五臺. ‘비 오는 여름 풍광은 월정사에서 바라보는 것이 최고요, 눈 오는 겨울 풍광은 오대산에서 바라보는 것이 최고’다. 오래전부터 월정사 스님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 구절은 월정사와 오대산의 겨울 풍광이 여름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뜻일 게다. 월정사와 오대산의 풍광이 특히 아름다운 이유는 전나무 덕분이다. 전나무는 오대산 전역에서 쉽게 눈에 띈다. 겨울에도 늘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상록수이고 30~40m까지 곧고 장대하게 자라는 생육 특성을 가진 전나무는 오대산의 대표 수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전나무 숲을 ‘오대산 전나무 숲’이라고 부르지 않고 ‘월정사 전나무 숲’이라고 한다. 이는 월정사나 오대산을 찾는 이들의 뇌리에 월정사 들머리의 전나무 숲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하게 각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계곡 건너편에 새 도로가 생기기 10여 년 전만 해도 월정사나 상원사로 향하던 모든 자동차는 이 전나무 숲을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 월정사는 물론이고 오대산을 찾는 방문객들도 울창하며 장대한 전나무 숲의 신비로운 풍광을 가슴에 담고 갈 수밖에 없었다.

    월정사는 아름다운 전나무 숲 못지않게 이 땅에서 가장 넓은 절집 숲을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면적이 여의도의 7배인 5800여ha나 된다.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임야 조사와 광복 이후 단행된 농지개혁 등으로 인해 줄어든 면적까지 감안하면, 원래는 이보다 훨씬 넓은 면적의 산림을 보유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월정사는 어떻게 이처럼 넓은 면적의 숲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 실마리는 상원사와 세조 임금의 인연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해 그 잘못을 참회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많은 불서를 간행하는 한편, 상원사 중건 불사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 인연으로 상원사를 방문한 세조는 두 번의 이적(異蹟)을 경험했는데, 하나는 피부병을 앓던 그가 상원사 계곡에서 몸을 씻을 때 문수보살을 친견한 덕에 지병을 고친 사연이고, 다른 하나는 법당으로 들어가려던 그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불상 밑에 숨어 있던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구하게 한 고양이에 얽힌 사연이다.

    세조가 하사한 묘전(猫田)



    고양이 덕에 목숨을 구한 세조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고양이를 위해 상원사 사방 80리의 땅을 묘전(猫田)으로 하사했다고 한다. 500년 하고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조가 자신의 어의(御衣)를 걸어둔 관대걸이는 상원사 초입 계곡 옆에 놓여 있으며, 또한 세조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는 석상(石像)이 되어 상원사 문수전 앞을 지키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곳곳의 사찰림의 유래를 엿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갖고 돌아와서 창건한 가람이다. 창건 이후 1400여 년 동안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불교 성지로, 또 수많은 고승대덕의 주석처로 불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월정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큰 화재로 소실되었고, 6·25전쟁 중 1·4후퇴 때 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해 영산전, 광응전, 진영각 등 17동 건물은 물론이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함께 소실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 오늘날은 적광전, 수광전, 설선당, 대강당, 삼성각, 심검당, 용금루, 요사채 등을 갖춘 대가람으로 복구되었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과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세조가 친필로 쓴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 등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월정사 사찰림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땅의 절집 숲들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게 아니다. 1600년이나 되는 불교 전래 역사처럼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다. 사찰림의 기원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도입된 선종(禪宗)이나 고려시대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아 산중에 조성된 산지가람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숭유억불이 엄격하게 시행된 조선시대에 절집은 정치적·사회적 핍박을 피해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어 ‘산중(山中) 사찰’로 정착됐고, 산사 주변의 숲은 자연스럽게 사찰림으로 이용되었다.

    왕실과 사찰의 상호 보험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 왕실이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였을망정, 한편으로는 유교적 덕목인 조상숭배를 불교를 통해 달성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 흔적은 왕자의 태(胎)를 지키거나 선왕과 선후의 고혼을 천도하는 원당사(願堂寺)와 능역 주변의 길지를 지키는 능사(陵寺)를 선정한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사찰로서는 왕실의 조상숭배라는 유교적 덕목을 종교적 수단으로 대행해주는 대신에 지배계급의 각별한 보호를 받고 더불어 봉산(封山)의 형태로 사찰림의 배타적 이용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로 왕실과 사찰 간에 상호 보험 성격의 협력이 이루어진 셈이다.

    사찰이 관리한 봉산의 형태는 종묘와 서원에서 사용할 위폐용 밤나무를 생산하는 율목봉산(栗木封山), 왕실에 필요한 숯을 생산하게 한 향탄봉산(香炭封山)과 송홧가루를 생산케 한 송화봉산(松花封山)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조선 왕실로부터 원당사로 지정되어 봉산을 관리하던 수많은 산사 중 대표적인 곳으로 승보사찰 송광사에 하사된 율목봉산과 향탄봉산을 들 수 있으며, 이들 봉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계산송광사사고(曹溪山松廣寺史庫)의 산림부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찰은 예로부터 관행적으로 이용해왔던 숲은 물론이고 왕실에서 하사받은 봉산에 대한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이용권까지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사찰림의 형성 과정에 얽힌 다양한 사연과 역사성은 일제가 1918년 시행한 임야조사령 시행규칙 제1조(古記 또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에 의하여 임야에 연고가 있는 사찰은 소유권을 인정한다) 제정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일제강점기에도 소유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정부 수립 이후 등기 절차를 거처 법적 소유권이 종단에 귀속된 6만여ha의 사찰림은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탄생한 생명문화유산인 셈이다.

    월정사 전나무 숲

    어느 계절인들 좋지 않으랴만, 월정사의 전나무 숲은 눈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일주문에서 금강문으로 이어지는 1㎞의 전나무 숲길 설경은 이 땅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광을 선사한다. 눈 쌓인 숲길을 거닐다보면 그 아름다움에 놀라고, 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깨끗해지는 쇄락(灑落)의 경험에 또 한 번 놀란다. 전나무가 편백나무 다음으로 많은 양의 피톤치드를 내뿜기 때문이다.

    어느 해 겨울 평일 이른 아침에 들머리 전나무 숲에서 본 풍광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날 따라 전나무 숲에 인적이라곤 없었다. 울창한 전나무 숲을 통과한 햇살은 마치 아름답게 소곤거리는 화음처럼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어서 사진을 찍어야지 하는 조급한 마음을 아는 듯 아침 햇살이 만드는 그 천연의 화음은 나의 걸음을 멈추어 세우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나는 행복했다. 어느 해인들 숲을 통과한 아침 햇살의 속삭임이 없었을까만, 게다가 그것이 돈다발을 안겨줄 리도 만무하건만, 새삼스럽게 차오르는 충만감으로 전나무 숲에 감사했다. 또 그런 풍광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에 행복했다.

    1) 들머리 숲

    월정사 전나무 숲은 천연림이라기보다 인공림에 가깝다. 이 전나무 숲이 아홉 수(9樹)에서 유래했다는 설화를 통해서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말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가 부처님에게 바칠 공양을 준비하고 있을 때 소나무에 쌓인 눈이 그릇에 떨어졌고, 눈을 떨어뜨려 공양을 망친 소나무를 못마땅하게 여긴 산신령이 소나무를 꾸짖고 대신 전나무 9그루가 절을 지키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 설화는 한랭한 산악지대에 생육하는 전나무가 풍토와 상관없이 따뜻한 남부지방의 사찰을 비롯한 이 땅 곳곳의 절집에서 터줏대감마냥 쉽게 눈에 띄는 이유를 드러낸다. 또한 소나무가 전나무 못지않게 월정사 숲의 또 다른 진객임을 함축하고 있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은 단원의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권1에서도 찾을 수 있다. 220년 전 관동 9개 군의 명승지를 편력하며 그림을 그려 정조 임금에게 바쳐야 했던 단원 김홍도의 이 화첩에는 중대사와 상원사와 더불어 울창한 전나무 숲에 파묻힌 월정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따라서 월정사 전나무 숲의 유래는 적어도 600년 이상의 세월에 근원을 두는 셈이다. 오늘날 월정사가 ‘천년 숲’ 걷기 행사를 매년 개최하는 것도 전나무 숲이 간직한 이런 역사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뜻에서 연유한다.

    월정사, 겨울 전나무 숲의 오연(傲然)

    중대 사자암 주변의 숲.

    그 밖에 월정사와 오대산의 옛 모습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유람기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벼슬을 하지 않고 처사(處士)의 삶을 산 김창흡(1653~1722)이 남긴 ‘오대산기(五臺山記)’에는 월정사와 산내 암자의 옛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내용이 담겼다. 김창흡은 월정사에서 시작하여 사고(史庫)와 영감사를 거쳐 상원사와 적멸보궁을 오른 후 북대 미륵암까지 유람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는 오대산 유람기 마지막 부분에 오대산의 네 가지 아름다움을 상술하고 있는데 유덕한 군자처럼 중후한 산세, 속된 이들이 감히 찾을 수 없을 만큼 울창하고 거대한 수목들(큰 것은 백 아름에 달하고, 심지어 구름 속으로 들어가 해를 가린다고까지 서술했다), 수풀 깊숙한 길지에 자리 잡은 여러 암자, 다른 산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샘물(서쪽의 우통수, 북쪽의 감로수, 남쪽의 총명수, 가운데의 옥계수)의 물맛이 그것이다. 김창흡 역시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절집 풍광을 오대산의 으뜸가는 아름다움으로 꼽았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예나 지금이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월정사와 산내 암자의 풍광이 유별났음에 틀림없다.

    월정사 전나무 숲의 역사성은 지난 100년의 격동기에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더욱 빛난다. 일제가 자행한 산림 수탈은 악랄했다. 월정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927년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산림경영계획에 따르면 당시 월정사 사찰림은 1ha당 약 109㎥의 축적(단위 면적당 서 있는 나무의 총 부피)을 보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월정사가 보유한 산림의 축적은 당시 전국 평균보다 6.5배나 높았다. 이러한 수치는 월정사가 수백 년 동안 주변의 산림을 잘 지켜왔음을 뜻한다. 일제가 이렇게 울창한 산림을 그냥 둘 리 없었다. 1932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4339ha의 월정사 사찰림을 대대적으로 벌채했다.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 계곡을 따라 깔아놓은 협궤 철로는 오대산 일대에서 벌채된 목재를 ‘계림목재 회사’로 실어 나르는 운송로였다. 벌목 운송로의 종점은 월정사 부도전 위 계곡 건너편의 넓은 공터였다. 오늘날도 이 공터를 ‘회사 거리’라고 부르는데, 계림목재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월정사, 겨울 전나무 숲의 오연(傲然)

    동대 관음암으로 향하는 숲길.

    벌채가 한창이던 시절엔 회사 거리 주변(동산 2리)에 260호(戶)의 큰 마을이 형성되어, 평창군 내에서 유일하게 파출소가 있었다고 한다. 월정사 산감을 지낸 장길환씨는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남벌로 오대산 일대 박달나무가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고 당시 사정을 전한다. 안타깝게도 월정사 사찰림의 수난은 광복 후에도 계속되었다. 작전상의 이유로 6·25전쟁 통에 칠불보전을 불태우는 한편, 주변의 숲도 함께 결딴냈기 때문이다. 이런 수탈과 수난의 역사를 알고 나면 월정사 전나무 숲은 우리 앞에 새삼 예사롭지 않은 대상으로 다가온다. 지난 100년의 격랑 속에서도 이만큼 넓은 전나무 숲을 종교의 힘으로 지켜내고, 지금도 우리 곁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기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2006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정사 전나무 숲에는 가슴높이 직경 20㎝ 이상의 전나무가 977그루 자라고 있으며, 수령은 40~135년으로 나타났다. 특히 가슴높이 직경이 1m 이상인 대경목도 8그루 자라고 있으며, 가장 큰 전나무는 직경 175㎝에 수고 31m라고 밝히고 있다. 이 땅 어느 곳에서도 이런 전나무 숲을 쉬 찾을 수 없다.

    2) 산신각의 신수, 만월산 소나무

    전나무 숲만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소나무 숲 역시 월정사의 자랑거리다. 적광전 안내판은 ‘6·25동란으로 전소된 칠불보전 자리에 적광전을 1968년 다시 세울 때 외부 기둥 18개 중 16개는 오대산 자생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느티나무)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은 월정사 일대 소나무가 뛰어난 재목이었음을 사실적으로 증명한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에는 절집 주변에 기둥감으로 쓸 만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았음을 상상할 수 있다.

    월정사 소나무 숲의 옛 흔적은 용금루와 팔각구층석탑 사이에 서서 대법륜전(공양체)을 향해 뒤편 산록을 바라보거나 오대천 금강연 주변에 눈길을 주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뒤편 산록이나 오대천을 따라 쭉쭉 뻗은 당당한 금강소나무들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그러나 더 인상적인 현장은 적광전을 옹위한 뒤편 만월산 자락에서 찾을 수 있다. 만월산 자락의 소나무 숲 아래에는 적광전보다 삼성각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다. 월정사 주변은 온통 전나무들로 둘러싸인 형상인데 도대체 왜 산신을 모셔둔 삼성각 바로 뒤편 만월산 산록에는 유독 소나무만 가득할까?

    그 답은 이 땅에 불교가 정착한 과정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한민족의 민간신앙은 예로부터 산과 숲과 나무를 숭배해온 토착신앙과 샤머니즘의 요소를 간직해왔다.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가 이 땅에 순조롭게 뿌리내리기 위한 첫 과업은 토착신앙이나 자연을 숭배하는 샤머니즘적 요소와의 화학적 융합이었다. 그 첫 절차는 산악숭배사상의 대상이 된 신성한 산(靈山)을 택해 사찰을 건립하는 것이다. 민간신앙의 신성 지역에 사찰을 건립한 것은 민간신앙이 뿌리내린 장소의 연속성을 강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불교를 보다 순조롭게 정착시키려는 의도로도 파악된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대부분의 사찰에서 찾을 수 있는 산신당이다. 여기에 전통 민간의 산신신앙을 표현한 산신과 호랑이와 소나무 그림을 모시고 있다. 산과 숲과 나무에 대한 이 땅의 재래적 세계관을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고 불교에 동화시킨 특유의 친화력은 산과 나무와 숲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사찰 주변 숲을 사찰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자리매김하도록 했을 것이다. 따라서 독성, 칠성과 함께 산신을 모신 삼성각 바로 뒤편 산록의 소나무는 월정사를 지키는 신수(神樹)라 할 수 있다. 이 땅의 절집들이 사찰림으로 유독 솔숲을 많이 보유한 까닭도 가람수호신의 구성원으로 한몫하는 소나무를 신수로 섬겼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3) 부도전과 동대 관음암의 전나무 숲

    월정사, 겨울 전나무 숲의 오연(傲然)

    삼성각을 지키는 만월산 자락의 소나무 신수(神樹).

    월정사 방문객 대부분이 그냥 지나치는 곳이 부도전 주변의 전나무 숲이다. 부도란 스님의 사리나 유물을 묻는 석물을 말하며, 또 다른 형태의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세 줄로 나란히 서 있는 부도 주변을 에워싼 전나무 숲의 겨울 풍광은 고승의 유택이라 그런지 숲 자체에 엄숙함이 배어 있다. 이 숲에서 신성(神性)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성이 깃든 엄숙함 때문인지 이 전나무 숲은 적막하다. 이런 적막함 속에서 침묵은 당연하다. 침묵은 내적인 고요를 연습하는 길이다. 적막을 경험하는 일은 고독을 맛보는 길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끔씩 본능적으로 조용한 장소를 찾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시에서 소음 없이 적막함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숲을 더욱 아끼고 사랑한다.

    부도전에서 큰길을 따라 상원사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작은 골짜기와 함께 동대 관음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동대 관음암으로 오르는 눈 쌓인 겨울 숲길은 차량과 인적이 드물 뿐만 아니라 휴대전화도 불통일 만큼 조용하다. 겨울 숲의 이런 적막은 우리가 잊고 있던 거리낌 없는 마음의 자유를 되살려낸다. 효율성을 숭배하고 속도 강박증에 시달리며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본다. 숲길을 오르면서 오로지 결과만 중시하고 잇속만 횡행하는 사회에서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관음암에 오르는 이 숲길의 진객도 아름드리 전나무다. 관음암에 이르는 2㎞ 거리는 경사가 심한 마지막 500m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걷기에 좋다. 이 숲길이 특히 더 아름다운 이유는 마치 가로수처럼 장대한 전나무들을 관음암까지 벗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에 이르는 숲

    1) 상원사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광

    높은 산일수록 눈 쌓인 겨울 풍경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눈 쌓인 사면에 불규칙적으로 서 있는 나목들이 흰 캔버스에 회갈색 점이나 선으로 형상화된 그림처럼 변한다. 자연 자체가 거대한 한 폭의 그림으로, 그것도 단순하고 간결한 회색 빛깔을 바탕으로 한 추상화로 변하고 만다. 상원사 앞뜰에서 남동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눈에 들어오는 잡목 숲은 오로지 자연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그림이다. 그 간결한 구성에, 그 소박한 절제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잡목 숲이 연출하는 이런 간결함과 소박함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 잠든 오감을 불러내고 겨울 숲을 찾아 나선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겨울 숲이 연출하는 적막함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청량제다. 찬 북서풍은 온갖 방향으로 날뛰던 원색의 욕망을 잠재운다.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풍광은 세속에 찌든 심신을 새롭게 소생시킨다. 자연의 영성과 인간의 영혼이 만나는 순간이다.

    상원사 앞마당은 그래서 우리 숲의 진면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진귀한 조망대다. 상원사 앞마당이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한 곳에 선 채 고개만 조금 돌리면 전혀 다른 숲의 아름다움을 조망할 수 있어서다. 남쪽을 향해 서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잡목으로 이뤄진 회갈색 나목 숲이 능선을 장식하는 적막한 풍경이 펼쳐지고, 다시 서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리면 역동적 풍경의 전나무 숲이 내뿜는 아름다운 활력을 느낄 수 있다.

    햇볕을 좋아하는 양수(陽樹)의 활엽수와 햇볕이 적은 그늘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음수(陰樹) 전나무의 생태적 특성까지 함께 익힌다면 더욱 좋다. 바로 겨울 숲을 찾은 이에게 부여된 생태적 지식의 외연을 넓히고, 그 차이를 자각한 특별 보너스이기 때문이다.

    2) 적멸보궁에 이르는 숲길

    월정사, 겨울 전나무 숲의 오연(傲然)

    부도전 부근의 전나무 숲.

    월정사의 넓고 깊은 숲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숲은 이른 아침 상원사에서 중대 사자암을 거쳐 적멸보궁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이다. 계곡 쪽 길이 아니라 상원사 찻집 뒤편으로 난 숲길이다. 이 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남녀노소, 귀천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두 발로 걸어야 하고, 한바탕 절실하게 자신을 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해 겨울 이 숲길에서 우연히 노(老) 보살과 만난 적이 있는데, 이때의 조우를 나는 잊지 못한다. 아마 적멸보궁에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상원사로 내려오는 걸음이었으리라.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의 왕래도 없었다. 산을 오르는 나의 모습을 본 보살의 얼굴에는 아주 잠깐 미소가 떠올랐지만, 의례적 인사 한마디도 없었다. 그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에 보통 때와는 달리, 나 역시 목례만으로 답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 잠시 조우했던 그 보살의 지극히 편안한 얼굴은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마치 문수보살의 얼굴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인상으로 비친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겼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아니면 철야기도를 무사히 마쳤다는 만족감 때문일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적멸보궁을 오르던 나의 마음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마음이 내게 있었기에 상대방의 온화한 진면목을 볼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이지만, 8년 전 생사가 달린 대수술을 받고 난 다음 이 숲길을 따라 적멸보궁에 힘겹게 올라 북받쳐 흘린 눈물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때의 각오와 감동을 되새기고자 월정사와 상원사 적멸보궁에 이르는 숲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찾는지도 모른다. 이 숲길에서 절실하게 느낀 삶에 대한 긍정과 살아 있음의 행복을 상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요즈막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워낼 수 있는 각자의 숲을 가지라고, 또 가끔씩 그 숲을 찾으라고 권한다.

    3. 북대 미륵암에 이르는 숲길

    북대 미륵암에 이르는 숲길은 상원사 입구 주차장에서 상왕봉과 두류봉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거닐면서 체험할 수 있다. 오대산을 관통해 홍천군 내면 쪽으로 난 이 도로를 따라 걸으면 오대산의 웅장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오대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을 비롯해 여러 봉우리도 한눈에 넣을 수 있다.

    “높고 깊고 텅 비고 밝아, 여러 곳의 승경을 조망할 수가 있다. 중대사와 비교하면 온후함은 미치지 않지만 시원함은 훨씬 낫다. 먼 산을 바라보니 허공의 비취빛이 하늘에 접해 있어서, 마치 태백산이 가까운 곳에 있는 듯하다.” 조선의 선비 김창흡이 북대 미륵암에서 바라본 풍광을 오대산 유람기에 남긴 내용이다. 300년 전에 쓴 글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생생한 묘사다.

    이런 풍광과 더불어 감상할 수 있는 것은 해발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변화하는 숲의 모습이다. 특히 해발 900~1000m의 남사면에 자라는 거제수나무 군락은 미륵암을 찾아갈 정도로 눈 밝은 이들만 누릴 수 있는 풍광이다. 거제수나무는 심산유곡에서 무리지어 자라는 특성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한 사면 가득 자라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거제수나무는 흰색의 수피(樹皮)를 가진 자작나무와 사촌 격으로, 붉은색이 조금 도는 회색 수피를 갖고 있고 서늘한 곳에서 자생한다.

    북대 미륵암에 이르는 숲길을 걸으면 겨울 하늘을 가로지르는 북서풍의 매운 맛도 덤으로 누릴 수 있다. 월정사나 적멸보궁 또는 동대 관음암 숲길은 숲 속에 파묻혀 있기에 겨울 칼바람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북대 미륵암에 이르는 이 숲길에서는 매서운 칼바람은 물론이고, 숲을 지나는 바람소리까지 경험할 수 있다.

    적설량이 많거나 칼바람이라도 부는 날, 왕복 10㎞의 이 숲길을 걷다보면 도회의 안락하고 편안함에 젖어 사느라 희미해져버린 우리의 본질적 야성을 불러낼 수 있다. 칼바람 앞에 눈물이 고이고 콧물이 흘러도, 마른 가지 사이로 씽씽 부는 매서운 된바람 소리에 귀가 멍해도 두렵지 않을 만큼 존재의 투지가 샘솟는다. 문명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장 인간적인 수단인 두 발로 뚜벅뚜벅 걸으면서 겨울이 만들어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은 숲을 찾아 나서는 이에게만 허락된 축복이다.

    북대 미륵암에 이르는 이 숲길은 물론이고, 겨울 숲에서는 편리함이나 안락함은 찾을 수 없다. 대신에 자연의 강건함과 원기가 충만해 있다. 그래서 산업사회 틀 속에 하나의 부품마냥 안주해온 우리들의 쪼그라든 자아를 되살리는 데 겨울 숲은 안성맞춤이다. 겨울 전나무들이 엄동설한과 당당히 맞선 그 오연한 자태는 우리들을 향한 외침일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양 도회의 삶에 안주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에서 한 번쯤 야생의 숲을 찾는 반란을 꿈꾸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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