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멀티플렉스, 거대 도시의 판타지아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0-02-02 16: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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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박눈이 쏟아지고 칼바람이 불어도 상관없다. 종일 걸어도 다 보기 어려울 만큼 넓고 아늑한 공간이다. 백화점, 호텔, 할인마트, 식당가 그리고 영화관까지. 시간과 돈만 있으면 된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깥세상은 잊어도 좋다. 이 안에서는 무슨 상상이든 허락된다. 적잖이 그 상상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다만 여기에 살 수는 없고 반드시 나가야 하니, 급격한 체감온도 변화엔 주의하시길.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영등포 타임스퀘어 내부.

    아바타(Avatar). 매력적인 단어다. 오디오 마니아들은 미국 콜로라도 주에 위치한 하이파이 오디오 전문회사 아발론어쿠스틱스의 매력적인 스피커 ‘아바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한창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라면 문방구에서 산 조잡한 카드를 던지고 놀면서 이 단어를 외칠 수도 있겠다. 미니홈피와 블로그, 카페로 요약되는 젊은 세대의 인터넷 문화에서는 이 단어가 일상 생활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아바타. 인도 산스크리트어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한 말이다.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감싸고 있는 종교적 의미를 걷어내고 나면 화신 또는 분신이라는 뜻이 남는데, 이로써 인터넷 시대의 3차원 가상현실게임이나 웹 환경의 채팅이나 미니홈피의 그래픽 아이콘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이버세계의 가상 분신이 곧 아바타인데, 이제는 오직 단 하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다. 지난해 말 전세계 극장가를 강타했고 1월3일 현재 무려 1조1600억원에 달하는 흥행수익을 올린 블록버스터 영화다. 관객몰이가 한창인 와중에 이미 역대 흥행 4위에 올랐으니 이 영화가 전세계 동시 개봉의 피날레를 장식하고 나면 아마도 ‘타이타닉’이나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을 깨고 사상 최고의 흥행작이 될 것이다. 4년의 제작 기간에 3억달러(약 3100억원)라는 역대 최대 제작비가 투입된 3차원(3D) 입체영상의 신기원, 아바타. 어쩌면 이 단어 끝에 느낌표를 붙여 ‘아바타!’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보기 위해 연말연시 북새통을 뚫고 한국의 대표적인 멀티플렉스 CGV의 영등포 타임스퀘어관을 찾았다.

    타임스퀘어? 뉴욕? 아니다. 영등포 타임스퀘어다. 그곳에 멀티플렉스 CGV가 있다. 나는 지금 그곳의 4층 난간에 서서 이 거대한 복합쇼핑몰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메인 출입구에 들어서면 5층까지 나선형으로 잇대어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마중을 한다. 에스컬레이터는 층마다 매우 세련되게 단장한 매장으로 사람들을 토해낸다. 2층의 큰 서점으로 가는 사람, 3층의 푸드코트로 가는 사람, 4층의 영화관으로 가는 사람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매장과 전문 식당과 커피숍과 놀이시설로 가는 사람들이 거대한 아트리움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영등포 상전벽해



    옛 영등포 경성방직 공장부지(4만2600㎡)가 지난해 9월16일 타임스퀘어로 거듭났다. 개장 이후 100일 동안 무려 누적 방문자 2000만명을 기록했고 매출 또한 2810억원을 기록한 곳이다. 주중 평균 16만명 주말 최대 32만명이 방문한 타임스퀘어 안에 영화관이 있는 것이다. 건물 연면적 37만㎡, 쇼핑 공간만 총 30만2000㎡에 달한다.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과 명품관, 이마트, 메리어트호텔체인의 코트야드 바이 메리어트, 교보문고, 아모리스 웨딩홀, 코오롱 스포렉스 그리고 멀티플렉스 CGV가 있다.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기 위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도심 속의 도심이다. ‘바깥’ 도심의 혼잡이나 불편이나 소음 따위는 이 거대한 복합 도시 안으로 침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안에서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여가는 물론 일상생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바깥’으로 향하는 수직의 쾌적한 통로를 빠져나가면 지하철과 버스와 택시와 기차까지 탈 수 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관은 독립된 건물로 따로 존재했다. 그곳에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벗어나거나 했다. 휴게실이나 좌석 같은 소품시설이 쾌적하고 세련된 외양으로 변화한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것을 포함한 영화관 전체, 거대한 공간 전체가 급변했고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CGV스타디움 내부(왼쪽). CGV영등포 영사실.

    옛날, 그 시절의 영화관을 잠시 떠올려보자.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등이 모여 있던 종로3가와 영등포 연흥극장이나 미아리 대지극장 그리고 신림극장, 세일극장, 삼양극장 같은 소규모 재개봉관의 추억들. 특히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없는 재개봉관 화장실의 나프탈렌 냄새를 기억하시는지. 의자는 낡을 대로 낡았고 비가 내리는 필름은 그나마 종종 끊겼으며 그때마다 ‘동네 형’들은 휘파람을 불어댔다. ‘가시를 삼킨 장미’(정진우 연출, 유지인·신성일 주연)나 ‘훔친 사과가 맛있다’(김수형 연출, 오수비·최윤석 주연) 같은 멜로 영화가 상영될 때면 옆자리의 나이 든 아저씨가 슬그머니 손을 잡기도 하지 않았던가. 조폭도 아니고 불량배도 아니고 양아치도 아닌, 그 시절의 어린 고교생들은 재개봉관의 2층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그 시절의 그런 추억이란 흡사 저 일제강점기의 풍문처럼 현실감 없는 과거지사가 되었다.

    흔적 없이 사라져간 단관극장

    거대 도시 서울의 유일한 단관극장이었던 서대문구 드림시네마(옛 화양극장)는 2008년 11월20일에 이제는 고색창연한 옛날 영화가 된 ‘영웅본색2’를 재개봉하면서 예전의 명성을 잇고자 했으나 결국 이듬해 5월 서대문 아트홀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단관 영화 상영에서 벗어나 뮤지컬, 연극, 콘서트, 기업행사 등으로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예전의 단관극장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요즘 같으면 반드시 보존해야 할 ‘근대 건축물’로 지정돼 그 외형이나마 남아 있었을 을지로 국도극장과 초동의 스카라극장은 각각 1999년과 2006년에 철거됐다. 한 세대의 문화와 추억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서울극장, 대한극장, 피카디리, 단성사는 한 세기를 전후로 하여 복합상영관으로 탈바꿈했다.

    이 같은 사정은 전국적으로 비슷하다. 부산 유일의 단관극장이었던 남포동 국도극장도 복합공연장으로 바뀌었으며 영화 ‘친구’의 촬영 장소였던 삼일극장도 2006년에 철거됐다. 62년 역사가 사라진 것이다. 광주의 계림극장과 태평극장, 대구의 대구극장, 자유극장, 제일극장, 대전의 대전극장과 신도극장 등이 모두 멀티플렉스라는 골리앗 앞에서 허물어졌거나 고개를 숙이고 그 품으로 들어가 안겼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영화관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CJ CGV 이상규 홍보팀장은 “오늘날의 소비생활 패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영등포 타임스퀘어와 이 안에 위치한 멀티플렉스 CGV”라고 말한다. “강남 코엑스몰의 1.5배 규모인 타임스퀘어 안에 백화점, 할인매장, 대형서점, 호텔, 스포츠센터 등이 있고 그 핵심에 CGV가 있다. 엇비슷한 소비상품을 나란히 늘어놓은 단순한 쇼핑몰이 아니라, 정교한 동선 계산 결과에 따라 쇼핑 여가 레저 문화 등을 하나의 공간 안에 합리적이면서도 다채롭게 펼쳐놓은 가운데 CGV라는 핵심 문화 공간이 있다.”

    멀티플렉스 군웅할거

    이러한 새로운 유통 트렌드를 ‘몰링(malling)’이라고 한다. 이 몰링의 공간에서는 단순히 물건을 사는 행위 차원을 넘어 공간과 공간 사이를 걷는 행위 자체도 ‘이채롭고 즐거운 문화적 경험’이 된다. 그래서 ‘몰링’이다. 이 거대한 복합 소비 공간에서 하룻저녁을 다 보내는 젊은 세대를 ‘몰링족’이라고 부른다. 혹시 구글을 애용하는가? 그렇다면 ‘구글링’이라는 단어를 알 것이다. 몰링이라는 신조어도 같은 식이다. 미국의 몰 오브 아메리카, 일본의 커넬시티, 홍콩의 하버시티 등이 나라 밖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국내에서는 부산의 센텀시티(‘신동아’ 2009년 10월호 참조)가 이러한 ‘몰링’의 새로운 트렌드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앞으로 일산 레이킨스몰, 대구 봉무 라이프스타일센터, 부산 롯데타운 등 전국 각지에 20여 개 복합 공간이 개관할 예정이다. 국민소득 2만달러가 넘어서면 이 같은 대형 복합쇼핑몰이 신속하게 확대된다. 신조어 몰링은 새로운 파생어를 거듭 생산한다. 적극적으로 몰링을 즐기는 ‘몰고어(mall-goer)’, 동네 산책하듯이 거대한 몰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몰워커(mall walker)’ 등이 있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CGV영등포 4D 상영관 입구.

    그 안에 영화관이 있다. 거대한 복합 쇼핑몰 안에서 여가 생활의 대부분을 충족하는것, 그 안에서 산책하는 것,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소비를 하는 것, 요컨대 그 거대한 소비 공간에 ‘산다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되고 있는데, 만약 그 한복판에 영화관이 없다면 아마도 그 ‘몰링’은 무척이나 심심한 일이 될 것이다.

    멀티플렉스로 인해 영화관 사업 자체 매출이 기록적으로 신장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스크린 가입률 98%)에 따르면 2009년 영화관 매출액이 무려 1조817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매출액 1조원 시대의 가장 큰 동인은 관객 수 증가와 실질 관람료 인상에 있다. 2008년 총 관객 수가 1억5083만명이었는데 2009년엔 1억5648만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관람료 인상 효과까지 부가됐다. 2009년 7월, CGV와 메가박스 등 국내 대표 멀티플렉스는 주중 8000원, 주말 9000원으로 기존보다 1000원씩 관람료를 인상했으며, 여기에 일반 상영관보다 평균 30% 이상 비싼 입장료를 받는 3D, 4D, 대형 상영관 등이 늘어나면서 매출 규모가 대폭 확대됐다. 여기에 영화 상영 직전의 광고 매출이나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형 매점 매출을 더해야 한다. 영화보다 팝콘의 수익성이 더 높다.

    멀티플렉스의 극장 점유율 추이를 보면 2001년 약 21%에 불과했던 것이 2007년에 약 85%에 달했다. 멀티플렉스는 거역하기 힘든 대세가 된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08 한국 영화산업 결산’ 자료에 따르면, 2008년 기준으로 전국 영화관은 모두 322곳으로 이 가운데 72%(232곳)가 복합상영관이다. 전체 스크린 2081개 가운데 복합상영관의 스크린은 무려 1840개(88.4%). CGV를 필두로 프리머스시네마,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씨너스 등 5대 사업자가 군웅할거하는데, 특히 1998년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CGV 강변’을 출범시킨 CGV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다.

    영화관람 후 소비로 연결

    몇 해 동안 ‘멀티플렉스 삼국지’를 써온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의 출혈 대전은 CGV의 우세로 일단락되었다. 오리온 계열인 미디어플렉스는 메가박스 지분을 매각하고 국내 극장사업에서 철수했고, 롯데그룹도 롯데시네마의 신규출점을 자제하면서 수익성 확보 위주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으며, 이 와중에 CGV는 중국 상하이 CGV 1호점을 개척하는 등 멀티플렉스 1위 사업자로 등극했다.

    문화연구가 이동연 중앙대 교수는 멀티플렉스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진다. 그는 복합 쇼핑공간과 그 핵심이 되는 멀티플렉스라는 공간이 ‘문화 다양성’을 해친다며 그 세부 사항으로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멀티플렉스는 영화 관객의 영화 볼 권리를 제한한다는 점. 둘째, 극장 공간의 생태계 위기를 촉발한다는 점. 셋째, 독점적 소비문화공간의 거점 역할을 한다는 점. 넷째, 멀티플렉스가 영화산업의 수직 계열화와 치열한 독점 전쟁의 최종 유탄을 받는 장소라는 점이 그것이다.

    이제 영화관은 그저 영화를 보고 재빨리 귀가하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거대한 복합 쇼핑 공간, 그 안에 영화관이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공간을 찾는 사람들을 서너 시간 동안 묶어놓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영화 상영 앞뒤의 시간들이 확장된다. 영화 상영 시작 시간에 딱 맞춰 들어와 영화가 끝난 뒤 신속하게 차를 타고 나가는 사람은 드물다. 영화관을 빠져나온 발길은 타임스퀘어 전역에 펼쳐져 있는 소품 매장과 서점과 식당과 게임장과 스포츠센터와 명품 매장으로 향한다.

    하나의 새로운 시작

    자, 이제 ‘아바타’를 보자. 타임스퀘어 4층 난간에서 발을 돌릴 시간이 된 것이다. 이달 공간읽기 대상으로 타임스퀘어 CGV를 선택한 것은 이 멀티플렉스 안에 세계 최대 스크린을 자랑하는 ‘스타리움관’이 있고, 거기서 3D 디지털의 ‘아바타’를 상영할 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서는 4D로 세팅된 한국 영화 ‘전우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시설은 한두 해 전만 해도 몽상가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했다.

    영화 ‘아바타’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판도라 행성을 두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시작!” 그런데 내게는 이 대사가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전세계 관객을 향해 던지는 의미심장한 선언으로 들렸다. 3D 기술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 ‘아바타’로 촉발된 것이다. 그 생생한 현장이 타임스퀘어라는 신개념 복합 소비 공간에 위치한 CGV의 거대한 스크린과 압도적인 음향 시스템 속에서 구현된다.

    신기술을 향한 전세계 영화인들의 상상력은 어느덧 새로운 지평을 찾은 듯 보인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3D 중심의 ‘비주얼 리얼리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칸영화제는 개막작으로 3D애니메이션영화 ‘업(UP)’을 선택했다. 베니스영화제 또한 지난해 수상 항목에 ‘3D영화부문’을 신설했다. 월트디즈니사는 2011년까지 22편의 3D영화를 내놓을 예정이다. 미국에서는 2005년부터 3D스크린 열기가 일어나서 2009년 말 현재 무려 2600여 개의 3D스크린이 설치됐다. 대부분의 영화관이 필름을 돌리는 기존 아날로그식 상영 시스템에서 3D디지털스크린으로 바뀌고 있다.

    국내 영화 관계자들의 반응도 뜨겁다. 물론 아직까지는 2100여 개 스크린 중에 3D영화 상영이 가능한 곳은 5% 정도. 하지만 ‘아바타’ 열풍 이후 각 멀티플렉스의 3D스크린 확보 경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현재 56곳의 3D 상영관을 확보한 CGV는 올해 안에 80개로 늘릴 예정이고, 롯데시네마를 비롯한 여타 멀티플렉스 역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3D 상영 시스템을 갖추는 데 1억원가량의 예산이 소요되지만 그 투자분을 회수할 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쉼 없이 밀려올 예정이다. 2010년 개봉영화 중에 3D 상영이 예정된 것만 해도 24편에 달한다.

    ‘아바타’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앞으로 자신이 만들 모든 영화를 3D로 제작하겠다고 밝혔고, 스티븐 스필버그나 로버트 제메키스 같은 흥행성 높은 감독은 물론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제프리 카젠버그 역시 ‘미래는 3D, 혹은 그 이상’이라고 호언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영화 ‘친구’로 유명한 곽경택 감독이 연평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 ‘아름다운 우리(가제)’를 풀 3D로 제작 중에 있고 1000만 관객 돌파를 이룬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 역시 차기작을 3D로 만들 예정이다. 1억원 정도의 시설 투자는 그렇게 무리한 계획이 아닌 것이다. 정부에서도 3D영상 및 그 파생 산업 전체를 ‘IT코리아 5대 과제’ 중 하나로 선정해놓은 상태다.

    영화 기술의 비약적 발전

    현대 문화예술의 해부학자인 아놀드 하우저가 주저 없이 20세기 최고의 예술로 지목한 영화는, 기실 ‘예술’이라는 측면보다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기술은 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지렛대다. 기술 향상이 없었다면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는 한낱 몽상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술 발전에 따라 영화감독은 새로운 표현력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놀라운 상상력의 전개가 가능했던 것이다. 대중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작업을 해온 감독들에게는 적어도 영화의 ‘기술’적 측면이 그 자신의 ‘예술’적 측면을 위협하는 적대적인 세력은 아니었던 셈이다. 마치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바람 빠진 공을 차던 소년이 천연잔디를 맘껏 누비는 프로선수가 된 것처럼, 기술은 영화감독에게 매혹적인 가상세계로 가는 마법의 지팡이였다.

    영등포 CGV의 신준호 영사실장은 경력 14년차의 영사기사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가 군 생활을 조금 편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영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베테랑 영사기사가 되어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아세아극장을 시작으로 강남 씨네하우스를 거쳐 CGV에 입사했다. 말하자면 그는 급박하게 변화해온 영화관 기술의 산 증언자인 셈이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CGV영등포 골드클래스.

    그의 안내로 영등포 CGV의 영사실을 둘러보았다. 영화관 전체의 한복판에 있는 영사실에서는 사방의 각 상영관으로 서로 다른 화면을 내보내고 있었다. ‘시네마천국’에서 보았던 그 옛날의 아날로그 릴 영사기는 찾아볼 수 없다. 거대한 플래터가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었고, 3D나 4D영화는 모든 영사 과정이 컴퓨터로 제어된다. 신준호 실장은 “영화 기술은 끝없이 진보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더 많은 자극을 원할 것이고, 감독들 역시 극단적인 표현이 가능한 기술을 찾아낼 것이다. 지금의 3D나 4D도 언젠가는 낡은 방식이 될지 모른다. 좀 더 혁신적인 영상을 원하는 욕망이 사라지기 전까지 영화라는 예술은 끝없이 기술적 진보를 거듭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 영화의 역사는 곧 ‘영화 기술’의 역사이기도 하다. 100여 년 전, 1895년이 끝나갈 무렵인 12월28일, 프랑스 파리의 사교장 그랑카페에 몰려든 사람들의 눈은 오늘날 첨단 시설의 3D상영관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눈과 다를 바 없었다. 100여 년 전의 그랑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 ‘열차의 도착’ 앞에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3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영화, 그것도 저 멀리서 기차가 도착해 플랫폼에 이르러 멈추는 것이 전부인 그 영화는 이후 100여 년의 영상시대를 예고한 충격의 필름이었다. 실제로 그 짧은 영화를 보다가 놀라서 거리로 뛰쳐나간 사람도 있었다. 이후 D. W. 그리피스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세실 B. 드밀을 거쳐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그리고 오늘날의 피터 잭슨과 제임스 캐머런이 있는 것이다.

    더 매혹적인 영화

    3D기술 또한 1838년 발명가 찰스 휘스턴의 입체 안경을 시작으로 1900년 파리박람회에 등장한 애너글리프 안경을 거쳐, 1915년 미국 뉴욕에서 처음으로 애너글리프 입체 광학 방식의 3D영화가 상영되었다. 이 3D기술을 포함해 영화의 모든 기술적 발전은 영화에서 파생된 여타 영상물과의 전쟁 과정에서 얻어진 측면이 크다.

    영화는 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크게 3번의 전쟁을 치렀다. 그 첫 번째 전쟁 상대는 1950년대의 텔레비전이다. 거실에서도 편안하게 각종 영상물을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자 극장을 찾는 관객이 줄었다. 두 번째는 1980년대에 치른 홈비디오와의 전쟁이다. 사람들은 영화관에 가는 대신 동네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보았다. 마지막 전쟁은 금세기 들어 전세계 네티즌의 일상적인 취미가 되어 버린 ‘불법 다운로드’다. 고비마다 영화 관객이 줄어들긴 했지만 언제나 마지막 승자는 영화 그 자체였다.

    압도적인 스크린과 음향 시설이 주는 심미적 쾌락은 제아무리 대형 텔레비전이라도 따라잡기 어려우며, 특히 디지털 전환 과정을 거친 인터넷상의 영화 파일은 우리가 영화관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자극적인 음향을 도저히 재현할 수 없다. 영화는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파일 같은 적대자를 만나면서 발전해왔지만 어쩌면 애당초 그와 같은 파생 매체는 영화 자체의 독특한 미학적 스케일과 감각을 따라올 수 없는 조무래기들이었는지 모른다.

    말을 바꿔보자면, 영화의 영원한 적대자는 ‘어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관객의 욕망을 자극하고 이 욕망은 다시 더 매혹적인 영화를 갈망한다. 영화사의 거대한 분기점이 된 세실 B, 드밀의 ‘십계’나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제임스 캐머런의 ‘터미네이터 2’나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같은 혁신의 영상은 이전의 모든 감각과 스케일과 매혹의 장치를 완전히 뛰어넘고자 하는 작가적 열망의 소산이다. 그 마지막 행렬에 ‘아바타’가 있는 것이다.

    4D ‘전우치’의 가능성

    ‘아바타’를 관람한 독자라면 충격적으로 확인했을 테지만, 이제 ‘3D’는 놀이동산의 셀로판지 색안경 차원이 아니다. 물론 모든 상상의 원천은 그와 같은 조잡한 입체영상에 있지만, 지난날 몽상가들의 꿈은 오늘날 ‘새로운 몸’이 되었다. 3D전용 안경 저 너머로 자막이 오른다. 그 자막은 과거처럼 스크린의 평면 위에 납작하게 붙어 있지 않고 관람자와 스크린 사이에 둥둥 떠 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된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CGV영등포 매표소.

    ‘아바타’의 줄거리는 지구인과 행성 판도라의 원주민 나비족 간의 대결을 뼈대로 한다. 지구인들은 판도라에서 자원 언옵타늄을 채굴하기 위해 나비족을 학살한다. 비록 영화 속 이야기와 주요 인물의 캐릭터는 2154년이라는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미국의 근현대사(인디언 학살과 이라크전쟁)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미국의 정치 분석가 마이클 카미켈이 “이 영화는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세상을 파괴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촌평한 것은 일리 있는 지적이다. 물론 주요 인물의 캐릭터는 ‘착한 미국인’의 전형이라서 ‘터미네이터 2’나 ‘반지의 제왕’이 보여준 묵시록적인 매혹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핵심은 그런 줄거리나 메시지가 아니다. 3D라는 첨단 기술이다. 개봉 20일 만에 역대 흥행수익 4위인 10억2000만달러(약 1조1000억원)를 넘어선 ‘아바타’의 기록적인 매출은 2009년 한국영화 전체 매출액의 2배를 넘는 규모다. TV 방영, 홈비디오, 게임, 음반, VOD, 캐릭터, 기술료 등의 부가 효과 창출은 계산조차 불가능한 수치다. 이 ‘기록적인 기록’은 엄밀히 말해 ‘아바타’라는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보다 압도적인 신기술의 효과에 의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제임스 캐머런의 ‘영상 혁명’에 기꺼이 1만원이 넘는 관람료를 지급하는 것이지 그 영화의 ‘착한 미국인’을 보기 위해 시간을 들여 영화관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화가 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를 연출한 최동훈 감독의 신작 ‘전우치’다. 원래는 기존의 영사 방식으로 제작된 이 영화를 CGV는 ‘4D’로 상영한다. 서울에서는 이곳 영등포와 강변, 용산점에서 상영한다. 4D는 수동적으로 앉아 있는 관객의 신체를 뒤흔든다. 의자가 상하, 좌우, 앞뒤 세 방향으로 거침없이 움직인다. 주인공 전우치가 얻어맞을 때마다 의자가 요동을 치면서 관객의 등을 두들겨댄다. 물과 바람이 나오는 ‘에어’와 ‘워터’ 효과, 여기에 ‘스모그’ 효과와 상영관 내 조명의 급속한 변화까지 더해지면 관객은 스크린 속의 등장인물이 되어버린다. 이 4D 이펙트는 둔갑, 염력, 축지 등의 도술을 쓰는 전우치라는 캐릭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실감나는 쾌락영화의 새 지평을 보여준다.

    물론 ‘아바타’의 압도적인 흥행 물결에도 불구하고 ‘전우치’가 쾌조의 흥행 성적을 거둔 것은 4D 덕분이 아니다. 그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만큼 4D 상영관이 많지는 않다. 배우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판소리 사설조와 흡사한 대사, 그리고 빈틈없이 구성된 탄탄한 이야기가 어떤 면에서는 ‘아바타’의 지나치게 거룩한 내용보다 현실감이 있다. 하지만 4D의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줬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너는 이제 우리와 하나가 된다”는 말처럼 그야말로 영상과 관객의 거리감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미래의 어떤 상황을 4D로 영사된 ‘전우치’가 확실히 보여줬다. 아직은 오감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수준은 아니지만, 100여 년 전 달려오는 기차를 보고 기겁했던 파리의 관객들처럼 3D ‘아바타’와 4D ‘전우치’는 확실히 그 가능성을 높여줬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물론 영화는 가장 오래된 ‘가상세계’다. 히틀러시대의 독일 미학자 아도르노는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 산업이 대중의 비판적 사고를 제어할 것이라고 했고 같은 시기에 활동한 극작가 브레히트 역시 망명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스크린이라는 현실 차단막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 적 있다.

    3D의 ‘아바타’와 4D의 ‘전우치’에도 불구하고, 영화관 바깥은 생생한 현실이다. 영화관을 품고 있는 타임스퀘어라는 거대한 공간 역시 그 바깥의 좀 더 냉혹하고 엄정한 현실 속에 있다. ‘아바타’의 주인공 제임스 설리는 ‘이제 깨어날 시간’이라고 말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안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야 한다. 쇼핑 공간에서 일상을 영위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 특히 영화관이라는 어두컴컴한 곳이 없다면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유통업계 종사자들은 도심에 건립되는 거대한 공간을 ‘복합 문화 공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소비 공간’이다. 그 점이 우울하다. 그 사이로 거닐어야 하고 그 안에서 연인을 만나고 가족 나들이가 이뤄진다는 점은(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싸늘하고 우울한 측면이 틀림없이 있다. 그런데 만일 그 구성 요소에서 영화관마저 삭제한다면 어떨까? 잠시나마 우리를 2154년으로 데려다준 영화가 있기에 이 비정한 거대 도시가 그럭저럭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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