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유인촌 장관의 행로(行路)

  • 입력2010-02-26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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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햄릿인가 연산인가, 아니면 ‘햄릿적 연산’인가. 법원으로부터 해임효력정지 결정을 받아낸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화예술위) 위원장의 ‘출근 투쟁’으로 ‘한 지붕 두 위원장’ 사태가 빚어진 데 대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 장관이 했다는 말, “그렇게도 한번 해보고… 재미있지 않겠어”를 신문기사로 읽으며 문득 떠올린 이미지다. 신문기사로 그 말을 하는 유 장관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다. ‘냉소적’이라는 기자의 주관적 코멘트 외에는.

    유 장관은 유명한 연극배우 출신이다. 영화배우도 하고 TV탤런트도 했지만 ‘유인촌’ 하면 역시 무대체질이다. 그중에서도 햄릿과 연산 역을 잘했다. 1995년의 ‘문제적 인간 연산’(이윤택 작·연출)에서는 햄릿적 연산을 연기해 그해 최고의 연극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연극배우 유인촌은 모성(母性) 결핍과 혁명아적 기질이 복합된 연산의 이미지를 혼신의 연기로 그려냈다. 그러나 “그렇게도 한번 해보고… 재미있지 않겠어”라는 말에서는 어떤 이미지도 떠올릴 수 없다. 그저 유인촌이 연극배우로 다시 무대에 설 수는 없겠다는 불명확한 느낌이 떠올랐을 뿐.

    불명확한 느낌의 이면에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음을 인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은 배우가 하는 연기에서 무슨 감동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게도 한번 해보고… 재미있지 않겠어”는 배우 유인촌의 말이 아니라 장관 유인촌의 발언이다. 그러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은 ‘배우 따로 장관 따로’일 수 없다. 하물며 한 나라의 문화를 관장하는 문화부 장관의 격(格)을 생각한다면.

    2008년 12월 유인촌 장관은 김정헌 문화예술위 위원장을 잘랐다. 문화부는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물러나야 한다”는 장관의 방침에 저항하는 김 위원장의 문화예술위를 표적 감사했고, 여러 이유를 들어 김 위원장을 해임했다. 강제 해임된 김 위원장은 문화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년이 지난 2009년 12월16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서태환 부장판사)는 “문화부가 2008년 12월5일 김 전 위원장에 대해 한 해임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김 전 위원장이 문화예술기금을 C등급 금융기관에 예탁해 손실을 입혔다”는 문화부 주장에 대해 “C등급 기관에 자금을 맡긴 것은 잘못이지만 자금을 예탁하는 것은 담당실무자가 선정기준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탓이 크며, 최종 결재권자인 김 전 위원장에게까지 실무자 수준의 규정 숙지를 요구하는 것은 다소 지나치다. 50억원의 손실이 발생했지만 이는 2008년 세계적으로 발발한 경제위기 등 상황이 열악한 점을 감안할 때 자금예탁 때문만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문화부는 김 전 위원장을 해임하기 전 사전에 통지하거나 소명기회도 부여하지 않았고 예술국장이 전화통화로 알려주었을 뿐 해임절차를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위법이니 해임은 무효라는 얘기다. 김 전 위원장이 해임되고 1주일 만에 해임됐던 박명학 사무처장에 대해서도 법원은 지난해 9월 ‘해임 무효’라고 판결했다. 명백한 위법이라는 것이다.



    2010년 1월26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장상균 부장판사)는 김 전 위원장이 문화부를 상대로 낸 해임처분 집행정지 신청에서 “해임처분에 대한 본안소송의 판결 확정까지 해임처분 집행을 정지한다”고 결정했다. “김 전 위원장에게 생길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예방하기 위해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고 집행정지 때문에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다. 법원으로부터 해임처분 취소에 해임처분 효력정지 결정까지 받은 김 전 위원장은 2월1일 문화예술위에 출근을 강행했다. “이 정부가 하도 법치, 법치 하니까 자신도 법원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한 지붕 두 기관장’이란 코미디 아닌 코미디가 현실이 된 것이다. 이런 판에 문화부 장관은 “그렇게도 한번 해보고… 재미있지 않겠어”라고 했지만 과연 유 장관말고 누가 그렇게 재미있어 할까.

    정권이 바뀌면 파워엘리트도 바뀌게 마련이다.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으로 권력 재창출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김대중 사람’은 ‘노무현 사람’으로 교체됐다. 그러니 이른바 좌파정권에서 우파정권으로 바뀐 판에 옛 정권에서 임명된 자리가 온전할 리 없다. 과거 한나라당이 발의해 만든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권이 바뀌더라도 공공기관장 임기(3년)를 보장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새 정부와 생각이 전혀 다른 기관장들이 버티고 있어서야 국정운영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느냐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법대로 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 균형 있는 국정을 운영하면 좋겠지만, 그건 말하기는 쉬워도 현실에는 맞지 않은 소리다. 당장 정권을 이루어낸 공신들에게 나누어줄 자리가 부족하다. 유인촌 장관이 총대를 메고 나선 산하 기관장 물갈이 이후 새로 들어선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대체로 ‘MB맨’이거나 친(親)정권 성향인 뉴라이트 계열이다. 좌파에서 우파로의 대이동이다. 따라서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단체장들은 물러나야 한다”를 노골적으로 해석하면 우리 편에 나누어줄 자리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를 당연하다고 옹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권력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입으로야 만날 국민통합을 노래한들 쉽게 바뀔 풍토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부가 유난히 법치를 강조하려 한다면 막무가내로 몰아내는 작태를 보여선 안 된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은 법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뿐이다. 더구나 일단 밀어내고 재판에서 지더라도 최종심까지 시간을 끌면 실질적으로 ‘물갈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계산이라면 밀려난 측(또는 세력)이 승복할 리 없다. 사회의 적대적 갈등만 깊어질 뿐이다. 근거와 절차의 정당성도 없이 특정인에게 위법과 무능 등의 혐의를 덧씌워 밀어내고, 사실상 임기 종료 이후 무죄로 판명되어도 그만이라는 식은 대상자의 인격을 말살하는 야비한 행위다. 최종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고 한들 이미 위법 무능한 인물로 낙인찍힌 상처가 쉽사리 치유될 수 있겠는가. 우파정권이든 좌파정권이든 자신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까지 말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법치 여부를 떠나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정권의 도덕성 문제다.

    나는 개인적으로 새 정권의 통치철학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공공기관장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러나 법에 보장된 임기를 지키려는 입장을 폄하할 수는 없다. 그 입장 또한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더구나 다양성이 요구되는 문화관련 기관장을 꼭 우파일색(또는 좌파일색)으로 채워야 하는지는 특히 의문이다. 결국 편협한 리더십과 벌거벗은 권력욕의 산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있는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법치를 강조하느니 못 지킬 법은 바꾸는 게 옳다. 예컨대 공공기관장의 경우 정권과 같이 할 수 있도록 임기를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음 정권(한나라당이 정권재창출을 한다고 하더라도)에서라고 같은 갈등이 반복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일이다. 당장은 ‘한 지붕 두 위원장’이라는 기막힌 현실을 이 정부가 강조해마지 않는 법치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김정헌 전 위원장의) 지위 회복이 권한 회복은 아니다”라는 식의 말장난은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위원장으로서의 지위는 인정하나 권한은 줄 수 없다는 것이 상식에 맞는 소리인가. 차라리 항소를 했으니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위 회복을 유보하겠다며 다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문화예술위 위원들은 “김정헌 위원장의 법적 지위 회복을 인정하고 그간 고통을 당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으나 기관 운영의 지속성과 업무수행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 오광수 현 위원장이 기관 대표권을 포함해 모든 권한을 행사하도록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예술위 위원들의 결정이 법원 결정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치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김 전 위원장에게 사무실을 제공하고 비서를 임명하고 차량과 업무추진비를 지급하는 ‘적절한 예우’를 한다지만 위원장으로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마당에 비서와 차량과 업무추진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공연한 혈세 낭비다. 김 전 위원장도 그런 대접받자고 출근을 강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도 출근하는 것이 괴롭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 출근은, 하자가 없는데 억지 사유를 만들어 기관장을 부당 해임시킨 문화부에 대한 항의표시다. 해임당할 때 구겨져서 내던져진 건 난데 지금 와서 그들이 무슨 모양을 찾느냐.” (‘한국일보’ 2월7일자 인터뷰)

    유인촌 장관의 행로(行路)
    全津雨

    1949년 서울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 초빙교수

    저서: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경위야 어떻든 ‘한 지붕 두 위원장’의 모양이 영 아니지 않으냐는 비판에 대한 항변이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유인촌) 장관이 공개사과하고 사퇴하면 나도 용단을 내릴 의향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 장관은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이니까 그게 끝날 때까진 지켜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1심에서 해임 무효와 해임효력 정지 판결이 났다지만 두 건 모두 항소했으니 법원의 최종판결이 나올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1심 법원이 “적법절차를 거치지 아니하여 위법할 뿐 아니라 표적감사에서 지적된 사항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며, 해임에 이를 정도의 업무상 잘못이 없다”며 해임 무효를 판결하고, “김 전 위원장에게 생길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예방하기 위해” 해임처분 정지 결정까지 내렸다면 적어도 유감 표명이라도 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도 한번 해보고… 재미있지 않겠어”라니!

    나는 유 장관이 사퇴하는 게 옳다고 본다. 법치 논란을 떠나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국격(國格)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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