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잡을 땐 확실히 잡아라, 설건드리면 욕만 먹는다”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0-03-02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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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행을 하든 안하든 사형제도는 존치돼야
    • 재소자 95%는 순응, ‘개선극난’ 5%가 말썽
    • 여자 재소자 합창단 공연 보고 눈물 나
    • TV, 인터넷, 직업훈련, 주말 외박…세계 최고의 교도행정
    • 흉악범 득실거리는 청송감호소에서 ‘하리마오(호랑이)’로 불려
    • 신창원 도망 간 부산교도소 내려가 조폭들 정리
    • 젓가락 세 번 삼킨 재소자, “보안과장 저 새끼 정말 독하다”
    • “조국이 해방되는 날, 너를 징역 200년 살리겠다”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 1952년 대구 출생<br>● 1978년 교위 임용(교정간부 19기)<br>● 안동교도소장, 대구구치소장, 법무부 교정국 보안1과장, 수원구치소장, 영등포구치소장, 대구지방교정청장, 서울지방교정청장<br>● 2008년 6월 법무부 교정본부장

    하리마오’. 인도네시아어로 용맹한 호랑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교도관들의 우두머리가 하리마오라 불린다는 사실은 나를 가볍게 흥분시켰다. 법무부 고위간부에게서 그 얘기를 듣고 나서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세상 속 또 하나의 세상이라는 교도소. 그 거친 세계를 헤치고 살아온 사내의 삶의 이력이 궁금했고 그를 통해 그 야만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한국 교정행정의 총사령관인 이태희(李台熙·58) 법무부 교정본부장. ‘인간 하리마오’를 만나기 전에 두 편의 영화를 봤다. 하나는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고뇌를 다룬 ‘집행자’이고 다른 하나는 청주여자교도소 재소자 합창단의 애환을 그린 ‘하모니’다.

    억센 대구 사투리를 쓰는 그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로 보였다. 말투가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다. 단정히 빗어 올린 머리카락은 각이 잡혀 있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덩치가 크지 않고 인상도 그다지 험악하지 않았지만, 성깔 좀 있을 법한 날카로운 눈매와 운동 좀 했을 법한 균형 잡힌 체구로 미뤄 여러 사람 잡았을 게 분명하다고 나는 확신했다. 인터뷰는 2월3일 오전과 5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경기도 과천의 법무부 청사에서 진행됐다. 2월3일 오후엔 안양교도소를, 5일 오전엔 화성직업훈련교도소를 탐방했다.

    ■ 사형수

    ▼ 사형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경험에 비춰 사형의 집행 여부와 별개로 사형제도 자체는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형이 확정되면 긴장하고 엄숙해집니다. 혹여 감형이라도 있을까 싶어 열심히 생활하게 됩니다. 종교생활도 하고 남을 위해 헌신도 하고. 이런 사람이 감형되면 생명을 박탈당한 사람이 새 생명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무기형 받은 사람을 사람 만들려면 5년 걸려요. ‘나한테 미래가 없구나’ 절망하다가, 5년쯤 지나면 ‘벌써 5년이 갔구나’ 하고 그때부터 기술을 배우고 사람이 돼갑니다. 반면 사형수는 무기로 감형되는 순간 바로 사람이 됩니다. 그만큼 사형이라는 형벌의 무게가 무거운 거죠.”

    수십 년을 재소자와 함께 살아온 교도행정 책임자로서의 자신감인지, 말에 기운이 넘친다.

    “일부 사람들이 도입을 주장하는 종신형은 그야말로 희망이 없는 형벌입니다. 외국도 처음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시행하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이 난 후 사면을 통해 내보내는 상대적 종신형으로 바꾸고 있어요. 실제로는 무기형보다 못한 거죠.”

    “사형집행은 교도관 본연의 임무”

    ▼ 영화 ‘집행자’ 제작을 지원했습니까.

    “마침 화성직업훈련교도소 지어놓고 문 열기 전이라 그곳을 사용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좋은 제작자 만났다면 좀 더 밀도 있게 잘 만들었을 텐데 소자본으로 만들다보니 우리가 봐도 엉성하데요. 군더더기도 많고.”

    ▼ 사형 집행을 두고 교도관들이 무척 괴로워하던데요.

    “과장됐죠. 사형 집행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순번대로 하거든요. 다 따르죠. 교도관 본연의 임무인데 갈등할 이유도 없고. 징크스는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사형 집행하는 날에는 집에 안 들어가고 목욕하고 술을 먹는다는데 나는 바로 집으로 가버렸어요. 허허허. 불필요한 술은 안 먹겠다고. 허허허. 1990년 부산구치소에서 보안계장 할 때 감독관으로 사형을 집행한 적이 있어요.”

    사형 집행에 대해 얘기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웃다니. 과연 하리마오다.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무술 유단자와 조사전문인력으로 구성된 기동순찰팀이 사동을 돌고 있다.

    ▼ 사형 집행은 딱 한 번 해보신 건가요?

    “예. 살인으로 사형을 받은 사람인데, 정신이 좀 희한합디다. 집행할 때 감정의 동요도 없고. 신원 확인 질문에 초연하게 대답하고 말없이 사라집디다. 그 모습은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 몇 사람이나 죽였는데요?

    “가정에 강도짓 하러 들어가 여러 사람 살해했죠.”

    ▼ 마지막 말이 기억나십니까.

    “‘할말 없다’였습니다.”

    ▼ 나이는요?

    “40대 초반.”

    ▼ 수형생활은 어땠습니까.

    “온종일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특별히 말썽 피운 적도 없고. 사형선고 이후 충격을 받았는지 눈에 초점이 없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어요.”

    ▼ 사형을 집행하면서 마음의 동요가 전혀 없었습니까.

    “대부분의 교도관이 사형수의 행동을 보거든요. 수형생활을 착실히 잘한 사형수에게는 연민을 느끼고 감형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반면 반성의 기미 없이 멋대로 행동해온 사형수에게는 전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 이 자는 사형당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죠. 판결문에 적힌 범죄내용을 보면 극악하기 짝이 없어요. 사형이 언도되면 집행은 우리 본연의 임무라는 생각이 꽉 박혀 있어요. 연민이 없을 수는 없지만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인데. 세계 어느 나라 교도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과거엔 늘 수행하던 임무 중 하나였습니다.”

    ▼ 사형수와 친하게 지냈던 교도관이라면 고통스러워할 만도 한데요.

    “사형수를 직접 대하는 직원은 한정돼 있어요. 다른 직원들은 잘 모르죠. 그리고 사형 집행은 다른 사람이 하니까.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제 발로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부 공중에 들려가지. 혼이 나가버리는 거죠. 형 집행을 위해 사형수를 형장으로 데리고 오는 직원 마음이 좋지는 않겠죠. 손발을 묶는 사람도 그렇고.”

    사형수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교도관

    ‘집행자’에서 교도관 생활 10년째인 종호(조재현 분)는 재소자들을 혹독하게 다스린다. 하지만 강인하기 짝이 없는 그도 사형집행장에서 사고를 겪은 이후 한순간에 무너진다. 목에 밧줄이 걸린 채 대롱대롱 매달린 사형수가 한번에 죽지 않자 두 손으로 직접 사형수의 몸을 잡아당겨 숨이 끊어지게 만든 후 정신착란증을 일으킨 것이다.

    ▼ 강해 보이는 교도관도 사형을 집행하고 나서 완전히 무너지데요.

    “영화니까 그렇지요. 허허허.”

    ▼ 영화 속 교도관들의 고뇌가 사실적이지 않나요?

    “현실은 달라요. 과거에 그런 나약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본 바 없지만. 예전엔 비인간적 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주기 위해 수시로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습니까. 종교관과 인생관에 따라 정말 고뇌하는 교도관도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 거침없이 집행합니다. 그 후에 괴로워서 술 한잔했는지는 모르지만. 다만 마지막 가는 길이 얼마나 애처롭겠습니까. 면회 왔다고 거짓말하고 데리고 나올 때는 마음이 처연하겠죠.”

    ▼ 직접 집행하신 적은 없는 거죠?

    “간부들은 감독만 하죠. 감독관이 ‘눌러’ 하면 누르는 거죠. 사실 가장 힘든 사람이 의무관이에요. 시신을 만지며 사망을 확인해야 하니까.”

    막무가내 시국사범 앞에선 무력감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화성직업훈련교도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육과정은 제과·제빵이다.

    ▼ 가장 다루기 힘든 재소자가 조폭입니까.

    “아무래도 일반 범죄자보다는 말썽을 자주 일으키지요. 하지만 더 힘든 건 상습범들이에요. 전과도 쌓였고 성격도 특이해 모든 게 못마땅하죠. 이거 해주면 저거 요구하고. 아무데나 시비를 걸죠. 툭하면 인권위원회에 진정하거나 행정기관에 정보공개 청구하고. 맘에 안 드는 직원은 고소하고.”

    ▼ 언제 가장 힘들었습니까.

    “정치적 혼란기. 5, 6공 시절 집시법 위반자가 많이 잡혀왔잖습니까. 시국사범들이 불식(不食)하고 소요를 일으킬 때는 ‘정말 이 직업 계속해야 하나’ 자신이 없었습니다. 시국사범들과 조폭들이 손을 잡기도 하고요. 그 시절은 정말 힘들었죠. 걔들 눈에는 정부가 곧 우리 교도관이니까. 교도관 괴롭히고 투쟁하는 걸 정부에 대한 투쟁으로 여기는 거죠. 마산교도소에 가보니 마창노련이라고 학생들이 근로자들과 힘을 합해서 기세가 대단합디다. 보안계장으로 근무했는데 근로자들이 출소하면서 ‘조국이 해방되는 날, 너를 비롯해 모든 마산교도소 직원에 대해 징역 200년을 살리겠다’ 이러더라고요. 법원에 재판 받으러 갈 때 수백명이 몰려들고 심지어 재소자를 탈취하려고도 하고. 민주화 물결에 전경들도 데모했잖아요. 좌절감에 하루하루가 힘들었어요.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 싶을 정도로. 일반 재소자의 경우 ‘저런 애들도 내가 인간 만들 수 있다’는 의욕을 갖고 대했는데, 시국사범이나 근로자들이 막무가내로 나올 때는 방법도 없고 정말 무력감이 들더군요.”

    ▼ 신념이 강해서 대화가 잘 안 되죠?

    “그렇죠. 그래도 전담반 만들어 각자 한 명씩 붙잡고 대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처우개선을 요구하면 규정 내에서 들어줬죠. 예산이나 인력이 모자라 그렇지 일리 있는 주장도 꽤 있었거든요. 걔들은 책대로 법대로 얘기하니까. 갈등을 겪으면서 친해지기도 하고.”

    ▼ 주먹들은 어떻게 시국사범들과 어울리게 되는 건가요?

    “합세하면 힘이 세지니까 학생들을 이용하는 거지요. 한번은 미결관구 주임이 와서 근무를 못하겠다고 하소연하더라고요. 조폭들이 학생들과 합세해 소리를 지르고 해서 순시를 못 돌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윗사람한테 허락을 받고 제가 진압하겠다고 나섰지요. 진압조 이송조 조사조를 편성해 토요일 오후 진압작전을 벌였습니다. 방어조 직원들에게는 ‘물건 날아오면 방패로 막으라’고 일러뒀지요. 절대 한꺼번에 진압하면 안 됩니다. 한 방씩 잡아나가야지요. 첫 방 문을 여니 깡패놈이 일어나서 덤비더군요. 덤비는 놈들 전부 법에 따라 시승시갑(포승으로 묶고 수갑 채우는 것)했지요. 두 번째 방에선 반 정도가 달려들더군요. 평소 나 보면 숨도 못 쉬던 놈들이. 세 번째 방에 가니 두 놈밖에 안 달려들고 네 번째 방에 가니 전부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더군요. 그게 진압방법입니다. 사동 복도에 직원들을 군데군데 세우고 확성기에 대고 ‘전체 일어섯!’ 하고는 재건국민체조를 시켰어요. 네 방을 진압했더니 전체 20방 재소자들이 다 일어나서 따라합디다.”

    ▼ 과거엔 교도소 측에서 조폭 두목에게 특혜를 주면서 질서 잡는 일을 맡겼잖습니까.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조폭들을 이용한 면이 있었지요. 근본적으로 틀려먹은 방법입니다. 재소자가 재소자 징역을 살리는 꼴이거든요. 지금은 일절 못합니다. 조폭에게 맡기면 문책당합니다. 공직자 향피(鄕避)제도처럼 전라도 깡패는 경상도로, 경상도 깡패는 전라도로 보내지요. 조폭들도 그래요. 무기형이나 징역 20년형을 받은 애들은 징역 잘 삽니다. 처신도 잘하고. 서진룸살롱사건으로 들어온 박모 같은 경우 참 징역살이 잘했어요. 잡스러운 조폭들이 껍적거리지요. 조폭으로 판결 받았지만 실은 동네 양아치들이에요.”

    달라진 항문검사

    방식이 바뀌긴 했지만 자해를 하거나 난동을 피우는 재소자의 신체를 구속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다. 시승시갑 대신 벨트에 양손을 끼워 넣는 허리보호대라는 장비로 묶어둔다. 식사 때나 용변을 볼 때는 직원이 풀어준다. 머리를 박거나 소리를 지르는 정신질환자들은 보호실에 수감하고 보호의자에 앉힌다. 보호실은 방음시설이 갖춰져 있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밖에서 들리지 않는다. 보호의자에 앉으면 수갑을 차게 돼 재소자가 꼼짝 못한다.

    2008년 6월 그가 교정본부장에 취임한 이후 바뀐 교정정책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일선 교도관으로 있을 때 문제라고 느꼈던 교정행정을 하나하나 바꿔나가고 있다. 거창한 구호를 부르짖는 것보다 재소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게 그의 업무방침이다. 전자영상장비 도입도 그런 실용적 사고의 산물이다. 예전엔 재소자가 입소하면 벌거벗은 채 항문검사를 당해야 했다. 담배나 마약 따위를 숨겨 들여오는 재소자가 있기 때문이다.

    “벌리는 사람이나 들여다보는 사람이나 얼마나 고충이 큽니까. 아태교정본부장 회의 참석차 말레이시아에 갔었어요. 재소자가 의자에 앉으면 직원이 밖에서 컴퓨터로 항문을 들여다보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응용한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재소자는 커튼이 쳐진 곳에서 의자에 앉기만 하면 돼요. 의자 밑에 줌 기능이 있는 카메라가 설치돼 있어 항문 속을 다 비춥니다.”

    전자영상장비는 현재 5개 교정기관에서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 모든 교정기관에 보급할 방침이다.

    고가품 반입금지는 그가 일선 교도관한테 메일로 의견을 받아 결정한 것이다.

    “재소자들 사이에 위화감이 안 생기도록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돈 많은 재소자는 내의나 양말도 비싼 메이커 제품을 착용해요. 없는 재소자는 싼 것도 구하기 힘든데. 지금은 일절 고가품이 못 들어옵니다. 사소한 거지만 재소자들한테는 중요한 거죠. 저도 일선을 떠난 지 제법 됐기 때문에 수시로 일선 교도관들한테 의견을 받습니다. 본부 직원들에게도 현장과 괴리된 공문을 하달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재소자들의 작업장려금 기부 제도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작업장려금이란 재소자가 일한 대가로 받는 돈이다. 이 돈을 반성의 표시로 피해자구호단체에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희망자에 한해서다. 지난해 10월부터 실시했는데, 올 1월 한 달 동안에만 271명이 21개 기관에 3959만원을 전달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소통하게 하자는 ‘회복적 사법’의 일환이죠. 그간 재소자들이 반성하고 있다는 걸 표현할 창구가 없었거든요. 올해부터 교화방송을 통해 집중 홍보하고 있는데 재소자들한테 반응이 좋아요. 마음에서 행동이 나오지만 행동이 마음을 이끌기도 하잖습니까.”

    “3억 되면 전화해라”

    취재 중 만난 김태규 안양교도소장은 이태희 교정본부장에 대해 “원래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은 분인데 그걸 재소자들에게 안 들키려고 더 엄하게 해왔다”라고 평했다. 이 얘기를 들려주자 그가 껄껄거렸다.

    “맞아요. 불쌍한 놈 보면 한없이 눈물 흘리면서도 그런 게 표출되면 안 되기 때문에 겉으로는 모른 체하고 쌀쌀하게 대하죠. 재소자들에게 엄하게 하면서도 ‘내 힘으로 해줄 수 있는 건 다해주자’는 마음으로 근무해왔습니다. 주임 시절부터 계장, 과장, 소장을 거치며 나중에 ‘내가 운이 좋아 높은 자리에 가면 이렇게 고치겠다’고 마음먹은 게 많아요. 자리의 한계 때문에 미처 못 했던 일을 본부장 돼서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난 참 복 받은 사람입니다.”

    30년 넘는 교도관 생활의 보람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저거 사람 되겠나 싶었던 사고뭉치들이 출소해 자리를 잡으면 전화를 걸어옵니다. ‘과장님’ ‘형님’ 하면서 ‘이제 저한테 술 한잔 얻어먹어도 됩니다’ 해요. ‘니 얼마나 벌었노’ 물으면 ‘2억 됩니다’ 해요. ‘3억 되면 전화해라’ 하죠. 여태까지 한 번도 얻어먹은 적은 없지만. 더러 부모들한테 편지도 와요. 자식 잘 건사해줘서 고맙다고.”

    화성직업훈련교도소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경기도 화성에 있는 화성직업훈련교도소에 도착하자 세찬 바람이 밀려들었다. 원래 염전부지로 막히는 게 없는 벌판이다보니 인근 서해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정문을 통과하자 아담한 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현석 소장의 안내를 받으며 교도소를 둘러봤다. 교도소 내부로 들어가기 전 방문증을 목에 걸고 휴대전화기를 보안과에 맡겼다. 휴대전화기는 외부인은 물론 내부 직원도 갖고 들어가지 못한다. 소장도 예외가 아니다. 이태희 교정본부장이 취임 직후 재소자들의 휴대전화 사고를 방지하겠다며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다.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담당 직원들이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계속 근무하겠습니다’ 따위의 구호를 외치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2009년 5월 문을 연 화성직업훈련교도소는 말 그대로 수형생활을 하면서 직업훈련을 받는 곳이다. 전체 수용인원은 1100여 명. 그중 훈련생 재소자가 650명이고 시설유지 재소자가 120명, 미결수와 노역수용자, 이송대기자가 350명이다.

    훈련생 중에는 10년 이상의 장기수가 280명이나 된다. 장기수를 우선적으로 선발하는 정책 때문이다. 무기수도 35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 오고 싶다고 다 올 수 있는 건 아니다. 희망자 중 행형성적이 우수하고 적격심사에서 통과한 자들이 선발된다. 징벌 기록이 많으면 무조건 탈락이다.

    교육과정은 1년짜리와 2년짜리로 나뉜다. 1년 과정은 기능사, 2년 과정은 산업기사 자격증 취득이 목표다. 15개 직종의 직업훈련공과가 설치돼 있으며 25개 반으로 편성돼 있다. 교실은 강의실과 실습실로 나눠져 있다. 직업훈련교사는 모두 25명. 한국기술교육대를 이수한 사람들이다.

    3층으로 구성된 직업훈련시설은 푸른 수의를 입은 재소자들과 기동순찰대만 없다면 일반 학교로 착각할 정도로 교육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자동차검사, 자동차정비, 자동차도장 등 자동차 실습장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어 CNC(컴퓨터 수치 제어) 선반을 가공하는 반, 제과·제빵반, 용접반, 컴퓨터 네트워크 관리반 등을 차례로 둘러봤다.

    김 소장에 따르면 젊은 재소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육과정은 제과·제빵이다. 정작 취업률이 높은 건 용접기술인데 선호도가 낮다고 한다. 제과·제빵반에는 대형 믹서와 오븐이 갖춰져 있었다. 이날의 실습요리는 프랑스빵. 흰 옷을 입은 훈련생들이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재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김 소장과 함께 재소자들이 만든 빵을 먹어보았는데 맛이 좋았다. 아직 일반에 판매할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실습 중인 재소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해보였다. 호기심에 취재진을 흘낏흘낏 쳐다보기도 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교육과정을 소화하지 못해 중도에 포기하고 원대복귀하는 재소자도 있다고 한다.

    훈련동에 이어 후생동을 둘러봤다. 취사장 주변으로 목욕실, 세탁실, 이발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날 점심 메뉴는 밥과 국에 어묵 김치 무채 세 가지 반찬이었다.

    교육장 못지않게 재소자의 거주공간인 거실이 궁금했다. 점심식사 시간이 돼 거실들이 비어 있었다. 크기는 독거실이 6.3㎡(1.89평), 4~5명이 쓰는 혼거실이 13.74㎡(4.1평)다. 문에 ‘동아일보 구독’이 써 붙여진 거실도 있었다. 신문은 자비로 구독한다고 한다.

    문을 따고 거실 안으로 들어가 봤다. 온돌바닥에 세면대와 TV가 갖춰져 있다. 화장실 문을 여니 수세식 양변기다. 깔끔하다. 거실 한쪽 벽면으로 줄을 걸어 빨래를 널어놓았다. 천장에는 살수장치(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다. 화재 발생시 자동으로 물이 쏟아진다고 한다.

    벽에는 수용자생활안내문이 붙어 있다. 수용자권리구제제도(진정, 청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눈길을 끈다. ‘이동문고 도서원부’에는 수십 권의 책 제목이 적혀 있다. 기상시간은 아침 6시30분이고 취침시간은 밤 9시다. 직원 한 명이 “외부인은 거실에 들어가기를 꺼리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는 걸 보고 놀랐다. 기자라서 기가 센 것 같다”고 농을 건넸다.

    거실에서 나온 후 중앙통제실로 이동했다. 화성직업훈련교도소는 무인경비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모두 200대의 감시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 카메라가 보내는 영상을 지켜보는 곳이 바로 중앙통제실이다. 통제실엔 25대의 모니터가 있다. 교도소 곳곳이 비춰지고 있다. 재소자의 거실엔 인권침해를 우려해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자살 우려자나 자살 시도자는 영상계호실에 수감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다른 교도소와 달리 여기는 재소자의 진정이나 자해가 없어요. 직원들에게 늘 ‘재소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하죠.”

    올 연말 재소자들은 각종 자격시험에 응시한다. 김 소장은 “성과가 잘 나와야 할 텐데 걱정”이라며 웃었다.


    ▼ 영화처럼 집행이 제대로 안 되는 사고가 더러 일어납니까.

    “1990년 이전에는 영화처럼 교도관 한 명이 ‘포인트’(사형집행 레버)를 잡아당겨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형을 집행하는 교도관의 마음이 좋을 리 없죠. 그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1990년부터는 버튼을 5개 만들어 5명의 직원이 동시에 누르는 자동화시스템으로 바꾸었습니다. 누구의 손에 의해 집행되는지 모르는 거죠. 집행할 때는 포승 길이를 잘 조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줄이 짧아야 집행 대상자가 공중에 매달리게 되는데 줄이 길면 바닥에 떨어집니다. 허허허. 실제로 그래서 다시 집행한 경우가 있었죠. 선배들한테 들은 얘긴데, 한번은 직원이 발을 빼고 나서 포인트를 눌러야 하는데 빼기 전에 누르는 바람에, 허허허, 사형수와 집행관이 함께 바닥에 떨어진 거예요. 직원이 충격을 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뒀다고 하더군요.”

    ▼ 영화 속 장면과 비슷하네요.

    “비슷하죠. 혼이 나갔겠죠. 허허허.”

    수형자는 기결수와 미결수로 분류된다. 법무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기결수 범죄 유형 중 가장 많은 게 절도이고 그 다음이 사기, 강간, 강도, 살인 순이다. 미결수의 경우 사기가 가장 많고 강간, 폭행이 뒤를 잇고 있다.

    ▼ 사형수는 다 살인죄죠?

    “그렇죠. 보통 서너 명 죽인 경우죠. 그것도 우발적인 살인은 사형을 안 줍니다. 계획적인 살인만. 판결문 보면 사람도 아니죠.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30일 23명(여자 4명)을 사형한 이후 지금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어 실질적인 사형제 폐지 국가로 분류된다. 현재 사형수는 모두 59명이다. 이 중 57명은 사형이 확정됐고 나머지 2명은 상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연령대로는 40대가 가장 많고 20대보다는 30대가 많다.

    ▼ 현존 사형수들 중에 감형될 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없습니까.

    “1997년 마지막 사형 집행 이후 몇 번 감형이 있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사형수들은 상대적으로 독하다고 봐야죠. 감형받은 자들도 죄가 가벼운 건 아닌데,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 하는 자들이죠.”

    ▼ 사형제 폐지론이나 무용론에는 전혀 공감하지 않으십니까.

    “사형제도 자체는 존치돼야 한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사형집행을 하는 교도관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사형을 없애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훈련돼 있습니다. 허허허. 국가의 명을 따르는 것이고요.”

    ▼ 1997년 이후 집행이 이뤄지지 않으니 사형수들도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기대감이 있겠죠.”

    ▼ 그렇다면 제도의 효용성이 없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언젠가 집행될지 모르니 늘 두려움을 갖고 있죠.”

    ▼ 오랜 수형생활을 통해 교화돼서 바르게 사는 사람이나 정말 억울한 사람을 사형시키는 건 문제 아닌가요?

    “오판의 문제인데, 과거엔 수사나 재판이 정확하지 않아 사형수가 죽는 순간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치범들도 그랬고. 하지만 지금은 일반 국민의 법감정이 사형감인데도 무기형을 선고할 정도로 판사들이 웬만하면 사형을 때리지 않습니다. 또 형사사법제도의 발달로 오판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 판결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요.

    “모든 것을 증거로 판단하기 때문에 부당하게 사형을 선고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순화된 사람들에 대해선 감형을 하면 되고요. 그런데 아예 (사형제도를) 없애면 ‘이제 안 죽겠구나’ 싶어 태도가 확 달라집니다. 요즘 사형수는 과거와 달라요. 예전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남의 발도 씻겨줬거든요. 쇼도 자꾸 하면 진짜가 되거든. 그런데 지금은 느긋해요. 집행에 대한 두려움이 있긴 하지만 긴장도가 떨어져 있죠.”

    ■ 교도소

    영화 ‘하모니’를 보면 과거에 비해 교정시설과 교도행정이 매우 좋아졌음을 알 수 있다. 온돌바닥과 TV, 출입문이 달린 수세식 화장실이 갖춰져 있고 교도관들도 재소자를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하모니’의 실제 모델인 청주여자교도소 재소자 합창단은 1997년에 결성됐다.

    “영화보다 더 눈물 나”

    ▼ 영화 ‘하모니’를 봤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실제로 활동하는 여자재소자 합창단입니다. 실제로 보면 영화보다 더 눈물이 납니다. 한 달에 한 번 가석방심사회의가 열립니다. 법무부 차관이 위원장이고, 교정본부장과 교수 판사 변호사 등이 위원이지요. 외부 심사위원들이 종종 판결문만 보고는 ‘어떻게 그런 흉악한 범죄자를 가석방할 수 있느냐’고 문제제기를 하기에 제가 ‘서류만으로 심사할 게 아니라 현장을 보고 심사해보자’고 해서 청주여자교소도를 방문했습니다. 가서 공연을 보는데 여자 위원들은 다 웁디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심사하면 안 되겠다는 거예요. 마음이 약해져서. 허허허. 하여간 앞으로 현장 가석방심사를 자주 하기로 했습니다.”

    ▼ 관객석이 눈물바다더군요.

    “저도 좀처럼 안 우는데, 합창단 공연을 보고 눈물이 납디다. ‘하모니’ 찍기 전에 감독이 찾아왔어요. 시나리오를 보내보라고 했지요. 시나리오를 보니 내용이 좋더라고요. 대한민국 유일의 여자교도소라는 점에서 교정홍보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고요. 다 교도소 안에서 촬영한 겁니다.”

    ▼ 영화 장면 그대로인가요? 안에서 TV도 보던데.

    “그럼요. 한국 사람들은 잘 몰라주는데, 전세계 교정행정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한국에 와보고 다들 놀라 자빠집니다. 세계 최초로 교화방송국도 세웠고요. 웬만한 케이블방송보다 낫습니다. 아나운서, PD, 작가 다 있어요. 거기서 만든 프로그램이 전국 교도소로 방송됩니다. 지난해 초 정식으로 가동했습니다.”

    ▼ 일반 방송은 시청을 제한하죠?

    “범죄소식은 안 좋으니 뉴스는 제한하죠. 다만 사회적응 훈련을 하는 천안개방교도소와 ‘중간처우의 집’에서는 제한 없이 다 봅니다. 중간처우의 집은 제가 본부장으로 부임해 만든 시설인데 안양교도소를 비롯해 현재 전국 다섯 개 교도소에 설립돼 있습니다. 거기선 인터넷도 맘대로 하지요. 행형 성적이 우수하고 가석방이 6개월가량 남은 재소자들이 들어갑니다. ‘필요적 귀휴’라고, 주말엔 집에 갔다 오게 합니다. 천안개방교도소는 원래 교통사고과실범을 수용해 교통교육을 하던 곳입니다. 제가 부임한 후 사회적응훈련원으로 기능을 전환시켰죠. 현재 250명이 수용돼 있는데 전부 침대생활을 하고 TV를 보고 인터넷을 합니다. 또 천안소년교도소를 외국인전담교도소로 바꿨는데, 2월23일 개청식을 갖습니다. 현재 450명이 수용돼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교도소 내에 국제협력과를 신설하고 외국어 가능한 교도관 15명을 특채했습니다.”

    보라미방송

    첫날 인터뷰가 끝난 후 이태희 교정본부장과 함께 교화방송센터를 둘러봤다. 2008년 6월 개국한 교화방송센터는 법무부 청사 1층에 자리 잡고 있다. 스튜디오, 주조종실, 편집실, 서버실로 구성돼 있고 영상카메라 5대가 갖춰져 있다.

    제작한 영상물을 인터넷을 통해 각 교정기관의 수신시스템에 전송해 정해진 시간에 방송이 송출되는 자동화시스템이다. 모니터들 한쪽으로 전국 교정기관이 표시된 대형 현황판이 설치돼 있는데, 특정 교정기관에서 방송 수신에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경보신호가 들어온다고 한다.

    개국 초기엔 TV 방송내용을 편집해 내보내는 송출 기능만 있었으나 지난해 PD, 아나운서 등 전문인력을 채용해 자체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교화방송은 보라미방송이라고도 한다. 평일은 9시간, 토요일 및 공휴일은 11시간 반 동안 방송된다. 일반교화, 여성, 교육 3개의 채널이 있고 라디오방송도 실시하고 있다. 영상편지(가족의 소리), 준법교육(법질서 지키기 운동), 독서진흥(책, 함께 읽자), 저명인사 초청강연, 출소자 성공사례 다큐멘터리가 주요 프로그램.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이태희 본부장과 나란히 앉아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보리떡 다섯 개’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마약류 전과자의 출소 후 새 삶을 그린 방송이었다. 짤막한 스토리였지만 밀도 있게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재소자 가족이 영상편지를 전하는 프로그램을 봤다. 재소자의 어머니와 여동생, 누나, 매형, 조카들이 차례로 등장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재소자가 포함된 어릴 적 가족사진이 비쳐질 때는 가슴이 찡했다.


    평소 교정행정에 관심 없던 나에게는 하나같이 신기한 얘기들이었다. 밖에서 인권침해가 어떻고 처우개선이 어떻고 사형제도를 없애느니 마느니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동안 교정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재소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온 것이다. 한편으로 인권운동가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 말이다. 화성과 청송에는 직업훈련교소도가 설립돼 있다.

    “10년 전만 해도 일본 후추형무소 직업훈련시스템이 부러웠어요. 지금은 우리 것의 반도 못 따라와요. 전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안 돼 있어요. 우수한 강사와 시설이 갖춰져 있어요. 그런 현장을 보셔야 합니다. 자격증만 따서는 소용없죠. 밖에 나가서 곧바로 취업이 돼야 하거든요. 화성에서 수료한 재소자들은 청송으로 가서 심화교육을 받습니다. 숙련과정이죠. 지난해 처음으로 천안개방교도소에서 수형자 취업박람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보험공단을 통해 조사해보니 직업훈련을 받은 출소자의 취업률이 33.1%예요.”

    교도소 밖에서 재소자의 사동(舍棟) 거실까지 가려면 4개의 문을 거쳐야 한다. 전자경비시스템에서는 버튼 하나로 모든 문이 열린다. 현재 전국 교도소의 반 정도에 이 시설이 갖춰져 있다고 한다. 전자경비시스템은 인력 부족을 해소하는 현실적인 방안이기도 하다. 2012년이 되면 경비교도대 병력이 완전히 철수해 교도소 경비와 관리에 큰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경비교도대가 사라지는 것은 국방부가 군병력 부족을 내세워 더는 지원할 수 없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다. 경비교도대는 그동안 군 훈련소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운용돼 왔다.

    “앞으론 감시대에서 직원이 총 들고 서 있는 광경이 사라집니다. 누군가 주벽 쪽으로 침투하면 비상벨이 울리고 통제실 카메라가 자동으로 추적합니다. 전에는 문마다 직원이 보초를 서고 있다가 열어주곤 했는데 지금은 각자의 아이디카드를 대면 탁탁 열립니다.”

    ▼ 교도관들이 재소자들과 물리적 충돌을 빚는 경우가 많지요?

    “지난 10년간 사회가 시끄러웠잖아요. 교도소도 세상 따라가는 곳이죠. 직원들한테 욕하고 협박하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지난해 ‘수용질서 확립 원년의 해’를 선포하고 기동순찰팀을 만들었습니다. CRPT(Correctional Rapid Patrol Team)라고. 24시간 순찰하죠. 7, 8개월 활동하고 나니 수용질서가 완전히 잡혔어요. 직원들 중 무술유단자와 조사전문교육을 받은 사람을 선발해 운영하고 있어요. 현재 250명입니다.”

    ▼ 저항하지는 않습니까.

    “전국의 재소자가 4만8000명이에요. 95%는 반성하고 순화돼서 잘 생활하고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죠. 꼭 5%-조직깡패 하고 성격이상자들이죠-가 문제입니다. 그 5%를 단속하기 위해 기동순찰대가 있는데, 전국 교도소 직원들한테 감사의 메일이 많이 날아옵니다.”

    교도소 자살률 많이 낮춰

    어차피 질문하려 했는데 그가 먼저 자살 문제를 끄집어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위입니다. 재소자들도 따라갈 수밖에요. 교도소에서는 심리적 압박이 더 심하지요. 지난해 자살을 기도한 재소자가 모두 115명입니다. 그중 105명을 사전에 막았습니다. 우리 직원들이 다 칼을 갖고 있어요. 캄캄한 새벽에 감시센터에서 지켜보던가 순찰을 돌다가 목매단 재소자를 발견하면 끈을 잘라내 바닥에 뉘어놓고는 인공호흡을 시킵니다. 심약한 직원은 그런 일 한 번 겪으면 사표 내려 하지요.”

    ▼ 주로 목매는 거죠?

    “그렇죠. 화장실 철격자를 많이 이용하는데 지금은 다 막아놓았습니다. 요즘은 TV받침대에 걸어 죽죠. 가장 위험한 게 앉아서 목을 매는 겁니다. 심지어 누워서 제 발로 밀어서도 죽고. 일본과 우리는 잘 방어하는 편입니다. 지난해 10명이 자살했는데 10만명 기준으로는 20명쯤 됩니다. 선진국은 50명, 100명이 넘어요. 프랑스 같은 데는 엄청나죠.”

    ▼ 수감생활이 힘들어 그런 건가요?

    “막장인생들 있잖아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마누라는 도망 가고 자식은 어찌 사는지 모르고. 지은 죄가 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교도소 들어오면 인생이 한 방에 무너지거든. 명예도 손상되고. 유서를 보면 대체로 ‘더 살아 뭣 하냐’ ‘먼저 가 미안하다’ ‘아내에게 부모에게 사죄한다’ 이런 내용이 많아요. 구구절절하죠. 이제껏 해마다 20명가량이 자살했어요. 지난해에 미친 듯이 달라붙어 10명으로 줄였죠. 올해 들어서만 예방건수가 11건이에요. 해마다 직원들을 대전에 있는 국군군의학교에 보내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따게 하고 있는데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어요.”

    ▼ 2004년 무기수가 교도관을 구타해 사망한 사건이 있었지요?

    “쇠몽둥이로 때려 머리가 다 부서졌어요. 원래 무기수인데 그 사건으로 또 무기형을 받았어요. 그런 형벌은 의미가 없지. 사형을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사건 이후 직원 부조회를 만들었어요. 일반직원은 1만원, 사무관은 1만5000원, 본부장은 3만원씩 내지요. 병으로든 뭐로든 재직 중 죽으면 1억4000만원이 지급되니 유족에게 힘이 되죠.”

    ▼ 그런 사건이 가끔 일어납니까.

    “죽은 건 처음입니다. 난동 진압하다가 직원들이 다치는 경우는 많았지만. 과거엔 재소자들이 배가 고파 자주 난동을 일으켰지요.”

    ▼ 교정직 이직률이 다른 직종에 비해 높은 편인가요?

    “특별히 높은 건 아닙니다. 요즘 취업이 쉽지 않으니. 과거엔 아주 높았지만. 만날 새로 뽑았죠. 이직률이 낮아진 데는 처우 개선도 영향을 끼쳤어요. 보수나 음식, 시설 등 근무여건이 현격히 좋아졌죠. 다만 직장에 대한 긍지와 소속감을 갖기 힘든 근본적 이유는 대상이 범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다루는 일이 징그럽거든요. 특히 보안과 직원들의 고충이 심하죠. 사기 진작 차원에서 지난해부터는 교정대상을 받으면 특진도 시키고 있어요. 직원들끼리 하던 여러 운동시합을 장관배로 격상시켰고요.”

    “교도소 무용론은 좌파적 시각”

    ▼ 성선설과 성악설 중에 어느 쪽을 지지하십니까.

    “95%의 인간은 착하게 태어나고 5%의 인간은 소질적으로 나쁘게 태어난다고 봅니다.”

    ▼ 5%는 교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나요?

    “반은 되고 반은 안 될 것 같아요. 머리가 이미 굵어졌기 때문에. 인천소년교도소에서 5년간 근무한 적이 있는데 뭘 가르치면 리트머스시험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대로 받아들이더군요. 교화가 영 안 되는 친구들은 우리 쪽 용어로 ‘개선극난’이라고 합니다.”

    ▼ 교도소 무용론도 있지요. 교도소 가서 더 망가지고 재범률이 높다는 이유로요.

    “교도소 무용론은 좌파적 시각을 가진 형사정책학자들의 얘기입니다. 모든 범죄는 사회책임이라면서.”

    ▼ 무용론이야 그렇다 쳐도 교화교육이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은 일리가 있지 않나요?

    “징역 3년형을 받으면 3년 동안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없잖아요. 관점의 차이지요. 3년마다 재복역률을 조사합니다. 현재 23.2%인데 해마다 줄고 있어요.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봅니다. 선진국은 50%가 넘어요.”

    국내 교정기관은 모두 50개다. 서울 대구 대전 광주의 4개 지방교정청 밑으로 교도소 36곳, 구치소 11곳, 지소 3곳이 있다. 2015년엔 경기도 안양에 교정병원에 해당되는 의료전문교도소가 세워질 예정이다. 전체 수형자는 기결수 미결수 합해 약 4만8000명인데 그중 여자 재소자가 4000명쯤 된다. 여자교도소를 하나 더 세우기 위해 경기도 화성에 터를 닦고 있다. 현재 교정직 공무원은 1만5000명이다.

    ■ 하리마오

    대구에서 태어난 그가 교도관이 된 것은 1978년 11월이다. 만 26세, 교정간부 19기였다. 전해에 치러진 교정공무원 7급 시험에서 3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응시생들은 대부분 현직 교도관들이었다. 교도관 경험이 전무한 그를 두고 ‘순수 공채’라고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집구석이 무너져 장남으로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찰 출신인 그의 부친은 “경찰은 바람직한 공무원이 아니다”라며 자식이 다른 길을 가기를 원했다. 자식은 부친과 다르면서도 같은 길을 걸었다. 경찰관이나 교도관이나 법을 집행하는 최일선에 있는 직업이기에. 애초엔 3년만 하려고 했다. 행정고시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욕심을 버렸다.

    “신혼 때 공부하던 책을 불살라버렸어요. 주어진 운명에 승복하고 멋지게 내 인생을 끌고가자고. 그러자 딴 세상이 나타납디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시간에 쫓겼는데, 직원들과 술도 먹고 직무에 대해 논하기도 하고….”

    첫 근무지는 인천소년교도소였다.

    “진짜 보람 있었습니다. 꼭 학교 같아서 부모가 와서는 높은 사람을 안 찾고 담임선생을 찾아요. 담당교도관을 담임선생이라고 하거든요. 그때 돌봤던 소년수들 중에 잘된 애가 많아요. 비감한 것은, 세월이 흘러 청송(감호소)에 가보니 인천교도소에서 봤던 소년수가 고참 도둑놈이 돼 있더라고요.”

    하리마오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청송감호소에서 보안계장을 할 때였다. 1980년대 중반이었다.

    “청송에 가보니 참 무질서 하더라고요. 재소자들 중에 깡패가 많다보니 직원들 기가 죽어 있는 겁니다. 상사라는 분의 첫마디가 ‘당신, 참 운 없소. 곧 난동 날지 모르는데’였어요. 내 나이 서른세 살 때인데, 분기탱천했지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난동 나면 때려잡으면 되지. 교도관이 그거 하라고 봉급 받는 것 아닙니까.’ 3일 동안 매일 밤 11시에 퇴근했습니다. 서서히 기율을 잡아나가기 시작했지요. ‘나를 보는 순간 무조건 동작중지다’ 하면서.”

    중간처우의 집

    지난해 1월 개소한 안양교도소 중간처우의 집은 주벽(담장) 밖에 위치한, 교도소 아닌 교도소다. 출소 예정자가 사회로 복귀하기 전에 일정기간 머물면서 출소를 준비하는 곳으로 ‘소망의 집’으로도 불린다. 수용자들은 대부분 잔형이 5개월 미만인 장기수로 가석방 후보자들이다. 10명이 수용돼 있었는데 얼마 전 한 명이 가석방으로 나갔다.

    보안시설과 경비병력이 없는 곳이므로 맘만 먹으면 언제든 탈출이 가능하다. 김태규 안양교도소장은 “늘 불안한 요소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믿지 않으면 내가 불안해 못 산다. 믿어주면 재소자들도 잘한다. 그들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설사 도망가는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다른 재소자들을 위해 계속 이런 시설을 늘려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밝았다.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김 소장을 따라 시설을 둘러봤다. 생활실이라 불리는 원룸 5개에 공용 거실 하나로 구성돼 있다. 생활실은 2명이 한방을 쓴다. 거실 겸 주방엔 냉장고와 에어컨, 싱크대, 식탁이 갖춰져 있다.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와 TV는 기본. 그밖에 소형 서재, 샤워장, 세탁실, 공중전화기 등이 눈길을 끌었다. 컴퓨터 사용은 한 사람이 한 번에 30분씩 사용하고 하루에 한 번 전화도 할 수 있다. 주말과 공휴일엔 외출·외박이 허용된다. 김 소장은 “이곳은 전국 재소자들의 꿈”이라고 말했다.

    기숙시설 옆에는 ‘아름다운 자동차가게’라는 간판이 붙은 카센터가 있다. 수용자 중 5명이 이곳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교도소 안 공장에서 일한다. 스팀세차를 하는데 바깥 카센터보다 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반인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이태희 교정본부장은 청송감호소에서 ‘하리마오’라는 별명을 얻었다.

    ▼ 반항하지는 않던가요?

    “그러니 초장부터 잘해야 합니다. 예전에 봤던 소년수들이 거기 가 있었거든요. 이미 소문이 나서 3분의 2는 미리 항복하러 옵디다. 저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고. 그놈들이 하리마오라는 별명을 붙였지요. 3분의 1이 항복 안 해서 교육 좀 시켰지. 한 달 반 고생하니 딱 잡히더라고요. 처음엔 울면서 갔는데 떠나올 때는 참 섭섭하데. 말 잘 들으면 예쁘잖아요. 딱 잡아놓고 배려해줘야지. 그때 기율을 어떻게나 잡았는지. 강모라고 김천 깡패가 있었어요. 길에서 만났는데 양복 입은 놈이 ‘갱생!’ 하고 거수경례를 붙이는 겁니다. 얼마나 어색했던지.”

    “영감, 오늘은 안 쓰나”

    ▼ ‘집행자’의 조재현 스타일이네요.

    “깡패를 사람 만들려면 같이 깡패가 돼야 해요. 말도 그렇게 해야 하고. 사기꾼한테는 사기꾼으로. 신창원이 부산교도소에서 도망갔을 때 본부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유모 국장이 나보고 내려가보라고 해요. 한 사람 보냈는데 겁이 나서 입원해버렸거든요. 나도 뚜껑 열리지. 본부에서 승진하려고 했는데. 명령이니 어떡합니까. 내려가면서 맘속으로 ‘너희 부산놈들 다 죽었다’ 했지요. 첫날 가보니 전부 깡패야. 조직들이고.”

    힘깨나 쓰는 재소자들과 간부 교도관들이 어울리던 테니스장을 정신교육훈련장으로 바꾼 게 기선 제압의 신호탄이었다.

    “모 조직 행동대장이 꿇어앉아 울기까지 했는데도 용서하지 않았어요. ‘너같이 못난 놈이 행동대장 하니 그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겠냐.’ 이후 조용해졌지요.”

    ▼ 독방에 처넣는 게 가장 강력한 제재인가요?

    “비연고지로 날려버리는 거죠. 깡패들은 연고지에서 힘을 쓰니까. 본부에서 깡패들에게 (지도)반장 시키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갔는데도 현장에서는 전혀 이행되지 않고 있었어요. 전부 반장 떼버렸지. 출소하는 그날까지 복도에도 안 나오겠다고 맹세하는 놈들만 방에 처넣고 나머지는 전부 날려버렸지. 깡패 청소하고 나니 또 다른 골칫덩어리 하나가 눈에 띄는 거예요. 나이가 60인데 툭하면 투서하는 거야. 한 번 썼다 하면 60장씩. 들어오기 전에 경찰관이었다는데 누구를 총으로 쏴 죽였어요. 동네싸움 하다가. 커피 주면서, ‘우리 아버지도 경찰관인데 어쩌다 이래 됐소’ 하니 죽 살아온 얘기를 합디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이 부산교도소에 있는데 얼굴 좀 보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게 해줬지. 그래도 아버지라고 아들한테 한참 뭐라 하데. 하여간 매일 그 사람 방 앞에 갔어요. ‘영감, 오늘은 안 쓰나. 또 써야지’ 하면서. 한 일주일 그러니까 ‘과장님 떠나면 쓰겠습니다’ 하데.(웃음) 그런 식으로 부딪쳐야 해요. 우리 직원들이 재소자를 징그러워하는데,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재소자가 나를 징그럽게 여기도록 만들어라.’ ‘저 징그러운 새끼 또 왔구나.’ 징그러워하고 무서워 피하면 못 잡습니다.”

    ▼ 그러려면 물리적 충돌을 감수해야 할 텐데요. 제압할 만한 힘도 있어야 하고.

    “기싸움에서 다 나한테 지니까. 과거에 대든 놈들을 징그럽게 처벌했던 게 소문났거든요. 독방에서 나오는 그날로 또 꼬투리 잡아서 넣는 거야. 그럼 항복하지. 가장 중요한 건 신뢰예요. 교도소장이나 과장은 재소자가 기댈 수 있는 언덕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징역살이에서 가장 큰 고통이 같은 재소자가 괴롭히는 거예요. 이런 걸 잘 해결해주는 게 훌륭한 교도관입니다.”

    ▼ 매번 잘 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힘들 때도 있었을 테고.

    “그래서 초장에 잘하는 게 중요해요. 초임 때 강직하고 청렴하고 강인한 인상을 안 심어주면 평생 괴로워요. 나중에 계급 달고 가봐야 재소자들이 인정해주지 않거든요. 저 쪼다가 과장, 소장 됐다고 키득거리죠. 재소자들 반은 고여 있는 물이거든. 들락거리는 놈이 계속 들락거리지. 1년에 12만명이 들락거려요. 우스갯소리가 있잖아요. 경찰관이나 교도관이 어떤 사람인 줄 알아보려면 길바닥 깡패와 소매치기한테 물어보라고. 무슨 술 좋아하고 가족은 어떻고. 허허허. 걔들 세계에서 만든 족보가 있더라고.”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1. 거실 문 위에 동아일보 구독 표시가 돼 있다. 2. 재소자 거실. TV 시청이 가능하고, 출입문이 달린 수세식 화장실이 갖춰져 있다. 3. 재소자 식단. 국에 반찬 3가지다.

    “대를 두고 복수하겠다”

    ‘잡을 땐 확실히 잡아라’는 게 그의 확고한 교정철학이다.

    “출소한 재소자들한테 협박전화나 협박편지를 받는 직원이 많습니다. 어제도 (교정본부) 과장들과 막걸리 한잔하며 얘기했지만, 잡을 땐 확실히 잡아야 합니다. 설건드리면 욕먹거든요. 나도 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처음엔 뜨끔했습니다. 진주놈인데, 편지를 열어보니 첫머리가 ‘존경하는 계장님’입디다. 안에 있을 때는 ‘대를 두고 복수하겠다’고 말했거든요. ‘부모도 나를 못 이기고 경찰도 나를 못 이겼는데 계장님이 나를 이겼다. 고로 계장님을 부모보다 존경한다.’ 허허, 뭐 이런 내용이었어요. 재소자들은 안에 있을 때는 저한테 잘해주면 착한 교도관이고 원칙대로 하면 악질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기자(滿期者)들 면담해보면 달라요. ‘고생 많았지’ 하면 ‘아닙니다’ 하면서 ‘그래도 과장님 같은 분이 있으니 한국이 유지되는 것 아닙니까’ 이래요. 허허허. 그러니 존경받는 교도관이 되려면 원칙대로 하라는 거죠.”

    영화 ‘집행자’에도 그런 대사가 나온다. 잡으려면 설잡지 말고 확실히 잡으라고. 고참 교도관인 조재현이 신참 교도관에게 하는 얘기다. “그거, 본부장께서 코치해주신 게 아니냐”고 묻자 고개를 저으며 껄껄거린다. 그러면서 영화 속 연쇄살인마 사형수 얘기를 꺼냈다.

    “거 못된 놈 연기 잘하데. 실제로 지 눈깔 빼는 놈 천지입니다. 쇠젓가락을 세 개씩 먹어버린다 아닙니까. 청송에 있을 때예요. 자격도 안 되는 놈이 바깥 일 하고 싶다고. 신OO라고 아직도 이름을 기억해요. 재소자들 중 일부가 교도소 담 밖에서 농사를 했거든요. 안 내보내준다고 젓가락을 먹어버린 거요. 안동병원으로 데리고 가 배를 째 젓가락을 꺼냈어요. 그런 다음 처박아놓았지요. 그랬더니 또 삼켰어요. 다시 수술해주고는 계속 안 들어줬지요. 물을 부어가면서 삼킨다고 하더라고. 세 번째로 삼키고 수술받은 다음 감방에 돌아와서 이렇게 얘기하더래요. 시팔, 나도 독한 놈이지만 보안계장 저 새끼 진짜 독한 놈이라고. 하하하. 끝까지 안 내보내줬지요. 또 처먹고 죽어라, 했거든요. 하하. 안동병원에서 기념으로 갖겠다고 해서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했지요. 내가 (청송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그놈 내보내줬더라고요. 그 뒤 난동이 한 번 일어났어요. 기율 무너지는 건 한순간입니다. 그런 걸 들어주니 전체 재소자가 기가 빠져버린 거죠.”

    “몽둥이로 때려본 적 없어”

    그는 청송에서 3년간 근무했다. 1985년과 1986년에 청송2보호감호소와 청송1보호감호소에서 2년간 보안계장으로 근무한 데 이어 1990년 부산구치소 재직 중 사무관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승진한 후 청송교도소 서무과장으로 부임했다. 그 바람에 딸이 청송군에 있는 진보초등학교를 두 번이나 다녔다. 그는 딸, 아들 하나씩을 뒀다. 보호감호소 제도가 폐지된 후 청송에는 1교도소, 2교도소와 직업훈련교도소 3개의 교도소가 남아있다. 이른바 흉악범들은 청송2교도소에 몰려 있다.

    한갓진 산골에서 온종일 재소자들과 부대끼며 사는 데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안동교도소장을 6개월 하고 대구구치소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비가 내리는 날 대구시내로 들어가는데, 아 이제야 사람 사는 데로 왔구나 싶더라고요. 그 산골에 소장 관사 하나 떡 있는데, 새소리 귀신소리가 들려요. 외롭죠. 그걸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토요일 일요일이 두렵죠. 평일은 일 하느라 정신없이 지나가니까. 일요일에는 저쪽 산 끝에 가보자, 하고 운동화를 신고 무작정 걸어가죠. 눈 똑바로 안 뜨면 자칫 유혹에 넘어갈 수 있으니.”

    그의 강성 이미지는 이미 초임 때 굳어졌다. 인천소년교도소에 미결수 시설이 있었는데, 깡패가 많았다. 어느 날 미결관구 담당자가 그를 찾아와 “도저히 안 되니 좀 잡아달라”고 했다. 그는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깡패 재소자를 불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제대로 한번 조지려 하니까’ 깡패가 무릎을 탁 꿇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고 방에서 안 나오겠습니다” 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포승줄 들고 가니까 꺼떡꺼떡 나오더니 무슨 생각인지 무릎을 탁 꿇더라고. 벌써 인천바닥에 소문이 났던 거지. 세월이 흘러 1997년 서기관으로 승진해 인천구치소로 갔는데 누가 찾아왔더라고요. 그 친구가 머리 허옇게 돼서, ‘형님’ 하는 거야.(웃음) 어느 소에 발령받아 가보니 상관들이 자네는 순시 돌지 말라는 거야. 그럼 낮에는 가만히 있다가 다들 퇴근한 후 밤에 도는 거지.(웃음) 하여간 질서가 이완되거나 원칙에 안 맞는 건 못 참았어요.”

    ‘교도관의 전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화성직업훈련교도소에서 CNC선반 가공 교육을 받고 있는 재소자들.

    ▼ 기합을 많이 줬나요?

    “기합 줄 게 뭐 있어요? 독방에 처넣는 거지.”

    ▼ 징벌을 세게 한 모양이군요.

    “세게가 아니라 원칙대로.”

    ▼ 패기도 많이 팼겠군요.

    “나를 모르는 교도관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천만에. 나, 몽둥이로 때려본 적 없어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했단 말인가.

    “다 방법이 있어요. 교도관 규범에 나오는 대로 하면 돼요. 기술만 있으면 법대로 하면서 못 견디게 할 수 있거든. 다른 직원들에게도 전수해줬지요. 나중에 가혹행위라고 소송 걸렸을 때도 책에 있는 행위라는 게 인정돼 이겼어요. 난동 방지를 위해 법대로 묶는 거라고. 또 나도 자신감 있는 게, 고등학교 때 집구석이 무너져 방황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 가방모찌 하던 놈들이 나중에 깡패가 돼 있더라고. 깡패를 해도 내가 더 잘할 텐데.(웃음)”

    “살려준다고 했잖습니까”

    ▼ 원래 한가락 하셨군요.

    “운동을 많이 했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경상북도 학교 체육대회가 대구수성종합운동장에서 열렸는데, 합기도 시범을 보였습니다. 호신술을 익혔기에 동년배 3명은 자신 있게 해치울 정도는 되지요. 젊은 놈한테는 안 되겠지만.”

    ▼ 교도현장에서 도움이 됐나요?

    “도움이 많이 됐지요. 신참 도둑놈들은 뭣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혼이 났지. 집어던져버리니까. 몸싸움도 많이 했죠. 난동 나면 맨 먼저 들어가 두들겨 잡아버리니까. 노태우 정부 시절 화염병이 유행했잖아요. 한번은 공장 안에서 한 놈이 문을 잠근 채 온몸에 기름 뿌리고 라이터 켜고 난동을 부렸어요. 내가 문을 따려고 ‘빠루 갖고 와라’ 소리치니까, 그놈이 ‘계장님!’ 하는 거야. 벌써 구원의 목소리야. ‘미쳤나 이 자슥아’ 하니까 자기 억울한 사정을 얘기하더라고. 그러면서 ‘저를 처벌하지 않으시면’ 어쩌구 하기에-이럴 때 ‘그래’ 하면 신뢰를 못 받아요-‘왜 처벌 안 해, 이 새끼야. 사나이가 지 저지른 짓에 대해선 처벌받아야지. 처벌 받고 징역 잘 살면 언제 한 번 죽을 일 있을 때 봐줄게’ 했지요. ‘지금부터 셋 헤아리겠다. 하나! 둘!’ 하니까 후다닥 문 열고 나오더라고. 신뢰거든. 약속 했으면 나중에 진짜로 봐줘야 하고.

    언젠가는 난동이 일어나 진해 깡패가 양재가위 들고 보안과로 쳐들어오는데, 청소하던 재소자 하나가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지요. 큰 공을 세운 거지. 그래서 ‘너 줄 건 없고 언제 한 번 죽게 될 때 봐주겠다’ 했어요. 넉 달 지났는데 조사실에서 꽁꽁 묶인 어떤 놈이 나를 찾는다는 거예요. 가보니 그놈이야. 어디서 담배를 받아 피웠더라고. ‘살려주십시오, 살려준다 했잖습니까’ 하기에 없던 일로 해서 살려줬지.”

    그는 고등학생 때 합기도 2단에 유도 2단, 검도 2단의 실력을 갖췄다. 싸움엔 웬만큼 자신이 있었다.

    “직원들한테 호신술이나 합기도를 권하는 것은 그것이 방어적인 무술이기 때문입니다. 나잇살 먹어 멱살 잡히면 흉하잖아요. 그 흉함을 피하게 해주는 운동이지. 손목을 잡아 틀면 아파서 떨어지니까. 상대가 기가 팍 죽지. 재소자들과 몸싸움 할 때가 많거든요. 호신술 익혀놓으면 간단히 제압할 수 있죠. 군포연수원에서 직원들에게 기본기를 가르치고 있어요. 지난해 4단 이상 유단자 80명을 교도관으로 뽑았습니다.”

    그는 교도관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체력단련을 했다.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고 팔굽혀펴기를 했다. 1980년대 초반 영등포구치소에서 주임으로 근무할 때는 아침운동을 하는 교도관이 없었다. 그는 혼자 옥상에 올라가 줄넘기를 하고 완력기로 근육운동을 했다. 안동구치소장을 할 때는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달렸다. 요즘은 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침마다 달리는 대신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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