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블루 마스터’ 이창후

“태권도 잘 하는 게 ‘유식함’이라는 걸 보여주겠다”

  • 송화선│동아일보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0-03-02 1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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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 도깨비, 줄여서 ‘파깨비’로 불리는 그는 파란색 옷만 입는다. 예외 상황은 딱 두 경우, 태권도할 때와 상갓집 갈 때뿐이다. 공수부대 태권도 교관으로 군복무 하던 시절에도 파란 옷 대신 국방색 옷을 입기는 했다. 태권도 공인 5단인 그는 늘 파란색으로 칭칭 감고 다니는 이유에 대해 ‘세상과 즐기는 게임’이라고 했다.
    ‘블루 마스터’ 이창후
    한겨울 추위가 매섭던 2월 초 서울대 인문관. 로비에 들어서니 새파란 파카 차림의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그는 분명 파깨비 이창후씨(41)일 것이다. 한 걸음 다가서며 살펴본다. 남색 정장 바지를 입었다. 파카 안으로 언뜻 비치는 셔츠는 연하늘 빛, 매듭만 보이는 넥타이도 진남색이 분명하다. 물어볼 것도 없이 인사를 건넸다.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을 이렇게 쉽게 찾는 것도 드문 일이다.

    ▼ 정말 온통 파란색만 입으시네요.

    “그래도 사진 찍는다고 신경 좀 쓰고 왔어요. 이 양복은 장모님이 선물해주신 겁니다.”

    ‘파란 옷을 입는 사나이’로 소문이 나고 보니, 선물 받는 옷도 파란색 일색이다. 그는 198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파란 옷을 입어왔다. 1년 365일, 윗옷부터 양말까지 파란색 차림이었다. 초기엔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청학동에서 살다 왔다느니, 부모가 파란색 옷만 입도록 강요한다느니. 심지어 관악산 화기를 누르기 위해 물색 옷을 입는 거라는 말도 나왔다. 지리학개론을 강의하던 한 교수님은 “파란 옷만 입고 다니는 학생이 있다는데, 풍수지리설의 관점에서 볼 때 일리가 있다”고 말해 ‘파란 옷 신화’가 만들어지는 데 한몫을 했다. 그런데 숱한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이 영 싱겁다.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냥 때가 안 타서 입는 겁니다.”



    22년째 파란 옷만 입어온 데 대한 변으로는 말이 안 된다 싶다. 때가 안 타기로 따지면 까만색, 회색도 있지 않을까.

    파란 옷을 입은 사나이

    그가 처음 파란 옷을 입은 건 입학 직후 교수들과의 상견례 자리에서였다. 그때는 새파란색 티셔츠만 입고 있었는데 한 교수가 “자네 운동하다 왔나?”하고 질문해왔다. 그러고 보니 파란 티셔츠는 정말 트레이닝복 차림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격식을 갖추기 위해 그 위에 파란 목도리를 둘렀다. 그랬더니 검은색 바지와 참 어울리지 않았다. 이번엔 파란 바지를 샀다.

    “파란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일하지 않으면 맞춰 입기가 참 난감해요.”

    그는 정말 곤란했다는 투로 말했다.

    ▼ 다른 색도 골고루 사시지 그러셨어요.

    “외지 생활이잖아요.(그는 대구 출신이다.) 고등학교 끝나고 서울 올라오면서 책 한 가방 옷 한 가방만 들고 왔어요. 세탁 안 해도 때 안 타는 옷을 담다보니 파란색이 많았죠. 그거랑 맞춰 입으려고 산 게 또 다 파란 색이고. 시장 가서 보면 파란 옷이 가장 싸거든요. 사람들이 많이 안 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파란 옷이 때가 안 탄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입어보면 아는데, 정말 묵은 때가 안 보여요. 자취를 하다 보니 빨래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그는 상갓집에 가느라 한 번씩 검은 양복을 입고 나면 파란색이 얼마나 실용적인지 깨닫게 된다고 했다.

    “먼지만 붙어도 얼마나 지저분해 보이는데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하얀색을 못 입은 것도 순전히 ‘때 걱정’ 때문이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사람들이 그를 ‘파란 옷만 입는 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파란색 물건이 생기면 갖다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대학 시절 즐겨 매던 파란 머플러는 이모할머니가 샀다가 ‘도저히 맞춰 입기 어렵다’며 그에게 준 것이다.

    블루 마스터

    ▼ 1988년 이후로 그럼 다른색 옷은 단 한 번도 안 입으셨어요?

    “군대 갔을 때는 군복을 입었고 태권도를 할 때는 하얀 도복을 입죠.”

    ▼ 군복이나 유니폼 말고는요.

    “집에서 입는 잠옷 중엔 하얀색도 있어요.”

    ▼ 사람들이 관심 갖는 걸 즐기는 거 아니세요?

    “즐기지는 않죠. 서울 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없으니까 제가 무슨 옷을 입든 상관 안 할 줄 알았어요.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는 게 재미있을 때도 있긴 하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어요.”

    ▼ ‘블루 사이코’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비하해서….”

    내내 웃던 얼굴이 딱딱해졌다.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처음 그 소문을 듣고 친구들에게 얘기했더니 발끈하면서 애칭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단어가 ‘파깨비’다.

    “저는 사람들이 아무데나 영어를 갖다 붙이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방송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영어가 너무 많이 나와요.”

    개인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자기소개서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교 때 영어 일어를, 중학교 때 프랑스어를, 고등학교 때 독일어 중국어를 습득했다. 하지만 우리말에 간간히 섞어 쓰는 것은 싫어한다. 인터뷰 도중 ‘UCC’를 언급할 때도 ‘손수 제작물’이라고 했다.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를, 한국 사람들끼리는 우리말을 쓴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그럼 저 별명이 싫었던 이유가 영어라서 였다는 뜻일까. 그보다는 ‘사이코’라는 단어가 심기를 건드렸을 게 분명하다.

    ▼ 그렇게 싫으셨으면, 파란 옷을 안 입는 게 해결책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강렬하게 의식하니까. 특히 외국에 나갔을 때 파란 옷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태권도 사범으로 외국인을 많이 가르치는데, 그 사람들이 제 이름을 기억 못 하거든요. 그냥 ‘Master Blue(파란 사범)’라고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파란색이 제 상징이 된 거죠.”

    그는 자신이 세상과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무심코 입은 파란 옷에 세상이 먼저 반응을 보였고, 세상의 대응에 따라 그가 다시 행동을 결정할 차례가 된 것이다. ‘내가 계속 파란 옷을 입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고 움직이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인생을 게임으로 생각하면 삶이 가벼워진다. 실패와 맞닥뜨려도 ‘이번엔 내가 졌군’ 생각하고 툭툭 털어낼 수 있다. 다른 수를 써서 새롭게 도전하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 하나의 단단한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니요/ 부풀어 오르는 가슴/ 그 속의 불길을 내뿜기 위함이 아니요/ 조용한 물가에 거품을 일으키는/ 한 마리의 고기를 잡기 위함이 아니요/ 저 높은 곳을 향해/ 날개를 달기 위함이 아니다/ 다섯 손가락이 조용히 긴장하는/ 손 안의 작은 공간에서/ 무한히 열리는 삶을 위한 길로 들어서고자 함이니/ …’

    이창후 시,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 중에서

    태권도에 매달리는 것도 어찌 보면 그 게임의 하나일지 모른다. 178㎝, 67kg. 호리호리한 체격을 한 그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전형적인 책상물림이다. 동시에 태권도 공인 5단에 학사장교로 공수특전사에서 복무하며 태권도 교관을 지낸 무술인이기도 하다.

    ‘블루 마스터’ 이창후

    새파란 파카를 입고 태권도 자세를 취한‘파깨비’ 이창후씨

    초등학교 시절 1품을 따고는 한동안 잊고 지내던 태권도를 다시 시작한 건 대학에 들어오고부터. 학교 태권도부에 가입했다가 운명처럼 이광희 사범을 만났다. 서울대 사학과 64학번인 이씨는 10여 년간 중동 건설현장에 나가 있다 마침 그 해 귀국해 후배들의 연습장을 찾은 터였다. 그런데 그의 움직임이 남달랐다. 그동안 보아온 발차기, 주먹지르기가 아니었다. 수련을 마친 후 이어진 막걸리 파티 자리에서 이 사범의 한 마디가 가슴을 쳤다.

    “태권도는 스포츠가 아니다. 무술이다. 남이 보기에 멋있고 화려한 동작은 필요 없다. 절제된 동작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격이 나온다. 밤길을 걷고 있는데 깡패가 몇 명 따라 붙었다. 무기는 없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주머니에 있는 열쇠꾸러미를 손에 쥐고 상대방의 얼굴을 한번 그어보라. 칼 휘두른 것과 똑같은 공격효과가 나온다. 주먹만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파괴력이 크다. 이것이 무술이다. 목숨 걸고 해야 한다.”

    태권도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다시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그의 자기소개를 보자.

    ‘초등학생 때 삼국지를 탐독하다 병법 독심술 화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 칼 쓰는 법과 중국의 비전 무술, 점술과 관상에 능하다.’

    ▼ 일찍부터 무술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어릴 때 꿈꾸는 건 누구나 비슷한 것 같아요. 중국 무술영화 같은 거 보면서 ‘아, 저것만 배우면 천하무적일 텐데’ 생각하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저는 싸움 못하고 겁도 많은 아이였어요. 울기도 많이 울었죠.”

    ▼ 맞고 다니는 편이셨나요?

    “너무 겁이 많은 애는 맞지도 않아요. 적당히 자신이 있어야 덤비다가 맞는 거지, 저는 미리 눈치보고 주눅 드는 쪽이었어요. 상대방이 때리기도 전에 심리적 압박에 못 이겨 우는 거죠.”

    실전 태권도

    성인 남자가 됐을 때 무엇이든 운동을 하나 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건 이 때문이다. 대충이 아니라 제대로, 이 사범의 말처럼 ‘목숨 걸고’ 하고 싶었다. 그는 태권도를 제대로 하려면 기본동작 중 하나인 ‘주춤 서 몸통지르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3년간 이 동작만 반복했다. 양 다리를 어깨 넓이 이상으로 벌리고 말 탄 자세로 구부려 앉아 주먹으로 정면을 지르는 동작이다. 허리에 놓인 주먹을 곧장 직선으로 뻗으면 안 된다. 허리를 틀어 어깨와 주먹을 뒤로 뺐다가 다시 앞으로 밀어 온몸을 격렬하게 비트는 게 중요하다.

    “뻣뻣하게 주먹만 지르는 것은 위력이 없습니다. 하체를 낮춘 후 어깨의 힘을 빼고 허리를 비틀어야 주먹에 온몸의 힘이 실리게 되죠.”

    그는 많은 사람들이 태권도를 배우고도 정작 필요할 때 쓰지 못하는 이유는 ‘제대로 수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곱상하게 생긴 손등 마디마디마다 굳은살이 딱딱하게 맺혀 있다. 끝없는 정권 단련의 흔적이다. 그는 수련을 계속하다보니 특전사를 제대할 무렵부터는 ‘인간으로부터의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했다. 지금 그의 내공은 “술집에서 한 잔 할 때 옆 테이블에서 와장창 소리가 나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준이다.

    “특전사 사람들이 우락부락하잖아요. 고등학교 때 반에서 제일 잘 싸우던 애들만 모아놓은 것 같은 분위기인데, 그 사람들하고 겨루기해도 제가 차면 다 맞더라고요. 태권도가 정말 실전성이 있구나. 내 몸을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구나 라는 걸 실감했죠.”

    이쯤해서 그의 시범을 보기로 했다. 서울대 태권도부 훈련실로 자리를 옮겼다. 하얀 도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까만 띠를 매고 나온다. 가끔 “파란 도복을 입으면 안 됩니까. 아예 파란 띠를 매면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태권도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태권도는 무술이면서 동시에 정신이기 때문이다. 하얀 도복과 까만 띠, 도장마다 걸려 있는 태극기 안에는 나름의 이유와 철학이 담겨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태극기에 인사하고, 진지한 자세로 끈을 당긴 뒤 그가 발차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어색한 느낌이다. 쭉쭉 시원스레 뻗어나가는 대신 어딘지 모르게 엉거주춤하다.

    ▼ 좀 더 위로 쭉 뻗어 차실 수는 없나요. 이게 그림이….

    “이것도 사진 찍는 데 맞추려고 최대한 높이 차는 건데요. 실제 상황에서는 절대 발을 위로 찰 필요가 없습니다. 위력도 없고 상대방에게 잡히기만 쉬워요. 그러다 잡혀서 넘어지면 어떡합니까. 발을 위로 올리는 건 무술에서는 금기입니다.”

    ‘블루 마스터’ 이창후

    이창후씨가 하늘 높이 뻗는 발차기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실전 상황에서는 자세를 낮춰 엉거주춤 차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그는 끝내 무술 시범에서 볼 수 있는 호쾌한 기술을 보여주지 않았다.

    태권도 4단 이상이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 역시 국내외에 많은 제자를 둔 사범이며, 한동안 경원대 겸임교수로 태권도학과 학생들을 지도하기까지 했다. 이게 그가 배우고 가르치는 ‘진짜 태권도’다.

    태권도인의 자부심

    꼭 필요한 동작 이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둔다. 그리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 즉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이창후 저 ‘태권도 삼재유강’ 중에서

    이씨가 태권도를 이용해 세상과 또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진짜 태권도’를 알리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20여 년째 수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관련 책과 논문도 꾸준히 발표중이다. 서울대를 졸업한 철학박사가 태권도 원형 찾기에 ‘다걸기’를 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도 때리고 맞고 뒹굴며 온몸으로 태권도를 익힌 뒤 철학·역사까지 섭렵해 새로운 이론적 기틀을 만들어낸다면? 그는 이 게임에 뛰어들었고, 세상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처음 태권도를 시작할 때부터 ‘문무겸비’를 목표로 삼았다. 여러 격투기 가운데 태권도를 선택한 건 아직 이론적 기반이 완성되지 않아 철학자가 할 일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한국 태권도 철학을 집대성하자’는 꿈을 이룰 기회는 생각보다 쉽게 찾아왔다.

    “대학교 2학년 때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이라는 시를 써서 태권도부 부지에 실었는데, 그걸 국기원 고위 인사가 보고 연락을 해왔어요. 태권도 철학을 정리하는 이론적인 작업을 할 사람이 필요한데 해줄 수 있겠느냐고요. 세계에 소개할 ‘태권도 경전’을 만들어보라는 얘기였죠.”

    관련 분야를 공부하고 이광희 사범의 조언을 받아 이듬해 원고를 완성했는데, 아는 태권도계 선배들이 송고를 말렸다. 그의 이름은 빠지고, 처음 원고를 부탁한 관계자의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은밀하게 부탁해온 과정도 마음에 걸려 그는 이 책을 일반 출판사에서 독자적으로 출간하기로 했다. 제목은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로 정했다. 이후 이씨는 ‘태권도 심경’ ‘태권도 삼재유강’ ‘태권도 현대사와 새로운 논쟁들’ 등 태권도 관련 책을 잇달아 펴내고 있다. 주된 내용은 태권도의 실전성을 알리는 것, 그리고 우리 민족 전래의 고유 무술이라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태권도는 실전성이 없다’, ‘태권도는 일본 가라테를 모방한 것이다’ 라는 반박이 없지 않지만, 이씨는 학술대회와 사이버 공간에서 열리는 논쟁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이런 주장을 ‘격파하고’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런 활동을 통해 태권도의 이론적 지평을 넓혀가는 것. 그래서 태권도가 몸뿐 아니라 머리도 사용해야 하는 분야가 되는 것이다. 그는 “태권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유식하다고 생각해야 태권도가 발전한다”고 했다.

    “태권도학과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스스로 무식하다고 생각하냐 유식하다고 생각하냐. 질문하곤 합니다. 그러면 하나같이 자기들이 무식하다고 답해요. 제가 답답한 건 그런 부분입니다. 태권도 하는 사람이 태권도에 대해 아는 건 왜 지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거지요. 일본 무술이 세계적으로 각광받게 된 건 그들이 ‘사무라이 전통’을 세우고 무술 하는 것, 무술 속의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태권도를 몸으로 할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적 뿌리를 연구해야 합니다. 제가 ‘태권도 잘 하는 사람은 유식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대학원에서 서양 철학을 전공하고 논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태권도에 동양 철학을 접목해 새로운 해석을 풀어낸다. 하늘, 땅, 사람을 뜻하는 ‘삼재’와 겨루기 원리인 거리, 기세, 균형을 관련시키기도 한다. 22년째 파란 옷을 입어온 뚝심으로 태권도의 본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중이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겸허이다. 이 겸허함 속에서 몸의 삼재를 제 나름의 자리에 둔다. 그러면 숙이지 않게 된다. 겸허 속에서도 불필요하게 숙이지 않을 수 있다면 자존심을 지키며 예절과 처세의 모두를 한꺼번에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하단전을 낮추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마찬가지로 겸허 속에서 자유롭게 처신한다는 것은 또한 당연히 힘들지 않겠는가.

    이창후 저, 태권도 삼재유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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