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사랑의 블랙홀’과 버무스(Vermouth)

지긋지긋한 오늘을 달콤한 내일로

  • 김원곤│서울대 흉부외과 교수│

    입력2010-03-03 16:1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하루가 1년처럼 힘들었는데, 자고 나니 다시 ‘어제’가 반복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거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남자 주인공이 수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나날을 겪으며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이야기다. 와인과 칵테일의 경계에 있는 술 ‘버무스’는 이 영화에서 지겨운 일상을 설레는 내일로 바꾸는 단서를 제공한다.
    ‘사랑의 블랙홀’과 버무스(Vermouth)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해럴드 래미스(Harold Ramis) 감독의 1993년 작품이다. 원 제목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로는 의미 전달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꽤 그럴듯한 우리말 제목이 붙은 채 소개됐다. 1980년대 ‘고스트버스터즈(Ghostbusters)’ 시리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빌 머레이와 로맨틱 코미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and a Funeral)’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앤디 맥도웰이 주인공을 맡아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재미있는 영화로 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매년 2월2일 겨울의 끝에서 봄이 언제 올지를 점치는 날로 알려져 있다. 이날의 유래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기리는 가톨릭 축일 중에 ‘성촉일(Candlemas)’이라는 촛불행사가 있다. 성모마리아가 순결하다는 표시와 함께 그녀를 기리는 촛불 행렬이 이어지는 날이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그날 그라운드호그(설치류)의 일종인 고슴도치나 오소리가 땅굴 위로 나오면 곧 봄이 오지만, 그라운드호그가 땅속에서 나왔다가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겨울이 6주 더 남은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이런 다소 황당한 믿음은 천성적으로 경계심이 많은 동물들이 자기 그림자에 놀라 숨는다는 이야기와 절묘하게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아무튼 그러한 풍습을 가진 독일 이민자들이 18,19세기경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정착할 때 그 믿음을 고스란히 가져왔고, 다만 이 지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큰 다람쥐처럼 생긴 우드척(Woodchuck·Groundhog)이 유럽산 고슴도치를 대신하게 됐다. 이 풍습은 양력으로 3월 초·중순경, 개구리가 땅 밑에서 나온다는 우리의 경칩(驚蟄)과 비록 시기는 맞지 않지만 개념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다.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1886년 2월2일 펜실베이니아의 펑추토니(Punxsutawney)라는 작은 마을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기념했다고 인터넷 백과사전은 소개하고 있다(반면 영화에서는 필 일행이 처음 마을로 들어갈 때 보이는 입간판에 1887년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행사가 열리면서 미국뿐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고,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내일이 없는 환자에게 “내일 또 오라”

    영화는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기까지 한 피츠버그 소재 텔레비전 방송국 기상통보관 필 코너스(빌 머레이 분)가 프로듀서인 리타(앤디 맥도웰 분), 카메라맨 래리와 함께 그라운드호그 데이 취재차 펑추토니 마을로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취재 첫날 아침 6시 필은 호텔의 알람시계 음악에 맞춰 잠을 깬다. 얄팍한 스타의식에 휩싸여 잔뜩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 예상치 못한 하루가 펼쳐진다. 행사장으로 가는 길에 보험판매원으로 일하는 전혀 반갑지 않은 고교동창을 만나 지겨운 대화를 나누고, 이를 모면하고자 급히 길을 재촉하다 얼음구덩이에 발을 빠뜨리고 만다.

    ‘사랑의 블랙홀’과 버무스(Vermouth)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를 소재로 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

    어쨌든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가 시작되고, 행사 진행자들은 ‘필’이란 이름표가 달린 나무둥지에서 그라운드호그를 꺼낸다. 그라운드호그의 이름이 주인공의 이름과 똑같은 필이었던 것이다. 행사 진행자들은 이어 그라운드호그의 이야기를 듣는 척하더니 “그라운드호그가 올해는 그림자를 봤다고 말한다”면서 겨울이 6주 더 연장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순진한 PD 리타는 행사를 무척 재미있게 지켜보지만, 필은 촬영을 대충 마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갈 궁리를 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내린 폭설로 인해 도로가 불통되면서 일행은 펑추토니에서 하룻밤을 더 묵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필은 예정에 없던 체류 연장에 투덜거리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필이 정확하게 아침 6시에 전날과 동일한 음악을 듣고 눈을 뜨자 놀랍게도 어제 그가 맞이했던 그라운드호그 데이가 똑같이 반복된다. 모든 상황이 똑같이 진행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날에도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자 필은 리타에게 이 기막힌 상황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리타는 “도대체 무슨 정신없는 이야기를 하느냐”고 말했다. 같은 날이 거듭되는 데 지친 필은 결국 정신과의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내일 또 오라”는 의사의 말에 ‘내일이 없는’ 필은 절망하고 만다.

    유쾌하지 않은 일상의 반복

    계속해서 반복되는 그라운드호그 데이를 맞이하며 필의 심경에도 차츰 변화가 생긴다. 처음에는 ‘내일이 없다면 결국 책임질 일도 없다는 뜻이 아닌가?’ 하는 자기변론과 특유의 못된 성격이 어우러져 여자를 유혹하는 등 마음 놓고 온갖 일탈을 일삼는다. 기막힌 현실에 지친 나머지 갖가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똑같은 장소에서 눈을 뜨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침내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필은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친절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먼저 모든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 진심으로 대하는 한편,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이용해 피아노 연주, 얼음조각 만들기 등을 배워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다음날 벌어질 일을 정확하게 예상해 식사 중 틀니를 잘못 삼켜 질식 직전인 남자,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 타이어가 펑크나 쩔쩔매는 할머니 등을 ‘슈퍼맨’처럼 도와준다.

    결국 자기중심적 사고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인간애로 가득 찬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이런 변화와 더불어 마침내 리타의 사랑도 얻는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원래의 의미와 달리 영화팬들 사이에 유쾌하지 않은 일상이 반복되는 경우를 뜻하는 말로 통용됐다.

    영화에서 지겹기만한 일상이 반복될 때 필이 리타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빌이 먼저 짐빔(미국 버번위스키의 대표적 상품명)과 얼음과 물을 주문하자 리타는 ‘스위트 버무스(sweet vermouth on the rocks with a twist)’를 시킨다. 필은 이를 기억해뒀다가 다음날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짐짓 모른 체하며 자기가 먼저 스위트 버무스를 주문한다. 이에 리타는 필이 자신과 같은 취향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호감을 갖는다. 필은 리타의 긍정적인 반응에 고무되어 ‘스위트 버무스는 로마의 태양이 오후의 건물을 비출 때를 생각나게 한다’며 애써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너스레를 떤다. 이 장면은 같은 날이 반복되는 와중에 필이 리타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각종 허브로 향이 강화된 와인

    ‘사랑의 블랙홀’과 버무스(Vermouth)
    리타가 좋아하는 스위트 버무스, 조금 더 정확하게 ‘얼음과 트위스트를 더한 스위트 버무스’는 과연 어떤 술일까? 먼저 버무스(Vermouth)라는 술은 간단히 말해 각종 약초를 첨가한 강화와인이다. 단순히 알코올 농도가 높은 술을 와인에 첨가해 주도를 높인 세리나 포트 같은 강화와인(fortified wine)과 달리 각종 식물을 첨가해 특유의 향을 강조한 와인이다. 이 때문에 방향성 와인(aromatic wine)이라고도 한다. 버무스는 기본 술인 백포도주에다 다양한 허브, 꽃, 식물뿌리, 향신료 등을 넣고 설탕으로 단맛을 낸다. 브랜디를 첨가하기 때문에 18~19%까지 도수가 올라간다.

    버무스라는 술의 이름은 1786년 이탈리아의 카르파노(Antonio Benedetto Carpano)라는 사람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압생트의 원료로 사용되던 쓴쑥(wormwood)이 첨가된 독일 와인에 깊은 인상을 받고, 새로운 방향성 와인에 쓴쑥을 의미하는 당시 독일어 ‘Wermuth’를 붙인 것이다. 이 때문에 현대 독일어의 ‘Wermut’는 술 Vermouth와 식물 wormwood를 모두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영향 때문인지 이 술의 명칭에 ‘버무스’와 ‘베르무트’를 혼용하고 있다. 버무스가 개발될 당시 술에 각종 약초를 혼합한 것은 사실 기본 원료였던 값싼 와인의 저급한 향을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버무스에는 크게 드라이 버무스와 스위트 버무스 두 종류가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스위트 버무스는 앞서 소개한 카르파노가 처음 만들었다. 이후 19세기에 이탈리아에는 친자노(Cinzano), 그리고 오늘날 세계 최대 버무스 회사로 자리 잡은 마티니 앤 로시(Martini · Rossi) 등 유명 회사들이 속속 등장했다. 스위트 버무스는 식전에 마시는 아페리티프로 사용되거나 칵테일 ‘맨해튼(Manhattan)’의 재료로 사용된다.

    스위트 버무스는 영화에서 리타가 주문한 것처럼 얼음과 트위스트를 넣어 마시면(sweet vermouth on the rocks with a twist) 참맛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트위스트는 칵테일을 장식하는 기법의 일종으로 라임 또는 레몬의 껍질을 벗긴 다음 트위스트 모양으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트위스트는 장식으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술에 특유의 풍미를 더한다. 스위트 버무스는 색깔에 따라 레드와 화이트로 나뉜다.

    마티니 주재료 드라이 버무스

    반면 맑은 색깔의 드라이 버무스는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처음 개발되었고, 진과 더불어 칵테일의 제왕 마티니(Martini)를 만드는 주재료다. 마티니를 만들 때 진과 드라이 버무스의 비율은 보통 3대 1에서부터 시작해 취향에 따라 버무스의 양을 줄여나간다. 최근에는 버무스의 양을 많이 줄이고 드라이한 마티니를 마시는 것이 일종의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버무스가 첨가된 복합적인 맛을 유지하면서 되도록 진의 순수한 맛을 즐기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너무 드라이한 마티니를 고집하다보면 자칫 칵테일이 아닌 칵테일, 그러니까 버무스의 향이 지나치게 미미해 마치 진 단독 제품인 것 같은 술이 될 수도 있다. ‘초드라이 마티니’ 애호가들은 이런 단순성이야말로 정말 만들기 어려운 마티니의 최고급 경지라고 주장한다.

    한편 스위트 버무스가 이탈리아 버무스(Italian Vermouth)로 널리 알려져 있고, 드라이 버무스는 흔히 프랑스 버무스(French Vermouth)로 불리고 있으나 현재 두 국가 모두 두 종류의 버무스를 다량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분류라고 보긴 어렵다. 독자 여러분도 즐거운 일로 가득 찬 하루를 마무리하며 영화에서처럼 스위트 버무스 한잔을 얼음, 레몬 트위스트와 함께 마시면 어떨지. 영화와 달리 아름다운 하루가 일생 동안 반복되는 행운이 따를지도 모를 일이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 옛말이 우리를 망설이게 할지라도 말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