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이종훈 한국전력 이사회 의장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민간이 먼저 나서 ‘사전작업’했어야”

  • 윤영호│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yyoungho@donga.com│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0-03-03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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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대(對)중국 원전 수출 성사 직전까지 갔다
    • ‘남의 기술 어깨너머로 익혀 우리 것으로’
    • 국제 원자력산업 위기가 한국에 전화위복 된 까닭
    • 정부 대신 한전이 로비업체 고용한 1996년 협정 개정 추진
    • 원자력 정보 투명할수록 국민 여론은 좋아진다
    이종훈 한국전력 이사회 의장
    원자력은 현대기술의 총아다. 그러나 더불어 원자력은 지극히 정치적인 물건이다. 핵을 가졌느냐 여부는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의 위상을 좌우하고, 원자력 기술을 보유하는 일은 국내외적으로 만만찮은 정치적 논쟁에 부딪히기 십상이다. 한국이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이래 수십 년 동안, 굽이굽이마다 정치는 언제나 기술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변수였다. 엔지니어들이 더 나은 기술적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정치는 때로 그들의 발목을 잡았고, 때로는 살길을 열어젖혔다.

    한국 땅에 세워진 첫 원자력발전소는 1978년 완공된 고리 1호기다. 이종훈 한전 이사회 의장은 바로 이 발전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처음 원자력과 인연을 맺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시작된 인연은 그가 한전 사장으로 퇴임한 1998년까지 이어졌다. 한국 원자력 기술발전의 모든 과정을 함께한 명실상부한 산 증인인 셈이다. 지난해 연말 전해진 아랍에미리트(UAE) 140만kW 발전소 4기 수주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 의장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1990년대에 이미 원전 해외수출을 타진했고 이를 위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추진했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UAE 원전 수출 소식이 전해진 후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문제는, 원자력이 국제정치와 맞닿아 파생한 또 하나의 첨예한 쟁점이다. 박정희 정부의 핵무기 개발 시도 이래 미국은 한국의 원자력 기술 개발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고,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북한의 핵개발 시도가 확인된 후 그러한 태도는 더욱 굳건해졌다.

    2014년 원자력협정의 기간 만료를 앞두고 2012년까지 개정 협상을 완료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1월말 천영우 외교통상부 제2차관은 워싱턴을 방문해 협정 개정을 위한 논의의 물꼬를 텄다. 지난해 7월에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직접 나서서 협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수십 년 세월을 지켜봐온 원자력 기술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시점, 더불어 본인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원자력협정 개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른 시점에서, 이 의장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1월28일 오전 한전 서울 남대문로 사무소에서 그를 만나 한국 원자력 기술의 지나온 역사와 원자력협정 개정에 대한 허심탄회한 소회를 들었다.



    후진타오의 연락

    ▼ UAE 원전 수주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합니다.

    “잠이 안 올 정도로 기뻤죠. 수출이야말로 원자력계의 숙원이었으니까요. 1990년대부터 수출을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10년이 넘게 지나서야 비로소 성사가 됐죠. 다행히도 아주 큰 건이 됐어요. 일반적으로 원자력발전소는 공동설비를 나눠 쓰는 게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에 2기 단위로 거래가 이뤄지고, 또 개발도상국에서는 보통 100만kW 발전소를 짓습니다. 도합 200만kW로 60억달러 내외의 사업이 많죠. 그런데 이번 UAE 건은 140만kW 4기를 한꺼번에 짓는 계약인데다 kW당 단가도 3600달러로 산정되어 이례적일 만큼 큰 사업입니다.

    이번 수주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역할이 컸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원자력에서는 지상전 못지않게 제공권 장악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때도 꼭 수출국 수장이 와서 마지막을 장식하곤 했거든요.”

    ▼ 가장 궁금한 것은 이러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특히 원자력 종주국인 미국이나 기술적으로 한참 앞서 있던 프랑스에 비해 우리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구조적인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아시다시피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원자력발전소에서 핵연료가 외부로 유출되는 사고가 벌어져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준 바 있습니다. 이 일 이후로 미국에서는 30년 동안 원전을 추가로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원자로에 대한 원천기술을 보유한 회사는 있지만 원자력발전소를 통합적으로 지을 수 있는 조직된 회사는 아예 사라지고 없어요.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은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한전 자회사인 한국전력기술(KOPEC)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회사에 사람을 보내 사업진행을 도울 정도니까요. 물론 지금은 선진국들의 원자력 정책이 바뀌고 있습니다만, 새로 사업체를 조직한다는 것이 쉽지 않죠. 덕분에 그 동안 꾸준히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왔던 우리가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겁니다.”

    인터뷰가 진행된 그의 집무실에는 한국 원자력사(史)의 큰 사건들을 담은 사진들이 놓여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사진이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과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1995년 11월 장 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사진입니다. 그 무렵 저희가 중국에 수출하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1998년 8월 한중수교 5주년 사절단으로 장 주석을 방문했을 때는 중국이 다음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때 꼭 한국을 참여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이 한국의 원자력 기술에 상당히 매료돼 있었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대공산권수출통제(COCOM) 때문에 미국은 중국에 원자력을 수출하는 데 거부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약속이 좌절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어요. 우선 정권이 교체되면서 제가 한전 사장을 그만뒀고, IMF 외환위기 때문에 우리 사정이 워낙 안 좋아졌어요. 제가 1998년 4월28일에 이임식을 했는데 마침 그날 후진타오 당시 부주석이 한국에 와서 한전 사장을 찾더라고요. 저는 이미 이임식을 했으니 나갈 수가 없잖아요. 부사장을 보냈더니 기념사진 한 장 찍고 그냥 돌려보냈다더군요. 그 해 11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원자력 협력사업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는데, 후임 한전 사장들에게 잘 연결이 안 되는 바람에 결국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긴 했지만, 그 사이 중국도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원자력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뤘습니다. 원전을 구매하는 눈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죠. 지난번에 중국이 국제입찰을 해서 우리도 시도했지만 결국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아직 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어쨌든 1990년대 후반에 저희가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려고 시도한 것도 중국 수출시도와 관련이 깊습니다.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됐는데, 하나가 한국이 중국에 원자력을 수출하는 것을 양해해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재처리가 가능하도록 협정을 개정하자는 것이었죠. 전자는 쉽게 풀렸는데 후자는 간단치 않았죠. 한 1~2년만 그 추세가 유지됐으면 중국에 대한 원자력 수출길이 열렸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때의 아쉬움을 이번에 UAE 수출 건에서 푼 거지요.”

    두 번의 전기

    ▼ 한국 원자력발전의 시작이라는 1970년대 고리1호기 건설부터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자력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과 당시의 분위기를 기억하십니까.

    “당시는 한국이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고 해도 차관조차 얻기 어려웠죠. 그래서 미국과 영국 회사가 자신들의 책임 아래 차관을 빌려다가 고리 1호기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설계에서 구매, 시공, 성능보장까지 모두 이들 회사가 책임지는 턴키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1973년 터진 석유파동이었습니다. 세계경제가 급속도로 침체되니까 고리 원전 건설사업도 흔들린 겁니다. 건설공기는 자꾸 늘어지고 공사비도 계속 올라가고요. 원전을 계속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났습니다. 결국 김영준 당시 한전 사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 추가비용을 지급하기로 결정해서 가까스로 사업이 살아남았죠.

    그 과정에서 한전이 원자로 공급업체였던 웨스팅하우스와 새로 협정을 맺었어요. 통합관리반(IMT)이라는 걸 구성해서 모든 공정계획에 한전이 참여할 수 있게 된 거죠.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사업관리를 함께 하면서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였던 웨스팅하우스의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 관리 노하우를 고스란히 배울 수 있었던 거죠. 이때 배운 기술 덕분에 고리 3~4호기부터는 우리가 직접 사업관리를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만약 IMT가 없었다면 기술자립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석유파동이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또 한번의 결정적인 계기는 영광 3~4호기를 건설하던 1980년대 중반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때는 이미 전세계적으로 원전을 새로 짓는 나라가 없어서 우리가 발주하는 사업에 원자력 선진기업들이 모두 뛰어들었거든요. 우리와 오래 사업을 해온 웨스팅하우스는 이번에도 쉽게 되겠지 생각했지만, 지명도나 규모에서 밀리는 또 다른 미국회사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은 필사적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회사를 상대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 회사가 갖고 있던 원천기술을 모두 넘겨받기로 한 거죠.”

    이때의 협상에 따라 1987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핵심요원 50명이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 본사에서 연수를 받기 시작한다. 영광 3~4호기에 들어갈 100만kW급 원자로의 설계에 참여하면서 그 소스코드를 고스란히 익힐 수 있게 된 것. 원전건설 기술의 핵심 중 핵심으로 불리는 원자로 설계 소스코드는 국가기밀에 준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는 원천기술이다. 한국의 원자력업계는 당시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최초의 한국형 원자로로 불리는 OPR-1000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남은 건 소스코드 독립

    이종훈 한국전력 이사회 의장

    장쩌민(왼쪽) 당시 중국 국가주석에게 한중 간 원자력협력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종훈 의장.

    사업관리 기술이 각 부분을 연결해 하나의 발전소를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관리기법이라면, 원자로 설계 소스코드는 그 중심인 원자로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 등 관련 기술을 말한다. 두 기술을 모두 익힘으로써 비로소 한국은 스스로 원자력발전소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이번에 UAE에 수출하게 된 APR-1400 원자로를 만들어냈다는 게 이 의장의 설명이다.

    “반대로 그 과정에서 곤혹도 많이 겪었습니다. 컴버스천엔지니어링에 밀린 웨스팅하우스 쪽에서 이걸 정치문제로 비화시키는 바람에 국내에서도 당시의 계약이 정치자금 조달과 연계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일이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1987년 민주화 바람을 거치면서 반핵 여론이 확산되기도 했고요.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리면서 국회에서 국정감사도 열고 두 달에 걸쳐 검찰 수사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문제가 없는 것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어려운 시점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최근 사례로는 노무현 정부 당시 신고리 원자력발전소의 실시승인이 지연되던 상황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원자력에 대해 비판적인 분이 정부 안에 많았던 까닭인지 정부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는 겁니다. 결국 2005년 1월에 업계 원로 72명이 서명을 해서 이해찬 당시 총리에게 탄원했죠. 효과가 있었는지 결국 정부 승인이 나오고 착공이 이뤄졌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원자로가 바로 APR-1400입니다. 신고리가 하염없이 미뤄졌다면 APR-1400은 검증받지 못한 원자로로 남았을 테고, 당연히 이번 UAE 수출도 불가능했을 거라고 봅니다.”

    ▼ 말씀을 듣다보니 한국의 원자력 기술발전사는‘어깨너머로 배워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한국의 기술수준은 이제 배우는 단계는 넘어선 것인가요. 이번 수출과 관련해 APR-1400이 우리 기술로 개발됐다지만, 여전히 해외에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에 관한 지적이 있었는데요.

    “아직 우리가 자립하지 못한 것이 크게 세 가지인데, 우선 독자적인 소스코드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컴버스천엔지니어링에 로열티를 지급해야 하는 소스코드말고 직접 우리 나름의 소스코드를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현재는 2012년까지 자체적으로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고, 또 성공할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원자로 본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로열티를 지급할 필요가 없어지죠.

    다음으로 냉각재펌프와 원전제어계측장치 정도가 아직 해외에서 구매해오는 부분인데, 냉각재펌프의 경우에는 기술 자체가 고차원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개발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워낙 대용량인데다 자체생산이 경제성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안 만드는 거죠. 원전제어계측장치도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경쟁력이 있는 IT 시스템 분야이므로 충분히 국산화가 가능하다고 보지만, 역시 경제성이 별로 없습니다. 이미 만들고 있는 외국업체에서 들여오는 게 훨씬 싼 거죠. 개인적으로는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 국산화를 너무 고집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휴대전화나 자동차가 100% 국산이 아니잖습니까.”

    한전과 한수원

    ▼ 앞으로도 원자력발전소 수출을 이어가겠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풀어야 할 관건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또 한국의 원전 기술이 가진 상대적인 강점은 무엇이고 상대적인 약점은 무엇인지도 솔직히 평가해주십시오.

    “중동도 중동이지만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자력 종주국인 미국에 우리가 가서 발전소를 짓는 거죠. 경쟁력은 충분합니다. 국내에서 원전을 지을 때는 보통 kW당 2300달러가량 원가가 들어갑니다. 이번에 UAE에는 3660달러에 입찰했는데도 경쟁자였던 프랑스 아레바에 비해 30% 이상 저렴했다는 거 아닙니까. 공사기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나 미국이 원전을 짓지 않는 동안 우리는 꾸준히 사업을 이어왔기 때문에 모듈화 등 공기(工期)단축에 대한 노하우가 상당합니다. 공기가 단축되면 가격경쟁력은 더욱 커지고요.

    걱정되는 부분은 인력 문제입니다. 한전이 지금 발전소 8기를 짓고 있는데도 공기업 인력감축 정책 때문에 사람 양성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갑자기 원전 수출이 성사되면서 인력부족 문제가 더 심각해졌죠. 더욱이 지금은 관련회사들이 쪼개져있다보니 체계적인 인력운용이 더욱 어렵습니다.”

    정부는 2001년 ‘전력산업구조개편’ 정책에 따라 한전에서 화력발전 5개 부문과 수력원자력 발전부문을 분리했다. 한전의 비효율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이를 분할해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것이 당시 정책의 바탕이었다. 이 때문에 원자력 부문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으로 떨어져나갔지만, UAE 원전수출의 경우 한수원이 아닌 한전이 주 계약자다. 대신 한전이 한수원으로부터 관련 전문인력을 파견받아 사업을 진행하는 구조다.

    “국제적인 초대형 프로젝트를 따내는 데는 한국전력의 브랜드파워가 상당히 작용합니다. 아무래도 한수원의 이름을 갖고 나가면 지명도가 떨어지는 거죠. 이명박 대통령이 앞으로도 한전이 주축이 되어 원전을 수출하라고 얘기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한전에는 원자력을 하는 사람이 부족합니다. UAE 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한수원에서 인원을 파견받았죠. 인력이 빠져나갔으니 한수원은 한수원대로 어려움이 있고요. 파견을 받는다 해도 조직문화상 소속직원들이 일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러한 조직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파견받아 쓰고 때 되면 돌아가는 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재처리와 재활용의 차이

    앞서 설명했지만 이 의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핵 재처리시설의 도입을 위한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은밀히 추진한 바 있다. 미국의 법률회사 H·H(호건앤드허트슨)와 100만달러에 로비 대행계약을 맺고 미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로비활동을 벌인 것이다.

    당시 그가 추진한 재처리는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전통적인 의미의 재처리는 아니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를 가공해 다시 원자로에 넣을 MOX(Mixed Oxide Fuel·혼합산화연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로비 움직임은 서울에서의 정권교체에 따라 핵 정책이 바뀌면서 백지화됐고, 이후 언론에 의해 공개되면서 세간에 큰 파장을 낳았다. 재처리가 곧 핵무장으로 통하던 시절의 일이다.

    ▼ 사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MOX 연료 재처리를 추진하다 좌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당시 이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으며, 지금 느끼는 소회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요즘 한창 원자력협정 개정 이야기가 나오면서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건식정련기술)에 관한 보도가 쏟아지더군요. 같은 취지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무기화가 가능한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있는 습식재처리와 달리 고온상태에서 재처리를 하면 핵무기로 이용될 가능성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재처리(reprocessing)라는 말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피하기 위해 재활용(recycling)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MOX 연료를 뽑아서 원자로에 다시 넣을 수 있다면 경제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폐연료봉을 보관하는 데 골머리를 앓을 일도 줄어들지요. 당시도 그런 뜻에서 재처리를 추진했고, 요즘 정부가 미국 측에 제기하고 있는 아이디어도 이를 허용해달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저 혼자 추진했던 일은 아니고, 권영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나 청와대 등과도 상의를 거친 일이었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얘기를 하다 잘 안되면 국가 간에 분쟁이 생기기 쉬우니, 민간이 먼저 사전작업을 해놓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정부가 나서는 게 맞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누가 해야 하나, 그게 한전이라는 거였죠.”

    이종훈 한국전력 이사회 의장

    1995년 6월 한국전력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로부터 북한 경수로 건설의 주계약자로 선정된 것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연 이종훈 당시 한전 사장.

    ‘사용후핵연료의 형질을 변경하거나 다른 용도로 쓰는 경우에는 미국의 동의를 받는다’는 협정 문구에 따라, 한국은 원전에서 사용한 핵연료(2008년 현재 1만100여t)를 고스란히 쌓아놓는 것 외에 다른 해결방안이 없다. 일본을 비롯한 다른 선진국들이 이를 재처리해 다시 핵연료로 만드는 이른바 ‘후행 핵주기’를 완성하는 동안, 한국은 고스란히 새 우라늄 연료를 해외에서 수입해 발전소에 투입해왔다. 사용후핵연료를 포함해 고준위폐기물을 보관할 장소를 찾을 수 없어 겪어야 했던 사회적 갈등 비용은 덤이다.

    “당시 한전은 1994년 제네바합의에 따라 북한에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경수로를 공급하기로 돼 있었어요. 그때 북한의 영변 원자로의 사용후핵연료를 봉인해두었잖습니까. 그런데 이걸 프랑스며 영국에서 서로 자기들이 재처리해 MOX로 만들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북한의 폐연료봉을 국외로 반출할 수 있는 명분도 주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도 경제적 이득을 챙기겠다는 복안이 있었던 거겠죠.

    그래서 저로서는 어차피 KEDO 경수로를 공급하는 게 우리니까 영변 폐연료봉을 끄집어내 MOX로 만들려면 우리가 직접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기회에 한국이 만든 원자로에서도 MOX를 쓴다는 걸 과시해야 이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한국의 사용후핵연료를 자국에서 재처리하고 싶어했던 영국에서도 마침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로비를 도와주겠다고 하기에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추진하게 됐는데, 정권이 바뀌고 제가 한전 사장에서 물러나면서 결국은 없던 얘기가 되고 말았죠.”

    결국은 신뢰의 문제

    ▼ 정부 관계자들이 최근 이 문제에 대해 발언을 쏟아내면서 관심사로 떠올랐습니다만, 그러나 원자력협정 개정은 기본적으로 국제정치적 변수가 많은 문제이고, 특히 북핵 이슈가 걸려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과연 이를 받아들일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외교관계에 대해서 저는 잘 모릅니다만,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전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분위기는 그런 것 없이 정부가 직접 나서서 협정 개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형식이란 말이죠. 어쨌든 미국이라는 나라는 정식으로 로비스트를 고용해 로비를 벌일 수 있는 나라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는 한전이든 누구든 민간이 먼저 물밑작업을 탄탄히 벌인 뒤에 정부가 나서야 일이 성사되지, 정부가 직설적으로 미 국무부에 얘기하는 것은 효율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미국이 파이로프로세싱을 기존의 재처리와는 다른 것으로 인정해줄지 여부는 사실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결국 미국이 한국의 재처리를 염려하는 것은 핵무기 개발 때문인데,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런 의구심을 영 털어버리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결국은 국가 간 신뢰의 문제니까, 한국처럼 투명한 사회에서 과연 어느 구석에서 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해낼 수 있겠느냐고 설득해야겠지요.”

    숙명에 관하여

    원자력산업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그 태반은 국내든 국제든 정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 이게 바로 원자력이 가진 숙명일 것이다. 한국이 처음 원자력발전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도 상당부분 정치적이었고, 원자력정책이 급변하게 되는 과정도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전기(轉機)와 위기는 모두 정치에서 왔다. 반도체나 조선 같은 다른 한국의 대표산업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 수십 년 동안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원자력이 정치로부터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느낀 바가 많을 듯합니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원자력에 대한 인식이 워낙 안 좋았으니까요. 정부에서도 워낙 많은 부분을 보안으로 묶어두다 보니 국민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겠죠. 1980년대까지는 원자력발전소 공사현장조차 공개를 못했어요. 이후로 정부도 한전도 국민의 접근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많은 것을 개방했기 때문에 원자력을 포기하지 않고 오늘날 같은 중흥기를 열 수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만큼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확인할 수 있도록 열려있어야 비로소 발전이 가능하다는 거죠.”

    ▼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정치가 기술 발전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항상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번에 UAE에 수출하면서 보니까 야당에서도 환영한다는 논평이 나왔더군요. 격세지감이 듭니다. 정부 관계자가 직접 원자력협정 개정이나 파이로프로세싱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으니까요. 이 기회를 잘 살리는 게 원자력산업을 위해서나 국익을 위해서나 반드시 필요한 일이겠다, 그 생각뿐입니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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