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그들이고 싶었던 나의 몸부림

피노키오와 미운 오리새끼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03-04 09: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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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리에 감각이 생기자 피노키오는 혼자서 걷기 시작했고 방안을 걷기 시작했고 방안을 뛰어다녔어요. 그러다가 문으로 달려가 길거리로 뛰어들어 달아나버렸답니다.
    •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중에서
    그들이고 싶었던 나의 몸부림

    콜로디의 동화 ‘피노키오’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아무리 달달 외워도 금세 까먹는 영어단어가 있는가 하면 한번에 가슴에 콕 박혀 불도장처럼 새겨지는 영어단어가 있다. 나의 경우 ‘eccentric’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중심(center)에서 벗어난(ex-)’이라는 어원을 지닌 이 단어는 ‘괴짜, 기인(奇人), 별난 사람’이라는 뜻의 명사와 ‘이상한, 별난, 괴벽스러운’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쓰인다. 고교시절 시험공부를 위해 영어단어를 달달 외울 때 이 단어에 유독 마음이 아팠다. 중심에서 벗어나면 다 이상하다는 건가? 그럼 중심은 항상 옳고 표준적인 것인가? 중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다 별난 것인가? 그럼 나도 좀 이상한 아인가? 난 중심을 벗어난 삶이 멋져 보이는데. 난 중심을 이탈할 용기가 있을까? 이런 망상을 하며 오랫동안 이 단어를 들여다보곤 했다.

    그런데 내 안에는 이중적인 욕망이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중심으로부터 이탈해 멋진 괴짜가 되고 싶은 마음과 중심을 벗어났을 때 감당해야 할 위험에 대한 공포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사춘기 시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비행청소년’이었다. 탈선, 불량아, 문제아가 되는 것이 가장 무서웠고 내 동생이나 내 친구들이 그렇게 될까봐 걱정했다. 그러는 한편 어른들이 ‘문제아’라고 부르는 애들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 시절에는 문제아라고 해야 자율학습 몇 번 빼먹고 남자친구 사귀고 공부 좀 안 하는 정도의 가벼운(?) 탈선에 그쳤다. 당시 학생이던 내 눈에 이 세 가지 탈선을 동시에 해내는 애는 대단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괴짜를 동경하면서도 정작 괴짜가 되는 건 두려워하는 심리, 이 소심한 이중인격의 기원에는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의 독서 체험이 한몫 톡톡히 했을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는 단지 오리들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대받고 따돌림당했다.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 ‘주제에’ 인간을 꿈꾸면서도 ‘인간답게’ 어른들의 교육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독한 경험을 한다.

    정말 배워야 할 교훈은

    집단이 개인을 고립시키는 ‘왕따’의 대명사인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는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 미운 오리새끼는 자신을 학대하는 오리떼와 자신을 조롱하는 다른 동물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참고 또 참는다. 그리고 제발 자신과 같이 놀아달라며 집단의 아성에 끈질기게 구애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과 똑같이 생긴 백조 무리를 만났을 때 자신이 지금껏 고민했던 ‘다른 오리들과의 차이’야말로 자신의 우아한 정체성이었음을 깨닫는다.



    피노키오는 사뭇 다르다. 피노키오는 이야기 막바지에 이르도록 좀처럼 안정된 정체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실수하고 유혹에 굴복하고 나약한 자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마침내 자신을 만든 아버지 제페토와 함께 고래 뱃속에서 탈출하자 그제야 일시적으로 방황을 멈추고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인간의 세계’로 진입한다.

    철저한 왕따 상황에서 독자의 연민을 자극하는 두 캐릭터는 집단 속에서 한 개인이 정체성을 갖기까지의 과정, 즉 사회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의 자아정체성 찾기 모험을 읽으면서 정작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누구든 쉽게 따돌리고 배제하는 집단의 권력과 횡포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따돌림을 당하고 놀림감이 되는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의 불쌍함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따돌리고 놀리는 집단의 폭력에 대해서는 눈감았던 게 아닐까? 그러면서 성악설에 기초한 인간관을 무의식적으로 배포해온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은 나쁜 인간들로 가득 차 있으니 중뿔나지 않게, 왕따 당하지 않게, 그저 고분고분 ‘우리’의 울타리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말이다.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니까, 세상은 험난하고 위험하니까, 착한 인간이 아니라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가정교육이 팽배하는 세상에서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미운 오리새끼도 피노키오도 독특한 개인을 받아주지 않는 사악한 공동체와 맞서야 하는 처지다. 윤리적인 개인과 비윤리적인 집단의 싸움,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풀리지 않는 문제다. 미운 오리새끼처럼 ‘나와 똑같은’ 백조의 무리가 나타날 때까지 참고 또 참아야 하나? 피노키오처럼 거짓말을 하고 일탈을 하다가 어느 순간 ‘바른 마음’의 정체를 스스로 깨달아야 하나? 내가 기억하는 한 ‘오리떼가 나쁘다’라든지 ‘피노키오를 괴롭히는 존재들이 나쁘다’고 가르쳐준 어른들은 없었다. 우리가 ‘그들 중의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도 받아본 적 없다. 피노키오와 미운 오리새끼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노키오를 괴롭히는 존재들이나 미운 오리새끼를 밀어내는 오리떼처럼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가.

    오늘은 학교에 가서 읽는 걸 빨리 배우고 싶어. 내일은 쓰기를 배우고 모레는 숫자 세는 법을 배울 거야. 그런 다음 내 힘으로 돈을 많이 벌 거야.

    - ‘피노키오’ 중에서

    그들이고 싶었던 나의 몸부림

    인형극 ‘미운 오리새끼’의 한 장면. 이 동화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던 저자 안데르센의 자전적 이야기로 해석된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새끼’(1843)와 콜로디의 ‘피노키오’(1883)는 100년 넘게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가장 널리 읽힌 동화에 속한다. 이 두 동화는 모두 ‘교육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전형적인 동화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설움을 딛고 한 마리 우아한 백조로 날아오르는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았고, 천신만고 끝에 꼭두각시인형에서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피노키오를 보며 박수를 쳤다.

    어린이의 불안과 조급증

    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생각해보니 박수칠 일만은 아니다. 다른 오리들처럼, 다른 인간들처럼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적일까? 다른 인간과 똑같지 않더라도, 오리와 똑같지 않더라도, 굳이 백조떼를 찾지 않더라도, 그저 미운 오리새끼나 나무인형인 채로, 미숙하고 부족하지만 여전히 ‘나다움’을 잃지 않은 채로 어른이 될 수는 없을까?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는 어린이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매우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미운 오리새끼’는 세상은 ‘거대한 그들’과 ‘나약한 나’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느끼는 어린이들의 전형적인 공포를, ‘피노키오’는 빨리 어른이 되어 부모님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어린이의 조바심과 ‘다른 아이들’처럼 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생생하게 형상화한다. 특히 아버지 제페토가 외투를 팔아 자신의 학비를 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피노키오가 빨리 돈을 벌어 아버지를 호강시켜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목은 언제 읽어도 뭉클하다. 저마다 나는 왜 빨리 자라지 않는지, 어른이 되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고민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피노키오의 조급증은 성장 속도에 대한 어린이의 불안을 닮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기 위한 매뉴얼을 되도록 빨리 마스터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

    피노키오의 교육자는 단지 아버지 제페토와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 피노키오가 가출해서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존재다. 피노키오는 정해진 교육의 한 지점으로 달려가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와중에, 그리고 언뜻 잘못돼 보이는 교육 속에서도 뭔가 배워간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다. 피노키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모범생이 되려고 무리 한 탓에 공부와 학교생활에 지쳐 탈선해버리고 만다. 피노키오의 진정한 변화는 모범생 만들기 프로젝트가 아니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태도에서 비롯됐다.

    피노키오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교과서를 팔아 꼭두각시 인형극을 보러 갔다가 허풍선이에게 잡히고, 양고기구이 장작감으로 불에 타버릴 위기에 처한다. 피노키오는 울부짖고 애원하여 간신히 살아나지만 자기 대신 다른 꼭두각시를 장작으로 쓴다는 말을 듣고 진심을 다해 선처를 부탁한다. 나무로 만들어진 형제나 다름없는 꼭두각시가 불타버리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도 선생님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피노키오는 같은 나무로 만들어진 꼭두각시의 고통을 이해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혹독하게 앓는 과정에서 피노키오는 교과서에 배우기 힘든 훌륭한 가르침을 얻었다.

    그렇다면 제 임무가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자, 호위병님들! 나를 묶어 저 불속에 던져주세요! 내 소중한 친구 어릿광대가 나 때문에 타죽는 건 옳지 않아요. 절대 안돼요!

    - ‘피노키오’ 중에서

    한편 미운 오리새끼는 왕따의 고통을 견디는 방식으로 극기(克己)를 택한다. 과연 옳은 방법일까? 미운 오리새끼인 채로 그들의 일원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백조임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까? 조용히, 티 나지 않게,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그런데도 백조임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평생 백조를 만날 기회조차 생기지 않는다면? 미운 오리새끼는 이런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한다. 그런 점에선 피노키오가 훨씬 매력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것 같다.

    유혹에 약해 더 매력적인

    어린 시절 나는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실수도 많이 하고, 거짓말도 많이 했는데, 내가 정말 정상적인 어른이 될 수 있을까’하는 고민 말이다.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쭉쭉 늘어나는 모습은 어린 마음에 엄청나게 충격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각인됐다. 피노키오처럼 코가 늘어나진 않았지만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푸른 멍이 점점 커지는 것만 같았다. 피노키오는 내게 용기를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피노키오는 미운 오리새끼처럼 무작정 참지만 않고 실수도 하고 일탈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도 하면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극기의 달인’ 미운 오리새끼보다 ‘유혹에 약한’ 피노키오가 좋다. 피노키오가 요정과의 약속을 어기고 로메오의 유혹에 꼴딱 넘어가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귀엽고 흥미진진하다. 이것이야말로 ‘어린이의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너 실수하는 거야. 피노키오! 내 말을 믿어. 나와 가지 않으면 넌 후회하게 될 걸.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니? 거기엔 학교도 없고 선생도 없어. 책도 없지. 그 축복받은 마을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목요일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 일주일에 목요일이 여섯 번이고 일요일이 한 번이야! 가을 방학이 1월1일에 시작해서 12월31일에 끝난다고 상상해봐.

    - ‘피노키오’ 중에서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는 아주 나쁜 동화일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계급과 계급, 인종과 인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구별짓기’를 가르치는 텍스트의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미운 오리의 인내심이나 피노키오의 고분고분함을 강조하기에 앞서 미운 오리를 왕따시키는 오리떼, 피노키오를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괴롭히고 약 올리는 존재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 있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안데르센의 콤플렉스

    ‘미운 오리새끼’는 그런 면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평생을 계급적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고민했던 안데르센의 자전적 스토리와 떼어놓고 보기 어려운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 동화 자체가 안데르센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낸 기나긴 연애편지라고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미운 오리새끼’는 평생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기 위해 온갖 치욕스러운 일들을 감내해야 했던 안데르센 자신의 아름다운 자기기만일지 모른다. 난 평범한 오리가 아니라 우아한 백조였노라고. 그러니까 어리석은 오리떼의 행패는 전혀 고민할 필요 없는 일이라고.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비난해도 ‘나는 백조이고 너희들은 오리일 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안데르센의 자전적 스토리를 접할 때마다 ‘개천의 용’이 처한 근원적 딜레마를 확인한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수는 있지만 최고의 사랑(혹은 인정)을 받을 수는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 선천적인 용이 아니라 지독하게 노력해야만 간신히 용이 될 수 있는 자의 비애. 평생 혹독한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자의 슬픔.

    ‘미운 오리새끼’는 스웨덴의 아름다운 가희 예니 린드에게 보낸 작품이다. 루이스 콜린에게 자서전을 보냈던 것처럼, 자신을 좀 봐달라는 메시지를 담아서 쓴 글이다. 그때 안데르센은 이미 동화 작가로서 대성공을 거둔 상태였다. …그래서 안데르센의 마음속에는 태어난 신분은 낮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상류사회에 들어갔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나는 못생긴 아기 오리였지만 지금은 성공해서 백조가 된 남자랍니다.’ 안데르센은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예니 린드에게 동화를 보냈다. 사랑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마음이 아기오리처럼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안데르센이라는 사람인 걸 어찌하겠는가.

    -우라야마 아키토시, 구혜영 옮김, ‘어른을 위한 안데르센 동화’, 베텔스만, 2004, 122~123쪽.



    그가 백조가 아니고 칠면조이거나 까마귀였다면, 혹은 공작새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칠면조나 까마귀라면 ‘백조보다 못한’ 존재이고, 공작새나 독수리라면 ‘백조보다 나은’ 존재인가? 그러한 종의 위계질서는 누가 정하는가? 그저 평범한 오리가 아니라 우아하고 고상한 백조가 됨으로써 오리들의 횡포에 복수하는 것이 미운 오리새끼의 가장 윤리적인 선택일까?

    피노키오의 그림자

    피노키오가 그토록 원하던 인간이 된 것은 그의 착한 행동 덕분이었다. 아버지 제페토와 고래 뱃속에서 탈출해 사람다운 행동을 하고 그 보답으로 꼭두각시 인형이 아닌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피노키오의 매력은 그가 매일 오류만 저지르다 마지막에 옳은 짓 한 번 하는 전형적인 문제아가 아니라, 실패와 상처와 오류조차 피노키오를 피노키오답게 만드는 소중한 구성요소라는 데 있다. 실패와 상처와 오류의 반복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피노키오가 아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감독하고 출연한 로베르토 베니니는 ‘피노키오’를 영화로 만들고 직접 출연했다. 그는 훈육이 아닌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 피노키오를 변화시켰다는 관점을 택했다. 피노키오를 사람처럼 만들려는 노력이 아니라 꼭두각시 인형일지라도 아들을 더없이 사랑하는 아버지 제페토의 진정성이 피노키오를 해방시킨 것 아닐까. 영화 ‘피노키오’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에로 복장을 벗어버린 피노키오가 학교로 가는 모습은 마침내 인간으로 길든 피노키오의 미래를 암시한다. 그러나 피노키오는 자신의 그림자만은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그림자만큼은 길들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피노키오가 세상과 화해하면서도 자신의 소중한 내면의 그림자를 남겨두는 방식이다. 우리가 올바른 교육의 패러다임에 담아내지 못한 인간의 개별성이야말로 ‘피노키오’가 가진 매혹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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