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통도사

들머리 솔숲, 한국의 상징적 풍광

  •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입력2010-03-04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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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 인위적이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솔숲을 놓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멋들어진 솔숲이 유지되려면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활엽수를 베어내고 꾸준히 낙엽을 채취해 소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통도사를 비롯한 몇몇 절집이 아름다운 솔숲을 자랑하는 것은 퇴비를 만들기 위해 활엽수 가지를 꺾고 낙엽을 주워 모았던 조상들의 생활방식 덕분이다.
    통도사

    무풍한송이란 이름을 간직한 통도사의 들머리 솔밭.



    통도사를 ‘한국의 3대 사찰’ 혹은 ‘불보사찰(佛寶寺刹)’로 한정한다면, 이 절집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간직한 불보사찰로서 이 절의 가치와 중요성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하지만 통도사를 찾는 평범한 방문자에게 일생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것은 무풍교에서 시작되는 들머리 솔숲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이 솔숲을 일컬어 무풍한송(舞風寒松)이라고 하며 통도팔경(通度八景)의 으뜸으로 치는데, 실제로 불자가 아닌 방문자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그래서 통도사의 또 다른 보물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점차 사라져가는 전형적인 농경문화의 옛 풍광을 통도사 솔숲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솔숲은 절집의 숲도 적절히 관리하면 한국성(韓國性)을 잘 드러내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어 더욱 각별하다.

    몇 해 전 소나무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소나무 사진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배병우 서울예술대학 교수를 청해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은 특유의 농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매년 엄청남 금액의 나무를 수입하지만, 나는 나무 한 그루 베지 않고, 나무를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이야기인즉슨 우리나라가 외국의 목재 수입에 한 해 약 6억달러를 지출하고 있는 데 반해 배 교수는 한 점당 수천만원을 받고 소나무 사진 작품을 외국의 소장가들에게 팔고 있다는 것이다. 배 교수의 작품은 굽고 쓸모없는 나무라며 천대받았던 토종 소나무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소나무 예찬이 있을까.

    “우리 미술의 연약함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다이내믹하고 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 소나무 작업이다. 소나무 작품을 흑백으로 제작하는 이유는 극동아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수묵화 느낌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한국을 상징하는 풍경이 소나무 숲이기 때문이다.”(솔바람통신 14호, ‘소나무와 나’ 중에서)



    소나무 숲이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풍경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배 교수와 나는 의견이 일치했고, 그 사실이 나는 기뻤다. 다만 배 교수가 경주 왕릉 주변의 소나무 숲을 대표적 풍경의 사례로 드는 데 반해, 나는 절집의 들머리 솔숲을 한국의 대표적 풍경으로 상정하는 점이 좀 다르다.

    절집 들머리 솔숲의 유래

    내가 한국을 대표하는 풍경이라고 상정한, 이 절집 들머리 솔숲은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우리의 옛 선조들이 한 곳에 정착해 농경(農耕)을 시작하면서 당면한 과업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은 농작물을 키워낼 만한 지력(地力)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화학비료가 없던 그 옛날, 땅의 힘을 향상시킬 수단은 퇴비뿐이었다. 농사의 성패가 퇴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퇴비는 인가 주변의 숲에서 자라는 활엽수의 잎과 가지, 그리고 풀을 채취해 가축과 사람의 분뇨와 함께 썩혀서 만들었다.

    농경사회가 유지되던 50여 년 전만 해도 농경에 필요한 퇴비를 생산하고자 인가 주변의 활엽수를 끊임없이 벌채하고, 숲 바닥에 떨어진 가지와 낙엽 등 유기물도 계속해서 거둬들였다. 활엽수 벌채와 임상 유기물 채집이 계속되면서 인가 주변 활엽수 숲의 지력은 차츰 악화되어 활엽수가 더는 살아갈 수 없는 불량한 상태에 이르렀다. 불량한 토양 조건 때문에 활엽수가 점차 사라진 반면, 좋지 못한 토양 조건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 강한 소나무들이 점차 득세했다.

    결국 인구밀집 지역에 형성된 소나무 숲은 농경사회에서 인간의 지속적 간섭으로 만들어진 ‘인위적 극상(極相) 상태’의 숲이라 할 수 있다. 극상이란 천이(遷移) 단계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안정된 숲을 뜻한다. 온대지방의 경우 소나무처럼 햇볕을 좋아하는 양수(陽樹)로만 이뤄진 숲을 그대로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그늘에 견디는 힘이 있는 신갈나무나 서어나무 같은 중용수(弱陰樹) 숲으로 변한다. 그 후 그늘에 견디는 힘이 아주 강한 까치박달나무와 층층나무 같은 음수(陰樹)들이 자리 잡는다. 이처럼 음수들이 제자리를 잡아 숲의 구조에 더는 변화가 생기지 않고 안정된 상태를 극상 상태라고 한다.

    소나무 숲을 ‘인위적 극상’이라 일컫는 이유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종이 자연스럽게 바뀌어 이뤄진 자연적 극상림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소나무 숲은 농경을 위한 인간의 지속적 간섭으로 인해 오랜 세월 극상 상태가 유지됐다. 농경문화에 의해 1000년 이상 유지됐기에 일각에서는 소나무 숲을 이 땅의 풍토가 만들어낸 고유의 문화경관이라고 해석한다.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배 교수가 소나무 숲을 한국의 대표적 풍경이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최근 전통문화경관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지난 50여 년 사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급격히 전환됨에 따라 농경문화가 일구어낸 독특한 전통경관이 사라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성을 상징하는 소나무 숲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단적인 사례로, 40년 전 전체 산림 면적의 60%를 차지하던 소나무 숲이 오늘날 25% 미만으로 줄어들었고, 소나무 단순림(單純林)의 구조도 급격히 바뀌고 있다. 농촌 인구 감소와 도시화로 인가 주변 소나무 숲은 자연의 천이에 따라 혼효림(混淆林)으로 급속하게 바뀌었다. 그나마 사찰 중 몇몇 곳이 소나무 숲의 옛 모습을 비교적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전형적인 솔숲을 통도사에서 찾을 수 있다.

    통도사 무풍한송(舞風寒松)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재위시 자장(慈藏)율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646년에 창건한 가람이다. 자장율사는 귀국하면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금강계단에 안치하고, 승려의 규범과 법식(法式)을 가르치는 한편 불법을 널리 전하면서 통도사를 계율의 근본 도량으로 만들었다. 통도사란 절 이름은 “영취산의 기운(氣運)이 서역국 오인도(西域國五印度)의 땅과 통(通)한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대광명전(국보 290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지만 17세기 전반 두 번에 걸쳐 영산전(靈山殿), 극락보전(極樂寶殿) 등의 법당과 보광전(普光殿), 감로당(甘露堂), 비각(碑閣),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 일주문(一柱門), 범종각(梵鐘閣) 등이 중수됐다. 국보로 지정된 대광명전 외에 은입사동제향로(銀入絲銅製香爐·보물 334호), 봉발탑(奉鉢塔·보물 471호)이 있고, 성보박물관에는 병풍, 경책(經冊), 불구(佛具) 및 고려대장경(해인사 영인본) 등 다양한 사보(寺寶)가 소장되어 있다.

    통도사

    남쪽 산록의 솔숲 속에 있는 통도사 5층탑.

    통도사 산문(山門)을 들어서면 길은 통도천(通度川)을 가운데 두고 왼편의 보행로와 오른편의 자동차 도로로 나뉜다. 무풍교 건너편으로 난 길은 자동차 왕래가 빈번해진 1990년에 만들어진 자동차 도로다. 무풍교 입구에서 청류교에 이르는 솔숲 사이로 난 1km 정도의 길은 보행로이며, 무풍한송(舞風寒松)은 이 들머리 솔숲을 일컫는 별칭이다. 이 들머리 솔숲은 그 별칭처럼 서늘한 기운의 소나무들이 울렁이는 바람에 따라 춤추는 형상으로 아름답게 늘어서 있다. 통도천을 따라 청류교를 만나는 지점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이 같은 들머리 솔숲은 이제 통도사를 비롯해 몇 안 되는 절집에서만 겨우 만나볼 수 있다.

    들머리 숲길이 1km이니 그리 먼 거리라 할 수 없다. 산책하듯 걸어도 반시간이면 족하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 10km 길이라도 되는 양 천천히 음미하듯 걷는 것이 이 솔숲의 진수를 만끽하는 방법이다. 산업문명이 요구하는 속도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농경문화를 꽃 피운 조상들의 느린 속도에 맞춰 걸을 때 비로소 들머리 솔숲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제대로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무풍한송 속을 걷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솔빛이 온몸을 간질인다. 솔향이 온몸을 감싼다. 솔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솔빛과 솔향과 솔바람이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별천지를 걷는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걷는다. 영혼을 씻어내는 황홀한 희열을 느낀다. 통도사 들머리 솔숲은 ‘걷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자 전율이다. 이런 감동은 차를 타고 일순간 휙 지나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다. 자연친화적 정감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고, 소리와 소리 사이에 흐르는 침묵까지 읽어내는 마음의 눈이 있어야 한다.

    솔숲을 걷는 일은 막연히 걷는 것과 다르다. 들머리 솔숲 길을 걷는 일은 업장을 벗고 정토(淨土)에 들어서는 통과의례이며, 고요와 자비와 평화와 청정세계에 진입하는 엄숙한 절차다. 지고지선의 부처님을 모신 절집에 이르는 숲길, 들머리 솔숲 길은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숲에 한국을 한국답게,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해주는 우리의 정체성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옛 방문객의 면면

    이 들머리 솔숲에서 눈에 띄는 인공물은 하천 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10여 기의 석등이다. 영축산 통도사 사적비에 따르면 경봉스님이 통도사 주지로 재임하던 1937년경, 산문에서 동구까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석등의 지대석은 2중 구조이고, 땅과 맞닿은 부분은 피지 않은 오므린 형태의 연꽃 모양이며, 그 위 8각형 면석에는 학, 코끼리, 사슴, 용, 호랑이 같은 동물이 새겨졌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불 밝힌 이 석등을 따라 통도사 들머리 솔숲을 거닐던 방문객의 감회는 어떠했을까?

    이 들머리 솔숲을 언제부터 무풍한송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구하(九河·1872~1965)스님이 남긴 한시 ‘무풍한송’으로 미뤄볼 때, 그 유래가 꽤 오래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맑은 바람, 하얀 눈 몇 겁이나 지냈는가(淸風霜雪機經劫)

    계곡 물과 돌 사이에 우뚝 높이 솟아 있구나(特立溪邊水石間)

    여의봉 앞 오가는 길 무풍교 앞으로(如意棒前來去路)

    일 없는 가을 구름 끊임없이 돌아오네(秋雲無事有時還)

    이 들머리 솔숲을 무풍한송이라 부른 흔적은 사중(寺中)에 통용되는 통도8경(通度八景)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통도8경은 1경인 무풍한송을 필두로 2경은 취운모종(翠雲暮鍾·취운암의 저녁 종소리), 3경은 안양동대(安養東臺·일출시 안양암에서 큰절 쪽으로 보이는 경관), 4경은 자장동천(慈藏洞天·자장암 계곡의 소(沼)가 달빛을 받아 연출하는 광경), 5경은 극락영지(極樂影池·영취산의 수려한 풍경이 담기는 극락암 영지), 6경은 비로폭포(毘盧瀑布·비로암 서쪽 30m 거리에 있는 폭포), 7경은 백운명고(白雲鳴鼓·백운암 북소리), 8경은 단성낙조(丹城落照·단조산성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를 말한다.

    무풍한송의 들머리 숲길은 빠른 걸음이면 반시간으로 충분한 거리지만, 소나무와 주변 경치를 음미하며 걷는다면 한두 시간을 들여도 부족할지 모른다. 왼편 통도천의 계곡물과 암석 사이에서 우람하게 자라는 소나무의 멋진 군무를 감상하는 것은 기본이고, 오른편 산록의 바위에 새겨진 이름을 읽으며 통도사를 찾은 옛 방문객의 면면을 상상해보는 일도 이 솔숲의 의미를 더 깊이 즐기는 방법이다. 두 번째 팔각정을 지나 오른쪽에 솟은 큰 바위에서는 통도사 주지스님을 지낸 구봉당 지화스님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들머리 솔숲 길의 끝자락 50m 못 미친 곳 바위들에 새겨진 이름 중에는 목은 이색과 청음 김상헌, 선원 김상용 형제의 이름도 보인다.

    목은 이색은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충신이다. 역사의 전환기에 번민했던 심정을 자연의 경치에 빗대어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엿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청음 김상헌과 선원 김상용 형제는 병자호란 때의 충절로 유명하다. 형 선원은 청나라 군대가 강화성을 함락하자 화약에 불을 붙여 자결했고,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보필했던 아우 청음은 인조가 청 태조에 굴욕적으로 항복한 후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돼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남긴 시조로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떠나려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김홍도·김정희의 흔적

    통도사

    금강계단의 석종형 부도와 소나무.

    들머리 솔숲은 청류교에서 끝나고, 이 지점에서 보행로가 잠시 자동차 도로와 만난다. 산내 암자로 향하는 자동차 도로 대신에 부도원과 해탈문을 향해 걷다보면 하마비를 만난다.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이라도 부처님의 나라에 들어서려면 예의를 갖추어달라는 표시다. 하마비가 서 있는 오른쪽 산록에도 이름이 새겨진 큰 암벽이 있다. 마치 부채를 편 것 같은 형태라 선자바위란 별칭을 얻은 이 바위에 빽빽하게 새겨진 이름들 사이에서 단원 김홍도와 그의 스승 복헌 김응환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김홍도와 김응환이 1788년 정조의 어명에 따라 금강산과 동해안 일대를 그림으로 그리고, 다시 1789년에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대마도로 가면서 통도사에 들러 남긴 기록으로 추정된다. 김홍도의 흔적은 또 있다. 성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통도사전도’가 그것이다. 조선 후기 통도사의 전경을 실경으로 그린 이 그림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 속에 안긴 통도사의 옛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낙관이 없고, 그림에 관한 기록도 없어 막연히 단원의 그림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들머리 솔숲의 바위들에선 친일 개화파인 윤치오(尹致旿)와 박영효(朴泳孝),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 대종교의 2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인 김교헌(金敎獻), 천도교 3대 교주 의암 손병희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을 돌에 새겨 영원히 남기려 한 사람도 많지만, 통도사 방문 길에 글씨를 남긴 이들도 있으니 그들 작품도 챙겨 볼 만하다. 일주문 현판 ‘영취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관음전 맞은편의 원통소(圓通所) 현판, 4면이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대웅전의 네 개 현판 중 서쪽의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다. 통도사엔 추사 김정희가 쓴 서예작품 1점과 현판 글씨 4점이 전한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성담상게(聖覃像偈)’는 서예작품이고, ‘일로향각(一爐香閣)’의 현판, 주지실 앞의 ‘탑광실(塔光室)’과 오른쪽 문 위에 걸린 ‘노곡소축(老谷小築)’ 현판이 추사의 글씨로 알려졌다. ‘산호벽수(珊瑚碧樹)’라는 현판도 추사의 솜씨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소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왕목

    소나무 숲은 가장 흔한 사찰림이며, 들머리 솔숲은 절집 소나무 숲의 전형이다. 들머리 솔숲이 아름다운 절집은 많다. 청도 운문사, 영천 은해사, 영월 법흥사, 아산 봉곡사, 서산 개심사, 밀양 표충사, 합천 해인사, 금강산 신계사, 강화 전등사 등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들머리 숲의 형태는 비록 사라졌지만 경내에 아름다운 솔숲을 보유한 절집으로는 용주사, 불영사, 내소사, 직지사, 쌍계사 등이 있다.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고찰에서 흔히 접하는 솔숲은 어떤 연유로 생겼을까? 절집 솔숲에 대한 이런 의문은 한국의 전통경관을 상징하는 소나무 숲의 역사성과 기능에 대한 물음이다. 사찰 소나무 숲의 역사성은 조선왕조의 왕목으로 자리 잡은 소나무의 상징적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는 왕족의 능역을 길지로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고자 능역 주변에 소나무를 식재했다. 왕릉을 지키는 능사와 함께 임금의 태를 모신 태실 주변과 태실을 수호하는 원당사에 소나무를 심은 이유도 소나무의 상징적 기능을 활용해 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태실과 태봉산을 수호했던 은해사(인종 태실), 법주사(순조 태실), 직지사(정종 태실)가 오늘날까지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솔숲이다. 이 중 은해사는 종친부에서 1714년 토지를 구입해 사찰 경내에 소나무를 조성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왕실의 원찰(원당사)로 지정된 사찰에서는 소나무를 각별히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식재도 빈번하게 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 솔숲은 물질적 기능도 감당했다. 조선 왕실이 시행한 산림제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산림제도는 왕실이 필요로 하는 관곽재, 궁궐재, 조선재 같은 소나무 국용재(國用材)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금산(禁山)을 지정해 소나무를 보호했다. 소나무 벌채를 금지한 이 제도는 송목금벌(松木禁伐) 또는 줄여서 송금(松禁)이란 용어로 불렸으며, 경국대전을 비롯한 여러 법전에 이 용어가 남아있다.

    통도사

    흥선 대원군이 쓴 일주문의 현판,‘영취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송금의 흔적은 영월 법흥사 인근 법흥리에서 발견된 ‘원주사자황장산 금표(原州獅子黃腸山禁標)’에서 엿볼 수 있다. 이 금표가 최근 발견된 점을 상기하면, 법흥사는 물론이고 주변의 사자산 일대가 왕실에 황장소나무를 공급하던 우량한 소나무 산지였으며, 왕실에서 금산 보호의 소임을 법흥사에 맡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실이 황장목을 지키는 소임을 사찰에 부여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치악산 구룡사 입구의 황장금표다. 이밖에 왕실에 송홧가루를 공급하도록 통영 안정사의 소나무 숲을 송화봉산으로 지정한 사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유람기와 옛 그림,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조선고적도보’와 ‘조선사찰31본산’의 사진집 등을 참고하면, 이 땅의 명산대찰 대부분이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에도 소나무 숲을 보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그 후 사회적 혼란기를 겪으면서 사찰 솔숲의 면적이 줄어들고, 숲의 형태도 소나무 단순림에서 소나무와 활엽수의 혼효림으로 변모했을망정 여전히 대부분의 절집이 솔숲을 보유하고 있는 건, 절집 솔숲이 이런 장구한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집 솔숲을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풍경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날 소나무 숲 면적이 줄어들거나 소나무 단순림이 혼효림으로 변해가는 것은 고래의 전통문화경관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전통경관의 중요성과 가치가 새롭게 제기되는 이때 소나무 단순림의 유지와 관리를 강조하는 것은 목재 수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재래의 산림 이용 방법 대신에, ‘전통문화경관의 보호와 관리’라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모색하려는 의도다. 절집 솔숲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바로 오늘날 절집 솔숲이 당면한 역사성이라 할 수 있다.

    솔밭에서 확인하는 ‘무소유’

    통도사에는 들머리 솔숲 외에도 곳곳에 아름다운 솔숲이 있다. 그중 한 곳이 바로 부도원 솔밭이다. 최근 활엽수들을 제거해 솔숲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월하 방장스님의 교시로 흩어졌던 부도와 비석을 솔밭에 모아놓으니 그 모습이 무소유를 실천한 고승대덕의 삶처럼 고졸하다.

    3단으로 된 부도원 중 2단에는 근·현대 통도사 스님들을 모셔두었다. 1920년대 일제 수탈의 마수로부터 통도사 일대의 소나무를 지켜내고,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한 구하스님은 물론이고 경봉스님과 월하스님, 벽안스님의 부도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10명씩 6줄로 서 있는 60여 부도 중 최근 작고한 스님의 부도들은 크고 화려한 반면, 옛 스님들의 부도는 소박하다. 물질적 풍요가 절집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인지, 문중 후배 스님들의 못난 안목 탓인지는 세월이 흘러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도원이 포근하고 안락한 느낌을 주는 것은 주변을 둘러싼 솔밭 덕분이다. 솔밭이야말로 선대 스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통도사 솔숲 중에 찾아봐야 할 곳은 또 있다. 아치형 돌다리인 일승교를 지나 서편 동산 솔숲에 안긴 5층 석탑 주변이다. 이곳에서는 저 멀리 영취산은 물론이고, 절집의 경내와 주변을 감싸고 있는 솔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솔바람 소리를 듣고, 생명의 기운을 가득 가슴에 쌓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취운암 쪽으로 내려서는 길도 주변이 온통 솔숲이다.

    통도사 솔숲 중 진수는 금강계단(金剛戒壇) 옆 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금강계단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 통도사의 정수인데, 그 정수를 지키고 있는 생명체 역시 붉은 수피를 자랑하는 우리 토종 소나무다. 대부분의 참배객이 금강계단 상층 중심부에 자리 잡은 석종형 부도를 지키고 선 붉은 소나무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치지만, 나의 관심은 왜 하필 소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섰나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해인사 장경판전을 옹위한 소나무들과 마찬가지로 금강계단을 지키고 있는 붉은 수피의 토종 소나무도 부처님 진신사리를 지키는 수호신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신수(神樹)가 아닐까.

    방치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지킬 것인가

    오래된 절집은 역사가 녹아 있고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현장이다. 1000년하고도 수백년간 불교문화를 지켜온 절집의 공덕은 문화재로 등록된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보고라는 점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절집이 장구한 세월 동안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뤄 한국적 경관을 만든 ‘자연유산의 보고’라는 사실이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하루가 다르게 국토의 모습이 바뀌고 있는 세태에 수백년 이상 전통자연경관을 지켜온 공간은 절집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절집 주변을 지켜온 솔숲은 아름다운 풍광이 되어 한국인의 심성에 전통문화경관으로 깊게 뿌리내렸다. 그래서 절집 솔숲은 그 자체로 우리 문화의 한 요소이고, 우리 국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집 솔숲은 바로 한국성(韓國性)의 또 다른 중요한 상징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절집 솔숲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절집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 통도사 솔숲이 각별한 이유도 수백년 한결같이 자연유산인 솔숲을 솔숲답게 지켜내고 있어서다. 솔숲을 솔숲답게 지켜내는 일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쉽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수많은 절집이, 솔숲이 참나무를 비롯한 활엽수 숲으로 변해가도록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솔숲을 솔숲답게 지켜내고 있는 통도사의 원력은 예외이고 파격이다.

    소나무 숲은 인간의 간섭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숲 바닥에 쌓인 낙엽을 채취하고 활엽수를 베어내지 않는 한 소나무 숲이 대(代)를 이어 제 모습을 지켜내기 어렵다. 소나무는 햇볕을 좋아해 활엽수 그늘 밑에서는 살아갈 수 없고, 낙엽 부식물 위에서도 대를 이을 종자를 싹 틔울 수 없는 독특한 생육 특성을 갖고 있다. 화석 연료가 없던 농경사회에서 솔가리는 화력 좋은 땔감이었고, 절집 역시 조리와 난방에 필요한 연료를 확보하고자 솔가리를 채취해야 했다. 이 땅 방방곡곡의 솔숲처럼 통도사의 솔숲도 인간의 끊임없는 간섭 덕택에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간 급격하게 진행된 산업화가 소나무 숲에 대한 농경사회의 간섭(연료 채취, 활엽수 제거)을 중단시켰고, 그에 따라 이 땅의 솔숲들은 자연 복원력에 따라 활엽수에 점차 자리를 내주고 있는 실정이다.

    통도사
    全 瑛 宇

    1951년 경남 마산 출생

    고려대 임학과 졸업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석사, 박사

    現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저서: ‘숲과 한국문화’ ‘나무와 숲이 있었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숲 보기 읽기 담기’ ‘한국의 명품 소나무’ 외 다수


    사실 통도사의 솔숲도 한때는 이 땅 대부분의 솔숲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방치해둔 솔숲을 솔숲답게 지켜낼 수 있었던 건 주지스님인 정우스님의 혜안 덕분이다. “영취산은 구하스님을 비롯한 많은 어른 스님들이 지켜온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잡목들로 인해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고, 심지어 죽어가는 나무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사중과 지역 언론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들을 설득하는 노력을 한 결과 지금은 모두들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주지스님의 이 말씀은 3년 전 통도사 솔숲을 지켜내고자 겪은 고초를 헤아리는 데 부족함이 없다.

    다른 절집들이 이런저런 형편으로 또는 주변의 시선이 무서워 감히 시도할 생각도 못하던 일을 단숨에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절집이 보유한 문화유산 못지않게 솔숲도 훌륭한 자연유산임을 절실히 인식한 덕분일 터. 따라서 ‘불보사찰 통도사’란 명칭을 사용하는 만큼 ‘전통문화경관을 지키는 통도사’라는 수식어도 자연스럽게 또 자주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통도사 들머리 솔숲의 그 호쾌하고 시원한 기상을 미래의 아이들에게도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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