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인격을 지닌 유기체, 인체

  • 고승철│저널리스트 koyou33@empas.com│

    입력2010-03-04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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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격을 지닌 유기체, 인체

    ‘인문의학, 21세기 한국 사회와 몸의 생태학’<br>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엮음/ 휴머니스트/ 222쪽/ 1만2000원

    손님은 왕’이라는 말이 병원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 환자는 제 돈을 내고도 의사에게 푸대접받기 일쑤다. 특히 환자들이 몰려드는 종합병원에서는 적잖은 의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환자를 맞는다. 환자가 병세를 자세히 물으려 하면 짜증을 내는 의사가 한둘이 아니다. 반말을 일삼는 의사도 있다. 이런 횡포를 따지면 으레 “의사도 사람이어서 너무 바쁘다보니 그렇다”고 변명한다. “험한 꼴 당하기 싫어서라도 아프지 말아야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의료계 내부의 폭력을 추방하자고 외치는 단체가 있어서 의아하게 여겼다. 엘리트 집단이라는 의사세계에서 웬 주먹질? 알고 보니 어떤 의과대학에서는 선배가 후배에게 몽둥이질을 하는 게 전통이라고 한다. 일부 종합병원에서는 교수가 전공의나 수련의를 손찌검한 사례가 드러났다. 때리는 사람은 “인명을 다루는 직업이므로 방심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둘러댄다. 한국의 의사는 맞아야 정신을 차린단 말인가. 미국의 명문 의과대학인 존스홉킨스대학 같은 곳에서도 때리면서 가르치나?

    한국에서 의사는 ‘고소득 직업인’으로 통한다. 공부 잘하는 고교생들이 기를 쓰고 가는 곳이 의과대학이다. 우수한 이공계 대졸자는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꿈꾸며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간다. 의사를 보고 허준, 화타, 편작, 히포크라테스 등 명의를 연상하는 환자는 거의 없으리라. 의술을 인술(仁術)로 여기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물론 사명감을 갖고 묵묵히 일하는 의사가 적지 않겠지만….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술에서 정작 인간의 존엄성을 망각한 탓이다. 병균 퇴치에 초점을 둔 나머지 사람 몸 전체와 인격을 도외시한 결과다. 의사란 직업을 밥벌이로만 좁게 본 자가당착의 결과다. 의학에서 인문학이 실종된 후유증이다.

    외부 관찰자로서 한국 의료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터에 ‘인문의학, 21세기 한국 사회와 몸의 생태학’이란 책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가 전문 의학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을 위해 엮은 출판물이다. 인체를 단순한 몸뚱어리로 보지 않고 인격이 담긴 육체로 보는 관점이 책 전체에 담겨 있어 독자로서는 흐뭇하다.



    이 연구소는 앞서 ‘인문의학, 인문의 창으로 본 건강’과 ‘인문의학, 고통! 사람과 세상을 만나다’라는 책을 내놓았다. 2007년 8월 문을 연 이 연구소는 의학을 인문학의 시선으로도 바라보아야 한다며 ‘건강한 삶’이란 화두를 탐구해왔다. 연구소는 동과 서, 고(古)와 금(今), 의학과 인문학 사이에 새로운 소통 경로를 열고 건강, 질병, 치유의 새로운 지평을 찾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자연과 몸은 상호되먹임의 관계

    강신익 연구소장은 서문에서 “서양의 근대의학은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과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법을 찾아 인류를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구해냈지만 우리 자신이 그 세균과 맺고 있는 ‘관계’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했다”면서 “그 결과 슈퍼박테리아와 여러 신종 전염병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치과 의사로 20여 년간 활동한 강 소장은 신경생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에서 의료인문학으로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그는 ‘몸의 살림살이: 건강생태학과 생태의학’이라는 글에서 “몸의 살림살이에서는 자연에서 필요한 물질과 에너지를 취하기도 하고, 그 대사산물을 자연으로 돌려주기도 한다”면서 “자연과 몸은 상호되먹임의 관계로 엮인 공동운명체이며 몸은 작은 자연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생태의학은 ‘참여의 의학’이라는 강 소장의 주장에 눈길이 끌린다. 건강을 원하는 당사자의 적극적인 의지, 몸을 구성하는 면역세포들의 참여, 가족의 보살핌, 건강보험과 같은 공적 부조 등이 조화를 이루지 않은 상황에서 암 덩어리만 제거한다고 해서 건강이 회복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여러 필자의 논문, 에세이, 대담 등을 묶은 것이다.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였다. 그러나 가볍게 읽히는 건강상식 따위는 아니어서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정독해야 어울린다. 동양의학에 대한 글은 음양오행 원리에 관한 기초지식을 갖추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다.

    ‘생태학과 경제학의 만남: 생태경제학’이란 논문에서 조영탁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생태경제학을 소개했다. 자연생태계와 사회경제시스템은 물질과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공생하는 공동운명체라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는 모든 학문 분야가 협력해서 풀어야 할 지구적 과제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도시 환경과 인체는 어떤 관계를 가졌을까. 이 주제를 다룬 ‘현대 도시, 기술적인 사회적 몸의 생산 공간’이란 논문은 “현대 도시는 화석에너지를 기반으로 하여 자연을 착취하는 에너지 소비도시”라고 규정했다. 논문 작성자인 박영균 서울시립대 연구교수는 “건강마저도 소비를 통해 얻어야만 하는 현대인의 몸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고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도시환경시스템을 바꿔 생산과 소비가 아닌 존재의 나눔과 호혜적 교환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양의학은 원래부터 자연과 인체의 합일을 꾀했다. 우주의 음양오행 질서가 인체에서도 적용된다는 논리에서다. 의술을 제대로 익히려면 먼저 황제내경, 주역 등을 배워야 했다. 의학과 역학(易學)은 별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동양의학은 의역학(醫易學)이라 불리기도 한다. 의학도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각, 항, 저, 방, 심, 미, 기…”라 외치면서 별 이름을 외웠다. 의사는 환자의 체질과 사주에 따라 다른 처방을 내린다. 아기가 태어나 처음 들이마시는 숨이 자연과 상응하는 첫 순간이므로 이때의 기운을 중시한다.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에는 동양인문학 전문가들도 활발히 참여하는 듯하다. 이 책에 실린 유학자 전호근 박사(민족의학연구원 편찬실장)와 노자(老子) 전문가 김시천 박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이 돋보인다.

    전 박사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주역(周易)의 자연관과 생태학’이라는 글에서 “주역의 궁극적 주제는 생명”이라 전제하고 주역 64괘 가운데 맨 마지막인 ‘수화미제(水火未濟)’는 끝나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삶은 계속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것. 김 박사는 ‘칠규(七竅)의 인간학’이란 에세이에서 인체의 일곱 개 구멍은 자연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며 이는 피리 구멍 7개와 같다고 제시했다.

    생태계 파괴 탓에 아토피 창궐

    이 책은 2009년 4월17일 민족의학연구실에서 ‘몸의 생태학, 오늘의 한국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대담도 수록했다. 이 대담에는 동양철학(김교빈), 사회학(김환석, 홍성태), 과학언론(강양구), 의철학(강신익)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많은 청중이 참석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우리 몸에는 많은 생물이 사는데 몸을 너무 방치하면 기생충이 몸을 점령하여 사람이 죽고, 몸을 너무 깨끗하게 관리해도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 있다”면서 “생태계로서 우리 몸은 공생을 통한 균형을 필요로 한다”고 발표했다. “비비디 바비디 부”라 외치며 무한한 욕망을 채우려는 마법 주문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상징이란다. 홍 교수는 자신의 아이 둘이 아토피 때문에 고생하는 사례를 밝히고 “요즘에는 모든 아이가 아토피 환자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것이 바로 심각한 생태계 위기의 직접적인 징후”라면서 “인간의 풍요가 생태 위기를 초래하고 이 때문에 우리 자신의 생명과 건강이 치명적인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신익 인문의학연구소장은 “아토피의 원인에 대해 위생가설이 있는데 지나친 위생 때문에 인체가 일시적으로 부적응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라 덧붙였다. 목욕을 제대로 하지 않던 과거에는 아토피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김환석 국민대 교수는 “몸은 어떤 고정된 본질을 지닌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다른 몸들(다양한 인간과 사물)에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점진적으로 만들어진다”면서 “그러므로 몸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인 셈”이라 설명했다.

    김교빈 호서대 교수는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더 편한 것을 추구하는 오늘 우리들의 소비방식은 엄청난 쓰레기, 화석연료의 소비증가, 무분별한 산림훼손 등으로 나타난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자연과 인간의 공존, 물질과 정신의 공존, 물질과 물질의 공존을 지향하는 세계관을 제시했다.

    강양구 프레시안 과학 담당기자는 “몸의 문제, 건강의 문제, 보다 넓게는 생태의 문제 등과 같은 논의들이 언론 지면을 통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라면서 “위험을 고민하는 이들은 그 위험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맥락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을 읽고 의학과 철학을 접목한 ‘의철학(醫哲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태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1987년 유럽의철학회가 창립됐고 한국에서는 2006년 한국의철학회가 발족했다. 미국에는 같은 이름의 학회는 없지만 이 분야를 연구하는 다양한 학회와 연구소들이 있다. 펠레그리노, 엥겔하르트 등 의철학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는 미국인이다.

    의철학 연구가 활기를 띠면 환자로서는 박수를 칠 일이다. 의사에게서 생화학적 구조물로서가 아니고 인격을 지닌 유기체로 대접받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철학적 소양을 기른 의사는 환자 치료에서도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 이런 의사는 고소득보다 더 소중한 가치인 ‘존경’을 받을 것이다.

    2004년에 출판된 ‘의학과 문학’(문학과 지성사)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시인이자 의사인 마종기 교수가 2003년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진행한 ‘문학과 의학’이란 강의를 정리한 내용이다. 미국에서 40여 년간 의사 생활을 한 마 교수는 “미국 의사는 환자에 대한 수십 종류의 검사 결과를 분석하는 데 매달려 환자가 자라온 환경이나 체질, 성격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며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명문 의과대학에서는 문학 강좌를 개설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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