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드라마 ‘추노’의 정치학

권력은 정의롭지 못하고, 정의는 권력을 잡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분투

  • 위근우│ 기자 eight@10asia.co.kr│

    입력2010-04-30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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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영 내내 30%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사극 ‘추노’가 최근 막을 내렸다. 몰락한 양반 출신 추노꾼 대길과 도망 노비가 된 무사 태하의 삶을 통해 조선시대 계급 갈등을 정면으로 다룬 이 드라마는 화려한 영상미, 배우들의 호연과 더불어 결코 가볍지 않은 정치적 함의로도 눈길을 끌었다.
    드라마 ‘추노’의 정치학
    “저태양은 우리 거야. 우리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높이 솟은 태양을 보며 도망 노비 초복은 역시 도망 노비인 은실에게 말한다. KBS 드라마 ‘추노’의 마지막 장면이다. 초복의 말은 이 작품의 플롯을, 그리고 주제의식을 관통한다. 비록 추노꾼 대길(장혁)과 전직 엘리트 무관이자 도망 노비인 송태하(오지호)의 추격전이 전면에 깔리지만 사실 ‘추노’는 쫓고 쫓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저 태양을 가져본 적 없는 자들과 그것을 가지고 있고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자들의 투쟁을 그린 작품에 가깝다.

    태양은 행복이나 자유로운 삶과 같은 어떤 보편적 가치일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권력이다. 영화적인 영상과 야마카시(맨손으로 건물이나 다리, 벽 등을 오르거나 뛰어넘는 행동)가 녹아 있는 액션 장면,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진짜 늦은 것’이라는 현대의 유행어 등 수많은 요소가 섞인 하이브리드적인 작품임에도 ‘추노’가 정치 사극인 건 이 때문이다.

    물론 거의 모든 사극의 주인공들은 권력을 추구한다. 멀게는 ‘조선왕조 오백년’의 왕족들이 그러했고, 가까이는 ‘태조 왕건’ ‘대조영’ 같은 건국 사극의 주인공과 그 라이벌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의 권력 다툼이라는 것은 누가 주인이 되는지에 집중될 뿐이다. 그에 따른 정치 시스템의 변화는 추구되지 않는다. 가령 ‘태조 왕건’에서 궁예와 왕건은 후삼국의 패권을 잡기 위해 다툰다. 절대 왕권 왕좌에 어느 영웅이 올라갈 것인지에 대한 싸움이다. 하지만 ‘추노’의 그것은 다르다. 노비가, 전직 엘리트 무관이, 은둔 선비가 권력을 추구할 때 그것은 개인적인 다툼인 동시에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편을 의미한다. 여기서부터는 누가 더 영웅다운지가 아닌, 누구의 정치적 의견이 더 옳은지, 또한 그 의견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무엇인지, 그리고 과연 현재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위해 순순히 자리를 내놓을 것인지에 대한 복잡한 질문이 따라온다.

    정치 시스템의 변화



    ‘추노’의 시대적 배경이 인조 재위 시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시 인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조선 히어로물 ‘최강칠우’의 대본을 쓴 박상연 작가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택한 이유에 대해 “‘난세’를 찾았다. 그런데 조선의 난세라면 더 볼 것도 없이 인조 시대가 1위였다.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정말 개판이더라”고 말한 바 있다. ‘최강칠우’와 같이 2008년에 방송된 또 다른 히어로물 ‘일지매’ 역시 인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한 양반들의 횡포와 법과 제도의 붕괴 때문에 괴로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시대상으로 담았다. 광해군의 외교 노선에 반대해 청과 대립했다가 병자호란을 겪은 난세 중의 난세, 그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영웅이 필요한 시대. 흥미로운 건 탐관오리가 부당하게 취한 재물을 빼앗아 백성에게 나눠주는 일지매나,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의뢰인을 위해 악인을 암살하는 칠우 모두 처음에는 제 구실을 못하는 공권력을 보완하는 일종의 자경단이었다가 점점 왕권을 위협하는 혁명가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이다.

    본래 자경단은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시대의 영웅이다. 인조 시대는 무능하고 도덕적 결함을 지닌 왕에게 권력이 집중돼 혼란스러운 시대다. 대길이 같은 노비 사냥꾼이 등장할 수 있는 건 노비를 관리해야 할 공권력이 무너져서이고, 태하가 소현세자의 아들(석견)을 찾아 옹립하려는 건 이 난세가 왕의 무능 탓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초반, 쫓고 쫓기는 두 인물은 한 시대가 낳은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들이자 난세를 견뎌내는 방식에 대한 서로 다른 대답이다. 순리대로 살며 허물어진 국가 시스템을 순간순간 보수해야 하는가, 커다란 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을 성군을 앉혀야 하는가.

    여기에 노비당의 업복이(공형진)는 또 하나의, 더 전복적인 질문을 추가한다. 폭군 때문에 혼란스러운 시대라면, 폭군이 군림할 수 있는 왕권 시스템 자체를 뜯어고치고 낮은 곳에 임한 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들이 가진 욕망과 지향점 안에 현재의 정권하에 사는 수많은 ‘우리’를 투영시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사극으로서의 ‘추노’는 현재를 비추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대궐의 정치, 저자의 정치

    드라마 ‘추노’의 정치학

    몰락한 양반 대길(가운데)은 도망 노비를 잡아 기존 정치 시스템의 위엄을 세우려 한다.

    저자(市場)라는, 기존의 사극에서 양념처럼 등장하기만 했던 공간이 부각되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적어도 ‘추노’ 안에서 저자는 주막과 포졸이 있는 공간적 배경이 아닌, 권력을 향한 수많은 힘의 이동이 이뤄지는 정치적인 공간이다. 독살당한 소현세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 태하는 저자를 뛰어다니고, 권력의 정점에 선 인조와 좌의정 이경식은 거리의 해결사 대길을 고용하는 동시에 권력의 하수인 철웅을 파견한다. 세상을 뒤엎을 꿈을 가진 업복은 총을 들고 밤마다 저자의 양반을 사냥한다. 간혹 이경식의 무리와 그 반대파가 인조 앞에서 서로의 뜻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손쉽게 헤게모니를 쥐는 건 늘 이경식, 더 정확하게는 인조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에서 실제로 정치적 욕망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공간은 저잣거리다.

    ‘추노’에 앞서 등장한 또 다른 사극 ‘선덕여왕’이 탁월한 건, 궁에서 벌어지는 미실과 덕만(선덕여왕), 진평왕 사이의 헤게모니 다툼이 그저 영웅끼리의 다툼이 아니라 궁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치는 행위라는 것을, 그래서 정치란 궁 바깥과 함께 호흡해야 하고 영웅다움이 아닌 그들을 위한 좋은 정책 경쟁으로 승부를 겨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점이었다. 그런데 ‘추노’는 여기서 한발 나아가 궁 바깥 역시 정치 무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대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난세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능동적 움직임이 필요하다. 궁 안의 독재자와 그 추종세력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 만들어진 난세, 그렇다면 이 너머 새로운 시대를 꿈꾸지만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이들이 몸을 던져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곳은 저자일 수밖에 없다.

    탁월한 액션 신을 보여준 액션 사극으로서의 ‘추노’와 정치 사극으로서의 ‘추노’는 바로 이 저자에서 조우한다. 드라마 초반, 대길과 태하, 철웅이 합을 겨루는 장면의 영상은 탐미적일 정도로 아름답다. 한데 이들의 싸움이 정말 치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무술의 고수여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 합이 실상 서로의 정치적 신념을 건 대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안을 몰살시키고 도망간 노비 언년이와 큰놈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대길은 도망 노비 따위는 어서 잡아 시스템의 위엄을 세워야 하고, 태하는 이 대결에서 살아남아 석견을 왕위에 올려야 하며, 태하의 대의나 장인인 이경식의 술수 모두 권력에 대한 욕심일 뿐이라고 믿는 철웅은 태하를 쓰러뜨리고 이경식까지 무너뜨리겠다는 마음으로 검을 휘두른다. 이 때문에 대길은 영춘권에 기반을 둔 신속한 손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하고, 철웅의 검은 합과 합의 엇박 사이에 상대의 급소를 노리며, 최강의 무장인 태하는 자신의 압도적 기량으로 석견을 위해 활로를 연다. 말하자면 그들이 펼치는 활극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몸으로 부딪치는 방법밖에 남지 않은 시대를 사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펼치는 몸의 정치에 가깝다. 비록 이 무리에 끼진 않았지만 총으로 양반을 사냥하는 업복이의 방식 역시 몸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다.

    변화를 위한 주저함

    하지만 태하가 석견을 구출해 조 선비를 비롯한 은둔 사림에 합류한 뒤 그들과 갈등하고, 대길은 자신이 평생을 걸어 쫓던 언년이가 태하와 혼인한 것에 절망하며, 업복이는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 때문에 나쁜 놈과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하면서 ‘추노’의 치열했던 흐름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다. 그동안 외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던 정치적 갈등을 주인공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갈무리해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이 ‘주저함’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극 초반 ‘추노’가,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질주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목적하는 바와 수단 사이에 어떤 괴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길은 노비를 잡기 위해, 태하는 석견을 구하기 위해 칼을 들었고, 업복은 못된 양반을 잡아 노비들이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총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언년이를 보게 된 대길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칼을 든다면 결국 그것으로서 취하고 싶었던 언년이와의 행복한 미래는 무너지고 만다. 석견을 왕위에 올리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갈 거라 여겼던 태하는 당장 반정을 꾀하는 것이 죽은 소현세자의 뜻을 세우려는 자신의 신념과 맞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업복이가 자신의 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른 체하고 ‘그분’이 지정해주는 양반을 잡을 때마다 자금책 노비는 자신의 배를 불리고, 업복이네 어린 여종은 부모와 생이별하는 부조리가 벌어진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도 꿈도 없는 철웅만이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학살극을 벌일 수 있다.

    드라마 ‘추노’의 정치학

    양반 출신 추노꾼 대길(왼쪽)과 도망 노비가 된 무사 태하.

    주인공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좋은 의도는 과연 그에 맞는 좋은 결과를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명분의 문제가 아니다. 종래 사극에서 벌어지던 정치를 진정한 정치라 볼 수 없었던 건 그것이 더러운 권력 지향주의자와 고고한 대의명분을 가진 이들 사이의 대결로 단순화됐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좋은 명분을 가진 이가 권력을 획득하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 하지만 정치가 그렇게 단순한가. 정치가 어려운 건 바른 생각을 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바른 생각만으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려워서다.

    일상에서라면 좋은 의도로 나쁜 결과를 상쇄할 수 있다. 그것은 신념윤리다. 하지만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좋은 의도로 행한 행동들이 역사적 우연성 안에서 의도와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때 그것을 책임지는 책임 윤리다. ‘추노’를 연출한 곽정환 감독의 데뷔작은 2007년 KBS가 방송한 ‘한성별곡-正’. 그는 이 작품에서부터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희망의 대물림

    ‘한성별곡-正’에서 정조는 자신의 뜻을 펼칠 정치력이 필요했지만 자신과 신념이 다른 대비(大妃)와 손잡을 수 없었기에 끝내 현실 정치에서 실패했다. 그의 지원군이 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었을 박상규, 양만오, 이나영 같은 젊은이들 역시 더 나은 세상을 꿈꿨을 뿐, 서로를 위해 연대하지 못해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대의를 지키는 동시에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물론 과거와 현대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힘겨워했던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추노’라는 드라마 한 편이 제시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곽정환 감독의 말대로 “‘추노’에서 ‘한성별곡-正’보다 진일보한 이야기를 담았다면, 그건 희망에서 끝나지 않고 희망을 실현시키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무엇을 가졌기 때문”이다. ‘추노’는 현실정치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지만 권력을 잡기 위해 희망과 신념을 유예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선을 보낸다. 가령 자신의 뜻을 현실 정치에서 펴기 위해 이경식에게 합류한 조 선비와 그를 욕하며 장렬히 죽어간 한섬을 비교해보라. 그것은 단순히 추악한 권력과 의로운 죽음의 대비가 아니다. 한섬은 자신의 죽음으로 뜻을 지켰고 그것은 살아남은 태하를 통해 이어졌다. 그에 반해 조 선비는 이경식이 주도하는 정치 게임 안에서 그저 침묵할 뿐이다.

    자신의 뜻을 현실 정치 안에서 펴기란 어렵다. 하지만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정치 안에서 한번 꺾은 뜻을 세우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추노’의 주인공들은 권력의 칼 앞에 상처투성이가 되면서도 결코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다. 관군들에게 포위당한 대길은 자신이 사랑하던 언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죽음을 맞이하고, 태하는 청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포기한 채 이 나라의 낮은 곳에서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겠노라 말한다. 아마도 ‘추노’에서 최고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 스스로의 신념으로 궁에 들어가 좌의정을 쏜 업복이가 관군에게 제압당하고 그걸 보는 반짝이 아비가 주먹을 꼬옥 쥐는 장면은 ‘추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현실을 변혁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변혁을 향한 꿈을 지킬 때 비로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최소한의 가능성이 열린다. “만약에 우리가 못하면 우리 자식들이 하면 되지”라던 끝봉이의 말처럼.

    태양은 누구의 것인가

    이제 다시 ‘추노’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와보자. 저 태양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과거로부터 이어진 변혁을 향한 꿈은 현재까지 역사적 진보를 만들어왔지만 과연 저 태양은 우리 것인가. 분명 양반과 노비를 가르던 신분제는 사라졌다. 하지만 노비는 떨리는 손으로 강의 얼음을 깨서 물고기를 잡고, 양반은 편히 앉아 여종이 구워 주는 고기를 먹으며 여흥을 즐기는 그 부조리의 현장은 과연 사라졌는가. 무능한 왕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져 민중의 삶이 힘겨운 건 드라마 속 인조 시대만의 병폐인가. 자신의 뜻을 꺾고 권력을 얻은 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그 반대편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수많은 이 시대의 조 선비가 증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길과 업복이 죽음으로 남긴 물음을 살아남은 태하가 평생을 걸고 답해야 하는 것처럼 종영한 ‘추노’가 던진 질문은 남아 있는 우리 시청자의 몫이다. 하여 다시 묻는다. 저 태양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만약 저 태양이 우리의 것이라면 여전히 우리 것이었던 적이 없어서인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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