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자녀 키우기 좋은 나라 1위, 호주

학원 뺑뺑이 돌던 병약한 아이 광활한 자연 속에 뛰고 또 뛰며 럭비선수 꿈꿔

  • 윤필립│시인·호주 전문 저널리스트 phillipsdy@hanmail.net│

    입력2010-04-30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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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주가 해외 거주 근로자들 사이에서 ‘자녀 키우기 좋은 나라’ 1위에 꼽혔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눈부신 햇살, 여유로운 경제. 이런 호주에서 자녀 키우기란 어떨까? 23년 전 호주로 이민 간 호주 전문 저널리스트가 다섯 살 아들을 변호사로 키우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내왔다. <편집자>
    자녀 키우기 좋은 나라 1위, 호주
    Sunburnt Country, and Outdoor People(햇볕에 그을린 나라, 그리고 야외의 사람들). 지구 남반부의 섬 대륙, 호주와 호주 사람들이 이렇게 불리는 건 호주의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호주 사람들이 ‘태양과 맥주, 그리고 섹스를 즐기는 이들’로 소문난 것도 천혜의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 방식 덕분이다.

    그래서였을까. 1920년대에 호주를 방문한 영국 작가 D. H. 로렌스는 소설 ‘캥거루’에 ‘잠 못 이루며 고뇌할 일도 없고, 삶의 근원을 알아볼 필요도 없으며, 죽음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해볼 필요가 없는 나라가 호주’라고 썼다. 특히 아열대성 기후 덕에 나무들이 사시사철 녹색 잎사귀를 매달고 있는 시드니는 항상 멜랑콜리한 런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밝고 활기차다. 그리고 아름답다.

    “시드니 항구의 아름다움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는 포기한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쓴 여행기 ‘바셋서 연대기(The Barsetshire Chron ide)’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앤서니 트롤럽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편’에 이 유명한 대목을 남겼다.

    이 축복받은 자연을 누리는 건 유학생, 이민자 등 ‘외지인’도 마찬가지다. 대문을 나서면 드넓은 잔디공원과 텅 빈 해변이 수없이 많은 나라다보니 자연 집 안에서 TV를 시청하기보다는 럭비나 수영을 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야외 바비큐를 즐기는 것도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다.

    햇볕에 그을린 나라, 호주



    지난 3월 영국계 은행 HSBC가 미국, 영국, 호주, 싱가포르, 홍콩, 아랍에미리트(UAE) 등 6개국에 거주하는 1000여 명의 해외 파견 직원들을 대상으로 ‘자녀 키우기 좋은 나라’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호주가 1위를 했다는 발표가 있었다(463쪽 상자기사 참조).

    호주에 파견된 직원들 중 83%는 “자녀가 새 친구들을 사귀는 데 잘 적응하고 있다”고 응답했고, 63%는 “자녀의 사회 적응도가 고국에서보다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또한 응답자의 78%가 “자녀가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낸다”고 밝히면서 “TV 시청시간도 30% 줄었다”고 답했다. “자녀의 정크푸드 섭취가 줄었다”는 응답도 53%를 기록했다.

    나는 1987년 화가인 아내와 다섯 살짜리 아들과 함께 호주로 이민을 왔다. 아들은 어느덧 성장해 변호사가 되었다. 호주는 내게도 자녀 키우기 좋은 나라였던가? 아들이 호주에서 유년기를 보낸 때와 HSBC의 설문조사 시점에 적지 않은 시차가 있지만, 나름대로 공통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4월 첫째 주말, 가족끼리 떠난 부활절 휴가지에서 아들과 와인 잔을 기울이며 지난 20년 세월을 되돌아보며 대화도 나눴다.

    아들의 이름은 윤영식(尹泳植). 올해 27세의 변호사다. 호주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아이는 서울에서 영재학원, 미술학원, 영어학원, 피아노학원을 시간을 쪼개 옮겨 다녔다. 아이의 아빠는 시인이었고, 엄마는 화가였다. 아빠는 시조(時調)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아이를 영재학원에 보냈고, 엄마는 그림 공부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이는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감기를 앓았다. 건선(乾癬) 피부 때문에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니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태권도와 수영까지 배웠지만 건강은 갈수록 더 나빠졌다. 그런 아이가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난 럭비선수가 되고 싶어요”라고 했다.

    당시 시드니에는 영재학원,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같은 건 없었다. 있다 해도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울과는 달리 오후 시간이 넉넉해져 심심해진 아이는 집 주변 잔디공원에 나가 혼자 럭비공을 차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아이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공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주로 럭비공과 축구공을 갖고 놀았다. 길쭉한 럭비공, 둥그런 축구공만큼이나 서로 다른 외모를 가졌지만 아이들에게 그건 별 대수가 아니었다. 부활절 대화에서 아들은 “외국에서 온 어린이가 호주에 쉽게 적응하는 이유 중 하나가 스포츠 활동”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공을 차느라 해지는 줄도 몰랐다. 정신없이 놀다보면 공원에 어둠이 깃들었고, 퇴근길의 부모가 공원에 와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유난히 병약했던 하얀 얼굴의 아이는 금세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건강한 아이로 변했다. 피부도 말끔해졌다. 그런 역동성이 어디에 숨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로 아이는 뛰고 또 뛰었다.

    호주 도착 두 달째 되는 날 아이는 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아이 예닐곱 명이 집으로 쳐들어왔다. 손에는 초콜릿과 감자칩이 들려 있었다. 기껏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영어로 친구들과 얘기했다. 어쩌다 다툼이 생기면 아이는 언성 높여 영어로 자기주장을 펼쳤다. 그런 모습이 부모는 마냥 신기했다. 여기저기 학원순례를 다니던 서울의 생활이 까마득히 잊혔다.

    허구한 날 놀기만 해도 되나 하는 걱정이 생길 즈음, 아이는 초등학교(primary school) 입학 전에 다니는 유치원((kindergarten)에 들어갔다. 집 근처 초등학교 부설 유치원이었는데, 그냥 ‘어린이 놀이터’라고 보면 된다. 잔디밭으로 나가 아침 내내 뛰어놀고, 간식 먹은 다음 그림 그리면서 놀고, 점심 먹고 노래 배우며 놀고, 틈만 나면 잔디밭에 나가 공차기 하고….

    잔디밭에서 뛰고, 또 뛰고

    이런 공립 유치원에 소요되는 예산은 주정부(85%)와 연방정부(15%)가 나눠 부담한다. 물론 각종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사립 유치원도 있지만 공립보다 20%가량 비쌀 뿐이다. 호주 어린이의 70% 이상이 공립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등학교에 다닌다. 유치원 입학연령인 다섯 살에 이민 온 영식이와 달리, 호주 어린이 대부분은 부모가 직장에 있는 동안 유아원(child care center)에 맡겨진다. 즉, 유아원-유치원을 거쳐 의무입학 나이인 6세가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한국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영식은 가톨릭이 운영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엄밀히 말하면 사립학교이지만, 여기선 그냥 ‘가톨릭 학교’라고 한다. 개인이 부담하는 학비도 거의 없고, 수업도 공립학교와 다를 바 없다. 다만 가톨릭 신자라는 증명을 학교에 제출해야 한다.

    아이가 다닌 가톨릭 초등학교는 지역 성당과 한울타리 안에 있었다. 교사가 전부 가톨릭 신자여서 종교적 색채가 강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수업 내용도 공립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사립학교가 교육부의 정기적 관리감독을 받으며 상급학교가 요구하는 과목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아이는 한국 영재학원에서 배운 산수 덕을 톡톡히 봤다. 게다가 미술, 피아노 등 기초를 익힌 상태라 다른 학생들보다 진도가 앞섰다. 태권도와 수영도 미리 배운 덕분인지 모든 운동 종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한국의 지나친 조기교육이 비판받고 있지만, 일부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주에선 스포츠와 예능 과목을 잘하면 ‘스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스포츠를 잘하는 영식이도 학교에서 스타로 통했다.

    스포츠 통해 팀워크 體化

    또 영식이는 선발학교(selective school)인 ‘시드니보이스 하이스쿨’에 합격한 첫 번째 학생이 되었다. 선발학교는 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는 일종의 영재학교다. 정부는 공립학교 중 일부를 선발학교로 선정해 일류 사립학교 이상의 시설과 재정을 지원해준다. 당연히 대입 실적이 좋을 수밖에 없어 선발학교 입학 경쟁은 치열하다.

    호주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명문 고등학교인 시드니보이스는 학부모들을 자주 초청했다. 교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호주 의무교육은 수준이 높아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며 “특히 우리 학교는 총리를 비롯한 수많은 명사를 배출했다”고 자랑했다. 그는 “호주의 의무교육은 지성, 사회성, 예술성은 물론이요 학생의 장래성을 감안한 기술 능력 함양에도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고 덧붙이곤 했다.

    참고로 호주의 교육제도는 유치원-초등학교(1~6학년)-고등학교(7~12학년)-대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의무교육은 10학년까지다. 10학년을 마치면 일부는 졸업을 하고,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은 11~12학년(senior secondary)에 진학한다. 10학년까지는 영어, 수학, 외국어, 과학, 사회 환경, 기술, 체육, 예술 등을 전부 배우지만 11~12학년은 영어, 수학 등 대입에 필요한 과목 위주로 공부한다.

    자녀 키우기 좋은 나라 1위, 호주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호주 어린이들.

    그런데 호주에는 10학년까지만 다닌 사회 저명인사가 많다. 폴 키팅 총리, 캐리 오브라이언 호주 국영 abc-TV 메인 앵커, 딕 스미스 CEO이자 비행 탐험가, 영화배우 니콜 키드만 등이 그 예다. 키팅과 딕 스미스는 가난해서, 오브라이언 앵커는 학교 다니기가 싫어서, 키드만은 암에 걸린 어머니 병간호 때문에 10학년까지만 다녔다고 한다.

    영식이는 호주로 건너와 럭비, 크리켓, 축구, 농구, 조정(漕艇), 골프 등 다양한 스포츠를 배웠다. 이 중 단체 스포츠가 아닌 것은 골프가 유일하다. 특히 초등학생 때는 축구팀을, 고등학생 때는 농구팀을 직접 만들어 뛰놀았다. 영식이는 특히 자신이 결성한 농구팀을 호주농구협회에 등록한 일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호주에서 사회체육팀을 창단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영식이도 자기 초등학교의 학생 수가 많지 않자 다른 학교 아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축구팀을 만들었다. 영식이가 만든 축구팀은 지금도 주말마다 경기를 한다. 영식이는 아마추어 심판 자격증을 취득해 이 축구팀의 심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드니보이스 고등학교엔 이스라엘, 인도, 독일, 이탈리아 출신 학생들이 농구와 조정 팀을 제각각 만들어 주말마다 경기를 한다. 영식이가 만든 농구팀은 한국 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한국팀이었다.

    부활절 휴가지에서 아들에게 왜 그렇게 단체 스포츠에 집착했는지 물었다. 늘 시간에 쫓기면서도 유독 스포츠 활동만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의 답변은 이랬다.

    “호주에서 팀워크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개인 능력이 뛰어나도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능력이 부족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팀워크를 몸에 익히려면 단체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많은 호주 젊은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단체 스포츠 활동을 하다보면 개인의 특출함보다 팀의 조화가 더 좋은 성과를 가져온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규칙 지키기’에는 엄한 편

    스포츠를 즐기는 호주가 모든 면에서 자유분방할 것 같지만, 호주의 학교들은 규칙을 매우 중히 여긴다.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 2개를 소개한다.

    2009년 10월19일, 애들레이드 주(州)에 있는 ‘라그스베이 초등학교’ 주리 게일 교장은 지역 신문에 “초등학교 6~7학년 학생들의 이성 간 포옹을 금지한다”는 공고문(written statement)을 게재했다.

    게일 교장은 공고문에 “고학년 학생들이 교정에서 포옹을 하거나 애정표현을 하면 저학년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며 “어른들의 세계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는 선배가 후배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2006년에도 비슷한 학칙을 만든 학교가 있었다. 영국 찰스 왕세자가 다닌 학교로 유명한 빅토리아 주(州)의 질롱 고등학교에서 “애정표현은 말할 것도 없고, 연인으로 지내는 것조차 금지한다”고 선언해 파장이 컸다.

    학부모들의 반응은 대략 반반으로 나뉘었다. 지난해 10월 호주의 주요언론인 ‘선 헤럴드’가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학교에서의 포옹 금지’를 찬성한다는 의견이 41%, 반대한다는 의견이 59%로 나왔다(그런데 좀 아이러니한 것이, ‘프리 허그(Free Hug)’ 캠페인은 호주에서 시작됐다).

    다음은 지난해 10월 불거진 사건. 멜버른에서 한 엄마가 아홉살 딸을 나무숟가락으로 때렸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TV에 나온 나무숟가락을 보니 한국의 주걱 같았다. 딸이 학교 교사에게 엄마의 ‘폭행’을 알렸고, 교사는 즉각 경찰에 연락했다. 빅토리아 경찰 당국은 “아이를 때린 부모의 행위가 혼내주는 차원인지, 가정폭력인지 가늠하기 위해 경찰은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다”고 밝혔다.

    어린이 체벌 문제는 늘 세계적인 관심사이기 때문에 이 사건 또한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특히 다국적 뉴스채널 스카이 뉴스, 미국의 NBC, 일본의 저팬 투데이 등에서 크게 보도했다. 사태가 커지자 호주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데일리텔레그래프가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어린이 체벌에 찬성하는 의견이 94%, 반대가 6%로 나왔다.

    자녀 키우기 좋은 나라 1위, 호주

    필자의 아들이 다섯 살 때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 공원에는 이따금 캥거루가 놀러온다.

    이토록 찬성률이 높은 건 호주의 오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유럽의 죄수들을 모아뒀던 역사적 배경을 가진 탓에 호주는 유럽문화권 국가 중 체벌에 가장 관대한 편이다. 교사가 학생의 손바닥을 때리는 것을 최근까지 허용했을 정도다. 호주 역사학자들은 호주의 관대한 체벌 문화에 대해 ‘식민지 역사의 잔재’라고 비판한다.

    캐빈 러드 총리도 이번 사건에 대해 한 마디 거들어 물의를 빚었다. “자녀가 가정의 룰을 어기면 주먹으로 때려줘야 한다(whack across the knuckles)”고 한 것. 이에 많은 아동심리학자가 “호주 부모들에게 나쁜 메시지를 전달했다”며 러드 총리를 강하게 비판했다.

    교통 여건은 안 좋아

    굳이 HSBC의 설문조사가 아니더라도 호주는 어린이들이 공부하며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좋은 나라라는 정평이 나 있다. 호주의 백인 정착 역사가 222년에 불과하지만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학문적 성과도 크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삶의 질이 높은 국가’ 2위이며, 호주가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도 10명이나 된다.

    의학상, 화학상, 물리학상 수상자가 대부분으로, 특히 의학 분야에서 호주는 인류에 큰 공헌을 했다. 항생제인 페니실린 사용에 관한 호주의 연구가 없었다면 많은 질병의 정복이 늦어졌을 것이다. 형광등, 복사기, 자동차 에어컨, 항공기 블랙박스, 빨래건조기 등이 호주에서 발명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호주라고 다 좋을 순 없다. 호주의 결점을 꼽자면 일단 교통시스템. 한국과 비교해 많이 뒤떨어져 있다. 아직 호주에 와보지 않은 사람들은 호주 도시들이 아주 한적할 것으로 생각한다. 도로가 널찍하고 자동차 통행량도 많지 않아 사람들이 여유롭게 다닐 것으로 짐작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약 200년 전 마차가 다니던 시절에 만든 도로를 고치고 넓혀 사용하기 때문에, 호주 대도시의 도로는 기대보다 훨씬 좁고 복잡하다. 출퇴근 시간 도심거리는 서울 못지않은 교통 혼잡이 발생한다.

    호주 대륙은 한반도의 35배에 달할 정도로 광대하고, 인구도 2000만명 남짓으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국가다. 그러나 도시의 거주 사정은 영 딴판이다. 시드니 인구가 400만명이 넘고, 멜버른 인구는 400만명에 육박한다. 도시집중 현상이 심한 것. 호주 인구의 약 95%가 인구 2만명 이상의 도시에 살고 있다.

    그러나 도심을 조금만 비껴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광활하게 펼쳐진 대자연 속에 아름답고 한가로운 길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드넓은 대륙에 100만명(호주 인구의 5%에 해당)이 흩어져 살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사정이 이렇다보니 호주의 시골이나 내륙 오지로 들어가면 시속 100㎞ 이상으로 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야말로 쌩쌩 달린다. 차창 밖 경치가 정신없이 뒤로 달려간다. 물론 그런 식의 여행으로는 호주 대자연의 속내를 전혀 알 순 없지만.

    부모 눈으로 보면 아들은 먼 타국에서 무난하게 잘 자란 것 같다. 하지만 본인으로선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부활절 대화를 계기로 알게 됐다.

    호주는 명실 공히 다민족, 다문화 국가다. 1901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진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란 얼룩이 있지만, 이는 인종적 차별이라기보다는 아시아 출신 저임금 노동자의 호주 진출을 막아보자는 의도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한국 출신으로 호주에서 성장한 영식의 견해는 이렇다.

    “학교나 사회에서 한국 출신이라 불리하다고 느껴본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마이너리티로서 특별대우를 받은 적이 더 많다. 토론대회에 출전할 학생을 선발할 때도 ‘아시아적 가치’를 곁들여 발언할 수 있는 내가 훨씬 유리했다. 호주가 국가이념으로 삼는 평등주의(Egalitarianism)는 실제 호주사회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다. 차별이나 우대받을 일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공정하게(fair go)’가 통하는 나라다. 물론 ‘기득권 유지’를 위한 본능적인 배타성이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하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훨씬 약하다. 가끔 내 주위 아시아계 친구들이 ‘호주의 차별’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면 ‘너희 모국을 생각해봐라’고 말한다. 내 관점에서 보면 호주 국민은 대체로 순박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호주에서 성장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끔찍한 입시경쟁을 겪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물론 호주 학생들도 지독하게 열심히 공부한다. 10학년까지만 여유를 부릴 수 있지, 이후에는 한국과 비슷하다. 특히 대학에서는 죽어라 공부에 매달려야 제때 졸업이 가능하다.

    부자 간 문화 차이 극복이 관건

    나는 대입시험 하루 전에도 축구장에 나가 선수로 뛰었다. 덕분에 극에 달한 긴장감을 해소했고,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호주에선 나말고도 이런 수험생이 많다. 이 얘기를 한국에서 온 친구들에게 했더니 ‘호주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며 내 입을 막아버렸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이민 온 친구들 중에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한국식 사고를 고집하는 부모와 호주식 사고에 익숙한 자녀가 갈등을 빚기 때문이다. 중간에 적절한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큰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 특히 사춘기 때 부모와 갈등이 심화돼 치명적인 사태로 치닫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나 역시 아들에게 ‘외국에서 자녀 키우는’ 부모 입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교양을 익히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호주는 다양한 교양을 터득하기엔 여건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자녀 키우기 좋은 나라 1위, 호주
    尹 泌 立

    1954년 충남 부여 출생

    호주 Miller College of NSW(TAFE) 졸업

    한국 ‘시문학’, 호주 ‘MEANJIN’지로 등단

    저서 : 시집 ‘부끄러운 시들’(공동) ‘시드니 랩소디’, 산문집 ‘시드니에는 시인이 없다’, 한국문학을 소개한 영문책자 ‘Many Voices’(WCP Press/공저) 등

    2001년 WCP문학상 수상

    호주 커뮤니티 ‘오픈칼리지’ 강사


    스포츠에 지나치게 열광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럭비나 크리켓과 연애하는 것처럼 호주 사람들은 입만 열면 스포츠 얘기다. TV에서도 스포츠 중계를 너무 많이 한다.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지만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선택과목이었다. 스포츠를 못하면 바보 취급을 하면서 역사는 몰라도 된다는 풍토가 있다. 그건 고전음악 등도 마찬가지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아들과의 대화 덕분에 나는 맘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의 선택으로 이민을 왔고, 호주 정착과정에서 부모 노릇을 만족스럽게 못했다는 자책감이 적지 않았는데 아들이 만족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HSBC의 설문조사에 응한 부모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싶다. 휴가지의 밤은 파도소리와 함께 깊어간다.

    HSBC ‘해외 근로자의 자녀(Offshore Offspring)’ 보고서는…

    “호주에선 밖에서 뛰놀고, 미국에선 정크 푸드 많이 먹어”


    영국계 은행 HSBC는 고국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는 해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엑스팻 익스플로러(Expat Explorer)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는 해외 거주 근로자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규모의 설문조사로, 2009년 2월부터 4월까지 50여 개국에 거주하는 31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HSBC는 이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해외 근로자의 경제(Expat Economics)’‘해외 근로자의 경험(Expat Experience)’을 발표했다. 세 번째 보고서 ‘해외 근로자의 자녀(Offshore Offspring)’는 해외 거주 근로자들이 자녀를 키우며 직면하는 다양한 어려움에 대해 분석했다.

    이 보고서는 조사 대상 중 자녀가 있는 1000여 명의 답변을 바탕으로 미국, 영국, 호주, 홍콩,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UAE) 등 6개국을 비교했다. ▲학교교육 ▲새로운 친구 사귀기 ▲새로운 문화체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 만들기 등의 요소를 기준으로 ‘자녀 키우기 좋은’ 국가 순위가 결정됐다. 그 결과 호주에 이어 싱가포르와 홍콩이 외국인이 자녀 키우기 좋은 나라에 올랐다.

    영국이나 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자녀 양육에 지출되는 비용이 자국보다 높고, 교육의 질과 자녀의 사회 적응 등에 대해 낮게 평가해 이들 국가는 최하위에 머물렀다. 이들 국가에 머무는 해외 근로자들은 “자녀가 친구를 사귀거나 공동체와 어울리기 어려워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두 나라는 자녀를 건강하게 키우기 힘든 나라로도 꼽혔다. 영국과 미국 응답자 중 각각 43%와 27%가 “자녀가 TV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고 답했다. 또 미국 응답자의 47%가 “미국으로 이주한 뒤 자녀들의 정크 푸드 섭취량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한편 모든 지역의 응답자 중 16%가 “해외 근로자 자녀가 겪는 유일한 문제는 고국에 있는 친구, 친척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리사 우드 HSBC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부문대표는 “이번 보고서를 통해 해외 근로자들의 양육 고민이나 자녀에 대한 기대가 일반 부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부모가 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며, 특히 해외 거주 근로자들에게는 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강지남│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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