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토착형 영웅의 매력 유쾌 상쾌 통쾌

홍길동 vs 전우치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04-30 19: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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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초에 천한 길동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게 하셨던들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 -‘홍길동전’ 중에서
    • 나를 벌할 힘으로 백성을 편안케 하라.
    • -‘전우치전’ 중에서
    토착형 영웅의 매력 유쾌 상쾌 통쾌

    토착형 영웅 홍길동과 전우치는 영화 ‘홍길동의 후예’(왼쪽) ‘전우치’ 등으로 작품화되며 지금도 영웅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신출귀몰한 변신의 귀재다. 제우스가 아름다운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변신했다면, 이들은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때로는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들을 혼내주기 위해 변신한다. 홍길동과 전우치. 그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제멋대로 뒤흔들어, 인간이 환상의 유혹 앞에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현실과 환상의 단단한 구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진정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하다. 그들은 아무리 사라지고 도망쳐도, 설사 ‘죽었다’고 소문이 나도,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것만 같은,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민중의 가슴에 한번 맺히면 지워지지 않는 영웅이다. 그들은 스스로 ‘가짜’이고 ‘환상’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임금을 비롯한 권력가들의 세계관을 교란시킨다.

    이때 임금이 팔도에 공문을 내려 길동을 잡으라 명했다. 그러나 길동의 조화가 무궁하여 서울 큰길에서 수레를 타고 왕래하기도 하고, 각 고을에 미리 알리고 가마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암행어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탐관오리의 목을 벤 다음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가어사(假御史) 홍길동이 올리는 보고서’라 하였다. 임금은 더욱 진노하여, “이놈이 각 도에 다니며 이런 난리를 치는데도 아무도 잡지 못하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오? … 이놈은 사람은 아니고 아마 귀신인 것 같소. 신하 중에서 누가 그 근본을 아는 사람이 없겠소?”

    -허균, ‘홍길동전’,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7~28쪽.

    그들에게는 전형적인 공통점과 매력적인 차이가 공존한다. 홍길동에게 변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면, 전우치에게는 변신 자체가 그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홍길동의 키워드가 ‘호부호형(呼父呼兄)’과 ‘율도국’인 반면, 전우치의 키워드는 ‘변신’인 것이다. “자, 이제 어디 한번 변해볼까” 하는 영화 ‘전우치’ 속 대사는 전우치의 매력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낸 셈이다.

    홍길동의 출생과 성장과정이 그의 캐릭터 형성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면, 전우치는 현재의 변신 그 자체, 변신의 능력이 있는 한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유희적 가능성이 중요하다. 홍길동의 변신이 프로메테우스의 반항을 닮았다면 전우치의 변신은 디오니소스의 유희와 축제를 더 많이 닮은 것이다. 홍길동의 정의(正義)가 위에서 내려다본 정의의 이상형이라면, 전우치의 정의는 아래에서 올려다본 정의의 다채로운 변형이다.



    또한 홍길동의 관료제 비판이 시스템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 의지를 담고 있다면, 전우치가 힘 있는 자들을 혼내는 방식은 단지 그들의 권력을 풍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자들이 터무니없이 망가지는 모습’ 자체를 즐기려는 쾌락에 초점이 맞춰질 때가 많다. 말하자면 홍길동의 변신은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데 반해 전우치의 변신은 장난스럽고 쾌활하다.

    벼슬 하는 놈 치고 백성들을 위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영화 ‘전우치’ 중에서

    영웅의 백그라운드

    천하로 집을 삼고 백성으로 몸을 삼겠노라.

    -‘전우치전’ 중에서

    홍길동이 좋아하는 인생 지침서는 ‘육도삼략’ ‘주역’ 등이고, 롤 모델은 장길산이다. 홍길동은 불교경전 해석과 풍수지리학에도 능하다. 주역의 팔괘로 점을 치고는 둔갑법으로 몸을 숨겨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모면한다. 박학다식한 홍길동의 이상은 허균의 ‘호민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토착형 영웅의 매력 유쾌 상쾌 통쾌

    영화 ‘홍길동의 후예’의 한 장면.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백성, 언제든지 권좌에 있는 자들을 끌어내릴 수 있는 원한에 찬 백성이 바로 호민이다. 허균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존재가 바로 호민이라고 본 셈이다.

    “불행스럽게 견훤이나 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홍길동의 방황은 자신의 신분적 제약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됐다. 반면 전우치의 핵심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다. 전우치는 사실관계를 알아보기도 전에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눈물에 마음이 허물어지는 스타일이다. 홍길동의 주된 타깃이 적서(嫡庶)차별이었다면 전우치의 타깃은 순간순간 만나는 백성들의 아픔이었다. 홍길동은 어릴 적부터 거의 완성된 인간형으로 제시된다. 총명하고 출중하지만 신분의 장벽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인간형으로 형상화된다. 이에 반해 전우치는 좀 더 드라마틱한 ‘성장소설’에 어울리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홍길동에게 좌절된 벼슬자리에 대한 미련이 강하게 나타나는 반면 전우치는 강자를 혼쭐내고 약자를 도와주는 감성의 유희 자체에서 무한한 쾌락을 느낀다.

    짓궂은 전우치의 성장

    전우치는 주색잡기에 빠진 관료들을 혼내주기 위해, 술자리에서 창기를 데려다준다고 약속하고는 관료들의 부인을 데려온다. 그런가 하면 그림이 현실이 되는 둔갑술을 자주 사용한다. 족자에 말을 걸면 족자 속 미인과 동자가 걸어 나와 술을 따르기도 한다. 그는 오생이라는 사람을 현혹해 큰돈을 받고 미인이 그려진 족자를 팔아먹는다. 족자를 사간 오생이 밤에 미인을 불러내 술을 마시고, 술김에 춘정이 돋아나 미인과 침상에 들려는 순간, 오생의 처가 나타나 족자를 확 찢어버린다. 전우치는 자신의 족자를 찢은 벌로 오생의 부인을 구렁이로 만들어버린다. 이렇듯 전우치가 도술을 부리는 동력은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일 때가 많다.

    우치 그림을 보니, 미인도 그리고 아이도 있어 희롱하는 모양이로되, 입으로 말은 못하나 눈으로 보는 듯하니 생기 유동한지라. 모든 소년들이 보고 흠앙함을 마지 아니 하거늘 …… “내 족자의 화려함도 사람의 이목을 놀래려니와, 이중에 한층 더 묘한 곳을 구경케 하리라” 하고 가만히 부르되, “주선랑은 어디 있느뇨?” 하더니, 문득 족자 속의 미인이 대답하고 나오거늘. 우치왈, “미낭은 모든 상공께 술을 부어드리라.” …… 오생이 술이 대취하여 족자를 가지고 외당에 들어가 다시 시험하려 하고, 족자를 벽상에 걸고 보니, 선랑이 병을 들고 섰거늘, 생이 가만히 선랑을 불러 술을 청하니, 선랑과 동자 나와 술을 권하거늘, 생이 그 고운 태도를 보고 사랑하여, 이에 옥수를 이끌어 무릎 위에 앉히고 술을 받아 마신 후 춘정을 이기지 못하여 침석에 나아가고자 하더니, 문득 문을 열고 급히 들어오는 여자 있으니, 이는 생의 처 민씨라.

    -‘전우치전’ 중에서

    이렇듯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기질과 유아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에 이끌리는 전우치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중요한 계기는 자신보다 더 강력한 내공을 지닌 서화담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적수라고 생각한 사람을 스승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변신의 유희에 그치지 않고 성장의 필요성을 자각한다. 홍길동에게는 정해진 스승이 없는 반면(그는 어릴 때부터 이미 독학으로 완성된 존재로 그려진다) 전우치는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 배우고 변하는 스타일이며 마침내 서화담이라는 거대한 스승을 만나 본격적인 배움의 여정에 들어선다. 말하자면 ‘홍길동전’에는 홍길동보다 잘난 인물이 없다. 홍길동의 유일한 스승은 바로 그 자신이다.

    신이 전하를 받들어 만세를 모실까 했으나, 제가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홍문관이나 문(文)으로는 예문관 벼슬길이 막혀있고, 무(武)로는 선전관 벼슬길이 막혔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방을 멋대로 떠돌아다니면서 관청에 폐를 끼치고 조정에 죄를 지었던 것이온데, 이는 전하로 하여금 아시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홍길동전’ 중에서

    개인의 욕망 vs 타인의 고통

    토착형 영웅의 매력 유쾌 상쾌 통쾌

    영화 ‘전우치’에서 강동원은 변신의 귀재이자 장난꾸러기인 이색 영웅 전우치 역을 맡았다.

    이 아이 비록 영웅의 기상이 있으나 어디다 쓰리오.

    -‘홍길동전’ 중에서

    진정으로 하늘을 대신해서 정도(正道)를 행하는 도다. 왜 오늘날에는 이런 무리가 끊기고 말았을까! 애석하다! 애석하다!

    -용여당, ‘수호전’ 중에서

    홍길동은 정치제도 자체를 바꾸고 싶어 하는 체계적이고 집단적인 야망을 드러낸다. 홍길동에게는 백성을 도와주려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호부호형 불가’의 한(恨)을 씻어내고, 현실의 권력시스템을 생산적으로 비판하며, 정치인으로서 환상 속에서나마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우선이다. 반면 전우치에게서는 개인의 정치적인 성공보다 타자의 고통이 도드라진다. ‘홍길동전’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홍길동의 변신술에 놀라 어안이 벙벙한 고위 관리들의 당혹스러운 표정이라면, ‘전우치전’에서는 고통 받는 백성, 전우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얼굴이 부각된다. ‘홍길동전’이 거의 ‘원톱’으로 진행되는 원맨쇼라면, ‘전우치전’은 다양한 캐릭터의 산전수전이 작품 읽기의 중요한 포인트다.

    홍길동은 공동체의 집단적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 변신술을 쓰는 반면, 전우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무기로 변신술을 활용한다. 홍길동의 마인드가 사회 개혁적이라면 전우치의 마인드는 심리 치유적인 셈이다. 홍길동의 행적 하나하나는 거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데 반해, 전우치는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다가 우연히 어려움에 빠진 타인을 만나 상황에 적절하게 도와주는 방랑자다.

    빈민구휼이나 탐관오리 협박을 주된 업무로 삼았던 홍길동과 달리 전우치의 해결사적 면모는 ‘상사병 치유’ 같은 민원 아닌 민원(?)에까지 닿아 있는 점도 흥미롭다. 전우치는 상사병에 걸린 친구 양봉환을 위해 과부 정씨를 데려오다가 강림도령에게 들킨다. 오랫동안 절개를 지켜온 과부 정씨의 마음까지 현란한 도술로 바꿔보려는 전우치. 강림도령은 여인의 절개까지 훼손하려는 전우치를 도술로 혼쭐낸 후 가난한 탓에 시집을 못 간 노처녀로 과부 정씨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한다. 전우치는 사랑의 메신저, 큐피드 역할까지 도맡고 싶어했다.

    좌절당한 행복추구권

    이번에 곡식을 나누어줌으로써 혹 나를 칭송하지만 이는 마땅치 아니한지라. 대개 나라는 백성을 뿌리 삼고 부자는 빈민이 만들어줌이어늘 이제 너희들 양순한 백성과 충실한 임금으로 이렇듯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건마는 벼슬한 이가 길을 트지 아니하고, 가멸한 이가 힘을 내고자 아니함이 과연 천리에 어그러져 신인이 공분하는 바이기로 내 하늘을 대신하여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이리저리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깨달아 잠시 남에게 맡겼던 것이 돌아온 줄로만 알고 나의 힘을 입는 줄로는 알지 말지어다. 더욱이 자청하여 심부름한 내가 무슨 공이 있다 하리요. 이렇게 말하는 나는 처사 전우치로다.

    -‘전우치전’ 중에서

    홍길동과 전우치. 그들은 현실 속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달콤한 환상의 힘으로, 상처 받고 고통 받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준다. 그들이 전파하는 환상은 실로 유쾌 상쾌 통쾌해 그들의 활약상을 읽는 사람들은 ‘알면서도’ 그 환상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준다. 터무니없는 환상이라도 좋다, 우리의 고통을 잠시나마 치유해줄 수 있다면! 게다가 이러한 영웅담은 전세계에 걸쳐 발견되는 인류 공통의 환상이다. 날이 갈수록 견고해지는 시스템의 장벽 앞에서, 국가나 정부나 단체에는 속 시원히 호소할 수 없는 개인의 원망과 한탄이 점점 더 고립된 내면의 독백으로 사라져가는 세상에서, 홍길동과 전우치 같은 불세출의 영웅은 매번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어 대중 앞에 호출된다. 점점 더 냉혹하고 각박해지는 사회에서 대중은 매번 더 강력하고, 더 세련되고, 더 환상적인 영웅을 불러낸다. 영웅을 향한 이 멈출 수 없는 대중의 갈망에는 바로 눈앞에서 좌절당한 ‘행복추구권’을 향한 갈증이 숨어 있는 것 아닐까.

    그들은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고, 관아도 무서워하질 않아요. 금은보화를 나누고, 좋은 옷을 입고, 독에 술을 가득 채워두고 마시고, 고기도 실컷 먹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어요!

    -김성탄, ‘수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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