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평양공화국의 이중생활

전기·수도 끊긴 고층아파트 생활 고역,외제화장품에 몸매바지 즐기며 연인에게 꽃 선사하기도

  • 주성하│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입력2010-06-03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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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공화국의 이중생활

    평양의 빽빽한 아파트촌 전경. 독일 한스자이델재단이 2009년 5월 촬영한 사진이다.

    북한의 공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민주주의’나 ‘인민’ ‘공화국’과 같은 단어들과 매우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단어들 중에서도 북한 당국이 가장 애용하는 단어는 ‘공화국’이다. 외부에 발표하는 성명만 봐도 ‘우리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북한이 지칭하는 ‘우리 공화국’은 오래전부터 ‘평양공화국’과 ‘지방공화국’으로 갈렸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민’도 ‘배급제 계급’과 ‘자력갱생 계급’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평양과 지방의 생활수준 격차가 크게 벌어졌으며, 식량 배급을 받고 사는 특혜 계층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평양 주민들은 당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특혜를 받고 있다. 스스로도 지방 주민들에 비해 우월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식량 배급도 그 어느 지방에 비할 바 없이 잘 받고 있다. 이런 까닭에 정권에 대한 평양 주민들의 충성심은 그 어느 지방보다 높다.

    “장군님께 충성을 바치라”

    평양 주민 하면 늘 맨 먼저 떠오르는 한 할머니가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 기근이 닥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을 때 가깝게 알고 지냈던 할머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장마당에서 구걸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자기 집에 데려가 밥을 먹이던 마음 푸근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1950년대 노동당에 입당한 ‘노당원’이었다. ‘수령님’을 말할 때면 늘 눈물이 글썽였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장군님이 곧 해결해주실 것이니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고 굳게 믿었다. 자식들에게도 항상 “장군님께 충성을 다 바치라”고 얘기하곤 했다. 할머니는 내가 사회의 부조리를 말할 때마다 추상같은 표정을 지으며 “사상이 썩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절대 못 본다”고 화를 내셨다. 그 때문에 할머니 앞에선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사람들은 왜 폭동을 일으키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치범 수용소라든지, 치밀한 감시체계라든지, 세뇌 교육 같은 것을 이유로 든다.

    그러나 단지 이 때문만일까. 북한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북한 주민들에게서도 찾아야 한다. 북한 정권이 저렇게 오랫동안 버티고 있는 데는 그 할머니처럼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맹목적인 충성심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랫동안 지속된 치밀한 세뇌교육과 언론통제의 탓이기도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평양 시민의 대다수는 이 할머니처럼 충성심 높은 사람들이었다.

    평양은 시민 구성부터 다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평양에는 성분이 나쁜 사람이 살 수 없다. 심지어 외국인 눈에 안 좋게 보인다고 장애인들까지 모두 지방으로 추방했다.

    북한 당국은 이렇게 고르고 고른 사람들을 평양에 뽑아놓고 지방 통행도 엄격히 통제한다. 평양 사람들은 지방에 다녀오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지방 사람들이 평양에 다녀올 수 있는 통행증을 받기란 정말 어렵다. 지방에는 평양 구경 한 번 못해본 사람이 부지기수다.

    평양은 외관상 외국에 자랑해도 손색없는 ‘쇼윈도’로 꾸며졌다. 아파트가 즐비하고 극장과 영화관, 놀이공원과 같은 문화 인프라가 잘 갖춰졌다. 지하철, 버스 같은 대중교통체계도 잘 정비돼 있다.

    평양 사람들에게 가장 살기 좋았던 때를 물으면 아마 1970~80년대를 꼽는 대답이 압도적일 것 같다. 이때가 평양의 전성기였으니까. 배급도 잘 줬고, 자고 나면 현대적 건축물들이 쑥쑥 들어섰다. 상점에서는 부족하나마 필요한 물품도 살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았다. 대다수 사람의 생활수준이 고만고만했다.

    1994년 겨울부터 난방 끊겨

    그러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이후 본격화돼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경제난은 평양 사람들의 만족스러웠던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배급을 줬다 말았다 하는 일이 자주 반복됐다. 그런 까닭에 지방 사람들은 배급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단련이 됐다. 하지만 평양에 찾아온 고난의 행군은 너무나도 급작스러웠다.

    나는 1990년대에 평양에 있으면서 그 현장을 두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체험했다. 고난의 행군이라면 대개 식량난을 떠올리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난방이 멈춰선 것이 가장 먼저 피부에 와 닿았다. 평양의 아파트들은 평양화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한 뒤 나오는 온수에 의존해 겨울 난방을 해결한다.

    1993년까지만 해도 집 안에서 속옷만 입고도 뜨뜻하게 지냈지만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그해 겨울부터 난방공급이 끊어지는 곳이 갑자기 늘어났다. 평양의 중심부인 중구역이나 보통강구역, 모란봉구역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난방이 끊겼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방 안에 이불을 깔아놓았다. 입김이 나오는 방 안에서 밤에는 양말에 버선을 겹쳐 신고 솜옷에 모자까지 쓰고 잤다. 이런 난방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평양 사람들은 요즘도 겨울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비닐통에 더운물을 채운 뒤 이불 안에 넣고 자는 집이 많다고 들었다.

    다음으로 정전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버스가 달리다 멈추고, 아파트에선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짐을 들고 고층 아파트를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전기가 돌지 않으니 수돗물 공급이 중단되는 곳도 늘었다. 물이 나오질 않으니 양동이를 들고 내려와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 갔다. 만경대구역 광복거리나 낙랑구역 통일거리 같은 곳에는 겉보기에 멋있는 고층아파트가 많다. 그러나 전기와 물이 공급되지 않으니 이런 아파트 생활은 그야말로 고문이다.

    고난의 행군 당시 우리 담임교수도 광복거리의 한 아파트 15층에 살았는데, 그 생활은 형용하기 힘든 것이었다. 담임교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양동이를 들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공동수도에서도 물이 항상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루 몇 차례 정해진 시간에 나오기 때문이다. 출근시간 전인 새벽에는 공동수도 앞에 긴 줄이 서 있게 마련이었다. 겨울엔 추위에 떨면서 30~40분 기다렸다 물을 받아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앞서 올라간 사람들이 흘린 물로 계단은 얼음판이 되기 십상이다. 또 공동수도에서조차 물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큰 용기에 물을 저장해놓는다. 급하면 옆집에서 물을 꾸어다가 다음에 갚기도 한다.

    이렇게 힘들게 올려온 물은 절약, 또 절약해 써야 한다. 밥하고 마시는 데는 어쩔 수 없이 쓰지만, 세수할 양은 못 된다. 담임교수도 한 컵 분량의 물로 세수했다. 양치하고 남은 물로 수건을 살짝 적신 뒤 그것으로 얼굴을 닦는 ‘고양이 세수’를 한다고 했다. 목욕 한 번 하려면 큰맘을 먹어야 한다.

    가장 곤란한 점은 화장실 문제였다. 광복거리 화장실은 동양식 수세식 변기를 사용하는데, 큰일을 보고 나면 그걸 처리할 물이 부족하다. 물론 아주 부지런하다거나 젊은 사람이라면 화장실용 물까지 아침에 길어갈 수 있지만, 병약자는 그러기가 힘들다.

    “번대 맞았다”

    그래서 일부 지역에선 책을 찢어 종이에 볼일을 보고 밤에 아파트 창문으로 내다버리기도 했다. 이것이 고층에서 떨어지면서 팍 퍼지면 ‘오물산탄’이 되고 마는데, 이걸 맞으면 ‘번대 맞았다’고 표현했다. 거리에 가로등도 없으니 하늘에서 뭐가 떨어지는지 살펴볼 수도 없다. 따라서 어두운 밤에는 고층아파트 주변을 걷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당국이 인민반장들에게 어느 집에서 오물을 버리는지 순찰하도록 지시하는 일도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나는 적잖은 고위 간부들의 집을 다녀봤다. 중구역의 중앙당 인근에 있는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어딜 가나 추위와 전기난에 시달리기는 매일반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고위 간부도 국가에서 내준 고급승용차의 트렁크에 물통 여러 개를 항상 싣고 다녔다. 노동당 건물에는 물이 나오지만 집에서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수는 짬이 날 때마다 물통에 물을 받아놓았다가 퇴근길에 간부 집에 물통을 올려다주고 일부는 자기 집에 가져갔다. 친구들 중엔 부잣집 자식도 많았는데, 이들도 물통을 들고 아파트를 오르내리는 신세를 피하진 못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사정은 크게 개선되진 않았다. 4월 초 방북한 스위스연방의회 울리히 슐리에 의원은 “20층짜리 고층건물에 4층까지만 물이 공급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다른 북한 주민들도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다.

    올 봄엔 전기도 아침에 3시간, 저녁에 1~2시간 들어온다고 한다. 이는 물론 고난의 행군 시기에 비해 많이 좋아진 것이긴 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고층 건물에 사는 노인들은 두문불출(杜門不出) 신세를 면치 못한다. 승강기가 가동되지 않으니 맘대로 오르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가 잠깐 들어올 때 승강기를 타고 내려올 순 있지만, 다시 집에 돌아갈 때 승강기가 작동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전제품 내다 팔며 연명

    식량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94년 가을부터 다음해 봄 사이 평양시민들은 자고 나면 무섭게 치솟는 쌀값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배급이 갑자기 중단되면서 몇 달 만에 쌀값이 20원대 중반에서 100원 이상으로 올랐다. 당시 노동자의 월급은 100원 안팎에 불과했다.

    그러자 평양 시민들은 살기 위해 지방 친척들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지방 친척들을 생각해주던 위치였는데, 갑자기 도움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배급제가 무너지면서 평양 시민들의 생활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빈부격차가 심해진 것이다. 국가 경제 파탄 상태가 10년 이상 지속되면 국민 전반의 생활이 점점 열악해지는 것이 정상이지만, ‘평양공화국’은 그렇지 않고 부자계층과 빈민계층으로 급격하게 양분됐다. 전체를 평균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생활수준이 높아졌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장사가 활성화되면서 농촌보다 도시의 살림살이가 좋아진 것이다. 여기에 더해 평양에는 권력가가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은 특권을 활용해 그 어느 도시에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장사를 크게 벌였다.

    생활수준 향상이 표면으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각 가정에 구비된 가전제품의 질적 변화다. 고난의 행군 초기에 사람들은 갖고 있던 재산을 내다 팔고 먹을 것을 사기 시작했다. 쉽게 팔 수 있는 것이 TV 같은 가전제품들이고, 팔고 팔다 더 팔 게 없으면 최후로 집을 팔았다. 집까지 팔아먹게 되면 거리를 방랑하는 꽃제비가 되었다.

    그러나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한 꽃제비로 전락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장사하는 법을 빠르게 체득했고, 각자가 전문으로 취급하는 품목을 가지고 노하우도 쌓게 됐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장마당을 중심으로 거대하고도 원시적인 시장경제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먹고사는 데 급급했지만 시장에서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평양 사람들을 가전제품을 갖추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어려울 때 가전제품을 내다 팔아 몇 달씩 연명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전제품은 일종의 보험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평양 가정집들이 일반적으로 갖추고 있는 가전제품들의 가격을 따져보면 다시 고난의 행군이 와도 평양 주민들은 1년 정도는 견딜 수 있다고 추론된다. 북한 4인 가족이 잡곡밥이나마 떨어지지 않는 중산층 수준으로 살려면 1년에 500달러 정도 필요하다. 지금 갖춘 가전제품들을 내다 팔면 충분히 500달러를 만들 수 있다.

    10년 전만 해도 몇 집 걸러 한 대 정도 있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컬러TV가 없는 집이 거의 없다. 컬러TV는 지금 새것이 70~9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컬러TV가 있는 집에는 DVD플레이어까지 갖추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DVD플레이어는 30~45달러 정도다.

    집 전화도 매우 많이 퍼져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100가구에 한두 집 전화가 있을까 말까 한 정도였는데, 이제는 거의 절반에 가까운 집들에 전화가 놓여 있다고 한다. 참고로 전화 설치비용은 구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충 100~200달러다. 집전화도 돈을 받고 명의를 이전시키는 방법으로 매매가 가능하다. 컴퓨터가 있는 가정도 다섯 집에 한 집은 된다. 대부분 중고이지만 대개 펜티엄4급 정도이며, 가격은 150~250달러다. 이외에도 평양 학생들은 MP3플레이어를 거의 다 갖고 있다. 디지털카메라 보급률도 상당히 높다.

    2008년 12월에 보급이 시작된 휴대전화도 4월 현재 사용자가 15만명에 육박한다. 평양 인구의 5%가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가구 수로 따지자면 대여섯 집에 한 집은 휴대전화가 있다. 북한 휴대전화는 가입비와 기기 값을 합쳐 350달러 정도다. 하지만 사용자 수가 많아지면서 가격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외화벌이기관 종사자나 웬만한 일반 장사꾼은 물론, 길거리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휴대전화 사용자 15만명

    평양에서 휴대전화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직업군은 운전수다. 택시운전수나 고위 간부 운전수는 거의 100%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연령대로 보자면 휴대전화는 대학생들 사이에 가장 많이 보급돼 있다.

    북한 당국은 비밀이 새나갈 우려 때문에 간부나 보위부원들의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는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몰래 다 갖고 있다. 지방에서는 왜 평양에만 휴대전화를 쓰고 지방에는 도입시켜주지 않느냐며 항의가 거세다고 한다. 최근 조선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올 연말에는 지방의 각 도, 시, 군 소재지에서도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평양에 돈이 집중되면서 평양 주민들의 의식주 생활은 점차 풍족해지고 있다. 돈만 있으면 영위할 수 있는 호화생활의 유형이 과거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우선 ‘외화식당’을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다. 봉사소 명칭을 단 내화를 사용하는 식당들도 거리에 수없이 많이 생겨났다. 그만큼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평양에는 식당이 많지 않았고 외식 개념도 거의 없었다. 좀 괜찮은 식당은 국가가 예약권 개념의 ‘예비표’를 인민반을 통해 분배해주는 방식으로 이용하게 했다. 지금은 돈만 있으면 예비표는 얼마든지 암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명절이면 거의 모든 식당에서 자리 잡기가 힘들 정도로 사람들로 붐빈다. 특히 고급식당일수록 손님이 더욱 몰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근 몇 년 동안 이상할 정도로 먹고 마시는 문제에 집착하면서 평양에는 세계 각국의 요리 전문점이 여럿 생겨났다. 평양에 피자나 스파게티를 전문으로 파는 이탈리아 식당이 3개나 된다는 점은 이미 보도된 바 있다. 이 식당 요리사들은 이탈리아에서 직접 조리법을 배워온 것으로 전해진다. 패스트푸드점도 생겨나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는 햄버거도 평양시민들에게 팔린다. 북한 유일의 종합전문식당가라고 할 수 있는 창광거리 음식점거리도 지난해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개장했다.

    평양공화국의 이중생활

    불평 많은 평양 주민들조차도 당국에 대해 칭찬하는 것은 2층 버스

    잘사는 사람들은 주문해 먹기도 한다. 2008년 6월 평양에 ‘맛대로 촌닭’이라는 치킨집을 낸 최원호(51) 사장은 “약 15달러 정도인 평양칠향계가 가장 주문이 많이 들어온다”고 전했다. 부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고급 음식을 호텔 수준으로 만들어 배달하는 전문점들도 생겨났다. 심지어 남한처럼 각종 집안 행사 때 출장을 가서 상을 차려주는 서비스도 있다. 주문한 지 한두 시간 내에 도착해 금세 고급 음식상을 차리는 수준이라고 한다. 한편 평양에는 한꺼번에 3000~5000달러씩 쓰는 호화 결혼식장도 있고 300~500달러 정도 쓰는 중산층을 위한 결혼식장 식당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메뚜기장에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그날 먹을 것조차 벌기 힘든 사람이 아직도 많다. 메뚜기장이란 국가가 허용하지 않은 불법 시장을 말하는데, 보안원의 단속이 닥치면 메뚜기떼처럼 와르르 흩어진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주로 시장세를 낼 능력조차 없는 영세 장사꾼들이 먹을거리나 담배, 술 같은 기호품을 판다.

    대동강맥주와 2층 버스

    가난한 사람들은 결혼식 날에도 상에 물고기나 고기를 올리지 못한다. 평양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평민들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 중 하나가 인조고기이다. 인조고기는 콩을 가공해 육류 맛이 나게 만든 식품을 말하는데 색깔과 모양은 어묵과 유사하다. 좀 사는 사람들도 인조고기나 이를 얹어서 만든 인조고기밥을 잘 먹는다. 인조고기는 맥주 안주로도 인기가 좋다. 사람들은 인조고기에 ‘선군탈피’나 ‘선군낙지(오징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도 당국에서 ‘선군’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니 인민들이 이를 야유해 붙인 이름이다.

    평양에서 당국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도 그나마 칭찬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동강맥주’이고 다른 하나는 ‘2층 버스’이다.

    북한은 2000년 영국의 맥주생산업체로부터 현지 설비를, 2002년엔 독일산 최신 자동생산 설비를 들여와 2002년 4월부터 대동강맥주를 대량 생산했다. 작년 7월엔 TV에서 대동강맥주 광고가 나와 이목을 끌었다.

    이 맥주는 평범한 평양 주민들도 사 먹을 수 있는 대중적 맥주다. 맥줏집에는 늘 사람들로 붐비며, 맥줏집에서 술을 사다 집에서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화폐개혁 전 대동강맥주 1ℓ는 북한 돈 70원에 팔렸다. 하지만 이는 예비표가 있는 사람들에 국한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암시장에서 700원을 주고 예비표를 구매해 대동강맥주를 사 마신다.

    화폐개혁 전 쌀 1㎏이 2000원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평양 주민들이 이따금 맥주를 마시기엔 크게 부담되진 않는다. 그러나 화폐개혁 이후엔 국정가격이 요동치면서 맥주를 사 먹기가 매우 어려워졌다고 한다.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300㎖에 1000원씩(화폐개혁 전) 하는 금강맥주를 마시는데, 평양에선 금강맥주가 대동강맥주보다 훨씬 좋다고 알려졌다.

    달러를 주무르는 사람이라면 보통강구역에 있는 외화상점인 낙원백화점에 가서 맥주를 마신다. 이 백화점이 운영하는 식당은 오스트리아에서 설비를 들여다 생맥주를 생산하는데 500㎖ 한 컵에 1유로로 매우 비싼 편이다. 하지만 맛이 좋아 돈 있는 사람들이 즐겨 찾아온다. 평양에는 술 공장도 많이 생겨났다. 심지어 최근엔 위스키 공장까지 세워졌다.

    담배를 생산하는 회사도 상당히 늘어났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 담배 시장은 중국산이 점령했다. 그러나 이제는 평양에서만큼은 중국산 담배를 찾아보기 힘들며 고급담배시장도 대부분 북한산 담배들이 차지하고 있다. 위조담배 생산에 큰 투자를 한 결과 질적으로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층 버스는 북한이 2000년에 중국 난징(南京) 금릉쌍객공사로부터 수입한 것이다. 한꺼번에 160명을 태울 수 있는 대형버스 100여 대를 일시에 수입해 평양에 투입했다. 전기난으로 지하철과 무궤도 또는 궤도 전차들이 빈번하게 달리던 도중에 멈춰 서는 데 비해, 경유를 쓰는 버스는 그런 단점이 없다. 북한 당국은 지금도 시내 출퇴근 버스용 경유만은 최우선적으로 보장해주고 있다. 하지만 연료난 때문에 하루 종일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전 6~9시, 오후 5시30분~9시에만 운행된다. 일요일은 쉬고 명절에는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뛴다.

    결혼은 평양 사람끼리

    평양공화국의 이중생활

    고난의 행군 초기에 평양 사람들은 가전제품을 내다 팔고 최후에는 집을 팔았다. 집을 팔면 ‘꽃제비’로 전락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렇게까지 될 확률이 높진 않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것과 달리 평양의 주택난은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다. 평양에 한번 들어온 사람은 절대로 지방에 내려가려 하지 않는다. 살려는 사람은 많고 나가려는 사람은 없으니 자연히 거주민 수가 늘 수밖에 없다. 당국은 평양 인구를 줄이기 위해 각종 노력을 강구하지만 별 효력은 없다. 사소한 잘못을 범해도 사정없이 전 가족을 지방으로 추방하는 것은 기본이고, 결혼을 통해서도 인구를 조절한다. 과거에는 평양 시민인 여성이 지방 남성과 결혼하면 지방에 나가 살게 했지만 이제는 평양 남성이 지방 여성과 결혼해도 평양에서 내보낸다.

    과거엔 지방 여성들 사이에선 평양 남성과 결혼해 평양 시민이 되는 것이 매우 선망됐다. 하지만 이제 평양 시민은 평양 시민끼리 결혼하려 한다. 평양 시민이 지방 사람과 결혼하면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평양공화국과 지방공화국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도 평양인구는 1980년대 말 200만명에서 지금은 330만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난으로 1990년대 이후 주택 건설이 거의 중단된 까닭에 평양의 살림집 규모는 200만명 수준에 맞춰져 있다. 1980년대도 집이 풍족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 훨씬 더 심각하다. 방 한두 칸짜리 집에 두 가정, 심지어 세 가정이 사는 경우도 많다. 과거에는 창고로 쓰던 지하실이나 아파트 앞 창고들도 집으로 개조되고 있다. 이 때문에 2007년 장마 때 평양 시내 모든 지하주택이 잠겨서 큰 피해가 났다.

    최근 북한은 평양 시내에 10만 가구 건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평양에 최신 아파트들을 건설해 대외적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목적이 크다. 신규 아파트들은 재개발로 건설되는 것이라 주택 절대 수량은 생각만큼 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아파트는 또 가뜩이나 풍족하게 살고 있는 수혜계층에게 거의 공짜로 제공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평양에서 제일 비싸게 거래된 집은 5만달러였다고 한다. 물론 항일투사나 군 차수 이상 고위 간부들이 사는 2층짜리 단독주택처럼 5만달러 이상의 집이 적지 않지만, 이런 집은 사고 팔 수가 없다. 아파트는 보통 1만~2만달러에 거래된다고 한다. 물론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부유층이다.

    주목할 점은 평양에서 잘사는 부유층은 군에 많다는 것이다. 좋은 식당에서 군관들이 돈을 쓰는 것을 보면 사회에서 외화벌이를 하는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진다고 한다. 10년 넘게 ‘선군정치’를 표방하면서 군부에 권력을 몰아주다보니 군 간부들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한다. 군대 내 일반 승진은 물론 사단장 같은 장성 자리에 오르는 데도 뇌물은 필수다.

    평양은 북한의 패션이나 유행을 선도하는 도시다.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의 정도가 심각하지만, 있는 사람들은 나름 세계적인 트렌드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그 한 예로 최근에 생일이나 결혼식에 꽃을 선사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불과 몇 년 전에는 없던 풍속이다. 국제부녀절인 3월8일 같은 날에는 꽃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외화상점에서는 외제 화장품이나 속옷 등이 매우 인기가 높다. 최근 평양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몸에 착 달라붙는 ‘몸매바지’ ‘몸매셔츠’ ‘몸매속옷’이 유행하고 있다.

    흔히 남한에선 북한 여성을 ‘자연 미인’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예전에는 그랬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소규모의 성형수술이 급속히 유행하고 있다. 쌍꺼풀 수술이나 눈썹 문신 정도는 거의 모든 여성이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올봄 평양 여성들 사이에선 ‘거지머리’라는 것이 유행이다. 아무리 단속해도 소용이 없다. 남자들도 어떻게든 머리를 기르려고 애를 쓴다. 최근 중·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옆머리는 짧게 깎고 윗머리는 고착제로 세우는 것이 유행이다.

    평양 주민들의 외형만 변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유치원생만 되어도 큰 돈, 작은 돈을 구분하고 소학생만 돼도 세뱃돈으로 북한 최고권액인 5000원을 달라고 하는 시대가 됐다. 얼마 전 김정일 위원장부터가 공산주의라는 말조차 꺼내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실정이니, 사람들은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최근 김일성대 경제학부와 인민경제대학은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해 상당히 많이 강의하고 있다. 예전에는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가르쳤지만 이제는 좋다, 나쁘다는 평가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놀라운 변화다.

    경제학자들에게 경제발전 방향에 대해 연구해 대책안을 내놓으라는 중앙의 지시가 내려지고 있지만, 고지식하게 자본주의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말했던 선임자들 중에 무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 남한과 관계 개선을 하고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견급 간부만 돼도 이 정도는 안다. 다만 말을 할 수가 없다.

    ‘충성 할머니’는 지금도 변함없을까

    그러나 아직까지도 평범한 평양 주민들 중에는 국가에 대한 의존심이 여전한 이가 적지 않다. 이들은 김 위원장 주변에 아첨꾼이 많아 현실 보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에 나라가 이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당국은 평양만큼은 어떻게든 배급을 제대로 해주려 하지만, 지난해 5월부터 배급이 또 들쑥날쑥해졌다. 올 3월 이후 배급사정은 급격히 악화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배급이 정상화되는 때가 오리라는 희망을 15년 넘게 버리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북한의 대민선전이 얼마나 대단한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아마 북한은 글의 서두에 썼던 할머니 같은 충성파들이 아직 남아 있어 저렇게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왠지 그 할머니도 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지금은 노인들끼리 모여 앉아 나라 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양에서 가장 살기 힘든 사람들이 바로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헤어진 지 10년이 지났지만 평양에 가면 그 할머니에게 묻고 싶다.

    “아직도 자식들에게 노동당에 충성을 다 바치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만일 할머니가 그렇다고 하면 북한 지배층엔 아직 버틸 힘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라고 한다면 북한 지배층은 이미 평양에서도 버림받은 것이다. 그러면 종말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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