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파티가 끝난 마지막, 어젯밤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0-06-04 12: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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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티가 끝난 마지막, 어젯밤

    ‘어젯밤’<br>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216쪽/9500원

    외국 소설의 경우 작품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 전혀 번역 소개되지 않거나, 제대로 된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지 않거나, 늦게 번역되어 새로운 시간대에 소통되는 예가 종종 있다. 로알드 달과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들이 늦게 소개된 대표적인 경우고, 이번에 처음 번역되어 한국의 독자와 만나고 있는 제임스 설터의 작품도 이에 속한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그의 국제적인 명성에 비해 번듯한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은 경우다. 하드보일드 문체의 전범으로 불리는 그의 ‘살인자들(The killers)’이나 ‘킬리만자로의 눈(雪)’은 시사영어사의 영한 대역 시리즈로 읽을 수밖에 없다.

    스타카토 문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신비로운 환상 동화로 유명한 영국의 로알드 달의 성인 단편 소설들은 성석제 작가의 열렬한 추천에 의해 강출판사에서 지속적으로 출간됨으로써 로알드 달은 소설 애호가들에게 능란한 이야기꾼과 ‘반전의 귀재’로 각광받고 있다. 성석제는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의 서열을 매기라고 한다면 로알드 달의 소설을 다섯 손가락 안에 놓겠다”고 공표할 정도다.

    또한 헤밍웨이의 소설 문법을 충실하게 습득하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문체를 넘어서는 스타카토 문체라는 독특한 단문 세계를 창조한 레이먼드 카버는 정영문과 김연수 작가의 번역에 의해 문학동네 출판사를 통해 독자와 소통해왔다. 젊은 시절 재미있게 읽은 외국 작가의 작품을 한국 작가들이 독자에게 소개하는 매우 이채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된 손님과 주인 사이에 아름다운 딸을 걸고 포도주 생산지를 알아맞히는 게임을 벌이는 로알드 달의 ‘맛’은 성석제의 안내로 읽을 때 감칠맛이 난다.

    “그럼 먼저. 보르도의 어느 지역에서 이 포도주가 나왔느냐? 그것은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소. 생테밀리옹이나 그라브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진한 맛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오. 이것은 메도크가 분명하오. 그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소. 자. 그럼 메도크 가운데 어느 코뮌에서 나왔느냐? 그것 역시 소거법에 의해 어렵지 않게 판단을 내릴 수 있소. 마르고냐? 아니오. 마르고일 리는 없소. 마르고 산 특유의 강렬한 향은 없소. 포이야크냐? 포이야크일 리도 없소. 포이야크라고 하기에는 너무 연약하오. 너무 상냥하고 수심에 차 있지. 포이야크의 포도주는 그 맛이 거의 오만하다 할 수 있거든. 게다가 내 입맛으로 느끼기에 포이야크에는 약간의 심이 들어 있소. 포도가 그 지역의 땅에서 얻는 묘한 맛. 뭔가 탁하면서도 힘찬 맛이 있지. 아냐. 아냐. 이건…… 이건 아주 상냥한 포도주야. 새침을 떨고 수줍어하는 첫 맛이야. 부끄럽게 등장하지, 하지만 두 번째 맛은 아주 우아하거든. 두 번째 맛에서는 약간의 교활함이 느껴져. 또 좀 짓궂지. 약간, 아주 약간의 타닌으로 혀를 놀려. 그리고 뒷맛은 유쾌해. 위로를 해주는 여성적인 맛이야. 이 약간 경솔하다 할 정도로 너그러운 기분, 이건 생쥘리앵 코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어. 이건 틀림없이 생쥘리앵의 포도주요.”



    -로알드 달, ‘맛’

    그리고 먼 길을 떠나 찾아온 오랜 지인인 장님과 교감의 의미로 그가 알고 싶어하는 유럽의 대성당을 손등과 손바닥을 맞대어 그려나가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김연수의 번역으로 읽을 때 절제된 단단한 힘을 경험할 수 있다.



    “계속하게나.” 그가 말했다. “멈추지 마. 그려.”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딱 붙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다 그린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 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계속 그렇게 있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말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한 작가의 작품이 사회 구성원들과 소통하려고 할 때,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제임스 설터는 헤밍웨이에서 레이먼드 카버로 이어지는 미국 현대소설의 전통 속에 있다.

    배신의 의미, 삶의 의미

    우선 짧고 간결한 문체적인 특징에서 같은 혈통임을 확인할 수 있고,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뉴욕을 무대로 살아가는 중산층 부부의 성적 욕망과 균열-에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헤밍웨이의 하드 보일드한 문체와 레이먼드 카버의 주제가 제임스 설터의 단편 미학을 형성하고 있고, 이런 연유로 헤밍웨이와 레이먼드 카버를 읽은 독자는 제임스 설터가 던지는 배신의 의미, 곧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이번에 출간된 ‘어젯밤’에는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전 손탁이 극찬한 대로, 한 편 한 편 절제된 내용과 스타일로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른 새벽, 햇빛은 투명하고 눈부셨다. 동향의 그 집은 더 하얗게 빛났다. 동네의 어느 집보다 깨끗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집 옆 커다란 느릅나무는 연필로 그린 듯 정교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엷은 색 커튼은 정지한 듯 움직임이 없었다. 집 안의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집 뒤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정원을 보러 오던 날, 키가 크고 날씬한 수잔나가 그 정원 위를 가로질러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녀를 처음 본 날이었다. 그날의 모습을 지울 수 없었지만 관계가 시작된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마리트와 정원을 다시 꾸미려고 그녀가 집에 왔을 때.

    -제임스 설터, ‘어젯밤’

    동네의 어느 집보다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집에는 지금 세 사람이 있다. 화자인 남편과 어젯밤 안락사를 했어야 할 아내 마리트, 그리고 아내와 남편의 친구인 수잔나. 어젯밤 계획에 따르면, 병든 아내 마리트의 뜻에 따라 남편 월터는 그들의 젊은 친구인 수잔나에게 부탁해 셋이 함께 외출해 레스토랑에서 고가의 포도주를 곁들인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고,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기로 한 것이다. 와인에 기분 좋게 취한 셋은 집으로 돌아와 서로를 바라보며 적절한 시기를 기다린다. ‘그 일’(마리트의 안락사)에 모두 동의한 상태. 그러니까 소설이 가리키는 ‘어젯밤’은 안락사를 선택한 아내의 마지막 밤이자, 아내가 몰랐던 진실이 밝혀지는 최초의 밤이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아내는 어젯밤, 그러니까 죽음으로 떠나는 마지막 밤을 보내지 못하고 살아나 아침을 맞는다. 그녀가 뜻대로 죽지 않고 되살아난 최초의 아침에 만나는 두 얼굴은 어젯밤 그녀가 함께한 사람들이 더 이상 아니다. 2층에서는 아내가 죽어가고, 1층에서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정사를 벌이는 집. 이것이 작가가 제시하는 ‘동네의 어느 집보다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집의 진실이다.

    아침에 만나는 두 얼굴

    월터와 수잔나는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공범인 그들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아직 제대로 눈을 맞추기 전이었다. 하지만 월터는 황홀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화장기 없는 그녀는 더 예뻤다. (중략) 몇 군데 전화를 해야 했지만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너무 이른 아침이었다. 대신 오늘 이후의 일들을 생각했다. 앞으로 맞이할 아침들. 처음엔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발소리가 났고 이어서 천천히 또 한 번 발소리가 들렸다. 수잔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마리트가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얼굴에 한 화장이 굳었고, 짙은 립스틱엔 균열이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뭔가 잘못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제임스 설터, ‘어젯밤’

    어쩌면, 소설이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 살을 맞대고 살던 아내가 죽어가는 동안 남편은 아래층에서 다른 여자와 정사를 벌이는 것이. 또 아내가 위층에 죽어 차갑게 굳어 있는데, 남편은 아래층에서 황홀한 눈으로 다른 여자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마치,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여자와 정사를 벌인 행위가 크게 문제를 일으켰던 20세기 초 뮈르소라는 청년을 카뮈는 ‘이방인’으로 불렀듯이, 제임스 설터는 ‘뭔가 잘못된’ 어젯밤이라는 시간을 현실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편한 진실과 대면하는 ‘낯선 순간’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요. 마리트가 흐느꼈다.

    -미안해. 그가 말했다. 정말 미안해.

    그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잔나는 방으로 가서 옷을 챙긴 후 현관으로 나갔다. 그게 수잔나와 월터의 마지막이었다. 그의 아내에게 들킨 그 순간으로. 그가 우겨서 그 후에도 두세 번 만나긴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게 무엇이었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냥 그게 전부였다.

    -제임스 설터, ‘어젯밤’

    파티는 끝났다. 오늘이 지나가면 어제가 된다. 그러나 어젯밤만은 지나가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소설만이 통과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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