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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유학생의 영국 일기 ⑦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우리 가족 영어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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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드라마의 마법

희찬이의 영어 실력이 부쩍 는 데는 사실 계기가 있었다. 희찬이는 ‘닥터 후(Doctor Who)’라는 BBC TV의 드라마 시리즈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이 시리즈를 매주 토요일 빼놓지 않고 보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이용 닥터 후 잡지를 매주 사서 내용을 다 외울 정도로 본다. 그 와중에 자연히 영어 실력이 늘어난 것이다. 한번은 학교에서 윈스턴 처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희찬이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총리를 맡아 영국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정치가이자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라고 줄줄 대답했단다. 선생님이 놀라시면서 “우와, 희찬이가 방학 때 ‘블레넘 궁전’(옥스퍼드 인근에 있는 처칠의 생가)에 다녀오더니 처칠에 대해 많이 배웠구나” 하고 칭찬해 주자 희찬이는 정직하게도 “아니에요. 지난주 ‘닥터 후’에 처칠이 나왔어요. 그래서 알게 된 건데요”하고 대답했다. 어이가 없어진 선생님은 “희찬, 넌 어떻게 모든 지식을 다 ‘닥터 후’에서 배우니?”라며 웃으셨단다. 장래 희망마저 ‘노벨상 받는 과학자’에서 ‘닥터 후 등장인물’로 바뀐 희찬이는 ‘닥터 후’덕분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영어를 배워버렸다. 한국에서 3년 가까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쓰며 고군분투했던 희찬이의 영어 고민이 영국에 온 지 9개월 만에 해결된 셈이다.

희찬이가 영어를 배우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뼈아픈 사실은 ‘영어는 영어권 국가에 와서 배우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희찬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대부분 시도해보았던 것 같다. 세 살 무렵부터 각종 영어 강좌에 데리고 다녔고, 일곱 살 때부터 유명한 영어학원에 다니게 했고, 영어 애니메이션도 2년 넘게 매일 저녁마다 봤다. 그러나 희찬이는 한국을 떠날 때까지 알파벳을 읽는 이상의 영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런 아이가 영국에 와서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영어로 책을 읽고 영어로 말하고 영국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그렇게나 어렵던 영어가 영국에서 이렇게나 쉽게 되다니, 언어의 세계는 참으로 복잡하면서도 냉정한 것이다.

며칠 전, 햇빛이 좋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글래스고 식물원에 놀러갔다. 식물원 주위에는 주차할 장소가 없어서 제법 멀리 차를 세워놓고 식물원에 걸어가야만 했다. 한나절 신나게 놀다 오후 5시쯤 되어 주차해놓은 골목으로 되돌아갈 때였다. 어럽쇼, 차가 보이질 않았다. 앗, 차가 없어졌나 봐! 나는 놀란 토끼 모양으로 후다닥 골목을 뛰어갔다. 다행히도 길을 돌아가니 주차된 차가 보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나를 따라 뛰어온 희원이가 이렇게 말했다. “Mom, did you think someone drove your car? (엄마, 누가 엄마 차 몰고 간 줄 알았어?)”나는 새삼스럽게 내 손을 붙든 희원이를 돌아보며 한국말로 대답했다. “응, 엄마 차 없어진 줄 알았어.” 그러자 희원이는 또 이렇게 말했다. “Look. your car is over there (봐, 엄마 차 저기 있잖아).”

영어를 먼저 떠올리는 아이



내가 놀란 것은 단순히 희원이가 제법 긴 문장의 영어를 말해서가 아니었다. 그 순간 희원이는 ‘자연스럽게’영어가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래서 그 문장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뛰어가는 엄마를 따라잡은 희원이의 머리에는 “엄마, 누가 엄마 차 몰고 간 줄 알았어?”가 아니라 “Mom, did you think someone drove your car?”라는 영어 문장이 먼저 생성된 것이었다. 나는 놀란 동시에 이 아이가 이러다 한국말을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희원이의 영어실력을 내가 좀 훔쳐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저렇게 영어문장이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면 교수님과의 튜토리얼 때 그렇게나 고전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희원이는 하루가 다르게 영어가 느는 대신, 그와 엇비슷한 속도로 한국말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집에서 늘 한국말을 쓰니 말 자체는 잘하지만 문제는 읽기 실력이다. 나는 매일 저녁 희찬이에게는 영어 책을, 희원이에게는 우리말 책을 읽도록 시킨다. 희찬이의 영어 책 읽는 수준은 매일매일 조금씩 늘고 있다. 그러나 희원이의 한국어 읽기 수준은 늘 제자리걸음에 가깝다. 한국에 있을 때 희원이는 받침이 없는 한글을 읽는 정도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받침 있는 글자는 잘 읽지 못한다. 희원이는 한국 나이로 이제 여섯 살이다. 아마 한국에서 여섯 살이 되도록 한글을 제대로 못 읽는 아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희찬이가 한국에서 영어 공부에 영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희원이는 한국어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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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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