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과학과 예술은 하나다?

  • 이한음|과학칼럼니스트 lmgx@naver.com|

    입력2010-07-29 16: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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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과 예술은 하나다?

    컴퓨터 아티스트 핸드북에 실린 릴리언슈바르츠의 ‘모나-레오’

    7월8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초·중·고교의 예술교육을 활성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학교 자율화 정책의 부작용으로 많은 학교의 수업 시간이 국·영·수 위주로 편성되자 대응책을 내놓은 것이다.

    우선 예술 교과의 수업 시간을 늘리고, 국어 시간에 연극을 하는 등 일반 교과를 예술과 접목시키는 수업도 확대할 계획이다. 그리고 2012년까지 1000개의 학교를 예술교육 선도 학교로 지정한다고 한다. 이곳엔 예술실, 강사 등이 지원된다. 예술영재교육원도 현재 1곳에서 20곳으로 늘린다고 한다.

    정부의 예술교육 활성화 발표

    아울러 과학과 예술의 통합을 원하는 학교를 골라 과학영재학교나 과학예술고등학교를 만들 계획도 밝혔다. 정부는 이를 통해 창의성과 인성의 함양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했다. 사실 현대는 과학과 예술의 융합이 활발히 논의되는 시대인 것은 맞다. 하지만 입시 위주 교육 환경을 감안할 때 예술교육 확대를 학교 자율에 맡기기로 함으로써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게다가 많은 학생과 학부모는 여전히 ‘예술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은 옛사람이라면 마법이라고 여길 놀라운 방법과 수단으로 우리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휴대전화, 인터넷, 텔레비전 등 과학기술의 산물을 의식하지 못한 채 쓰다가 막상 그것이 사라지면 금세 금단 증상을 느낄 정도다.



    과학은 나날이 의외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놀라움과 감동을 선사한다. 스마트폰, 화성 표면을 기어 다니는 탐사 로봇, 허블 망원경이 찍은 우주의 장관, 구글 어스, 심해에 사는 별난 동물, 오지에서 발견되는 신기한 생물 등이 우리 곁으로 온다. 니콘 현미경 사진 경연 대회(Nikon MicroscopyU)의 사진들을 보면 현미경에 비친 신기하고 아름다운 미시 세계에 감탄이 절로 나올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예술이 주는 감동은 솔직히 예전만 못하다. 예술의 현실 재현 능력은 이미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는 디지털카메라와 웬만하면 쓸 줄 아는 포토샵에 밀리고 있다. 적어도 물량 면에서는 말이다. 게다가 현대 예술은 ‘전통 파괴’와 ‘낯설게 하기’에 골몰하는 경향이다. 즉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동보다는 의외성과 새로움에 더 기댐으로써 일반 대중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다. 영화 같은 대중예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일종의 컴퓨터 그래픽과 정보통신 기술에 힘입은 예술이다.

    이러한 경향성에 따르면 과학의 창의성이 예술의 창의성을 뛰어넘은 듯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교육 탓도 있을 것이다. 과학이 홀대를 받고 있다고 아우성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교육에서 과학은 적어도 예술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예술이란 아직도 붓을 들어 물감을 칠하고,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하는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는 전통 범주를 벗어나는 행위예술, 영상예술 등 온갖 새로운 것이 가득한데도 말이다.

    사는 데 예술이 꼭 필요한가

    예술을 다른 과목과 연계시키고 과학과의 융합을 도모함으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 이해 능력을 함양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다만 이런 주장을 펼치려면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은 예술 없이 생존할 수 있는데 예술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많은 사람은 예술이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예술이 어떤 형식을 취하는지,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기는지, 어떤 식으로 향유되는지는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서양의 바이올린, 동양의 가야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부부젤라는 각기 다른 문화의 산물이며 그것이 발산하는 소리도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음악 자체는 어느 문화에든 존재한다. 어떤 문화에서든 조금만 익숙해지면 그 문화의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과학과 예술은 하나다?

    청소년들이 2009년 8월 뮤지컬교육을 받은 뒤 공연하고 있다.

    아직까지 반증 사례가 제시되지 않으므로 모든 문화는 이야기하기, 음악, 춤 같은 예술을 지닌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다. 즉 예술은 문화의 산물이 아니다. 예술이 문화의 산물이라면 세상에는 예술이 없는 문화도 얼마든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언어나 도구 사용과 마찬가지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발전시키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일 가능성이 높다. 문화권마다 언어가 다르듯, 예술의 형식도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뉴질랜드의 예술사학자 데니스 더튼이다. 그는 예술을 경험하고 창작하려는 욕구가 왜 본능이 되었는지 탐구한다. 진화론적 관점에 따르면 어떤 행위가 우리의 본능이라면 그것은 그 행위가 인류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것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뇌의 회로에 반복하도록 새겨진다는 의미다.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욕지기가 일어나고 토하는 것은 본능이다. 무언가가 썩는 냄새가 날 때 인상을 찌푸리고 피하는 것도 본능이다. 그런 행동을 드러내지 않은 인류의 조상은 아마 식중독이나 감염으로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그런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지닌 조상은 살아남아 번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인류의 생존과 번식에 어떤 기여를 했을까? 더튼은 예술의 중요한 특징은 ‘상상 경험’이라고 말한다. 즉 실제로 위험을 무릅쓰고 무언가를 하는 대신 상상을 통해 그것을 경험하는 형식이다. 이는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 호랑이 같은 맹수와 맞서 싸워 이러저러하게 이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그 상황을 떠올린다면, 직접 호랑이와 싸우지 않고서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마음은 그런 상상을 통해 살아가면서 겪을 문제를 여러 맥락 속에서 경험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런 상상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조상은 그렇지 못한 조상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번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나누는 생생한 이야기, 의례 춤, 동굴 벽화 등의 예술은 그런 상상 경험이 발전된 형태일 것이다. 문자가 등장하면서 문학과 연극이 나오고 악기는 상상을 더욱 정교화한다. 컴퓨터 그래픽의 등장으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기이한 상상의 세계까지 시각화할 수 있게 되었다.

    최재천 교수는 도정일 교수와 대화한 내용을 담은 책 ‘대담’에서 인간이 예술행위를 왜 하는지가 진화심리학적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라고 하면서도, 성(性) 선택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차원을 넘어 원시인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 같은 복잡한 그림을 그리거나 부족의 옛 전설이나 무용담을 열정적으로 떠들어대는 짓을 해왔다. 그런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면 휴식을 취하거나 사냥을 할 힘을 비축하는 데 장애가 된다. 자연선택은 지극히 경제적이다. 낭비하는 자, 덜 효율적인 생활 방식을 택하는 자는 여지없이 솎아낸다. 그런데 비생산적인 일에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예술가가 어떻게 인류 역사에서 계속 살아남아 번성했을까?

    예술은 여성을 끌어당긴다

    성 선택이 그 대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성 선택의 사례로 흔히 드는 것이 공작의 꼬리다. 공작 수컷의 꼬리는 펼치면 화려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인간의 눈에도 그렇지만 공작 암컷의 눈에도 그렇다. 그러나 그 꼬리는 거추장스럽다. 그것을 끌고 다니거나 펼치고 있다가는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기 십상이다. 자연선택이 작용한다면 길고 화려한 꼬리를 지닌 공작의 조상은 사라지고 짧은 꼬리를 지닌 조상만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이유는 암컷이 그런 꼬리를 지닌 수컷을 짝으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암컷이 화려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지닌 수컷을 고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화론자들은 화려하고 멋진 꼬리가 건강함의 징표라고 본다. 그런 걸 지니고도 아무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칙칙하고 볼품없는 꼬리를 지닌 수컷은 병에 걸렸거나 기생충에 감염되었거나 건강이 안 좋다는 징조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더튼은 이 논리를 예술에 적용한다. 그에 따르면 오랜 시간을 들여 나무를 깎아 멋진 조각상을 만드는 남자는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유창하고 설득력 있게 말을 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넘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유창함은 비생산적이긴 하지만 재치, 지능, 슬기로움의 징표일 수 있다. 성 선택은 그런 예술적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것이 인류 문화에서 예술이 발달한 이유가 된다. 그러니 현대에 이르러 예술을 과학 뒷전으로 밀려나도록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최근 들어 예술과 과학을 융합시키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대중예술뿐 아니라 전시회, 음악회, 공연 등에서도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도모한다. 소설가 김탁환씨와 뇌 과학자 정재승 교수가 공동으로 ‘눈먼 시계공’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한다. 예술적 상상력과 과학적 분석을 결합시켰다고 한다. 과학도를 대상으로 한 예술 강좌, 예술 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과학 강좌처럼 예술 분야와 과학 분야의 교류를 활성화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과학과 예술이 전혀 별개의 분야라면 둘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은 억지 혼인과 비슷할 뿐이다.

    이에 대해 과학사나 예술사 전공자들은 “본래 과학과 예술은 하나였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인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그는 과학적 능력과 예술적 영감을 결합한 천재다. 비행 장치를 비롯한 각종 기기의 설계도는 그가 과학에 얼마나 큰 재능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과학과 예술이 행복한 결합을 이루고 있던 다빈치의 시대는 이후 각각의 분야가 저마다 담을 쌓고 별개의 학문 분야로 자리를 잡으면서 종말을 고한다. 19세기에 이미 재결합이 불가능한 수준이 된다. 현대에 들어선 콘텐츠의 경제성을 따지는 산업계의 요구, 모든 분야를 아우르겠다는 과학의 의욕이 어느 정도 작용해 과학과 예술의 융합이 다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을 파악하는 직관력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논하기 위해선 먼저 둘이 지닌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봐야한다. 세계적인 과학 잡지 ‘네이처’에 다년간 칼럼을 쓰고 있는 예술사학자 마틴 켐프는 예술과 과학이 겉으로는 전혀 딴판인 것 같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구조적 직관’이라고 이름 붙인다. 구조적 직관이란 겉으로 보이는 혼란스러운 모습 뒤에 숨어 있는 본질적인 질서와 패턴을 파악하는 깨달음이나 통찰력을 의미한다. 과학자와 예술가의 마음은 이 구조적 직관을 통해 복잡해 보이는 자연 세계의 숨은 질서를 간파한다. 이 점에서 과학과 예술은 동일하다.

    차이점은, 예술은 온갖 해석이 가능하도록 열린 태도를 취하는 반면 과학은 다른 해석의 여지를 가능한 한 줄이려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나리자’를 보고 각자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다빈치가 어떤 의도로 그러한 그림을 그렸는지, 시대적 배경은 어떠한지와 같은 배경 지식은 모나리자에 대한 이해와 감상에 도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그런 배경지식으로 인해 모든 이가 똑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냐와 상관없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은 저마다의 해석을 통해 자기만의 감동을 얻는다.

    마틴 하이데거의 논리에 따르면 소설은 작가의 손을 떠나 발행되는 순간 작가가 의도한 소설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텍스트는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는다. 작가가 생산하는 소설, 소설 그 자체, 독자가 읽는 소설은 각각 다른 해석의 대상이 된다.

    과학과 예술은 하나다?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

    반면에 과학은 어떤 현상을 다른 여지가 없도록 명확히 규명하려 한다. 과학에서 이런저런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은 연구가 불충분했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과학자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처럼 경이로울 정도로 복잡한 입장과 상황을 치밀하게 엮어내는 예술가의 능력에 감탄할지 모른다. 과학은 복잡해 보이는 자연을 낱낱이 해체해 근본 원리를 발견한 뒤 다시 결합할 수 있다. 과학자에게도 전체는 언제나 부분의 합보다 크지만 부분들을 결합시켰을 때 새롭게 나타나는 특성인 창발성은 과학자에게는 까다로운 것이다. 반면 예술가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그 특성이 들어 있다.

    과학은 현재 세상을 주도하고 있지만 소통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술은 전시회, 음악회, 공연, 낭독회, 출판 등을 통해 자신을 알리고 소비자를 끌어 모으는 전통적인 수단을 갖고 있다. 수만년 전에 기원한 예술과 달리 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과학은 자신을 알리는 이렇다할 수단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학에 대해선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런 측면에서 과학과 예술의 결합은 예술의 범위를 더 확대하는 동시에 과학을 널리 알리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문제는 어떻게 접목시키느냐인데 최근 들어 광학, 영상 매체, 로봇 공학 등을 이용한 전시회나 공연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시각적으로 화려한 과학의 산물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이다. 예술가와 과학자가 한 팀을 이루어 공동 과제를 수행하는 일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고종 황제의 증손녀인 이진씨는 미국 MIT대학 학생과 공동으로 기상 관측 풍선에 도자기를 담아 대기권 상공에서 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어설픈 접목은 양쪽에 별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과학과 예술의 융합 과제가 끝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각자의 길로 가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성과물인 예술 작품은 남겠지만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일회성 협력에 불과하다면 큰 의미를 부여할 것 같지 않다.

    과학은 최후의 점령군?

    좀 더 심층적인 측면에서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쪽도 있다. 이러한 융합을 처음 주장하고 나선 쪽이 자연과학인데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이른바 통섭(統攝·Consilience)을 ‘자연과학 원리를 토대로 삼으라’는 강압으로 느끼기도 한다. 즉 다른 분야 사람들은 자연과학 하면 환원론을 떠올리고 경계한다. 따라서 그런 수직적 통합이 아닌 대등한 수평적 통합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선 더 논의가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융합은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며 과학과 예술 양쪽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과학은 우주 성운 사진처럼 시각적으로 예술 작품 못지않게 감탄을 자아내는 성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는 목적이 다르다. 성운 사진은 단지 성운 사진일 뿐이다. 천문학자는 그 안에서 별이 어떻게 탄생하고 죽는지를 상상하지만 그것은 객관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엄밀한 논리 전개의 과정일 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얻는 감동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과학이 현재의 예술과의 대등한 동맹 수준에 만족할 것 같지는 않다. 이미 과학은 빅뱅에서 인류 진화에 이르는 원대한 서사시를 내놓은 바 있다. 그것은 수치로 씌어진 최초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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