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미국 내 한인시민운동 선구자 김동석

한인 유권자 결집시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끌어내고 한미FTA 비준 압박도

  • 하태원|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triplets@donga.com |

    입력2010-09-02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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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단합해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정신 하나로 시작해 이제는 미국 내에서 가장 활발한 시민운동을 펼쳐나가는 풀뿌리 시민단체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다. 뉴욕과 뉴저지 지역에 밀집한 한인 유권자의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선거참여 운동을 조직해낸 그는 2007년 미 하원을 만장일치로 통과한 일본군 강제위안부 결의안을 이끈 데 이어 2008년에는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지명 변경하려던 미 지명위원회(BGN)의 결정을 되돌리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2010년에는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의 기여를 평가하고 인정하는 결의안 통과에 큰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이제는 미국 상하 양원의원 15명 정도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이 시민운동가는 이제 미국 내 가장 큰 한인커뮤니티가 존재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를 멈추지 않게 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가 말하는 미국 의회정치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


    미국 내 한인시민운동 선구자 김동석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7월26일 오후 미국 하원 캐넌 오피스 빌딩. 2007년 미국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 운동을 주도했던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KAVC)에서 인턴활동을 하고 있는 어린 학생 30여 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에 위안부 강제동원 공식 시인과 사과를 촉구했다. 버스로 4시간 반가량을 달려온 이들은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등 무성의로 일관하고 있는데 대해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 즈음 작은 체구에 금발을 휘날리는 한 중년의 여성이 나타났다. 플로리다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공화당 출신의 11선 의원 일리애나 로스-레티넌 의원이었다. 하원 공화당 간사로 줄곧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한 외교통 의원이다.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 의석을 장악할 경우 외교위원장이 될 사람이기도 하다. 1960년대 쿠바 카스트로 공산정부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로스-레티넌 의원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인권분야에 관심이 많아 북한문제에 큰 목소리를 내는 의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내 힘의 원동력은 유권자들의 결집



    어린 학생들을 환영한 로스-레티넌 의원은 이들을 이끌고 온 김동석(52) 전 한인유권자센터 소장과 반갑게 포옹했다. 로스-레티넌 의원은 “지금 막 플로리다발 비행기에서 공항에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며 “다른 일정 두 가지를 취소했다”고 말했다. 그는 즉석에서 일본 정부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로스-레티넌 의원은 “결의안에서 명백히 표명된 미 하원의원들의 뜻은 일본 정부가 희생자들에게 공식 사과를 하라는 것”이라며 “이 결의안 통과 이후 일본에서 4명의 총리가 재임했지만 누구도 공식 시인 및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일본 정부에는 뼈아픈 일이었다. 또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소수계 민족 중 하나인 한국의 어린 학생들을 위해 시간을 분 초 단위로 쪼개 쓰는 하원의원이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달려온 것 역시 평소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본인은 손사래를 치지만 김 전 소장은 미국 의회 내에서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 한인 시민운동가로 꼽힌다. 1996년 뉴욕 플러싱에서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든 뒤 16년 동안 발품을 팔며 활동한 성과로 이제 그는 연방 상·하원 의원 15명 정도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사는 곳은 뉴욕·뉴저지 지역이지만 김 전 소장은 거의 워싱턴에서 살다시피 한다. 의회에서 한국과 관련한 청문회가 벌어질 때 참여하는 것은 기본이고 한국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의원이 워싱턴에서 벌이는 공개 활동에는 반드시 참석해 눈도장을 찍는다. 김 전 소장은 미국 의원회관 격인 하원 레이번빌딩과 캐넌빌딩에도 자주 모습을 보인다.

    8월 초에는 한인밀집지역인 뉴저지에 지역구를 둔 스티브 로스만 민주당 의원이 미국 자동차노조의 요청으로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서명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알고 무작정 의원 사무실 앞에 가서 의원면담을 요청했다. 이 지역 한인유권자들이 서명한 FTA 비준촉구 서명서를 챙겨갔고 ‘유권자의 힘’을 빌려 로스만 의원에게 “반대 서명하기 전에 한 번쯤은 한인 유권자들의 의견을 물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은근한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3일 후에 로스만 의원은 FTA 반대 서명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뺐다.

    그는 의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른바 펀드레이징 행사에도 반드시 참석한다. 2년에 한 번씩 선거를 치러야 하며 법률에 정한 한도 이상의 선거자금을 받을 수 없는 미국 정치인에게는 단돈 몇백달러도 무시할 수 없는 돈이다. 김 전 소장은 6월에는 위안부 결의안 의회 통과에 큰 기여를 했던 민주당 출신 마이클 혼다 의원의 워싱턴 생일잔치에 참석해 한인들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소수계 민족이 미국에서 살아남는 법

    미국 내 한인시민운동 선구자 김동석

    김동석씨가 만든 한인유권자센터는 미국 의원들이 무시 못하는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김 전 소장은 “솔직히 1, 2달러가 궁해 식사 시간을 피해 사람을 만났고 하룻밤 호텔비가 없어서 워싱턴에서 일이 끝나면 새벽시간에 졸음운전을 해가며 뉴욕으로 돌아온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이지 황천길을 수도 없이 경험했지만 무엇인가 나를 지켜주는 힘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래도 보람된 일이고 우리의 힘을 알릴 수 있는 일이어서 신나게 일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김 전 소장은 언제 어떤 계기로 미국 내에서 한국인들의 힘을 결집하는 일을 시작했을까. 김 전 소장은 그 시작을 199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흑인폭동으로 꼽는다. 1985년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시립대 헌터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이민사회의 정치력 신장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미국은 1990년대 초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재임시절 걸프전에서 승리하면서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확고히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경기침체를 겪는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강조해온 강한 미국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지만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뉴욕, LA, 시카고 등 대도시에서 사는 극빈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부과되고 있었다.

    김 전 소장은 “사회보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흑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황당하게도 흑인들의 불만은 정치력이 약한 소수민족에게 화풀이하는 식으로 분출됐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LA 인근에서는 배가 고파 거리로 몰려나온 흑인들이 한인들이 주로 운영하는 청과상이나 델리 등에서 물건을 사고는 돈을 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생기면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LA에서 백인 경찰이 흑인 용의자 로드니 킹을 하이웨이에서 구타하는 장면이 CCTV에 찍히고 이 장면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흑인들의 감정이 폭발했다.

    김 전 소장은 “LA 폭동으로 한인들이 오랫동안 일궈온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망가지는 것을 보고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한인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플러싱에서 뭉쳤다”고 회고했다.

    유대인의 로비를 벤치마킹하다

    이들은 미국에서 소수계 민족이 안정된 삶을 영위하려면 정치적인 힘이 있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강력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나오는 원천이 어디인지를 따져보니 바로 선거 때 행사하는 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김 전 소장 등은 대도시 한인 밀집지역에서 유권자를 결집하고 스스로의 권익을 옹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다른 소수계 민족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례들을 공부했다. 당연히 유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표적인 유대인 로비단체인 미국 이스라엘공공정책위원회(AIPAC)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10년 전부터는 정식회원 자격을 얻어 AIPAC 수련회에 매년 참석했다. 최초의 흑인대통령 후보와 최초의 여성대통령 후보가 맞붙어 ‘세기의 대결’로 불린 2008년 미국 민주당 경선과 대선전은 AIPAC의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해 6월4일 민주당 경선 승리로 대선후보 자격을 확정지은 버락 오바마 후보는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AIPAC 정책수련회 마지막 날 연설자로 연단에 올랐다. 그는 “내 마음을 담아, 이스라엘의 진정한 친구로서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안전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란 핵 보유를 저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연설해 8000여 명의 유대계 청중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나흘 동안 진행된 2008년 정책수련회에는 비록 경선에서 패배했지만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물론이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존 뵈이너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 등 거물급의 연설이 이어졌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부부도 비공개로 방문해 AIPAC 지도부와 만찬을 했다. 현직 상하원 의원 200여 명이 참석해 지역구에서 온 유대계 인사들과 합석하고 눈도장을 찍어 장외에서는 “의사당이 통째로 옮겨온 듯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김 전 소장은 우선 한인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투표참여율은 높지만 영어에 능통하지 못한 한인 이민 1세들을 위해 유권자 등록용지와 투표용지에 대한 한국어 서비스 실시를 요청해 받아들여졌다. 해당 선거구에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유권자가 1만명 이상 거주할 경우 해당 언어로 된 안내를 실시해야 한다는 규정을 발견해낸 뒤 시 당국에 여러 차례 요청한 끝에 관철시켰다. 17~18%에 머물던 뉴욕, 뉴저지 지역 한인 유권자의 평균 투표율이 27%까지 올라갔다. 2008년 대선에서 플러싱 지역 한인유권자의 투표율은 58%를 상회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 지역의 정치인들이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뉴저지주의 스콧 가렛(공화) 하원의원이나 뉴욕의 게리 애커먼(민주) 하원의원 등에게는 특히 한인들의 결집된 표가 당락을 좌우할 정도가 됐다.

    2007년 위안부 결의안에서 ‘승리’를 얻다

    한인유권자센터가 존재감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것은 2007년 위안부 결의안의 미국 의회 통과로 볼 수 있다.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미국 의회에 대한 일본 로비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수행하는 이라크전쟁에 대해 가장 큰 재정적 기여를 하고 있는 국가가 바로 일본이라는 점도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 의원들을 움직이는 것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김 전 소장은 로스-레티넌 의원을 집중 공략했다. 쿠바 출신으로 인권문제와 여성이슈에 민감하다는 점에 착안한 것. 김 전 소장은 “접근이 쉽지 않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표현처럼 로스-레티넌 의원이 가는 행사장마다 찾아다니며 집요하게 접근해서 안면을 익혔다”고 말했다. 김 전 소장의 표현에 따르면 로스-레티넌 의원은 처음엔 들어주었고, 다음엔 대화의 상대로 여겨준 뒤 결국 위안부 결의안 처리의 당위성에 동의하고 행동에까지 나섰다. 김 전 소장은 “인연이라는 게 참. 로스-레티넌 의원이 결국엔 공화당 측 의원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설득해주고 나아가 당시 외교위원장이던 유대계 탐 랜토스 의원과 결의안 통과를 위해서 긴밀하게 협력해줄 줄은 정말 몰랐다”고 회고했다.

    위안부 결의안 채택의 또 다른 중요한 분수령은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원회에서 열린 청문회였다. 앞서 마이크 혼다 의원 등 민주당 의원 5명과 크리스토퍼 스미스 의원 등 공화당 의원 2명은 2007년 1월 일본군 성(性)노예는 일본 정부가 저지른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사건이며, 집단 강간, 강제 낙태, 정신적 모욕, 성적 학대 등으로 신체적 장애, 학살 또는 자살이 포함된 전례 없이 잔인하고 중대한 사건이라는 내용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결의안을 제출했고 아태소위는 청문회 개최를 전격 결정했다. 레인 에번스 전 민주당 의원이 1999년 처음으로 의회에서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를 이슈화한 이후 세 차례나 미국 의회에 제출된 결의안이 일본 로비에 밀려 위원회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폐기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커다란 진전이었다.

    결국 미 하원은 2007년 7월30일 오후 본회의에서 일본 정부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공식 시인, 사과하고 역사적 책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상정해 단 35분 만에 만장일치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김 전 소장은 “어떤 거대한 로비도 시민들의 풀뿌리식 운동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올해 3월에는 미국 사회에서 미주한인들의 기여를 평가하고 인정하는 결의안 가결에도 김 전 소장과 한인유권자센터가 한몫을 맡았다.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결의안은 미국 국민은 미주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기여한 매우 소중한 공헌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1903년 1월13일 102명의 한인 이민자가 미국 땅에 첫발을 디딘 이후의 한인 이민역사를 다루면서 6·25전쟁의 참상, 폐허와 빈곤을 딛고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향한 이민자들의 삶도 소개하고 있다.

    미국 내 한인시민운동 선구자 김동석

    지난해 12월 애니 팔레오마베가 미 하원 아태환경소위원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면담한 김동석(맨 오른쪽)씨. 왼쪽에서 두 번째는 김완주 전북도지사.

    지난 1월22일 스콧 가렛 의원이 정부개혁감독위원회에 결의안을 상정한 뒤 한 달 동안 의원들을 설득해 50명의 서명을 받는 일은 김 전 소장이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다. 김 전 소장은 “미국 전역의 한국인들과 한국과 인연이 있는 의원들을 우선 만났다”며 “2007년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나올 때 인연을 맺었던 의원과 이후 우리가 계속 접촉하며 관리해온 의원들로부터 주로 서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미국의 사회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을 연방하원 전원의 이름으로 인정한 것으로, 이는 한인들이 이웃과 협력하며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이민자 그룹으로 인식받게 됐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유권자센터는 90일 동안 비자 없이 미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한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역시 추진단계에서부터 지역의 여론을 활성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워싱턴 의회정치의 작동원리

    15년 넘게 미국 의회정치를 보고 경험한 김 전 소장은 의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반응하는 방식에서 나름대로 워싱턴 의회정치의 작동원리를 터득했다. 김 전 소장은 “단순히 해당 의원에게 몰아줄 수 있는 표의 수로만 현역 의원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 유권자 집단의 총의를 담은 서명만으로 미국 의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전 소장은 “결국 특정 의원과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매개체는 합법적으로 선거자금을 모금할 수 있는 ‘펀드레이징’ 행사”라며 “위안부 결의안 하원 외교위 통과의 키를 쥔 랜토스 전 의원을 움직인 힘도 냉정하게 말하면 한인사회가 모아준 3만달러의 정치자금”이라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큰 금액이 아니더라도 한국에 도움을 준 의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정치기금 기부를 통한 관계유지라는 것이 김 전 소장의 주장. 그는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영원한 지한파(知韓派)는 없다고 보면 된다”며 “한국과 인연을 맺으면 자신의 의정활동은 물론 선거자금 모금에도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과 끊을 수 없는 고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김 전 소장이 가진 노하우 중 하나다. 미국 내 유대인들은 연방의회 휴회 기간에 의원들을 이스라엘로 초대해 데리고 간다.

    이 방식을 벤치마킹했다. 대학, 연구소 등 민간차원에서 나서서 강의를 하게 하고 명예박사학위를 준다는 것. 지난해 4월 김 전 소장의 주선으로 하원 14선의 경력을 자랑하는 댄 버튼(공화) 의원이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위안부 결의안을 주도한 마이크 혼다 의원은 그해 8월 강원대학교에서 교육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애니 팔레오마베가(민주) 하원 아태소위원장 역시 같은 달 전북도를 방문해 명예시민이 된 데 이어 전북대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 3인방이 하원 내에서 열렬한 한국 지지자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 전 소장은 올해 8월 초에는 미 하원 친한파 의원들의 조직인 ‘코리아 코커스’ 공동의장인 다이안 왓슨(민주) 의원을 대동하고 한국을 방문했다.

    김 전 소장은 의회비준을 남겨두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역시 풀뿌리 시민운동의 경험이 원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오랫동안의 협상을 통해 FTA 협정을 타결지은 양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은 그리 많지 않다”며 “이미 중간선거를 위해 지역구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의회의 주요 지도자들을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소장은 “자동차 문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이 분야에 대한 재협상 없이는 FTA 비준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샌더 레빈 민주당 하원세입위원장 설득에 공을 들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내 경험에 비춰볼 때 미국 의회정치에서 지역의 민심을 앞서는 당론은 존재할 수 없다”며 “미시간 지역 한인들의 총의를 담아 레빈 의원에게 제시하면 그도 쉽게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소장은 “신기할 정도로 잘 작동하는 것이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이용한 청원이며 미국의 대중 정치인에게는 이보다 좋은 즉효약이 없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선거운동이 한창인 지금 미국의 정치인들이 가장 갈망하는 선거자금을 모아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란 것이 김 전 소장의 조언이다. 한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나설 수 없는 영역인 만큼 풀뿌리 운동이 제격이라는 것이 김 전 소장의 부연.

    최근 김 전 소장은 뉴욕의 한인 유권자 1400명이 FTA 비준을 촉구하는 서명부를 찰스 슈머 민주당 뉴욕주 상원의원에게 전달했다. 김 전 소장은 “뉴욕 지역의 한인 동포 몇 분이 2개월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서명을 받은 것이며 서명에 참여한 한인들은 FTA가 뉴욕지역 경기 활성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며 “50만명 이상의 한인이 모여 사는 뉴욕을 대표하는 상원 의원인 슈머 의원으로서는 적어도 FTA 비준에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과 뉴저지 지역 한인유권자들의 결집 노력이 어느 정도 본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김 전 소장은 LA에서 더욱 강력한 한인 유권자 운동을 펼치기 위해 현재 LA 지역에서 활동 중이다. 일단 코리안-아메리칸 포럼이라고 임시로 명명한 새로운 시민운동 조직은 미국 내 한국인의 권익을 신장하고 촘촘한 네트워크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LA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다

    김 전 소장은 “16년 동안 이끌어왔던 뉴욕, 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직을 버리고 LA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자 곳곳에서 ‘저 친구 곧 한국 들어가겠군’ 하는 소리를 듣는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내 목표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전국적인 조직력을 갖추고 유대계 로비조직인 AIPAC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을 갖추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소장은 그래서 이 지역의 운동을 주도하는 모양새를 갖추기보다는 철저히 LA 지역에 있던 기존 시민운동 단체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그들의 구심력을 강화하는 조력자 역할에 머무르겠다는 생각을 강조했다.

    김 전 소장이 이른바 풀뿌리 운동의 힘에 대해 신앙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걸출한 한두 명의 한인 출신 정치인의 탄생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매개로 똘똘 뭉친 집단의 영향력이 더욱 강력하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계 이민자로 주류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명망가들이 위안부 결의안 채택운동이나 독도 지명변경 등의 이슈가 터져 나올 때 오히려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실망했다”며 “이민 2세들에 대한 정체성 교육강화 방안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김 전 소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1월 민주당 대선후보 예비경선이 치러지던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컬럼비아에서였다. 전세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민주당 경선을 취재하기 위해 워싱턴 특파원 자격으로 유세 현장을 찾았던 필자와 같은 언론인을 제외하고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한국인은 김 전 소장이 거의 유일했다. 홀로 자동차를 몰고 와서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오바마 후보를 지지하는 한국유권자센터’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당시 오바마 후보와 악수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이 솔직히 안쓰러워 보였다. 같이 밥을 먹을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유세가 모두 끝난 뒤 돌아서는 김 전 소장의 모습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감도는 것도 보였다. 저렇게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2년 반이 넘도록 김 전 소장을 만나고 그의 활동을 직접 지켜본 결과 이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놀랍게도 그의 저돌적인 돌파력은 미국 정치권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최소한 한인 유권자들이 ‘의미 있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지역에서는 그의 말발이 먹히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었다. 김 전 소장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어찌 보면 한인들의 미국 내 정치력이 신장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그는 “지금부터 2012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8년 대선 전에서 여타 아시아계 민족들과 비교할 때 한국계의 활동이 뒤지지 않았던 것처럼 2012년에는 좀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 LA에서 미국 전역 한인을 조직화하는 일에 나선 김 전 소장의 얼굴에는 긴장된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도전에 나선 그의 얼굴에서는 두려움보다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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